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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82)화 (282/425)

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 화(火) : 시궁창의 사람들(2)

진화 일행의 배가 포구에 닿자마자, 적호단이 배에 올랐다.

“어라? 부단주님!”

“뭐야? 나 보고 올라온 거 아니야?”

적호단원들이 놀란 얼굴로 남궁진혜와 진화 일행을 알아보고, 남궁진혜 역시 자신들을 보고 놀라는 적호단원들을 의아한 듯 보았다.

“후우, 이번엔 저 골칫덩어리들을 놔두고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적호단주 팽치가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는 것을 보자면, 결코 남궁진혜와 진화 일행을 만나려 한 의도는 아니었던 건 확실했다.

“여, 남궁……!”

“오! 그대여, 이제야 내 눈의 평화와 안정, 번영이 돌아오는 듯하오!”

현오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들기도 전에, 나하연이 양손을 벌리고 진화를 맞았다.

나하연은 그동안 찝쩍거리지 못한 만큼 마음껏 찝쩍거려 보겠다는 듯, ‘그대를 보자니 이제야 내 폐에 맑은 공기가 들어오는 듯하군. 그대와 같은 공기로 숨을 쉬어서 그런가?’ 혹은 ‘그대가 돌아오니 비로소 세상이 밝아 오는군. 역시 내 세상을 밝히기엔 해만으로는 부족한 듯하오. 이미 그대를 봐 버렸으니까.’ 따위의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 나하연의 뒤로 현오와 팽가 형제, 당혜군 그리고 제갈상과 관서겸이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 젓고 있었다.

일상적이고 친근한 광경.

친우들이라 표현해도 될까.

관도생들이 보여 주는 풍경과 유치찬란한 상황에 진화는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너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적호단 신쌩 씨-입 조로 움직이고, 조장은 계속 남궁진화! 불만 없지?”

적호단주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특정 발음에서 말투가 몹시 공격적인 것이, 이젠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사고치지 마라.’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진화 일행도 적호단과 함께한 지 벌써 이 년째라, 배 위에 오르자마자 능숙하게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흐흐흐, 황궁에서 맛있는 건 많이 먹었나? 황궁의 숙수들이 만드는 건 좀 다르겠지?”

현오가 진화의 옆으로 와 능글맞게 물었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오랜만에 만난 듯 반가웠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진화 자신과 서로 죽고 죽이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천살성의 존재.

제물 양육실에서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했지만, 그땐 현오가 어찌 되든 무관심했다.

이전 생에도 현오나 역천마제의 제물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오 또한 저 못지않게 어려운 삶을 살았을 텐데.

그런데 현오와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친우(親友) 같은 관계를 맺다니, 운명이라는 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까.

현오를 보자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뭘 먹으면 고작 며칠 만에 그렇게 살이 찐 거지?”

“앗! 티가 나나? 승정방에서 일 년에 가사를 두 벌씩 해 먹는 놈은 나밖에 없다고 구박이 장난이 아닌데! 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네. 또 환마제의 미혹에 당할까 봐 걱정된다고 해서 불마동에 들렀다 왔단 말이네.”

현오는 환마제의 악몽에 당하고도 멀쩡하게 깨어났다.

현오에게 악몽은 소림의 불마동이기 때문이었다.

불마동에 들어가는 건 그만큼 현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환마제의 후예로 보이는 자를 죽이러 간다는 말에, 소림에서는 현오가 걱정되었던 모양이었다.

현오는 악몽이 될 정도로 싫어하면서도 얌전히 불마동에 들어갔다.

불마동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보다 소림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음?”

진화는 현오를 보다 불현듯 마음에 걸렸던 사과를 전했다.

지난날, 홍의생 때 습격을 받아 소림에 큰 희생이 있었을 때에 원통하게 울던 현오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전 생의 습관대로 진화가 정도 무림 동료들의 죽음을 가볍게 생각할 때였다.

고의로 죽게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필사적이었던 것도 아니라, 진화는 현오가 소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해하게 된 만큼 그때의 일에 미안함을 느꼈다.

“하하하! 뭘 사과까지야, 괜찮네. 사실 불마동에 들어갔다 오면 사부님이 아무리 먹어도 눈치를 안 주시거든. 그것 때문에 살이 찐 것이니!”

“…….”

소림보다 고기를 사랑한다고 해서 소림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 테니까.

다만 현오에 대한 진화의 애정은 순식간에 식어 가는 듯했다.

“뚱뚱땡중!”

“우아악!”

“잘 있었나? 물어보나 마나군. 이 얼굴에 기름기 좔좔 흐르는 것 좀 보소!”

“뒤통수에 만두가 하나 더 붙었군. 대체 뭘 하면 뒤통수에 살이 찌는 건가?”

남궁구가 반가움에 현오의 등에 올라타고 남궁교명이 현오의 접힌 뒤통수를 보며 혀를 찼다.

곧 팽가 형제가 다가와 남궁구를 한 손으로 들어 현오를 구해 주었다.

“그 덩치로는 남궁구가 아무리 깔아뭉갠들 죽지도 않을 텐데 뭣 하러 구해 줘?”

“집요한 여자는 인기가 없지.”

“이 씨, 그런 너는!”

“나는 나하연. 포기를 모르는 여자지.”

당혜군과 나하연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싸우고, 일행보다 조금 늦게 준비를 마친 제갈상과 관서겸이 다가왔다.

* * *

크고 깊은 동굴 안.

스르렁, 스르렁.

수십 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바위를 굴렸다.

거대한 바위가 굴러가면서 바닥에 있던 단단한 돌에 조금씩 흠이 갔다.

그렇게 점점 흠이 쌓이면서 깊은 홈이 파였다.

“서둘러야 합니다. 천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힘내십시오! 아무런 대가 없이 하늘의 제국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성녀께서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소!”

하얀 옷을 입은 사제들이 사람들을 독려하고, 바위를 굴리는 사람들은 힘든 내색 없이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그 모든 광경을, 절벽같이 높은 제단 위에서 혼현마제와 성녀라 불리는 소녀가 지켜보고 있었다.

혼현마제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역천대법을 위한 진을 그리는 작업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대법을 위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저 사제복을 입은 술법가들은 다 진짜예요?”

“…….”

혼현마제가 영 딴소리를 묻는 소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 것부터 칼날처럼 소녀를 벨 듯이 쏘아보는 눈빛까지.

“아, 아니, 처음 보는 사람들이 너무 익숙해서…….”

소녀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혼현마제의 시선을 피했다.

혼현마제는 철없는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 내미는 소녀를 향해 으르렁거리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귀천성이 뭐 하는 곳 같으냐. 너 같은 거지 계집을 데려다 밥 먹여 주고 귀한 옷감으로 몸을 휘감아 주는 곳? 정신 차려라! 귀천성은 하늘을 바꾸고 세상을 뒤집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싸워 왔다. 너는 운이 좋아 그런 곳에 발을 들일 기회를 얻은 것이고. 아니면…… 너도 저들처럼 대가를 치를 테냐?”

“아니오!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때.

누군가 잔뜩 얼어붙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혼현의 말대로만 해라. 그러면 네가 잘못할 일은 없을 테니까.”

큰 키와 긴 팔다리, 한쪽 얼굴을 긴 머리카락으로 가린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였다.

“검마.”

“파군의 병력 이동이 지체되는 바람에 조금 늦었다.”

검마 백천흠.

역천마제를 지키는 귀천검의 소유자로서, 수십 년 전의 전쟁에서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로 옥허신검의 좌수를 베어 낸 무림삼대 검주 중 일 인. 역천마제가 ‘재능 하나만을 두고 말하자면 자신을 뛰어넘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괴물이었다.

옥허신검의 좌수를 베어 내며 얻은 부상으로 그 또한 오랫동안 좌활백설옥의 신세를 져야만 했지만, 이제 겨우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

혼현마제는 신체가 완성되고 세월에 무르익은 검마의 무위가 짐작이 되지 않았다.

“파군의 병력 배치는 완성되었는가?”

그곳의 역천진 또한 혼현마제가 직접 총괄했다.

남은 것이 있다면 오직 역천대법을 실행하는 데에 필요한 ‘제물’이었다.

“혈마제가 힘을 찾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거다. 이곳은?”

“보다시피 차질 없이 진행 중이다.”

혼현마제가 거대한 바위가 굴러가는 현장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검마가 조용히 있던 소녀를 보았다.

“네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다시 팔현성을 완성할 수 있겠지. 너는 새 하늘의 가장 위대한 여덟 별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검마가 말하는 위대한 별 따위 소녀에게 와닿지 않았다.

다만 그만큼 중요한 자리라면 지금보다 더한 부귀영화가 있겠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저 바닥에 깔린 흙은 죽은 자들의 피와 원한이 깃든 독이다. 너는 만인의 독과 만인의 피를 받아들이는 만인의 악기(惡器)가 될 것이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소녀가 결의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소녀는 악기가 되든, 쓰레기통이 되든 상관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시궁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

* * *

장기군은 파군과 함께 신제국과 한제국의 경계에 있는 곳 중에서도 독특한 곳이었다.

땅은 한제국의 소속이었지만 물자의 유통 면에서 신제국과 거래가 많은 곳으로, 저자에서 먼 관문을 다니는 한제국 군사들과 신제국 상인들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전쟁 중인 제국들 사이의 접경지라 언제 불타 없어질지 모르는 동시에 상인들의 활동으로 몇몇 마을이 매우 번성한, 부나방처럼 화려하고 위험한 곳이었던 것이다.

“북회군 소속 군사들이 있지만, 마을의 치안은 대부분 상인회에서 고용한 자경단이 암묵적으로 전담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그 상인회가 정의맹에 우호적이고요.”

“상인회에서 사람을 보내 준다고?”

“예. 마을에 있는 현학문 소속 학자와 만나야 하는데, 그곳까지 안내해 준다고 합니다.”

남궁진혜의 보고에 적호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학문은 십이좌회에 소속된 곳 중 월하회와 함께 이름이 알려진 곳으로, 정의맹에서 장안에 남겨진 역천대법의 흔적을 연구하는 데에 도움을 요청한 바 있었다.

‘현학문?’

진화는 두 번째로 그 이름을 들었지만 처음에는 그저 예사로 듣고 흘려 넘겼다.

하지만 마침 황도를 다녀와서 그런가.

하남 조씩 가문의 장원과 같은 이름에 귀가 솔깃했다.

‘우연이겠지.’

진화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남 조씨에게 내려진 현학(賢學)장원이라는 이름은 외조부가 황제의 태사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외조부와 외숙인 사례교위는 무림과 어떤 인연도 없어 보였고, 무림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었다.

귀천성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중원을 구한 십이좌회라니, 전혀 맞지 않았다.

“현학문의 학자는 환마제의 역천대법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것이 있는 겁니까?”

“중원 무림의 모든 것을 통달했다는 곳이다. 게다가 현학문 또한 귀천성과 오래도록 싸워 왔으니, 역천대법의 모든 것이라면 몰라도 진법 하나의 파훼법도 못 알아낼 곳이 아니지.”

진화의 물음에 적호단주 팽치가 단언했다.

적호단주가 명성에 따라 누군가를 덮어 놓고 신뢰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진화와 남궁진혜는 물론 적호단 조장들은 그의 판단을 믿었다.

“그것보다 남궁진화.”

“예.”

“장기군에서 민란 토벌군이 온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황자들이랑 엮이면…….”

적호단주가 진화를 향해 살벌하게 눈을 떴다.

“구석에 데려가서 조자리를 내 버려, 전적으로 네 책임인 걸로.”

적호단주가 시작도 전에 황자들에게 반감을 보였다.

황태자에게 방해를 받았던 것과 그가 했던 수많은 꼴 보기 싫은 행패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적호단주의 말에 진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진화 대신 남궁진혜가 크게 반발했다.

“아니, 그게 왜 우리 진화 책임이에요? 책임을 져도 단주님이 져야지!”

“황자들을 패면, 난 반드시 죽겠지만 쟤는 그래도 살 가능성이 있잖아!”

“쯧쯧. 단주님이 황궁에 대해 뭘 모르시나 본데, 황족들은 원래 대신 때리는 놈이랑 대신 맞은 놈이 결판내면 끝이라고요.”

남궁진혜가 손가락을 흔들며 적호단주를 가르치듯 말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진화를 대신해서 우리가 황자들 밑에 놈들을 족치는 거면 문제가 없다는 거죠.”

“그으래? 그런 것도 있어?”

남궁진혜의 해석에 적호단주가 반색하며 물었다.

당연히, 그런 것은 없었다.

조위례나 동 태감이 들었다면 기함을 하고도 남을 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은 똑같이 황궁 법도에 어두운 진화뿐이었다.

‘누가 때리든 상관없나?’

진화는 남궁진혜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말릴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쿵짝이 맞아서 황자들의 수하들을 어떻게 팰지 떠드는 적호단주와 남궁진혜를 두고, 적호단 조장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황족이고 나발이고, 토벌대 군인을 때리면 국법에 어긋나지 않나?”

“단주가 주먹 들면, 일 조, 이 조가 팔을 잡고 삼 조, 사 조가 다리를 잡는다.”

“나머지는?”

“부단주 막아야지.”

누군가의 옳은 소리에 적호단 조장들이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배가 포구에 닿고.

“어서 오십시오.”

장기군에서도 현학문 학자가 있을 곳까지 안내를 해 주기로 한 상인이 적호단을 마중 나왔다.

“적호단주 팽치입니다.”

“장기군 상인회 소속 이편달이라 합니다.”

“정의맹에서 현학문 학자에게 받은 전서에 따르면, 아행장이라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적호단주가 적호단이 가야 할 목적지를 알렸다.

그러자 상인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아행장이라면…… 고지마을의 도박장인데요?”

“도박장?”

상인의 말을 들은 적호단원들이 놀란 눈을 떴다.

황자들과 엮일지도 모르는데 도와주기로 한 학자는 도박장이라니.

“어쩐지 쎄-하더라니. 임무 시작도 전에 다채롭게 무지개-떡 같은 느낌이군.”

적호단주가 욕지거리를 뱉듯 말했다.

아행장(餓行場). 

객잔 이름이 못 먹어도 간다라니, 이상한 이름이다 싶긴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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