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볼 진(診) 재앙 화(禍) : 운명의 완수(1)
“쥐새끼 같은 놈들!”
텅 빈 마을을 보며 삼황자가 이를 갈았다.
반면 실질적으로 북회군을 이끌고 있는 사마 원자기는 태연했다.
애초에 이곳에서 오래 지낸 사람이라면 북회군이 고지마을까지 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기가 어떤 조치도 하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걱정 마십시오. 마을 사람들이 한 번에 움직였다면 병사들이 금방 추적할 수 있을 겁니다.”
주변이 전부 험하디험한 산길.
젊은 사내들도 힘든 길을 노약자나 여인, 아이 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고작해야 산속으로 숨어드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잠시 후.
마을 밖으로 움직인 흔적을 쫓던 병사들이 돌아왔다.
“찾았습니다.”
병사의 보고를 들은 원자기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기다렸던 사냥감을 발견한 듯 잔인한 미소였다.
“말에서 내리셔야 할 듯합니다.”
“괜찮다.”
삼황자의 입가에도 원자기와 비슷한 미소가 걸렸다.
어두운 밤.
길도 없는 숲으로 숨어든 사냥감을 쫓기 위해 말에서 내리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제 이런 수고가 황궁으로 돌아가 더 큰 무용담이 될 것이었다.
앞서 말에서 내린 원자기와 삼황자의 뒤로 원자균과 사황자도 말에서 내렸다.
사황자의 표정이 편치 않았다.
원자기나 삼황자로부터 어떤 안내도 듣지 못했지만 이제 그런 건 익숙해졌다.
다만 사황자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숨어든 마을 사람들 중에 노약자와 여인, 아이 들이 끼어 있다는 것 자체였다.
‘젠장. 더러운 꼴을 보겠군.’
사황자가 잔뜩 신이 난 얼굴의 삼황자를 보며 쓴 물을 삼켰다.
휙! 휙!
절벽의 끝.
몰이사냥을 하듯 백성들을 절벽으로 몬 북회군이 창을 꺼내 백성들에게 겨누었다.
“이제 항복하고 오라를 받으라!”
삼황자가 앞에 나서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외쳤다.
북회군의 지휘권은 사황자와 나눠 가졌으나, 누가 군을 움직이는지 백성들이 아닌 병사들에게 각인시키는 과정이었다.
삼황자와 북회군에게 눈앞에서 겁먹은 토끼들처럼 서로 들러붙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들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복하라!”
북회군 사마 원자기가 나서서 삼황자의 말을 반복했다.
전투 없이 사로잡는 건 병사들의 흥분을 끌어 올릴 수 없어서 좋지 않았으나, 삼황자의 위엄으로 백성들 스스로 항복했다 하면 황도에 보고하기는 괜찮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절벽 끝까지 쫓긴 백성들은 떨고만 있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끼리 옹기종기 머리를 붙이고 삼황자나 북회군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흡사 마지막을 각오한 것처럼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허어! 저것들이……!”
삼황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백성들을 보며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사마 원자기는 생각이 달랐다.
“이왕 이리된 것 군사들 사기나 올리시지요.”
“음?”
“묶어서 산을 끌고 내려가 봐야 군사들의 힘만 뺄 뿐입니다. 죽여서 일벌백계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호오, 그렇군.”
원자기가 삼황자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고, 삼황자 또한 원자기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역도들을 일벌백계하여 황명의 지엄함을 세울 것이다!”
삼황자가 마지막 기회라는 듯 외쳤다.
하지만 백성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저들끼리 더 뭉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삼황자가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내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거늘, 그 자비마저 거부하고 황명을 비웃다니! 병사들은 들으라! 저 역도의 무리를 모두 죽이라-!”
“추-웅!”
삼황자의 명에 그의 뒤에 있던 병사들이 움직였다.
창을 겨누고 점점 접근하던 병사들은 곧 과감하게 백성들을 위협적으로 몰았다.
남자들이 안에 여자와 아이 들을 두고 그들을 감싸 안았다.
그들은 어떤 저항도 할 생각이 없는 듯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다.
“황자님, 저희도…….”
이러다가 삼황자에게 모든 공과를 다 빼앗길 수 있는 상황이라, 원자균이 도의상 사황자에게도 참여를 권했다.
“아니오. 어차피 저항도 못 하는 백성을 죽이는 일이오. 굳이 우리 손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듯하군.”
사황자가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자균이 뭔가 생각이 많은 눈으로 사황자를 보았다.
그때, 삼황자의 명에 따라 백성들을 포위했던 사마 원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이 창이 백성들에게 꽂혀 들어갔다.
“타하하핫-!”
푸-욱! 푹!
“아악!”
“아—악!”
밖에 있는 남자들의 몸을 꿰뚫고 창이 들어가고,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푸욱!
박혀 있는 창을 뽑아내니 붉은 피가 쏟아지듯 흘러나오고, 창날 끝에는 허연 내장 조각들이 딸려 나오기까지 했다.
가족들을 감싸 안고 버티던 이들이 가장 먼저 쓰러졌다.
하지만 병사들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다음 열!”
“타아아앗!”
푹! 푸-욱!
“아악!”
“우아아악!”
“천……신……이시……여!”
노인들이 죽었다.
그리고 창끝은 어김없이 더 안쪽에 있던 여자들과 아이들을 향했다.
“뭐 하느냐! 역적이다! 역적의 자식들일 뿐이다-!”
사마 원자기가 병사들을 독려하고, 각오를 다잡은 병사들의 창이 안으로 뻗어졌다.
그와 동시에.
“멈춰라-!”
파아아아--!
타-앙! 쿵. 쿵.
여자와 아이 들을 향해 뻗어지던 창대가 단번에 잘려 나간 것이다.
“멈추시오!”
“웬 놈이냐! 아니, 네놈들은?”
“정의맹 소속 적호단주 팽치요. 잠시 손 속을 멈추시오!”
맨손으로 병사들의 창대를 매끄럽게 날려 버린 사람은 적호단주 팽치였다.
적호단주는 굳은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사마 원자기에게 통보하듯 소리쳤다.
* * *
“가, 감히! 무림의 천한 무부 따위가 지엄한 황명의 수행을 막은 것인가!”
흥분한 삼황자가 화가 나서 나섰다.
하지만 적호단주에게도 믿을 구석은 있었다.
“지엄한 황명은 우리 쪽도 수행 중입니다.”
적호단주 팽치가 온몸으로 짜증과 귀찮음을 표출하며 앞으로 나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거참, 많이도 죽였다.”
“뭐라!”
“보셔……요. 우리도 뭐 좋아서 온 건 아니오……요. 우리가 이황자 저하와 함께 적들의 본거지를 치고 있는데, 놈들이 사특한 술수를 부리는 데에 필요했던 피가 줄줄 흘러내리더란 말이지. 그 범인을 추적해서 이곳에 오니, 이 사달이 나고 있네……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삼황자는 적호단주 팽치가 어색하게 붙이는 존대만큼이나 그가 말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감히 천한 무림의 무부들이 군을 막아섰으니, 각오는 한 것이겠지?”
북회군 사마 원자기가 살기를 풀풀 날리며 물었다.
그러나 그런 위협에 적호단주 팽치가 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젠장! 우리도 임무 수행 중이었다니까! 이 난리를 만들어 낸 적의 수뇌부가 사특한 대법을 실행 중인데, 댁들이 거기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귀 못 알아들어?”
적호단주 팽치가 원자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진짜 살기를 뿜어 대며 화를 토했다.
정의맹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가 뿜어내는 살기에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병사들조차 겁을 먹고 물러섰다.
그때, 적호단주와 함께 올라왔던 일 조 조장 서장원이 소리쳤다.
“찾았습니다.”
“부숴!”
적호단주 팽치가 보지도 않고 말했다.
피가 모여서 흐르는 입구를 발견했다면 그걸 봐서 무엇하겠나. 한시라도 빨리 부수는 것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일 조 조장이 곤란한 목소리로 적호단주를 불렀다.
“단주님, 이거 우리는 안 되겠는데요.”
“뭐야?”
적호단주가 다가오자 단단히 뭉쳤던 백성들이 흩어지고, 그 사이로 일 조 조장이 가리키고 있는 곳이 보였다.
절벽 돌 위에서 흐르는 피들이 일 조 조장이 가리키고 있는 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씨발, 물러서라. 내가 부순다!”
“예.”
적호단주의 말에 적호단원들이 물러섰다.
그리고 그들 뒤로, 여전히 절벽 위에서 버티고 선 군대가 보였다.
“젠장. ……거기! 여기를 부술 거니까 뒤로 물러서시오!”
짧게 욕지거리를 뱉은 적호단주가 삼황자와 원자기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무림인의 통보를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었다.
“닥쳐라! 감히 본 황자의 일을 방해하고도 살아남길 바라는가!”
“방해는 그쪽이 먼저라잖아! 요! 진짜 뒈지기 전에 물러서라고! 요!”
“뭐, 뭐라! 감히 황족을 모독하다니! 사마, 저자들을 당장 잡아들이라!”
삼황자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씨발, 황족은 여기도 있다니까! 저 안에서 진짜 황족이 죽기 전에 협조하라고!”
적호단주 팽치도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팽팽하게 맞서서 서로를 노려보는 상황.
삼황자의 명에 원자기가 병사들로 하여금 적호단을 향해 창을 겨누게 하고, 적호단원들 또한 적호단주의 명령을 기다리며 병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누구도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상황을 보며, 사황자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진짜 마지막 도박이다!’
사황자가 굳은 얼굴로 옆에 있던 원자균을 보았다.
“병사들을 뒤로 물리지.”
“예?”
원자균이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사황자가 더욱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병사들을 뒤로 물려라.”
“하지만 저하!”
“저자의 말을 못 들었나? 이 일로 행여 이황자 저하가 위험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의 분노는 어찌 감당할 생각인가?”
“그런……!”
사황자의 지적에 원자균이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사황자의 판단이 합리적이라 생각한 원자균은 곧 굳은 얼굴로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원자균의 외침에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사황자 저하의 명이시다! 모두 물러나라!”
원자균의 단호한 명에 사황자를 따라야 하는 북회군들이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전력의 반을 잃게 된 삼황자가 분노한 얼굴로 사황자를 노려보았다.
“유영,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는 유창 형님이야말로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이황자 형님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한 건가?”
“그, 그건…… 저들의 말을 어찌 믿고!”
“이황자 형님이 정의맹 적호단과 함께 움직이는 건 알고 있었잖아. 일전에 얼굴도 보았고. 그런데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그러다 정말 이황자 형님이 위험에 빠지면…… 감당할 수 있겠어?”
“뭐?”
“하남 조씨 일가와 남궁세가, 황후마마는 물론이고 황제 폐하의 분노까지. 형님을 찾은 지 얼마 안 돼서 유창 형님 때문에 그분을 잃는다면, 그 분노를 다 감당할 자신이 있냐고 묻는 거잖아.”
“너 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라, 삼황자는 물론 옆에 있던 원자기까지 심각한 얼굴로 굳었다.
사황자의 곁에서 원자균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물러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황자의 안전이 달려 있다면, 자존심을 부리실 때가 아닙니다.”
원자기의 말에 삼황자가 원자기를 노려보았다.
무례하고 건방진 원자기의 말에도 화가 치솟았지만, 그의 말처럼 지금은 화를 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병사들을 물리라.”
삼황자가 짓씹듯이 명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북회군이 빠르게 절벽에서 물러섰다.
적호대원들이 남은 백성들을 밀어붙여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서른 보 정도 물러서자, 적호단주 팽치가 입술을 삐쭉이며 주먹을 들었다.
“타아아앗---!”
적호단주의 팔에 불이 붙은 듯 붉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걸 지켜보던 삼황자와 사황자, 원씨 형제 그리고 병사들이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적호단주 팽치가 하북팽가의 강권 중에 강권이라는 혼원벽력권을 절벽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콰과광—콰-앙!
쩌어어어----콰---앙!
수십 명의 사람들이 딛고 있던 절벽 바위가 부서지고 쪼개지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허!”
놀란 사황자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콰과광---쾅-!
챙---!
동굴 안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진화와 검마의 눈길이 동시에 흔들리는 천장을 향했다.
혼현마제 또한 심각한 얼굴로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동굴 입구로 향하는 시선.
‘일이 잘못되었구나. 시간이 없는데…….’
천문이 주어지는 때는 점점 다가오는데, 역천진으로 향하던 피가 말라붙었다.
혼현마제는 초조한 듯 그것을 보다가 결국 결심을 굳혔다.
쉐에에에엑----!
혼현마제의 손이 움직이고, 동굴 안에 세찬 바람 소리가 시작되었다.
“현홍사다! 막아라-!”
타앙-!
휘이익---! 휙휙! 휘-익!
공기를 찢는 듯 불길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제단을 둘러싼 동굴의 사방에 설치해 둔 혼현마제의 주살진(蛛殺陳)이 먹이를 향해 움직였다.
휘이익-!
채—앵! 챙! 챙!
교성흑오대와 환마제를 따르는 백성들을 상대하고 있던 적호단원들도 급하게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앞으로 검을 들었다.
하지만 바람은 앞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모여!”
남궁진혜의 외침에 적호단이 서로 등을 대고 모여들었다.
죽음의 바람은 이미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주살진의 날카로운 실에 걸려 사지가 잘리는 것은 적호단이 아니었다.
아무런 방비 없이 있던 교성흑오대와 백성들이 바닥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작은 시내처럼 붉은 피가 흘러 땅을 적셔 들어갔다.
그때.
파지지지지짓-----콰광, 쾅!
푸른 번개가 사방으로 뻗어 갔다.
공중에서 수십 번씩 섬광이 번쩍이고, 이내 희뿌연 연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네 수작은 이제 뻔해.”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게 탄 현홍사의 흔적이 떨어지는 속에서, 진화가 매서운 얼굴로 혼현마제와 그 앞을 막은 검마제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