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볼 진(診) 재앙 화(禍) : 운명의 완수(4)
콰과광----광!
그림 같은 협곡을 이루던 절벽 하나가 무너졌다.
혼현마제와 함께 동굴을 빠져나오며 검마제가 통로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위태롭던 절벽이 무너지면서, 그들을 쫓아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허, 허어!”
“…….”
검마제는 황당하고 허탈한 듯한 웃음을 흘리는 혼현마제를 보았다.
그것을 끝으로 금세 냉정을 찾는 모습이 평소의 혼현마제와 같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마지막에 그 소림 중, 역천마제 님의 제물이 아니었나?”
검마제의 물음에 혼현마제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곧 기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아, 그자라면 괜찮을 걸세. 단지 쫓아오지 못하도록 출혈만 일으킨 것이니.”
“그런가…….”
혼현마제의 대답에 검마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 뒤로는 대화가 없었다.
더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환마제의 부활이라는 임무에 실패했으니, 그에 대한 보고를 하러 돌아가는 일만 남았을 뿐인 것을.
“내 실책일세. 정의맹의 후기지수들을 너무 얕본 모양이야.”
“남궁진화라 했던가? 의천검주의 냄새가 나더군.”
“그자의 제자라는 말이 있었지. 그렇게 빨리 클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광마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괴물을 만들었어! 후우, 더 말해 뭐하겠나. 돌아가지.”
“…….”
혼현마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마제는 냉정하게 스스로를 자책하는 혼현마제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 * *
임무를 끝낸 적호단이 객잔으로 돌아왔다.
가장 심하게 다쳤다고 할 수 있는 현오의 방에는 명진학사가 그를 살피는 중이었다.
적호단주와 남궁진혜, 진화 그리고 현오의 보호자라 주장하는 남궁구, 남궁교명이 초조한 얼굴로 명진학사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후.
“후우, 이거…… 이 정도면 아파서 죽었을 것 같은데요.”
명진학사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진화를 향했다.
“…….”
진화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워낙 잘려 나가기도 깔끔하게 잘리고 붙이기도 잘 붙인 터라, 후유증은 없겠습니다.”
“그렇게 아파했는데요?”
남궁구가 진화의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아까 현오는 분명 그 어떤 돼지 멱따는 소리보다 크게 울었었다.
혼현마제의 현홍사에 당했을 때보다 괴로워 보였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에이, 그건 아니죠. 잘려 나간 걸 붙인다고 이전과 똑같아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한번 손상이 되면 장기도 기능이 떨어지고 피부도 재생력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현오 스님은 위장부터 간장까지 그냥 태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혈을 깔끔하게 연결시켜 놓아서 순환까지 원활하니, 기능적으로도 회복하는 데에 문제가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거 참 다행이군요.”
명진학사의 확언에 적호단주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구와 남궁교명도 어느 정도 진화에 대한 오해를 푼 얼굴이었다.
“실혈된 부분만 보충하고, 다른 건 적호단원들과 같이 몸을 보하고 체력을 돋우는 데 좋은 약재만 쓰면 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적호단주가 수하들을 위해 기꺼이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현오도 그렇지만 이번 임무에선 유난히 부상자가 많았다.
환마제의 악몽에 당하면서 스스로 깨어나지 못했거나 심신의 기력을 잃은 이들이 꽤 많았던 것이다.
늘 전쟁터를 오가는 적호단이었다.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끔찍한 악몽이란 게 오죽하겠는가.
적호단주는 신체적으로 별다른 이상이 없는 이들에게도 며칠간 휴식을 주었다.
“빌어먹을!”
남궁진혜가 속이 상한 듯 욕지거리를 뱉었다.
적호단주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적호단은 부단주인 남궁진혜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인원을 상하게 했으니.
“네 탓이 아니다.”
적호단주가 자책하는 남궁진혜를 위로했다.
“하지만…….”
“새끼들이 몸만 키웠지 정신 상태가 약해 빠졌어! 깨고 나면 다 함께 특별 정신 수련을 하겠다!”
적호단주의 말에 남궁진혜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 있는 남궁구와 남궁교명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그건 그렇고, 피는 왜 계속 흘러 들어온 겁니까?”
남궁진혜가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적호단주가 슬쩍 진화를 보았다.
“또 그 황자 놈들 때문이었다.”
“네?”
“어째 안 얽힌다 싶더니, 유인당한 것도 모르고 실컷 양민 학살 중이시더군. 멈추라고 해도 더럽게 말도 안 듣고! 하여튼 귓구멍 막히고 자존심만 높은 새끼들이 다 그렇지!”
“아우, 망할 새끼들!”
적호단주와 남궁진혜가 시원하게 황족모독죄를 자행했다.
그래도 진화를 생각한 것인지 더 이상 분노를 이어 가진 않았다.
“일단 혈의 생산을 촉진하는 침을 놓고, 현오 스님이 깨고 나면 탕약을 올리겠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진화의 처치가 맞아떨어져 큰 위험은 없을 거라, 명진학사가 일행을 안심시켰다.
남은 것은 현오가 깨어나는 것뿐이라, 잠이 든 현오의 곁에 남궁교명만 남고 모두 밖으로 나왔다.
타—앙!
조용히 현오의 방을 나와 진화가 향한 곳은 황자들과 북회군이 묵고 있는 숙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억지로 열리자, 안에 있던 북회군이 일제히 무기를 쥐고 사방을 경계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이 이황자로 알려진 진화라는 걸 알아보기도 전에, 숨이 막힐 듯 거대한 기운이 그들을 짓눌렀다.
“황자님!”
“…….”
한쪽에서 진화를 알아보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진화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위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잔뜩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올라가는 진화를 보고도, 누구 하나 그의 걸음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진화를 따라 들어온 남궁구가 무표정한 얼굴로 북회군 전체를 바라보며 계단 아래를 지켰다.
그렇게 이 층으로 올라온 진화는 삼황자와 북회군 사마 원자기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쾅!
“이게 무슨 짓입…… 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원자기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방에 들어온 직후부터 흉흉하게 날뛰던 진화의 기운이 온전히 원자기와 삼황자를 향했기 때문이다.
심장을 멈춰 세울 듯 온몸을 죄어드는 기운에 삼황자가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진화를 향해 날을 세우려던 원자기는 창백한 얼굴로 진화와 눈을 마주했다.
“백성들에게 유인당해 정의맹 임무를 위험에 빠뜨려?”
“우, 우리는 황명에 따라 민란을…….”
“그러니까. 얼마나 병신 같으면 제국의 황자와 중앙군씩이나 되는 작자들이 고작 농사나 짓던 이들에게 농락이나 당하는 거냐!”
비수처럼 찌르는 진화의 말에 원자기와 삼황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삼황자는 꽤 분한 눈으로 진화를 보았지만, 달리 입을 열진 않았다.
지금까지 삼황자와 원자기도 적호단의 부상자들이 실려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에게 상황이 불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황자인 진화가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물론 진화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크읏!”
삼황자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까만 눈동자가 저를 향하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쯧!’
진화가 속으로 혀를 찼다.
살기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놈들 때문에 현오와 적호단이 위험에 빠졌다는 생각을 하면 속에서 화가 치솟았다.
그때, 참다못한 원자기가 겨우 입을 열었다.
“화, 황자님의 아우이십니다. 아무리 황자님이라도 아우인 삼황자님과 황제 폐하의 군대를…… 크억!”
이번에는 정말이었다.
원자기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화의 기운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커헉!”
아무 실체도 없는 기운에 목이 졸린 원자기가 숨을 컥컥대며 놀란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진화의 눈이 괴로워하는 원자기의 얼굴을 무심하게 보고 있었다.
“내 친우이자 소림의 촉망받는 제자가 죽을 뻔하였다. 적호단의 피해가 이처럼 컸던 적이 없다. 네놈들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대체, 황제 폐하의 군을 이끄는 작자들이 얼마나 멍청하면 칼 하나 들 줄 모르는 이들에게 농락을 당한단 말이냐! 부디 적호단의 치료가 무사히 끝나길 바라거라. 그들이 하나라도 깨어나지 못한다면, 내 반드시 너희들에게 대가를 받아 낼 테니!”
“커-억! 커헉! 컥! 히이이이익-!”
경고를 마친 진화가 원자기를 던지다시피 하며 기운을 풀어 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풀려난 원자기는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삼황자가 다가가 원자기를 부축했다.
삼황자는 자신을 위협하고 돌아서는 진화의 행동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고작 무림의 무인들 몇 다친 것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자신은 이 제국의 황자였다.
밀어줄 세력 하나 변변찮은 황태자와 달리, 진짜 유력한 황위 계승자!
“……실수하신 겁니다!”
삼황자가 진화를 노려보며 말했다.
공포에 벌벌 떨던 때와 달리 저를 향해 매섭게 날을 세우는 삼황자의 눈을 보던 진화가 사르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거 참 무섭겠군.”
가소롭다는 듯 태연하게 웃어 보인 진화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삼황자는 진화가 나간 문을 노려보며 한참 동안 분노에 몸을 떨었다.
* * *
삼황자의 방을 나온 진화가 계단을 내려가려던 때.
기다렸다는 듯 맞은편에서 사황자가 나타났다.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은(恩)과 원(怨)이라 할 수 있으니.
“…….”
진화는 철수를 반대하는 삼황자와 원자기에 맞서 철수를 결정하고 그들을 설득해 준 것이 사황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만약 삼황자가 끝까지 반대했다면 적호단주는 정말로 황족을 두드려 팬 대역죄인이 되었을 것이다.
짧게 한숨을 내 쉰 진화가 사황자에게 말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라.”
이전에는 제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접근했음을 알았으면서도 모른 척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사황자의 도움을 받았으니, 그 대가로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사황자가 놀란 눈을 떴다.
“아…….”
진화의 말에도 사황자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지도 않았다.
진화는 조용히 사황자의 말을 기다렸다.
“그게…….”
말을 할 듯 말 듯, 사황자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못했다.
결국 진화의 인내심이 먼저 동이 났다.
“말할 수 있을 때 와라.”
기회는 주되 인내심까지 준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툭 던지듯 여지를 남긴 진화가 계단을 내려가려 걸음을 뗐다.
그때, 사황자가 급하게 진화를 잡았다.
“그때 그 약!”
“…….”
고개를 돌린 진화와 눈이 마주치자 사황자는 다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곧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진화와 눈을 마주쳤다.
“황……궁에서 당한 그 독약. 그거 어떻게 해독한 것입니까?”
“……?”
진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게다가 그 독약이라면, 사황자의 모친인 허미인의 소행으로 추측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모친의 독약에 대한 해독제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해독제가 있다면 주십시오. 은혜는 꼭, 무엇으로든 갚겠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사황자의 눈빛이 너무 간절하여 무시할 수 없었다.
진화는 결국 솔직하게 답을 하기로 했다.
“……해독제는 없다.”
파지지직.
진화의 손에서 푸른 번개가 튀었다.
“경지를 넘은 무인은 만독불침이다.”
“아……!”
사황자가 맥이 풀린 듯 휘청거렸다.
하지만 진화가 뇌전까지 보여 주며 하는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황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실망을 넘어 절망한 듯 보였다
대체 사황자씩이나 되는 이가, 심지어 모친의 독 때문에 저런 얼굴을 하는 이유가 뭘까.
이쯤 되니 사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화는 사정을 캐묻기보다 사황자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다른 사람의 독도 해독해 줄 수 있다.”
진화의 말에 사황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가 말할 수 있을 때 말해라. 그 정도는 들어주지.”
상대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은혜를 갚는다.
그것이 진화의 방식이었다.
진화는 짧게 말을 남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사황자는 한참 동안 진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모조리 불에 타 없어지고 난 자리.
남은 것은 타다 만 앙상한 뼈대와 검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잿더미뿐이었다.
복잡한 골목에 있던 곳이라 불은 순식간에 주변으로 번지며 꽤 많은 곳을 태웠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불을 모두 제압하기까지 꼬박 이틀이 걸렸을 정도였다.
거의 작은 마을 하나가 이틀 사이에 모두 사라진 것이다.
“회주님.”
월하회주 정소팔의 곁으로 염석당주 효염이 다가왔다.
“이곳이 발화지가 확실하다지?”
“예. 목격자의 증언도 그렇고 이틀간의 바람과 불이 번진 양상이 일치합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방화를 한 것이 확실하구나.”
세상의 모든 정보를 모으는 월하회에서 오랜만에 일어난 황도의 큰 화재에 대해 조사를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월하회 회주까지 등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월하회주는 화재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 일이 방화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염석당주 효염이 의아한 얼굴로 그것에 대해 물으려던 찰나였다.
붉은 옷을 입은 염석당 당원이 급하게 월하회주와 염석당주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하오문주가 왔습니다.”
당원의 말에 염석당주의 눈이 커졌다.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사패천의 암고래가 화재 현장까지 나오다니. 확실히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월하회주가 기다렸다는 듯 하오문주를 찾았다.
“어디 계시는가? 아니, 그럴 것이 아니라 곧바로 이쪽으로 모시게.”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렇게 왔으니.”
월하회주의 말에 염석당원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부드럽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가 존재를 알려 왔다.
“문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월하회주와 하오문주가 서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역시 알고 오셨군요.”
“혈수문이 있던 곳이니까요. 하루아침에 경쟁 문파가 전멸, 아니 소멸했으니 관심을 가질밖에요.”
하오문주 채명지의 말에 월하회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 독이 확실합니까?”
“사천당문의 확언을 받아야겠지만, 거의 확실합니다.”
월하회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하오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주의 확신이라니.
월하회주가 갑갑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우리끼리 논할 사안이 아닐 듯하군요.”
월하회주가 황성이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