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 화(火) : 시궁창의 사람들(3)
장기군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인 고지마을.
고지마을은 사방에 산적들이 날뛰는 중에 상인회가 관리하는 안전한 길목에 있는 곳으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이동할 때 묵어 가는 중간 기착지이자 인근 마을 사람들을 위한 큰 장이 서는 주요 마을이었다.
“이제 좀 사람 사는 마을 같군.”
사황자 한유영이 주변을 돌아보며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앞서 군을 이끌고 있는 북회군 사마 원자기와 삼황자 한유창은 사황자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긴 여정 내내 그러했다.
그들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사황자의 어떤 말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조금 뒤에 있던 북회군 교위 원자균이 민망한 표정으로 사황자의 말에 대꾸했다.
“먼 길 고생하셨습니다. 황자님, 황자님께서 다니시기에 산길이 좀 험했지요? 오늘은 푹 쉬시지요.”
황태자가 민란 토벌에 좌장군인 표서량을 대동한 것과 달리, 삼황자와 사황자의 민란 토벌에는 북회군 사마 원자기와 교위 원자균만이 동행했다.
황제는 이번 장기군 민란의 진압을 삼황자와 사황자에게 맡기면서 북회군이 황자들을 수행하도록 한 것이라, 북회대장군 원수경은 본인이 직접 움직이지 않고 군을 나누어 원자기와 원자균에게 각각 삼황자와 사황자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원자기와 원자균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북회대장군 원수경의 장자와 삼남으로. 형제 모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북회군에서 종군 중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대장군의 아들들이 공평하게 황자들을 수행하는 듯했다.
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대사마 허임은 대장군 원수경이 힘을 합하면서 조카인 삼황자에게 장남을 보낸 대신 삼남을 사황자에게 보내 성의를 표시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북회군의 사정을 아는 이라면 인선의 시작부터 얼마나 불공평한지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사마인 원자기는 북회군의 모든 운용을 이끄는 자리였고, 교위인 원자균은 북회군의 기병들만을 이끄는 장수일 뿐이었다.
토벌에 동원된 북회군의 지휘권을 두 황자들에게 공평하게 나눠 준 듯하지만, 북회군 병사들이 누구의 명을 우선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황자는 그조차도 관심 밖인 듯했다.
“원 교위는 그게 무슨 말이오? 이제 좀 바깥나들이를 온 기분이 나는구먼! 이곳이 유명한 상인들의 교역지라, 별의별 것이 다 있다지?”
사황자가 사방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눈길이 노골적으로 닿는 곳 면면이 홍등이 걸린 곳이거나 화려한 외관의 주루라, 그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빤히 보였다.
그에 원자균이 곤란한 얼굴로 사황자를 말렸다.
“사흘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주변 조사에 들어간 후 곧바로 민란 토벌에 나설 것입니다. 그 전까지 체력을 조금 아껴 놓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으음? 허! 황태자도 했던 민란 토벌이오. 우리끼리 솔직한 말로, 역도들이라 하나 무지렁이 백성들을 상대로 북회군이 나선 것만으로 가혹하지 않나? 복잡하게 굴 것 없소. 그저 딱 하룻밤, 바깥세상에 나온 김에 구경은 좀 해 볼 참이니.”
사황자가 원자균에게 손을 저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사방을 향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불태웠다.
열정적인 사황자의 모습에 원자균도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정 하룻밤이시라면.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호위들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원자균의 승낙에 사황자가 단호하게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
“넷! 호위는 넷만으로 족하오.”
“하오나, 저하.”
“으으음! 그 이상은 너무 걸리적거려. 그래서야 무슨 구경이나 제대로 하겠소?”
사황자의 고집에 원자균은 이번에도 지고 말았다.
삼황자와 사황자, 북회군이 고지마을 저자에 들어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원씨 형제들이야 원체 강골에 무골이라는 원씨 가문의 피를 이어받아 팔 척 장신에 우람한 체격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들과 혈연관계임을 증명하듯 삼황자 또한 제법 건장한 체격이었다.
게다가 붉은색 갑주를 입고 커다란 말에 올라 선두에서 북회군을 이끄는 모습은, 누가 봐도 황자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위풍당당했다.
허미인을 닮아 체격이 왜소한 사황자는 그들에게 가려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놈은 진짜 나갔단 말이오?”
“예, 저하.”
“허!”
삼황자가 코웃음을 쳤다.
“정말 나갔다라? 흥, 나가서 진탕 술을 먹고 놀아 보라지. 그 여우 같은 놈이 갑자기 방탕하고 철없는 황자 흉내를 내는지 속이야 뻔하니까.”
삼황자의 말에 원자균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가문의 삼남으로서 원자균은 사황자의 행동에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그때, 조용히 정찰대의 보고를 보고 있던 원자기가 원자균에게 말했다.
“자균이 네가 계속 사황자의 행동에 맞춰 주도록 해. 여전히 대사마와 손을 잡고자 하는 지방 호족들이 많으니, 주색을 핑계로 그들을 만나러 다닐 가능성이 크다. 호위로 붙인 병사들에게 사황자가 누굴 만나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할 수 있다면 대화 내용도 알아 오도록 해. 네가 사황자의 곁에 직접 붙는 게 좋겠지만, 아직 사황자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지 못했으니까.”
딱딱하고 냉철한 말투.
원자기의 눈빛에는 은근히 원자균에 대한 질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황자가 당연한 듯 원자균을 배제하고 호위도 단 넷으로 단정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사흘 동안 친분을 쌓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원자균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저하께서는 사황자가 헛짓거리를 하는 동안 진짜 군문에 대해 익히셔야 합니다. 보고서를 읽고 정보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알겠습니다, 형님.”
원자기의 말처럼 삼황자는 사황자의 사정 따위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교활하게 수작 부리기 좋아하는 사황자나 외숙부에게 휘둘리는 샌님 같은 황태자와 달리, 삼황자는 자신이야말로 부황과 같은 용맹한 군주가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 형님의 말대로 지금 편을 늘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부황의 인정이지! 비록 이번엔 자기 형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나중에는 내 스스로 북회군을 이끌어 부황에게 인정받고 말겠다!’
삼황자가 눈을 빛내며 원자기의 앞에 앉았다.
그때, 밖에서 급하게 수하가 들어왔다.
원자균은 삼황자와 원자기의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물러나, 귓속말로 수하의 보고를 들었다.
“……뭐? 그게 정말이야?”
원자균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자 원자기와 삼황자가 보고서를 살피다 말고 원자균을 보았다.
“무슨 일이냐?”
“그게, 사황자가 주루가 아니라 도박장에 들었다고 합니다.”
“뭐? 도박장?”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보고에 삼황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 * *
아행장.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누구도 막지 않지만,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나가는 사람은 없다는 고지마을 최대의 도박장이었다.
장기와 바둑, 마방진부터 마작에 투전, 투계, 투구까지.
흔하고 건전한 놀이부터 노예를 데려와 싸움판에 밀어 넣는 일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놀이 중 야행장에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도박판에 세상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게 하는 곳이었다.
“별천지로군. 저 돈을 다 가져가는 건가?”
속세를 등진 스님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돈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현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남궁교명이 한숨을 쉬었다.
“도박해서 딴 돈으로 먹을 걸 사는 것보다, 도박할 돈으로 만두를 사 먹는 게 빠를 거다.”
“아.”
남궁교명의 말에 현오가 단번에 설득당했다.
“확실히, 저걸 따는 것보다 훔쳐서 나가는 게 더 가능성이 크겠군.”
남궁구는 백 칸이 넘게 그려진 마방진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저걸 채울 능력이 있다면 다른 일로 돈을 버는 낫지 않나?’
진화도 그렇지만 모두가 질린 눈빛으로 백 칸이 넘는 마방진을 보았다.
그때, 한 사내가 나왔다.
“믿는다! 명진!”
“다 풀어야 한다!”
이제 서른쯤 되었을까.
쪽빛 문사의를 입는 작고 왜소한 남자는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들으며 의기양양 수염을 쓰다듬었다.
염소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뭣할 정도로 빈약한 수염이라, 그 모습을 보며 남궁구와 팽가 형제, 관서겸 등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사내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그들은 입꼬리를 말다 말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척. 척. 척. 척.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에 마방진 열 칸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이후로도 사내는 사람들이 숫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다음 칸들을 채웠다.
“우아아아-!”
“아아! 안 돼-!”
누군가는 환호를, 누군가는 절망에 찬 비명을 질렀다.
“미친……!”
“진짜 신이야, 뭐야? 답을 알고 나왔나?”
“백 개는 외우지도 못하겠다!”
“와아! 역시 마방진의 신, 명진 학사야!”
구경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남궁구처럼 그저 과격한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는 사이, 사내는 어느새 백 개의 칸을 다 채우고 당연한 듯 돈통에서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적호단원들을 포함한 도박장의 모두가 그 광경을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진화의 귀엔 돈을 쓸어 담는 소리보다 먼저 들린 소리가 있었다.
“누가 방금, 명진 ‘학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놓고 학사라는데, 맞겠지?”
남궁진혜는 이렇게 쉽게 만날 거라 생각도 못 한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설마 환마제가 지척에 있는 상황에 비밀스러운 접선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대놓고 사방팔방 학사라고 떠벌리다니.
“미친……!”
적호단주 팽치가 낮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설마 하고 물었던 진화의 눈이 커졌다.
“끌고 와.”
적호단주의 턱짓에 적호단원들이 한숨을 쉬며 움직였다.
잠시 후.
“아아, 저것만! 진짜 저것만 챙기고 손 털고 나온다니까!”
적호단원들의 손에 달랑 들린 채 사내, 아니 명진 학사가 적호단주의 앞에 끌려왔다.
“댁이 적호단주요? 무슨 성질이 그렇게 급한지. 저 돈만 다 챙기고 일어서면 되는데, 그걸 못 기다려선……!”
명진 학사는 두고 온 돈이 아까운지 적호단주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명진 학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두툼한 손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입이 막힌 건 물론 눈까지 가려진 명진 학사가 고개를 흔들려는 순간.
그의 귓가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손이 아니라 네 인생을 털어 줄까?”
“헙!”
적호단주 팽치의 말에 명진 학사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이후 다리가 풀린 명진 학사는 축 늘어진 빨랫감처럼 적호단원들에게 얌전하게 제 몸을 맡겼다.
그렇게 적호단원들이 용케 얻어걸린 명진 학사를 데리고 아행장을 떠나려 할 때였다.
“형님! 형님!”
누군가 적호단원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동생이 있는 사람들은 거의 돌아보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 돌아섰다.
그때.
“진화 형님-!”
정확하게 진화를 부르는 소리에, 모두가 돌아보았다.
그곳에 웬 청년이 열렬하게 진화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 나들이 나온 화화공자 같은 화려하고 값비싸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어쩐지 얄밉게 생긴 얼굴이 눈에 익었다.
“아는 놈이냐?”
“아니오.”
적호단주의 물음에 진화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돌아서려는 진화와 적호단의 낌새를 알아챈 걸까.
청년이 더 큰 소리로 진화를 불렀다.
“진화 형님-! 저 한가 넷째입니다! 저 좀 살려 주세요!”
청년의 말에 적호단주가 다시 진화에게 물었다.
“한가 넷째라는데, 진짜 몰라?”
“제국의 황실이 한씨죠.”
마지못해 하는 진화의 대답에 적호단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럼 황자 놈이잖아!”
적호단주의 말에 진화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사이.
적호단주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진화를 노려보았다.
일 조 조장 서장원을 비롯한 적호단 일 조가 눈치 빠르게 사황자를 데리러 갔다.
적호단 일 조와 함께 진화가 있는 곳을 온 사황자는 그 뒤에도 주렁주렁 사람들을 달고 왔다.
큰 덩치의 사내들은 척 보기에도 도박장에서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문제를 없애거나 해결하는 왈패들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뒤로 왈패들에게 실컷 두드려 맞은 것으로 보이는 사내 넷은, 사황자를 원망스럽게 보면서도 그의 뒤를 찾아 서는 모습이 딱 사황자의 호위무사로 보였다.
사황자와 호위무사, 그리고 사황자를 붙잡고 호위무사들을 두드려 팬 왈패들.
보기만 해도 골치 아픈 존재들에 적호단주의 얼굴에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면? 댁이 해결하게?”
적호단주의 짜증스러운 물음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왈패 하나가 시비조로 물었다.
하지만 시비도 사람을 봐 가면서 걸어야 하는 법.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쳐 오른 상태의 적호단주 팽치는 결코 시비를 걸어도 될 법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두둑.
“끄억……!”
산 사람의 목에서 날 수 있는 소리가 맞을까.
적호단주 팽치의 손에 목이 붙잡힌 왈패들의 우두머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뜨고 주마등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한 번만 더 묻는다. 저놈, 아니 저분과 무슨 일이지?”
“컥! 그, 그게…… 저놈이 속임수를 쓰다가 걸려서…….”
“허!”
우두머리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호단주가 기가 막히다는 듯 사황자를 노려보았다.
사황자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억울하오. 내가 물어 줄 판은 그 판뿐인데, 저 사람들이 이제까지 모든 판을 물어내라는 것이 아니오? 세상천지에 그런 법이 어디 있겠소?”
결국 속임수를 쓰다 걸린 것은 사실이라는 말이었다.
아니 그보다 세상천지에 불법 도박판에서 법을 찾는 것이 더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적호단주 팽치가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진화는 무심한 얼굴로 사황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검고 깊은 눈이 사황자를 향해 날카롭게 빛났다.
* * *
한편.
중원 어느 곳보다 화려한 밤의 황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까맣게 가린 여인이 그림자를 따라 점점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달그락. 달그락.
뭔가가 부딪히는 기묘한 소리만 들리는 깜깜한 어둠 속.
여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희미한 불빛만 새어 나오는 낡은 나무 문 앞이었다.
드드드드-드.
여인의 소매에서 나온 무언가가 낡은 나무 문을 긁어내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스-윽 하고 빛나는 무언가가 여인의 목에 닿았다.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검은 천의 갈라진 부분 안으로 살짝 드러난 붉은 입술이 기분 좋게 호선을 그렸다.
“성에서 왔다. 혈수문주를 만나야겠다.”
여인의 말에 끼이이익- 낡은 나무 문이 힘겹게 공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