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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75)화 (275/425)

남궁마제

떨칠 진(振) 꽃 화(花) :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투기장(5)

황궁은 넓고 그 안에는 크고 아름다운 수많은 궁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궁전 중 자신의 궁(宮)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황제와 황후뿐이었다.

귀빈 원씨와 미인 허씨, 황태자 한유강이 그보다 아래인 염녕전과 영수전, 동궁전을 가졌고, 그 외 황자들과 공주들은 어머니의 거처에서 별채를 받아 지냈을 뿐이다.

더 품계가 낮은 후궁들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법도가 그러했다.

원귀빈과 허미인은 각자 집안 배경도 빵빵하거니와 그들의 장자가 약관을 넘는 때에 지금보다 품계가 올라서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들은 품계에 따라 어쩌면 더 큰 거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나 그 또한 전(殿)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자식인 황자와 공주 들은 그럴 수 없었다.

성인이 된 황자나 공주가 자신만의 거처를 가지고 싶다면 궐 밖으로 나가거나 혼인을 하는 수밖에 없었고, 계속 궐에 있고 싶다면 어머니의 거처에서 함께해야 했다.

이황자 한진화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건희전(建喜殿).

실종되었다가 나타난 이황자의 거처였다.

황제는 이황자를 찾은 기쁨으로 이황자에게 전(殿)을 선물했다.

황후의 창신궁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명목이었지만, 건희전은 황제의 장추궁과도 가까워 모든 후궁들이 탐내던 곳이었다.

동궁전보다 작지만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황제는 이황자에게 건희전을 주기 위해 ‘적통 황자는 자신의 전을 가지고 황궁 안에 머물 수 있다.’는 법령까지 만들었다.

한 제국에 적통 황자는 한진화뿐이었고, 법령이 적용된 사람도 진화뿐이라. 진화 한 사람을 위한 법령은 진화에 대한 황제의 총애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건희전은 그런 총애의 상징 그 자체나 다름이 없었다.

단지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기쁨이 컸다고 하기엔 너무도 거대한 상징물이 궁궐 안 여러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불편한 시선들은 이번 조정 회의에서 황제가 노골적으로 진화의 편을 들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쥐새끼들이 더럽게 속삭대는군.”

남궁교명이 담벼락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건희전 안에는 황후가 직접 고른 궁인들로 가득했지만, 담벼락 너머에서 염탐하는 이들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하하하. 놔둬. 언제 한번 ‘함부로 무림인들 뒤를 밟으면, 자다가도 똥간에 빠져 죽을 수 있겠구나.’ 느끼게 될 테니까.”

“…….”

언제 한번 자는 놈을 잡아다 똥간에 빠뜨리겠다는 뜻일까.

남궁교명은 남궁구를 쳐다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희전 궁인들은 재밌는 농담을 들은 듯 웃음을 흘렸지만, 남궁교명은 남궁구가 실제로 그렇게 하고도 남을 놈이라고 확신했다.

“좀 더럽긴 하지만, 저 똥파리 같은 놈들은 그렇게 당해도 싸다.”

건희전의 별채에 묵고 있는 남궁교명도 담벼락 밖에서 속삭이는 소리들이 여간 거슬렸던 것이 아니라, 이번만큼은 남궁구를 말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남궁교명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제까지 남궁구가 뭔가를 할 때에 남궁교명은 한 번도 말려 본 일이 없었다.

“……똑같은 놈들.”

“푸웁!”

진화가 흘리는 말에 참고 있던 동 태감마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놀란 궁인들이 동 태감을 보고, 동 태감도 어지간히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윗전인 진화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터라, 동 태감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 반성할 따름이었다.

‘허어, 궁 생활을 육십 년이나 해 놓고 웃음을 흘리다니. 나도 참 편해진 모양이군.’

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던 전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황궁의 궁인들은 윗전의 말을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이 궁의 법도이고, 혹여 윗전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채찍질을 당하거나 귀가 잘리는 일도 허다했다.

특히 성정이 거친 황족들은 궁인들을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하기 일쑤라, 당금 황제의 치세에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다른 궁의 나인들은 손찌검을 당하는 일이 예사였다.

하지만 그들의 주인은 달랐다.

진화는 궁인들을 어색해하긴 했지만, 궁인들을 보는 시선이 다른 사람들을 보는 시선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밖에서 자라 그렇다기보단…… 그래, 타고난 성정이시지.’

평생 윗전의 심기를 살피며 살아온 궁인들이다.

눈치가 곧 명줄이라, 그들은 진화의 행동이 진심인지 아닌지 금방 읽어 낼 수 있었다.

‘좋은 분이셔, 주인으로서도, 제국의 황자로서도.’

동 태감과 건희전 궁인들이 진화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궁인들의 분위기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 사람은 남궁구였다.

장난스럽게 지어진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남궁구의 눈빛이 순식간에 사람들의 표정을 읽었다.

‘내부에는 첩자가 없는 모양이네.’

궁인들에게 눈치가 생존이라면, 남궁구도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농담과 웃음으로 궁인들과 어울리면서 진화의 안전을 살피던 남궁구는 이제 조금씩 경계를 내려놓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은 셋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모든 궁인들을 물렸다.

“당문에서 연락이 왔어. 정의맹에서 전서를 보냈는데, 백매단이 환마제의 꼬리를 밟았다는군.”

“위치는?”

“아직. 무슨 교단처럼 성녀를 두고 그 밑의 사제들이 움직이는 구조인데, 백매단의 생각에 그 성녀가 환마제인 것 같다는군. 그래서 지금 그 성녀의 위치를 쫓고 있고. 다만, 우리가 장안에서 보았을 때도 웬 여자를 앞에 세우고 환마제는 뒤에 숨어 있었잖아.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움직이느라 신중할 수밖에 없대.”

남궁구의 말에 진화와 남궁교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동도 하지 못할 정도로 육체가 붕괴한 환마제는 아름다운 이국의 여인을 조종하며 움직였다. 환마제의 수하들도 여인을 환마제 본인을 대하듯 섬겼고.

그때를 기억하며 진화와 남궁교명은 백매단의 판단에 동의했다.

“그 운명의 중첩이라는 거, 놈들도 알고 있을까? 아니, 좀 이상해서.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 교활한 놈들이 이렇게 추적당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계속 일을 벌일 리 없잖아.”

“글쎄.”

진화도 생각하고 있던 의문이었다.

운명에 대해 알고 있다면, 어째서 역천마제와 광마제는 서로 손을 잡았단 말인가.

적어도 진화가 아는 광마제라면 적이 될 인물을 살려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여기 연회인지 뭔지가 끝나는 대로 바로 적호단에 합류하지. 이번에 환마제를 완전히 죽인다면, 이제는 다시 가져다 채울 것도 없을 테니까.”

진화는 당장 눈앞에 닥친 싸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만 이때까지도 진화는 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싸움이 벌써 시작되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 * *

신제국 선건궁.

한제국 황궁보다 규모는 작지만 화려하기로는 뒤지지 않는 신제국 황궁에 이렇게 고요한 곳이 있을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주인이 아닌 이방인이 자리를 차지한 선건궁은 이제 신제국의 황궁에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질적인 선건궁에서도 한 곳.

선건궁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전각은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뚜벅. 뚜벅.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어둠 속에 발소리가 울렸다.

끼-익.

발소리가 문 앞에 닿았을 때, 문은 손도 대기 전에 저절로 열려 손님을 맞았다.

발소리의 주인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방 한가운데에는 웬 장년인이 홀로 의자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의자에 편하게 기댄 자세와 상관없이 장년인에게서는 신선과 같은 선연한 기운과 제왕의 기상이 동시에 느껴졌다.

툭.

방으로 들어온 손님,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도포 밖으로 단단한 풍모의 자랑하는 사내가 장년인의 앞으로 죽간 하나를 던졌다.

스르륵.

멋들어진 백염과 백미가 꿈틀거리고, 조용히 장년인의 눈꺼풀이 열렸다.

붉은 정광이 번뜩이다 사라졌다.

“구훤, 그게 무엇인가?”

“독마제가 찾아왔다는 혼현마제의 비록이라는군. 보겠나?”

광마제 구훤의 대답에 장년인, 역천마제가 제 앞에 있는 죽간을 보았다.

하지만 곧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봐도 되겠군.”

“호오, 혼현을 믿는 것인가?”

“적어도 자네보다는?”

광마제가 역천마제를 도발하는 듯했지만, 이번에도 역천마제는 그에 말려들지 않았다.

“허허허, 이번에는 이것인가?”

역천마제의 손짓 한 번에 방 안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역천마제는 친근한 태도로 광마제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자네의 힘은 여전한가?”

“절반만.”

“그렇군.”

역천마제의 물음에 광마제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역천마제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가라앉은 분위기.

하지만 곧 역천마제가 죽간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걸 내게 순순히 가져온 것을 보니, 아직 아무것도 못 찾은 모양이군.”

“놈이 우리를 속였다는 건 알았지.”

수오라는 놈의 말에 따르면 이건 가짜라고 했다.

혼현마제가 그렇게 말을 했다고.

전부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혼현마제의 말보다는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러면?”

“왜 속였는지를 모르겠네.”

광마제가 죽간을 보며 눈을 빛내는 것을 보며, 역천마제가 조용히 차를 따랐다.

“어찌하려는가?”

“어찌하는지 이제부터 보려고. 흐흐, 내가 이것을 자네에게 가져왔잖나. 혼현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하지 않나?”

광마제가 씨익 웃으며 묻자, 역천마제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꼭 못된 장난을 치기 전 아이 같군.”

“흐흐, 자네는 내 장난을 한 번도 말린 적이 없고, 이번에도 말리지 않겠지?”

“혼현의 일을 방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네. 우리에게 중요한 때일세.”

“걱정 말게. 그냥 혼현이 약간 바빠질 뿐 우리 일에는 좋을 테니까.”

역천마제가 타이르는 어른처럼 광마제에게 당부를 하고, 광마제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잠시 후,

“뭐야! 그게 왜 그 미친 늙은이의 손에 들어가!”

광마제가 죽간을 들고 역천마제를 찾은 일은 당연하다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혼현마제의 귀에 흘러들어 갔다.

하지만 그 사실에 혼현마제보다 당황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런 미친 늙은이! 그걸 대놓고 역천마제 님께 가져가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수오는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져서 혼현마제에게 들릴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뭐가 미친 늙은이의 손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죽간!”

독부의 물음에 혼현마제가 화가 난 듯 대답했다.

그에 독부가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죽간인데 그래요?”

독부도 화가 난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상대의 화를 맞는 것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혼현마제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살기까지 번뜩이며 독부를 노려본 것이다.

“너와 내가 이야기할 죽간이면, 무슨 죽간이겠나.”

순식간에 침착해진 목소리.

독을 뿜기 전 냉정해진 뱀처럼 차갑고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에, 독부의 눈이 커졌다.

“설마? 아니, 그게 왜 그자의 손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그걸 이제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

도발하는 듯한 눈빛.

냉정한 혼현마제의 말에 독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혹시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하지만 내 주변에 쥐새끼가 있는 건 확실하니 얼른 찾아야지. 너도 협조해. 우리가 거짓말을 하게 된 걸 주군이 아시는 건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닐 테니까.”

“알겠어요.”

“나는 주군께 다녀오지.”

그 죽간이 가짜라는 걸 역천마제나 광마제가 아는지 모르는지 그것부터 확인할 때였다.

혼현마제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급히 역천마제를 찾아 나갔다.

혼현마제가 나가고 독부가 신경질적으로 찻잔을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아악-! 젠장! 대체 어떤 빌어먹을 쥐새끼야!”

독부는 오랜만에 가지는 다도 시간을 방해받은 것도 짜증 났지만 이 일로 혼현마제의 심기가 틀어졌다는 것에 더 화가 났다.

“빌어먹을 쥐새끼! 뼈도 남기지 않고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어 주지!”

치를 떨며 분노하는 독부의 모습을 보며 수오는 작게 떨리는 손을 옷소매 안으로 숨겼다.

* * *

다음 날. 

건희전에는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쨍그랑-!

“까---악!”

“무슨 일이냐!”

건희전 나인이 비명을 지르고, 바르르 떨던 새는 결국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다.

뒤늦게 달려온 내관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급하게 동 태감에게 달려가고, 동 태감은 희게 질린 얼굴로 진화를 찾았다.

“황자님!”

동 태감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에, 건희전 담벼락 밖에 있던 사람들도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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