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벼락 진(震) 시끄러울 화(譁) : 황궁에 숨은 혈성(2)
황궁이 어수선했다.
조정 대신들이며 궁인들이며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했지만, 아직도 궁 안에선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은 목소리 하나, 웃음소리 하나 크게 흘리지 않고 딛는 걸음걸음마다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가운데, 곳곳에서 나뭇잎이 바스락대듯 수군거렸다.
어린 궁인들이 잿물을 가져와 대전 입구에 만들어졌던 추국장의 핏자국을 닦고 또 닦았지만, 짙게 물든 핏자국은 옅은 갈색 빛으로 남아서 이전에 있던 흔적에 자국을 더했을 뿐이었다.
“이전에 후궁전에서 일어난 그 많은 독살이며 신료들의 돌연사가 전부 허미인과 그 집안 소행이라며? 그런데 달랑 효수로 끝나다니. 말이 돼?”
“허미인은 냉궁에 한 달간 있게 한 뒤에 죽인다잖아.”
“먹을 것도 없이 찬 데서 지내게 하다가 나중에 죽인다지만, 그게 괴로워 봐야 얼마나 괴롭다고. 그래 봐야 사약 받고 편안한 죽음이지.”
“그래서 말인데, 그게 사실은 한 달 동안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도록 미음에 사약을 타서 넣어 준다는 말이 있어. 장이 썩다가 나중에는 끊어져서 죽도록.”
“그, 그래?”
“이봐, 거기, 입조심해! 아침에 태감님들과 상궁마마님들이 모두 모아 놓고 한 이야기 못 들었어? 그 일에 대해 떠들다가 황자님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불붙은 장작을 입에 넣어 입 구멍을 태워 죽일 거라 하셨잖아!”
“우, 우리가 뭐?”
“흠흠. 저기. 저기 가서 닦자.”
궁인들의 수군거림에 누군가 앙칼진 목소리로 경고하자, 이제까지 수군거리던 이들이 안 그런 척 시치미를 떼었다.
하지만 곧 경고를 한 궁인의 눈치를 살피며 더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육황자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허미인이라며? 금수만도 못한 년! 짐승도 제 자식에게 그리하진 않을 텐데!”
“그러니, 황자를 둘이나 낳은 후궁이 폐서인에 사사까지 되는 거지!”
“그러고 보면 폐하께서 황제가 되시기 전에 폐서인 된 사람이 더 있었다고 했잖아. 황태자의 친모! 꼴랑 미인도 그 정도는 해야 폐서인 되는데, 전에 그 폐서인은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거야?”
“쉿! 그건 진짜 입조심해야 해. 생각해 봐라. 황자를 낳은 후궁도 궁인 수십을 죽이고 황자까지 건드리고서야 폐서인이 되었는데, 황제의 장남을 낳은 정비가 그리되려면 무슨 짓을 해야겠어?”
“야-! 거기-!”
또다시 앙칼진 목소리가 있고서야, 궁인들이 입을 다물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과 관련해서 떠드는 이들이 어디 궁인들뿐이랴.
허미인의 폐서인 사건이 있고 나서, 허미인의 이야기와 비교하여 가장 많이 떠도는 말이 이전에 폐서인 된 황태자의 친모에 대한 이야기였다.
폐서인 표서은.
현 황태자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는 가장 큰 약점이었다.
황제 한유수가 알려지지 않은 일개 황족이었던 시절.
나라가 혼란하고 황권이 바로 서지 않으니. 힘없고 가난한 황족은 호족들의 조롱과 관리들의 생색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그때 한유수는 가족들을 위해 인근에서 가장 힘이 있었던 호족인 표씨 가문의 딸과 정략혼을 하였다.
그 일로 한유수는 표씨 가문의 재력으로 군사를 키워 왕의 자리에 올랐고, 표씨 가문은 표서은을 왕의 정비로 만들어 황실과 혈연을 맺었다.
세간에서는 핏줄을 팔았다 뭐다 하며 떠들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한유수는 천하를 도모할 힘을 얻었다.
여기까지였다면 성공적인 정략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표서은이었다.
평범한 외모에 안하무인인 행동거지를 가졌다는 호사가들의 평판이 이어지고, 잔인하고 포악한 성정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런 차에 한유수가 호족들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하남의 대호족 조씨 가문과 두 번째 정략혼을 맺게 되었다.
“하이고. 정화 아씨가 아깝지. 천하절색의 미모에 품위 있는 자태, 선량한 성품까지. 하늘이 내린 국모감이 아니던가!”
하남 조씨는 정략혼에 미지근했으나, 한유수가 아름답고 순후한 조정화에게 반해 두 번째 정비로 들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호사가들이 떠드는 조정화에 대한 평판이 표서은의 질투심을 자극했다.
그 전부터 잔인한 손 속으로 피를 보기 즐겨 했다는 말이 있었지만, 이후로 어린아이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점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정화보다 먼저 아들을 갖기 위해 표서은이 사악한 주술의 힘을 빌렸다는 소문이었다.
“근자에 왕비전에서 사라진 궁녀만 수십이옵고, 왕비전 상궁이 돈을 주고 여아들을 사 모은다는 소문이 저자에 팽배하옵니다. 부디 이 일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억울한 이가 없도록 하시옵소서!”
소문이 도를 넘어서, 왕부 조정에까지 올랐다.
순식간에 왕비전 궁인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궁인들의 증언에 근거하여 병사들이 궁 밖에 왕비가 산 아이들을 모아 두었다는 비밀 장원까지 덮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사관과 병사 들은 경악스러운 광경을 목격했다.
마침 괴이한 제단 위에서 표서은이 맨손으로 어린아이의 심장을 뜯어 거기서 흐르는 피를 받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발견된 주검과 땅에 묻힌 어린아이의 시신이 수천이었다.
거기에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시고 있던 표서은의 배가 불러 있었다는 사실이다.
왕부 전체에 왕비가 사람을 잡아먹고 배 속에 마귀를 배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한유수는 조정 신료들의 반발과 곧 태어날 아이의 안위를 위해, 출산 후 표서은을 폐서인한 뒤 사사하였다.
하지만 이후로도 장남인 한유강에게는, 표서은이 마귀에게 홀려 낳은 자식이라는 수군거림이 따라다녔다.
한유강이 황태자가 된 후에도 폐서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는 그대로였고, 때때로 사람들은 황태자에게서 표서은의 모습을 찾아 험담했다.
표씨 가문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공신의 직위와 세력을 잃어버렸고, 표서량은 내내 전장을 떠돌고 나서야 겨우 황제의 배려로 표기장군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 * *
파군.
황태자와 표서량이 자신들을 증명하기 위해 적들의 앞에 섰다.
“공격하라! 죽이라!”
챙! 챙!
“으아아아아-!”
비명이 난무했다.
죽이는 이들도, 죽는 이들도 모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병사들은 광기에 젖은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한 손으로 튀어나오는 내장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전쟁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흐아아아! 죽어라! 죽어!”
사방에서 소리치는 저주의 목소리.
코를 파고드는 피비린내.
제정신으로는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광경들.
그 속에서 황태자는 한껏 커진 동공이 담아내는 전장의 모습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넋을 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전하,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이곳은 전장입니다!”
대장군 표서량이 황태자를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황태자가 멍한 얼굴로 표서량을 보았다.
“외……숙?”
“전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이제 겨우 첫 전투입니다! 신제국의 공세가 만만치 않으니, 전하께서도 굳건하게 버티셔야 합니다.”
“어, 언제까지요?”
“……북이 울릴 때까지입니다.”
멍청한 얼굴로 묻는 황태자의 모습에 표서량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충격이 크군. 오늘은 틀렸어.’
표서량이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표서량은 충격에 빠진 황태자가 더 이상 전장에 있는 것이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 있어 봐야 멍청한 모습만 더 보일 뿐이야.’
표서량이 혀를 한 번 찬 뒤 부관을 불렀다.
“전하를 안으로 모셔라.”
“충.”
표기군의 군사마 위기린이 황태자를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표서량은 곧장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놈들을 죽여라! 한 놈이라도 더 죽여!”
거대한 창이 병사 둘을 한꺼번에 꿰뚫고, 표서량은 그대로 창을 휘둘러 창에 끼어 죽은 병사들을 전장 한복판으로 던졌다.
한제국의 젊은 맹장으로, 북방의 반란군들이 창대만 보고도 오금을 저린다는 혈랑신창 표서량의 신위가 펼쳐졌다.
사기가 오른 표기군이 표서량의 뒤를 따르며 신제국 병사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신제국과의 전쟁 첫째 날이 그렇게 지났다.
다음 날.
성을 공략하려는 신제국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울 것입니다.”
“본래 전장을 처음 마주하면 그렇게 충격을 받기 마련입니다. 전하께서 일찌감치 그 충격을 떨쳐 내셔서 다행입니다. 과연, 천무장이라 불리던 폐하의 아들답습니다.”
다부진 얼굴로 성벽에 선 황태자에게 표서량이 자애로운 얼굴로 웃어 보였다.
표서량은 전날 큰 충격을 받아 전장을 벗어났던 사람이 이렇게 곧바로 다시 전장에 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황태자를 칭찬했다.
표서량의 칭찬에 황태자는 황제의 아들다운 모습을 보일 것이라며 각오를 다졌다.
둥- 둥- 둥-.
전장이 열린다는 걸 알리는 북소리.
까맣게 밀려드는 적군을 보며 황태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자꾸 고개를 돌리려는 제 안의 공포와 싸우며 적군들을 노려보았다.
“지금입니다.”
표서량의 목소리에, 황태자가 검을 들었다.
“적이 온다! 화살을 날려라!”
적절한 명과 함께 황태자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의 앞에 섰다.
물론 그의 주위에는 표기군의 정예 편장들이 호위를 서고 있었지만, 황태자의 시선은 오로지 적들만을 향해 있었다.
쿵. 쿵. 쿵. 쿵.
긴장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황태자의 귀로 제 심장 소리가 북소리보다 크게 울렸다.
황태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눈멀고 귀가 먼 사람처럼 오로지 벽을 오르는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데만 집중했다.
거짓말처럼 점점 심장 소리가 멀어졌다.
* * *
황궁.
그날 마지막 허미인을 심문하는 곳에는 황제가 왕부에서부터 신임해 온 네 명의 중신들이 있었다.
태사 조위례와 대사농 정조인, 중서령 사마윤과 위장군 원수경.
그중 태사 조위례와 위장군 원수경은 지금의 황제를 그 자리에 올리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가문들의 수장이자, 황자들의 외척이었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그날 허미인이 한 말은 다른 후계자를 밀고 있는 외척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혈성(血星)이라 불리는 불길한 핏줄이 황궁에 있다니.
그것도 폐서인 표씨의 핏줄이라니.
황제는 허미인이 냉궁으로 들어간 뒤 네 명의 대신들을 은밀하게 불렀다.
“어찌하면 좋겠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황제의 물음에 네 명의 대신들이 약속한 듯 고개를 숙였다.
“아직 그때의 일이 황궁에 돌고 있진 않더군.”
덤덤한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 칼날을 품고 있는 듯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조위례와 위장군은 그들의 머리로 꽂힌 황제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황자도 같이 들었지.’
위장군의 눈이 슬쩍 조위례를 향했다.
조위례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늙은이 같으니!’
조위례의 얼굴 표정, 시선, 태도에서 어떤 의미도 읽을 수 없었던 위장군은 속으로 혀를 차며 눈을 돌렸다.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오. 짐은 아직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았으니.”
“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황제가 아직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결정이 있기 전까지 용혈의 거취에 관해 어떤 말도 나와선 안 될 것이라는 황제의 경고에, 네 명의 대신들은 그저 깊이 허리를 숙여 받들 뿐이었다.
“태사만 남고, 나가 일들 보시오.”
“그럼, 물러나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이번에도 대신들은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하지만 굳이 태사 조위례만 남기는 황제의 명에, 대전을 나가는 위장군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다 같이 있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굳이 태사만을 남기셨다라…….’
위장군 원수경은 황제의 명 이면에 깔린 그의 의도를 읽으려 애쓰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귀빈전으로 가지는 않았다.
경고를 받기까지 했으니 당분간 귀빈전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귀빈전과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를 내보내고 태사 조위례만을 남긴 황제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대체 어찌해야 할 것 같소?”
“송구하옵니다.”
“짐이 태사에게 그런 말을 듣고자 남긴 것 같소?”
조위례가 말을 아끼자, 황제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그러자 조위례가 고개를 들어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나이다.”
덤덤한 눈빛과 평온한 목소리.
잠시 시간을 두고 꺼낸 조위례의 말에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귀천성, 그 역도들이 찾고 있다는 팔현성 중 하나였소. 하나같이 지독한 운명의 굴레로, 진화마저도 그 속에 잡아 두고 있더군. 벌써 짐의 자식들 중 둘이야! 허, 발칙한 놈들!”
“이황자님도 그렇고, 무림 전체가 마제라 불리는 자들을 죽이고 있다더군요.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그들이 찾는 운명일 뿐, 아직 마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녀석은 진화와 다르오. 알지 않소, 표서은 때문에 황태자에게 붙은 소문을!”
“……마제가 되지 않더라도 다음 황제가 혈성을 타고났다면, 그 자체로 신료들이 가만있지 않겠지요.”
황제가 고민하는 이유였다.
감히 황제의 자식을 노리는 역도의 무리야 결말은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원귀빈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여론을 형성하고 황태자를 흔들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정말로 위태로워질 것이오.”
황제가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위태로워질 것이라…… 분명 그러할 것이다.
조위례도 황제의 말에 동의했다.
황태자의 유약한 성정으로는 바람처럼 흔들어 대는 여론에 심기를 굳건히 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걱정할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또 상처받으실 겁니다. 폐하의 근심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혈성이 깨어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이 제국의 황제로서, 폐하께서는 그 불안한 혈통에 제국의 미래를 맡길 수 있으시겠습니까?”
조위례의 말이 황제의 근심을 꿰뚫자,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이미 황제도 알고 있었다.
아들인 황태자를 향한 황제의 근심 이면에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폐해야 할지 모른다는 슬픔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후우, 태사는 속일 수 없군. 그렇소.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서야 겨우 다시 세운 제국이오. 불안한 혈통에 제국의 미래를 맡길 순 없소.”
황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황제는 깊은 심중에만 가지고 있던 무거운 결심을 이렇게 뱉고 나니 한결 속이 편안해졌다.
“아직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겠소. 불안한 혈통에 제국을 맡길 순 없지만, 반대로 그 역당들에게 휘둘리지도 않을 것이오. 황태자의 안에 정말 그런 것이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겠소.”
“현명하신 결정이옵니다.”
황제의 결정에 태사 조위례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