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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74)화 (274/425)

남궁마제

떨칠 진(振) 꽃 화(花) :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투기장(4)

황제가 축객령조차 귀찮다는 얼굴로 손짓하자, 뒤쪽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엄 태감이 나타났다.

잔뜩 힘을 준 입꼬리와 가늘게 떨리는 수염.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모시겠습니다.”

진화가 하나 아쉬운 것 없다는 얼굴로 돌아서자, 등 뒤에서 다시 한번 한숨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바로 곁에서 푸우-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도 들렸다.

대전을 나오며 진화는 여전히 볼을 푸르르 떨고 있는 엄 태감을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뭐가 그리 웃긴 것입니까?”

“푸흐흐흐!”

진화가 묻자, 엄 태감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다 그만 참고 있던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진화가 더 의아한 눈으로 엄 태감을 보았다.

“후후후, 주인의 기쁨은 종의 기쁨이 아니겠습니다. 폐하께서 저토록 즐거워하시는 모습은 오랜만이군요.”

“……아까 그것이 말입니까?”

진화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엄 태감이 진화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왕의 자리는 참으로 고독한 자리입니다. 천하가 우러러보는 자리이지만, 누구도 바라는 것 없이는 고개를 들지 않지요.”

“……?”

진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엄 태감의 눈빛이 어린 손자를 보듯 따뜻하게 변했다.

순진한 황자였다.

빛나는 황좌는커녕 고작 황자의 자리조차 아직 낯설어하는 모습이 역력한.

그런데 황제의 고집스러운 눈썹과 황후의 아름다운 외모를 빼다 박았다.

누구도 핏줄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닮은 외모로, 천하를 가지려는 황제와 황후의 욕심은 닮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폐하께서는 어쩌면 아무런 바라는 것 없이 마주 보아 주는 사람을 기다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화는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엄 태감은 혼자 씩씩거리면서 내심 좋아하고 있을 황제를 생각하며 고소를 머금었다.

대전 밖에는 진화를 기다리는 내관들이 있었다.

이제 진화를 모시는 건, 진화를 담당하는 건희전 내관들에게 넘겨야 할 때였다.

“살펴 가십시오, 저하.”

“예, 그럼.”

엄 태감의 공손한 인사에 진화도 마주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고개를 든 엄 태감의 눈빛이 진화의 발길을 붙잡았다.

“무슨…….”

“아까 황태자 전하의 말씀들 중에 어떤 부분은 귀담아들으셔야 합니다.”

“네?”

“이 황궁에서,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건 실로 큰 축복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일이지요. 앞으로 많은 눈들이 저하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를 것입니다. 황궁을 이루고 있는 모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저하를 향해 독을 뿜을 것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기를.”

“아, 충고 감사합니다.”

엄 태감의 진실 된 충고에 진화가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에 엄 태감이 자애로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이 늙은 환관이 충고를 드리자면……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한낱 환관 나부랭이에게 존대를 하셔서도 안 됩니다.”

“아!”

엄 태감의 말에 진화가 크게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경계를 풀고 있었다.

이전 생에 진화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늘 불호(不好)였던지라, 진화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호불호보다는 살기가 있으냐 없느냐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무림과 달리 황궁은 그보다 훨씬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예법은 그보다 더 복잡했다.

“태감의 조언은 새겨듣겠네.”

진화가 사르르 웃으며 진심으로 엄 태감에게 감사를 전했다.

살포시 짓는 미소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말린 꽃봉오리가 열린 듯 순간 코끝에 향기가 스친 것 같았다.

‘어허, 어쩌면 괜한 충고였나? 허허허.’

엄 태감은 대전 밖에서 건희전 내관들이 진화를 맞는 모습을 보며 너털너털 웃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황궁 생활에 닳고 닳아 윗전을 향해 마음껏 웃는 법이 없던 건희전 내관들이 진심으로 진화를 반기고 있었다.

하긴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잠시의 만남이지만 늙은 환관조차 참지 못하고 입을 놀릴 정도였으니.

* * *

진화의 입궁으로 창신궁과 건희전에 춘풍이 부는 것과 달리, 황태자가 있는 동궁전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매서운 샛바람 불고 있었다.

턱.

소리가 나도록 털썩 의자에 앉는 황태자를 좌장군이 가만히 지켜보다 그 맞은편에 앉았다.

황태자의 허락이 없었기에 비례(非禮)를 지적해야 마땅했지만, 동궁전 환관들 중에 그것을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 황태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소리쳐 탓할 수도 없었다.

주인인 제가 먼저 좌장군에게 예외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주인인 저조차 좌장군에게 비례를 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태어나 지금까지, 네게 바란 것은 딱 하나였다. 네 외숙의 품에서 기어 나오는 것, 그것 하나!”

“그런데 넌 그것 하나를 못 하는 놈이지.”

황태자의 머릿속에 황제의 책망이 맴돌았다.

그때.

“잘하셨습니다.”

뜬금없는 칭찬에 황태자가 한껏 찡그리고 있던 것도 잊어버렸다.

놀란 눈으로 앞을 보자 좌장군이 흐뭇하게 웃으며 저를 보고 있었다.

“숙……부님?”

“잘하셨다고 했습니다, 전하.”

대체 뭘 잘했다는 것일까.

황태자의 얼굴은 칭찬을 처음 받아 본 아이처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폐하께 큰소리를 치신 것. 그리고 이황자에게 경고를 남기신 것, 모두 잘하셨습니다.”

“그걸 어떻게!”

“이래 봬도 제가 제국의 장군입니다.”

놀라는 황태자에게 좌장군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제국의 다섯밖에 없는 대장군.

그 말만으로도 황태자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황태자는 좌장군의 무위를 실제로 본 적 없이 없었다.

이번에 같이 나가 민란을 제압할 때도 좌장군은 단 한 번도 그의 창을 휘두른 적이 없었다.

황태자가 적사문주에게 당할 뻔했던 그 순간에도.

“그렇지요. 외숙께서도 무림인들처럼 귀가 좋으시지요.”

황태자가 좌장군을 향해 말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으나, 어쩐지 그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그것을 눈치채기 전, 좌장군이 먼저 말을 이었다.

“허허, 군문과 무림은 많이 다릅니다만 신체를 단련한다는 점에서는 뭐, 비슷할 수 있겠습니다.”

분위기를 풀려는 듯 좌장군은 황태자의 모든 말을 긍정할 듯 웃으면서 답했다.

“어쨌든 지금쯤 폐하께도 한번 소리를 높일 때가 되었지요.”

“잘못을 하고 대드는 것에도 때가 있습니까?”

“허허허, 백성들 몇 죽인 게 무슨 잘못이랄 것까지야 있습니까. 애초에 폐하께서도 이황자를 오해한 일로 근신 정도 내리시려던 것을요. 오히려 전하께서 전장에 나가신다 하니, 폐하께서 표정 관리를 못 하셨지 않습니까.”

좌장군의 말에 황태자는 대전에서 눈이 휘둥그레졌던 황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집무실에 따로 불러 혼을 낸 것도 오랜만이었다.

“북회군이 아니라 표기군을 따라가라 하시더군요.”

“호오, 집무실에서 말을 바꾸셨습니까? 거보십시오! 북회장군을 붙였다가 말을 정정하시다니, 폐하답지 않은 일이 아닙니까. 폐하도 자식 문제에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좌장군의 말에 황태자도 점점 표정이 풀렸다.

그러나 풀어진 얼굴 한편으론 여전히 풀지 못한 응어리 하나가 붙어 있었다.

“외숙의 반이라도 닮아 오라 하시더군요.”

여전히 마음에 남은 말.

하지만 이번에도 좌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흐흐흐, 그러니까요.”

음흉하게 웃는 소리에 황태자가 의아한 듯 좌장군을 보았다.

그러자 좌장군이 미소를 싹둑 잘라 버리고 진지한 얼굴로 황태자와 눈을 마주쳤다.

“기대도 않는 자에게는 무엇을 시키지도 않습니다, 하물며 제국의 대장군을 닮아 오라는 소리는 더욱더.”

“아!”

좌장군의 말에 황태자의 눈이 커졌다.

황제자의 눈빛에 금방 응어리가 사라지고 희망이 차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좌장군이 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황궁에서 쓸데없이 힘을 허비하고 있을 때, 우린 이 전쟁으로 힘을 키울 것입니다.”

“외숙의 말대로 그렇게 쉽게 신제국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아무 걱정 마시고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전하. 파군의 전장은 우리에게 유리한 무대로 마련될 것입니다.”

불안해하는 황태자를 향해 좌장군이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좌장군이 동궁전을 짧게 혀를 찼다.

‘쯧, 녀석도 이제 대가리가 컸다고 자꾸 한마디씩 더 붙이게 만드는군.’

좌장군은 오늘도 징징거리는 황태자를 잘 달랬다고 생각했다.

다만.

‘황제가 날 경계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황태자는 잘 달래면 그만이었지만, 황제는 아니었다.

황좌를 차지하고도 배고픈 맹수의 눈빛을 이글거리는 황제는 위험한 사람이었다.

언제라도 제 목을 물어뜯고 배를 채우려 하기 전에 제 목숨을 대신할 무언가를 그 입에 넣어 줘야만 하는.

‘황태자를 날 닮게 하라고? 진짜 군공을 세워 주라는 말이군.’

아무리 대전에 사람을 비워도 어떻게든 말이 새어 나오는 것이 황궁이었다.

황제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좌장군 자신이 직접 엿들을 것이라 예상하진 못해도, 어떤 경로로든 자신의 귀에 들어갈 것이라는 건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자신에게 전하는 말일지도.

‘군공.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지.’

좌장군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꽃들이 만연한 멋진 정원을 두고, 그는 다른 뭔가를 찾는 듯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름다운 정원에는 쥐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좌장군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좋아. 네 주인에게 함께하겠다고 전해라.]

좌장군이 느긋하게 동궁전을 지나치는 순간, 바람이 풀숲을 스쳤다.

* * *

신제국 선건궁.

춘풍이 부는 한제국 황궁과 달리 신제국의 선건궁은 고요하기만 했다.

대전이 있는 동궁은 사정이 조금 나았으나, 귀천성의 손님들이 주인의 자리를 꿰찬 선건궁은 정체 모를 흑의인들이 궁인들과 병사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발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최소한으로 남아 있는 궁인들은 죽은 동태처럼 생기 없는 눈을 하고 의무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다.

그 속에서 혼현마제는 자신의 처소에서 서류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파군과 장기군의 전쟁은 확정입니까?”

수오가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고 넘어가는 문서들을 보며 물었다.

신제국 조정이야 벌써 역천마제에게 겁을 먹고 귀천성이 장악한 지 오래지만, 상대는 또 달랐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는 놈에게 가장 급한 것을 미끼로 흔들었으니, 우리 손을 잡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혼현마제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다음 문서에 도장을 찍어 갔다.

그런 혼현마제를 보며 수오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의 혼현마제는 아무리 확실한 일도 제 손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한 후에 일을 진행했다.

그때와 비교하니, 달라진 모습이 새삼 실감이 되었다.

‘대체 무엇이 스승님을 이렇게 급하게 만든 겁니까.’

애틋하고 먹먹해지는 가슴.

하지만 이미 혼현마제를 배신한 자신이다.

수오는 속으로 혼현마제에 대한 질문을 삼키고, 늘 그렇듯 조용히 다음 서류를 올려놓았다.

최근 정의맹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았다.

혼현마제가 최대한 귀천성 소속 문파들의 집결지를 바꾸며 단속을 하고 있었지만, 그중에는 정의맹이 한발 더 빨리 주요 거점들을 파괴하는 일이 왕왕 벌어졌던 것이다.

“어디서 정보가 새는 걸까요?”

“글쎄. 그렇다고 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산발적이다. 그것보다는 정의맹 군사부가 예측을 잘한다고 해야겠지. 제갈가주는 이렇게 순발력이 좋지 않았는데, 새로 합류했다는 남궁의 소가주가 주도하는 일이라 봐야겠구나.”

“남궁진휘가요?”

“후후, 창천신룡이라 불리는 정의맹 최고의 기재다. 그런데 무공보다 지략으로 더 유명하지.”

남궁진휘를 칭찬하는 듯한 혼현마제의 말에, 수오가 놀란 듯 혼현마제를 보았다.

“스승님께서도 그자를 높이 평가하시는 겁니까?”

조심스러운 물음.

혼현마제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질투심이 귀엽다는 듯 눈만 살짝 들어 수오를 보았다.

갑자기 혼현마제와 눈이 마주친 수오가 놀라서 눈을 피했다.

“허허허, 부끄러우냐? 하나 질투는 향상심을 부른다. 그렇게 뛰어난 또래가 있다면 응당 질투하고 경쟁심이 발동해야지.”

혼현마제는 수오를 향해 자애롭게 웃었다.

하지만 곧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갈가주가 남궁진휘를 신뢰하고 있어. 애송이의 순발력이 저보다 좋다는 걸 인정하고 판단을 맡기고 있지. 거기에 틈이 있는 것이다. 조심스러운 제갈가주와 달리 남궁 애송이의 판단에 자만심이 깃드는 순간,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가 생길 테니. 잠깐은 이렇게 작은 기회들을 내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

혼현마제의 말에 수오는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 내리는 것 같았다.

남궁진휘의 마음에 오만함을 심기 위해 지금의 패배를 미끼처럼 휘두르는 혼현마제의 모습에서, 잠깐 혼현마제의 변화를 내려다보며 오만해질 뻔한 제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전쟁을 제물로 바치고 본성의 부활을 앞당길 것이다. 그러니…… 음?”

혼현마제가 중원에 뿌려 놓은 미끼들을 회수할 날을 기다리며 눈을 빛내던 때.

혼현마제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러십니까?”

수오가 놀라며 물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혼현마제는 문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수림이 사패천으로 돌아갔다고?”

혼현마제는 수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한수림이 돌아가?

어떻게? 왜?

혼현마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의선문에서 한수림이 머문 곳, 그곳의 출입자와 일행, 사람이 머문 시간까지. 모두 알아 와라! 빨리!”

혼현마제의 눈이 매섭게 번뜩이며 수오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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