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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92)화 (292/425)

남궁마제

진압할 진(鎭) 꽃 화(花) : 밝히는 자, 아는 자, 숨기는 자(2)

타닥타닥타닥.

사위가 깜깜한 어둠 속으로 잔걸음이 바쁘게 지나갔다.

스스슷.

풀이 흔들리는 소리에 걸음이 멈춰 서며 사방을 경계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의 어린 내관과 궁녀 들의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촛불을 밝히고 끄는 일이라. 밤이 오자마자 불을 밝힌 어린 궁인들은 윗전들이 잠드는 시각이 되면 바쁘게 소등에 들어갔다.

잔걸음의 주인은 촛불이 타던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시간에 기다렸다는 듯 창신궁에 있는 작은 광에 다가갔다.

체구가 작은 궁녀의 그림자가 달빛에 비쳤다.

쿵. 쿵. 쿵. 쿵.

궁녀는 실제로는 밖으로 들리지도 않을 심장 소리에 손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품에 숨겨 둔 독 병을 꺼내 실수 없이 물그릇에 탔다.

드드드.

‘헉!’

숨을 집어삼켰다.

물그릇을 조용히 바람구멍 틈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 그릇 바닥이 돌바닥에 끌려서 소리가 나고 만 것이다.

궁녀는 너무 놀라서 숨을 내쉴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눈만 도르르 굴리며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

조용히,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궁녀는 그제야 겨우 참고 있던 숨을 살살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물그릇을 안으로 넣었다.

‘후우.’

손이 덜덜 떨려 왔지만 들키지 않게 심호흡을 하며 물그릇을 넣었다.

그리고 바람구멍 안쪽에서 물그릇을 가져가는 기척을 느끼며 다시 숨을 참았다.

잡혀도 죽지만 안에 있는 사람이 물을 마시지 않아도 죽을 것이다.

‘마셔! 마셔! 제발……!’

궁녀는 자신의 죄 앞에 눈을 질끈 감고 바람구멍 안을 향해 빌고 또 빌었다.

기도가 통했는지, 곧 안쪽에서 기다리던 소리가 났다.

텅!

‘……!’

그릇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밖에서 덜덜 떨면서 기다리고 있던 궁녀는 안쪽에서 독을 탄 물을 마시고 그릇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뭔가 서늘하고 뾰족한 것이 궁녀의 목 뒷덜미에 닿았다.

“헉!”

고개를 들고 눈을 돌린 궁녀는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흑의에 복면을 한 일련의 무리가 그녀의 목에 비수를 댄 채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곧장 그녀의 아혈을 짚으면서 소리를 막고, 그녀의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

거친 손가락이 뭔가를 찾는 듯 입안을 헤집고, 이어서 그녀의 온몸을 훑었다.

흑의인들이 그녀의 몸에서 독 병을 찾아내자 뒤늦게 저항하려 했지만, 말 그대로 이미 늦은 일이었다.

“끌고 간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흑의 복면인들이 궁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창신궁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광으로, 안쪽에는 당연히 창신궁의 본관이 있었다.

* * *

“물그릇이라니…….”

월하회주가 물그릇을 보며 허탈한 듯 말했다.

안쪽에서 마시고 떨어뜨린 줄 알았던 그것은, 물 한 방울까지 완전한 모습으로 월하회주의 손에 들려 있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모든 것이 의심스럽기 마련이지. 그런 중에 가장 의심을 사지 않고 건네줄 수 있으면서 독의 흡수를 높일 수 있는 것이 바로 깨끗한 물을 이용하는 방법이오.”

당문의 독의장 당황이 월하회주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함께 있던 하오문주 채명지가 코웃음을 쳤다.

“흥! 월하회에서 그동안 후궁전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의 정보를 다 넘겨줬잖아요. 열 명 중에 예닐곱 명은 물을 마시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다 나왔는데, 그쪽이 뭘 잘난 척이에요?”

“정보는 말 그대로 정보일 뿐이오. 용독을 대비하는 쪽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놓고 하나도 놓치지 않아야…….”

“어차피 우리 쪽 애들이 독을 푼 궁녀까지 탈 없이 잡아 왔으니 증인은 충분하잖아요?”

“이 물에서 독을 꺼낼 수 있어야 충분한 것이지! 그건 우리 당문 독의들만 할 수 있는 것이고!”

하오문주의 비꼼에 독의장 당황이 반발하면서, 당문독의장 당황과 하오문주 채명지가 매섭게 서로를 노려보며 맞부딪혔다.

그러자 월하회주가 곤란한 얼굴로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허허허! 두 곳 모두 중요한 쓰임이 있으니, 정사 협력을 구한 것 아니겠습니까. 한발씩 물러나시지요.”

-정신들 차리시오! 황후마마의 앞이란 말입니다!

질풍노도의 예민한 어린애들을 데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당문 독의장과 하오문주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곳이 어디인지도 잊었단 말인가.

사람 좋은 얼굴로 둘 사이를 중재하던 월하회주도 이번만큼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두 사람에게 눈빛을 쏘아 보냈다.

월하회주가 이를 악물고 보내는 경고에 정신이 번쩍 든 하오문주와 독의장 당황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앞에는 창신궁의 주인, 제국에서 가장 귀한 여성이자 제국의 황후인 조정화가 웃음을 머금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사옵니다.”

“아닐세. 무림의 사람들이 격이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네. 오히려 정과 사를 대표하는 그대들의 관계가 무척 흥미로웠네.”

황후의 말에 당황과 하오문주가 민망해하며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황후가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호호호, 정말이야. 개의치 말게.”

하오문주가 슬쩍 고개를 들어 황후를 보았다.

‘정말 많이 닮았네.’

백옥처럼 곱고 화사한 얼굴에 천제가 붓을 들고 한 획, 한 획 정성을 들여서 그린 듯 아름답고 조화로운 이목구비. 그중에서도 특히 눈을 뗄 수 없는 건, 순후하고 맑은 눈매에 흑수정같이 검고 깊은 눈동자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도 향기를 품은 꽃처럼 우아함과 품위를 잃지 않는 여인.

황후는 청아한 소리로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오문도들이 붙잡고 있는 궁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곳만 칼로 도려낸 듯 단호하고 냉정했다.

그런 황후의 모습에, 하오문주는 황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동시에 그녀와 닮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저렇게 꽃 같은 얼굴로 서늘하게 저를 협박하던.

“구 또한 내가 지키는 남궁이다.”

내가 구의 어미인데…….

서운하고 가슴이 아린 동시에 사무치도록 감사한 마음이 드는 말을 하던 사내.

하오문주의 눈이 황후에게 오래 머물자, 황후가 의아한 듯 그녀를 보았다.

하오문주는 황후가 불쾌해하기 전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이전에 그분을 뵌 적이 있는데, 너무 닮으셔서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어머, 우리 진화를 만난 적이 있는가?”

“예. 일전에 정의맹과 얽힌 일이 있었는데, 남궁세가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고 가셨지요.”

“호호호, 그 아이라면 그랬을 거야, 폐하처럼 자기 사람을 많이 아껴서.”

단지 진화의 이야기를 꺼냈을 뿐인데, 황후의 얼굴이 도화꽃처럼 화사하게 물들었다.

이렇게 보자니, 이전의 그 청아한 웃음소리조차 가짜였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황후가 진화의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리자 창신궁 전체에 훈풍이 도는 듯했다.

실제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궁인들조차 진화의 이야기에 미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오문주는 궁에 머문 시간이 짧다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가 궁인들에게 마음을 얻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남궁에 하남 조씨, 게다가 황궁까지. 세상이 그분을 중심으로 도는 듯하구나. 천의가 닿는다는 게 진짜 존재한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 저쪽까지.’

하오문주의 눈이 월하회주를 향했다.

세상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월하회.

혈수문의 일과 무림에서 일어난 석연치 않은 죽음들, 그리고 황궁과 조정 신료들 사이를 움직인 독살 사선을 연결시킨 것은 월하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오문에서는 앞으로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주시면 됩니다. 당문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안에 든 독이 무엇인지 알아내 주시고 죽은 이들의 사인과 연관성을 밝혀 주십시오. 앞으로 월하회에서 정과 사, 황궁을 막론하고 의심 가는 정황과 정보는 모두 제공할 것입니다.”

월하회주의 말에 당문 독의장 당황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범인은 이미 알고 있지 않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증거를 모으고 범인의 위치를 찾고 난 그다음이 아니겠소? 대책은 있는 것이오?”

독부 은요.

당문에서는 일찍이 그들이 해독해 내지 못한 독의 주인이 독부라 확신했다.

아직 독의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으나, 황도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들이 귀천성과의 전쟁 중 독부의 손에 죽은 인사들의 죽음과 양상이 비슷하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문제는 허미인과 독부의 연관성을 밝혀낸다 한들, 여기 있는 이들만으로는 독부를 잡아낼 방법이 요원하다는 것이었다.

그에 월하회주는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독부를 잡을 사람은 이미 요청해 놓은 상태입니다. 아마도 그분이 오실 겁니다.”

“우리 진화가?”

황후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월하회주가 미소를 지으며 아련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월하회도 이황자님과 함께한 적이 있지요.”

“호오, 그대에게도 내 아들이 엄포를 놓던가?”

“월하회의 기둥 하나를 날려 버리셨지요. 독부도 그분께는 별수 없을 겁니다.”

기둥을 쪼개던 푸른 뇌전을 떠올리며, 월하회주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최근 정의맹에서 진화와 적호단이 기어이 환마제의 후인마저 죽여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진 참이었다.

* * *

적호단에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어디에 숨은 건지 전쟁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독부가 처음으로 꼬리를 잡힌 것이다.

“황도요?”

“정확히는 황궁에 숨었을 가능성이 크다는구나.”

황궁.

그 말에 진화가 눈을 크게 떴다.

지난번 독살 위협을 당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는 그저 황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추악한 질투에 휘말린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그동안 황궁에 숨어서 후궁전과 조정 여론에 관여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독부가 왜 황궁에서 그런 일을 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건 독부를 붙잡아서 물어봐야겠지.”

“저도 가는 것입니까?”

“일의 전후가 반대겠지. 네가 가야 하니 적호단이 가는 것이다.”

남궁진휘의 말에 진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황자라는 신분이라면 황궁에서 움직이는 데에 황궁 사람들과 부딪힐 일 없고, 얼마 전엔 한수림과 제갈길현의 독까지 해독했으니. 진화만 한 적임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심해야 한다. 독과 별개로 독마제가 쓰는 독공은 엄연히 독을 이용한 무공이다. 나와 우리가 늘 너를 염려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위험한 일이 있다면…… 진혜를 이용하거라.”

“형님.”

남궁진휘의 농담을 섞은 당부에 진화가 민망한 듯 웃고 말았다.

하지만 남궁진휘는 진지했다.

“여태 경지를 그렇게 무식하게 밟은 무인은 없다고 하더구나. 광기둥이라니…….”

“광기둥요?”

“미친 기운 낭비 검강 기둥이라더군. 창피해서 어디 내보이긴 힘들지만, 방패로 쓰기에는 적당할 것이다. 저답게 무식하게 튼튼할 터이니.”

남궁진휘가 혀를 차며 하는 말 뒤에는 남궁진혜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었다.

아마도.

남궁진휘의 말처럼 이번 임무에 최고의 적임자인 진화가 움직이면서 적호단이 함께 황도로 향하게 되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적호단주는 출발 전부터 진화를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약한 주제에 콧대만 높은 황궁 놈에, 성격 나쁜 당문 독의, 거기에 하오문이라고? 어쩐지 네놈들을 비롯해서, 아니 네놈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은 죄-다 떠맡는 느낌이야.”

적호단주가 눈매를 좁히고 진화와 진화의 곁에 모인 관도생들, 이제는 엄연한 적호단 십 조 단원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이 완전히 골칫덩어리들을 보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적호단주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이 아니었기에, 진화는 슬쩍 적호단주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의외의 인물들이 황도로 가는 적호단 행렬에 합류했다.

얼마나 의외의 인물들이었는지 진화조차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왜 눈깔을 그렇게 뜨는가?”

성격이 매우, 매우 고약해 보이는 노의원은, 어쩐지 오만하게 비틀린 입매와 눈빛이 눈에 익었다.

“……!”

의선문 특제 티가 나지 않는 인피면구와 변장으로 골격 자체가 다른 사람 같았지만, 특유의 심술맞은 기운이…… 제갈길현이었다.

그 옆에는 음흉한 여우처럼 웃고 있는 중년의 의원이 있었는데, 그저 하얀 분칠을 지운 홍랑대부였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절대 이곳에 나와선 안 될 두 사람이었다.

제갈길현은 깨어났다는 사실조차 절대 비밀로 붙여져 있었고, 홍랑대부는 한수림이 돌아간 것을 비롯해서 외부에 행적이 알려지면 곤란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물론이고 의선문이나 군사부에서도 그걸 모를 리 없는데, 이들이 대체 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진화가 적호단주의 눈치를 살피랴, 제갈길현와 홍랑대부 초산하를 번갈아 보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흐흐흐, 놀랐느냐?

-……미치신 겁니까?

-예끼! 이놈아, 다 필요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필요해서요?

물론 이유가 있으니 의선문과 군사부가 허락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는 그마저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갈길현을 보았다.

-독부의 역천비록을 해석해야지. 분명 검마제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검마제의 정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흐흐흐, 다 아는 수가 있지. 세상에 모든 천문 기록은 현학문에 있고, 모든 사건 기록은 월하회에 있을 테니까.

음흉하게 웃는 제갈길현의 모습에 진화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때, 홍랑대부 초산하가 끼어들었다.

-곧 십이좌회가 황도에서 있을 것이니, 천주님께서 그곳에 또 다른 역천비록을 가지고 오실 겁니다.

홍랑대부의 말에 그나마 진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의선문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의원들을 보내 준다더니…… 골치 아픈 것들은 죄다…….”

적호단주가 성격 나빠 보이는 노의원과 중년 의원을 보며 구시렁거렸다.

그는 노의원이 천수현인 제갈길현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흘흘흘, 입이 팔딱거리는 게 딱 가지고 놀기 좋은 멧돼지 같은 놈이로고.”

적호단주가 제갈길현에게 찍혔다.

진화는 적호단주를 보며 심술궂게 웃는 제갈길현을 보았지만, 스-윽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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