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 화(火) : 시궁창의 사람들(1)
죽간이 숨 막히게 쌓여 있는 장 하나, 촛불을 켠 등 하나, 책장과 탁자, 붓 통 하나도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방.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금으로 장식된 용이 어깨 장식을 물고 있는 화려한 의자.
오직 천하에서 단 한 사람,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였다.
“죽이지 않고 참았다라…….”
황제가 문서를 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눈앞의 노인을 보았다.
늙은 내관은 안광이 번뜩이는 황제의 눈빛에도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다지 참을성이 많은 놈이 아니었어. 아니, 참아 주지 않는 놈이었지. 이황자가 왜 그런 것 같던가?”
“…….”
오랜 세월 황제를 모셔 오면서, 엄 태감은 황제의 질문이 가끔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 겨우 두 번 얼굴 보는 이복형제에게 정이 있을 리 만무하고…… 눈치를 보던가?”
“그건 아니었습니다.”
“아니라?”
“눈치를 본다기보다 아예 무신경한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번 독살 시도도 그렇고, 이황자님께서는 본인이 진짜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한 본인의 위험에 대해 무섭도록 무감하신 듯합니다. 동 태감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군요.”
“그렇다고 뒷일을 두려워할 놈은 더더욱 아니지.”
황제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황후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너무 신경을 써. 혹시 남궁세가에서 그놈을 키우면서 은연중에 은혜 갚기를 강조한 걸까?”
황제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진심 한 톨 들어 있지 않은 질문이라 엄 태감도 농담으로 듣고 웃어넘겼다.
“거긴 누가 봐도 팔불출이죠. 하지만 이황자님 본인이 그런 강박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날 닮았다면 그렇게 착한 놈은 아닐 텐데…….”
황제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것 외에는 무척 영리하십니다. 상황을 유리하게 끌어갈 줄 아시고 적절히 상대를 겁박할 줄도 아시고…….”
“싸울 줄 아는 놈이지.”
비로소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제야 겨우 하나, 마음에 드는 놈이 나타난 것이다.
“이황자도 후보에 올린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런데 황자님이 원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 이 자리가 본인이 원하면 앉고 원하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는 그런 자리 같은가?”
엄 태감의 염려에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엄 태감이 걱정하는 건 ‘그러다가 이황자가 황궁으로 안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지만, 황제는 그에 관해서는 눈곱만큼도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이 자리를 하늘이 내려 준다는 건 전부 개소리다.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늘 탓을 하는 거지. 남궁세가에 하남 조씨에 황후까지, 제 놈에게 줄줄이 딸린 식구들 목숨이 전부 걸렸는데 제 놈이라고 방법이 있을까! 나라고 좋아서 이 자리 앉았겠나?”
황제가 지금도 분통이 터지는 듯 책상에 쌓인 문서들을 노려보았다.
매일매일 격무에 시달리고, 필 획 하나에 백성들 수천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끔찍한 책임감이 따른다.
사랑하는 여인과도 함께할 수도 없다. 빌어먹을 황궁의 법도는 황제의 잠자리 순서까지 정해 놓았으니까.
함부로 호불호를 드러내거나 균형을 깨 놓을 수도 없었다. 인간의 욕심은 놀랍도록 끝이 없어서 황제가 중심을 잃는 순간 신료들이 흐트러지고 그 아래 백성들은 순식간에 도탄에 빠질 수 있으니까.
사실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되어도 좋다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당장 수십만, 수백만 군사를 부리는 권력을 놓았다간 그 군대가 제 사람들을 노릴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살려면, 살리고 싶으면 앉아야지! 나도 살려고 앉은 자리다. 이놈의 피가 뭔지 반쪽만 빼낼 수도 없고. 줄줄이 엮인 놈들이 다 죽을 판이니, 나도 어쩔 수 없어서 이 망할 시궁창을 헤치고 앉은 자리란 말이다.”
황제는 용상을 빗대어 ‘냄새나는 시궁창에서 홀로 번쩍이는 자리’라 말하길 서슴지 않았다.
“밖에서 보기에 황제는 편하게 앉아서 말만 씨부리고 하는 일은 없어 보이는 모양이야. 어미들 손에 던져 놓은 황자 놈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크는 걸 보면.”
황제가 다른 보고서를 손에 들고 미간을 구기며 구시렁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엄 태감이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제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황제가 방금 든 보고서 때문이었다.
“삼황자는 견뎠고, 오황자와 칠황자는…… 이런! 오줌까지 지렸어?”
“칠황자께서는 아직 어리시니까요.”
“아무리 어려도! 이런 젠장! 울고불고 생지랄도 모자라서, 이놈이 황좌에 올랐다간 역사에 오줌싸개 황제로 비웃음을 당할 판이군. 허어, 쯧! 나이가 어리든 어떻든, 판을 걸었다가 졌으면 죽어야지.”
황제가 보고서를 엎었다.
“오황자와 칠황자는 성인이 되는 대로 궁을 내보내겠다. 죽고 싶지 않으면 최대한 멀리 가라지.”
두 황자의 탈락이 결정되었다.
황제는 두 아들의 길을 잘라 버리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음 보고서에 눈을 돌렸다.
엄 태감은 그런 황제가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괜한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두 황자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황자는?”
“방관 중이었습니다.”
“여우 같은 놈. 제 어미 손에 동생을 던져 놓고 일찌감치 떨어져 나올 때 알아봤지.”
황제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언뜻 말만 들으면 사황자를 비난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일찌감치 어미의 치마폭에서 벗어난 기지를 높이 사고 있는 편이었다.
똑똑하게 자라기보다 착하게 자랐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지만, 황제는 부모의 마음만으로 자식을 바라볼 수 없었다.
“허미인이 사황자에게 손을 뻗치지 못하도록 계속 감시하고, 사황자가 이번 민란을 처리하는 데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지켜보지. 위장군의 수작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면, 그놈의 기지를 인정해 주도록 하지.”
“예.”
이제 자식들, 아니 황자들에 대한 일은 끝이 났다.
앞서 탈락한 육황자와 함께 두 명의 황자가 더 탈락하고, 한 명의 황자가 더 평가대 위에 올랐다.
황제 자신의 손으로 자신들을 올리고 떨어뜨렸지만, 그들 하나하나에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올라오는 이야기는 달랐다.
황제의 눈동자 속에 시퍼런 날이 선 듯 번뜩였다.
“건희전의 일은 어떻게 되었지?”
“황후궁에서 독을 넣은 자를 잡아다 심문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허미인이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계집들 몇 죽이는 것하고 내 자식을 건드리는 건 다르지.”
황제는 벌써 마음속에 있는 칼을 휘두른 듯 서늘했다.
살을 섞고 자식을 낳은 여인에 대해 말을 하는데도 감정 한 톨 남지 않은 듯 냉정했다.
“황후마마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듯합니다. 하남 조씨에서도 독의 출처를 알아보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날, 조용히 지나가겠다는 황제에게 황후는 처음으로 원망을 뱉었다.
진화를 잃어버렸을 때조차 뱉지 않았던 원망이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낳은 자식, 잃어버렸다가 겨우 되찾은 자식.
황제라고 가슴이 아프지 않은 게 아니었다.
황제라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지 않은 건 아니었다.
탕!
황제가 탁자를 내리쳤다.
황후의 원망 못지않게, 황제도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대체! 허미인이 쓰는 독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어! 후궁들은 물론이고 신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고에도 그 독이 쓰였어! 멍청하고 순진한 허미인과 대사마가 그렇게 교묘하게 신료들을 압박하고 여론을 움직일 순 없다. 분명 뭔가, 다른 놈들이 있는데……!”
“현재로는 연결된 끈이 허미인과 대사마 쪽뿐이니까요. 이번에는 이제까지와 다릅니다. 놈들이 실수를 한 건지, 자리를 비워 그렇게 된 건지, 이전과 달리 꼬리가 밟혔으니까요.”
“사람은 붙여 놓았겠지?”
“물론입니다. 허미인과 대사마 쪽으로 궁과 관련 없는 아이들로 붙였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마라.”
“예, 폐하.”
황제의 명에 엄 태감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허미인전의 궁인들을 갈아치우는 건?”
“황후께서 궁인들을 아끼시지 않습니까.”
황제의 물음에 엄 태감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허미인의 감시를 위해 궁인들을 교체하기를 바랐지만, 이는 황후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허미인을 끌어내리면 그 아래 궁인들도 모조리 죽는다.
황후는 허미인의 손발이 되어 죄를 지은 이들 외에 다른 희생자가 나오는 걸 원치 않았다.
내명부는 황후의 관할이고, 황제는 평생 황후를 이겨 본 적이 없으니. 황제도 엄 태감을 탓하진 못했다.
“대신 황후께서 영수전을 고립시키신다 합니다.”
“그래? 대사마 측은?”
“지금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대답을 하는 엄 태감의 입가에 비소가 맺혔다.
미친 딸년은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그 딸이 꼬리가 밟혔는데 아비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
아무리 보아도 허미인과 대사마는 황제가 서슬 퍼렇게 눈을 붉히는데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일을 처리할 위인들이 못 되었다.
황제의 평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젠장! 그 쥐새끼가 어디에 숨었는지 기가 찰 노릇이군.”
처음에는 그리 똑똑하지도 않은 대사마가 기가 막히게 줄을 잘 서서 살아남는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포용력도 재력도 없는 가문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아비와 딸이 합심해서 궁 안팎에 저들보다 나은 호족과 그 가문 여인들을 모조리 죽이더니, 끝내 대사마 자리까지 올라 낙양 호족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지금도 그들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라 믿지 않았다.
오히려 방심하고 있던 자들이라 이상함을 늦게 알아차린 격이었다.
“사황자의 주변을 살펴라. 대사마가 붙여 준 인물의 감시도 놓치지 말고.”
“예, 폐하.”
벌써 수십 년째 진척이 없던 일에, 이제 겨우 그림자 하나 밟았을 뿐이다.
황제는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크게 그림을 그렸다.
그는 아직 젊고 건강하며, 후사를 논하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었으니까.
“열양공주가 아파서 연회에도 참석을 못 했다고?”
“열병이 심하셨다 합니다.”
“어의를 보내 주고 약을 좋은 걸 써 주거라.”
“예, 폐하.”
황제가 아비로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참, 조 태사에게 일러 다음에 이황자가 오면, 글공부를 빙자해서 제왕학을 가르치라고 해.”
“……예, 폐하.”
엄 태감은 다음번에야말로 이황자가 황궁으로 오는 걸 거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역천마제의 명으로 신제국을 떠나기 전.
독부 은요가 혼현마제를 찾았다.
얼굴이라도 보고 떠나려고 들른 길.
혼현마제의 곁에 반갑지 않은 소녀가 있는 것을 보고 독부의 눈매가 대번에 가늘어졌다.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저를 향해 생긋 웃는 것을 보며, 독부가 눈살을 찌푸렸다.
달그락.
‘죽여 버리고 싶은 년!’
독부가 손톱끼리 긁어내리며 소녀에게서 억지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중요한 용무라도 있는 듯 혼현마제에게 말을 걸었다.
“가가, 죽간이 어떻게 주군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아내셨어요?”
죽간 따위 사실 독부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단지 혼현마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이렇게 말을 걸면 혼현마제가 고개를 들어 저를 봐 주니까 꺼낸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혼현마제가 독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독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광마제가 주군을 뵙고 난 다음에 주군 손에 그게 들어갔으니, 전해 준 사람이야 뻔하지. 문제는 그게 어떻게 광마제의 손에 들어갔는가인데, 아무리 뒤져도 이쪽에는 빈틈이 없어. 내 편에 첩자가 없다면, 놈이 광룡귀면대를 완성했다는 게 가능성이 높겠지! 내 거처에 감히 쥐새끼를 보낼 정도로……!”
혼현마제가 광마제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그에 독부가 다정하게 혼현마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놈들이 눈에 띄더군요. 뭣하면 내가 죽여 줄 수 있어요.”
“안 돼. 너는 주군의 명을 따라 황도로 가야 한다.”
“하지만…….”
“됐다. 어찌 되었든 이걸 다시 내 손에 쥐여 준 것을 보면 주군께서 이 문제를 덮어 두겠다는 의미이니까.”
혼현마제가 독부의 말을 자르고 그 문제를 끝맺었다.
역천마제가 넘어가기로 한 것을 괜히 들쑤셔서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장 급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수오야, 의선문에 알아보라고 시킨 건 어찌 되었지?”
“예, 스승님. 홍랑대부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냈는데, 다른 건 알아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의선문의 방비를 군사부에서 직접하고 있다고 합니다.”
“군사부? 제갈 가주 그놈이 직접 나섰다고?”
혼현마제가 제갈가주를 떠올리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뭔가 있다. 뭔가 중요한 것이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그 효율적이고 교활한 인간이 의선문 방비에 직접 나설 리가 없다!’
불길한 예감이 계속 혼현마제에게 경고를 보냈다.
혼현마제는 이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의선문이 안 된다면 사패천에 사람을 보내라. 사랑탑을 닫지 않는 이상 첩자를 완전히 막기는 힘들지. 한수림이 어찌 되었는지, 그쪽을 알아 와라.”
“예.”
혼현마제의 명에 수오가 고개를 숙였다.
‘왜 이렇게 의선문 쪽 일에 집착하는 거지? 가짜 역천비록을 만든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거기 있는 건가?’
고개 숙인 아래로, 수오가 눈을 반짝였다.
혼현마제의 명을 받은 수오가 나가고, 잠시 후 혼현마제마저 신제국의 일로 조정에 불려 갔다.
독부 은요가 그 모습을 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 참, 이제 가야 하는데…….”
이제 곧 떠나야 하는 독부가 혼현마제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지 못해 속상해하는데, 마침 옆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풋!”
소녀가 독부를 향해 웃음을 흘린 것이다.
스-윽.
독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네가 웃은 거니?”
서늘한 목소리.
그보다 더 서늘한 기운이 소녀를 향했다.
하지만 소녀 또한 이전의 그 힘없고 비루한 겁쟁이가 아니었다.
“흥! 웃기니까 웃었죠. 혼자 안달하는 꼬락서니가 안 웃겨요?”
“허! 이것 봐라?”
독부가 코웃음을 치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요염한 얼굴과 육감적인 몸에서 숨이 막힐 듯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으, 읏……!”
소녀가 창백한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소녀가 강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독마제에 맞설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독마제가 저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아니 그것을 믿고 자존심을 부려 본 것뿐이었다.
“나, 날 상하게 하면 혼현마제 님께서 가만 안 있으실 거예요!”
“호오, 그러면 안 되지…… 나도 알아.”
소녀의 협박이 가소롭다는 듯, 독부가 요염하게 웃으며 소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달그락.
소녀의 눈앞에서 손톱끼리 부딪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더니, 곧 날카롭고 섬뜩한 손톱이 소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잘해. 우리 가가의 마음에 들게. 단, 가가에게 꼬리 치진 말고. 그랬다간 다음번엔 내 손톱이 간지럽게 지나가지만은 않을 테니까. 가가의 일을 하는 데에 예쁜 얼굴은 필요 없잖아. 안 그래?”
“흐읏……!”
숨이 막힐 듯한 살기와 함께 눈앞에서 얼굴을 건드리는 검은 손톱에, 소녀는 겁에 질린 듯 금세 눈이 촉촉해졌다.
겁에 질린 소녀의 얼굴이 마음에 든 듯, 독부가 손톱으로 소녀의 얼굴을 톡톡 두드려 준 뒤 물러섰다.
“다음에 또 보자. 그때도 네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호호호호호!”
독부가 요란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집무실을 나갔다.
그 모습을 소녀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 * *
황후의 당부에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동 태감의 눈물 콧물에 도망치듯 궁을 나왔다.
황제의 의미심장한 눈초리는 이미 진화의 뇌리에 없었다.
진화와 남궁진혜, 구, 교명은 청화상단에서 가장 빠른 배에 올라탔다.
“이번에 죽이면 끝인가?”
“글쎄다. 적어도 겨우 걸음마나 하는 놈을 데려와 다시 환마제로 만들지는 못하겠지.”
“운명의 중첩이라는 게, 마제와 제물한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라며.”
“마제들끼리…… 역천마제와 광마제, 나와 현오도 얽혀 있다는군.”
“놈들도 그걸 알까?”
“알겠지.”
“그런데 둘이 한편이라고? 서로 죽고 죽일 수 있는데?”
“그러고도 한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운명의 중첩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낸 것이 거의 없으니까.”
진화의 말에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신기한 듯 진화를 보았다.
그 운명에 따르면 진화와 현오도 서로 죽고 죽이는 운명일 수 있다는 건데, 진화가 너무 남의 말을 하듯 덤덤한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현오와 좀 껄끄럽지 않겠어?”
남궁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진화가 픽- 하고 실소를 뱉었다.
“그 만두쟁이랑?”
“하긴. ……그런데 그놈도 도련님이랑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
남궁구의 날카로운 반문에 진화가 입을 닫았다.
대신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분명한 건, 이전의 그자처럼 지금의 환마제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거야. 우리는 이번 기회에 환마제를 죽이는 데 집중하면 된다.”
죽일 수 있는 놈들부터 죽여 나간다.
어찌 되었든 역천성을 보필하는 팔현성의 숫자가 줄어든다면 놈들이 곤란해질 터였다.
정의맹에서 내린 판단도 진화의 생각과 같았다.
“다행인 건, 이번 일도 우리 적호단이 맡을 거라는 거지. 전투가 격해지고 있는 곳들이 있어서 현무단과 주작단, 청룡단이 모두 나간 모양이야. 다만 늦게 오면 우리만 두고 출발한다니까…….”
“어떻게든 빨리 가서 절대로 빠지지 말아야지.”
“돌아가는 일정을 알아 놓겠습니다.”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드물게도 적극적이었다.
이전에 진짜 환마제와 붙었을 때, 두 사람은 실력이 되지 않아서 진화와 환마제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게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 있는 듯 남궁구와 남궁교명은 벌써부터 흥분해 있었다.
“우리도 그때와 다르다고.”
“이번엔 확실하게 공자님을 보필하겠습니다.”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자신감 가득한 눈을 빛내며 말했다.
두 사람의 모습에 진화가 슬쩍 웃었다.
진화에겐 두 사람이 곁에 있다는 자체가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 삶과도 다르다!’
자신의 옆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전 삶과 비교한다면 군사부의 움직임이나 정의맹의 전력, 정사연합과 제국의 모습이 모두 달랐다.
남궁진휘를 살리고 남궁구와 남궁교명과의 관계를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사패천을 돕고 천수현인을 살린 것까지, 모두 진화가 만들어 낸 변화였다.
무엇보다 지금의 무위라면, 적어도 광마제에게 허무하게 지지 않을 것이었다.
‘환마제를 죽이고 역천비록의 비밀까지 풀어낸다면, 놈을 죽인다. 그리고 귀천성을…… 이긴다!’
어쩌면 이전 생에 꿈꿨던 모두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미래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죽을 각오로 정의맹으로 가던 이전과 달리, 정의맹으로 돌아가는 진화의 얼굴에도 자신감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