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시끄러울 화(譁) : 혈마제의 각성(5)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혈마제의 역천비록을 읽었다.
“병인년 무진월 을해일 축시. 운명의 중첩으로 엮이지 않은 변수일세.”
그러자 현학문주 청벽선생 운송이 그날의 천문을 말했다.
“만월이 구름에 가리고, 북성이 가장 밝은 날이군. 용호상박, 혈성을 띤 호랑이가 승천하는 용의 목덜미를 문 날이야.”
현학문주의 말에 옥허신검이 물었다.
“위험한 것인가?”
“만인을 잡아먹은 혈호일세.”
현학문주가 굳은 얼굴로 단언했다.
호랑이가 배가 부른 후에도 만인을 채울 때까지 살생을 했다면, 그건 사냥이 아니라 놀이였던 것이다.
맹수가 생존이 아닌 쾌락을 위해 살생을 시작했다면, 그건 맹수가 아니라 요물이 된 것이다.
혈호는 신령인 용에게도 덤비는 겁 없는 요물이었다.
그때,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다시 역천비록을 읽었다.
“마르지 않는 갈증. 만 명의 피를 마신 순간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눈뜰 것이다.”
아직 역천비록을 제대로 해석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수현인의 말을 듣는 순간,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이 있는 곳이 전장이라고?”
옥허신검이 기가 찬다는 듯 물었다.
“혼현마제 놈이 처음부터 알고 노렸겠지.”
“적호단은요? 위험한 것은 아닌가요?”
“아직은 아닐 걸세. 군세는 한 제국이 우세하다고 들었으니까. 신 제국이 연전연패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을 보면, 혼현마제도 혈성을 깨우는 것 외에 승전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야.”
적호단을 걱정하는 야희성녀의 물음에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고개를 저었다.
독마제가 전장으로 갔을 거라 예상되긴 하지만 그곳에 있는 전력이 독마제 하나에 벌벌 떨어야 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제왕검이 입을 열었다.
“혈성이 이미 깨어났다면? 혈마제가 이미 깨어난 것이라면 어찌 되겠는가?”
제왕검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천수현인에게 향했다.
모든 것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혈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 천수현인도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독마제와 혈마제뿐이라면…… 그래도 쉽지 않을 것이네.”
천수현인은 진중하게 답한다고 했지만, 그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심술맞은 얼굴을 한 천수현인의 모습에 제왕검은 오히려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천수현인의 예상대로, 독부는 지도를 보며 쉽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죽이는 것뿐이라면 방법은 간단한데, 참 귀찮게 되었어.”
저번 공격에서 생각보다 많은 피해가 없었다.
아니, 상장군을 비롯한 많은 장수들이 포로로 잡히며 신 제국군에는 큰 전력 손실과 사기 저하가 있었지만, 그건 독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독부는 그저 흘렸어야 할 피를 제대로 흘리고 오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북회군과 표기군이 전부 성벽에 있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표기군이 뒤로 물러난 상황입니다.”
독부의 질문에 함께 있던 신 제국 부장 하나가 답했다.
그는 독부의 혼잣말을 들으면서 내용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 하나, 그녀가 이 전쟁에서 승리 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십 번의 무의미한 전투에서 동료와 수하 들을 잃었던 부장으로서는 속이 뒤집어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게다가 존경하는 상장군마저 독부의 명에 적의 포로로 잡혔으니.
‘저딴 년 때문에……!’
부장의 눈빛에선 그 불만이 고스란히 새어 나왔다.
독부는 그런 부장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여기랑, 여기. 이번에는 이쪽으로 가야겠어.”
“이유가 있습니까?”
“……뭐?”
예상과 다른 답변이 돌아오고서야 독부가 고개를 들어 부장의 얼굴을 보았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반감과 불만, 그리고 그것들의 밑바닥에 살기마저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독부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 후후후, 이건 뭐지?”
독부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말았다.
그리고 먹잇감을 앞에 둔 독사처럼 몸을 바로 세웠다.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는 모르겠으나, 제대로 된 작전을 말해 주십시오. 더 이상 무의미하게 병력을 희생시킬 순 없습니다.”
뭔가 단단히 각오를 한 듯 부장의 표정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달그락.
독부가 습관적으로 손톱을 부딪치며 부장에게 다가갔다.
콧속으로 향내가 훅 하고 들어왔다.
부장으로선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색기 어린 눈매와 날렵하고 요염한 입술,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여성스러운 몸매와 한 걸음 내딛는 것마저 유혹적인 자태까지.
하지만 여느 유곽에서 만났다면 반가웠을까, 전장에서는 결코 반길 수 없는 여인이었다.
부장은 제게 다가오는 독부를 그저 시선만 슬쩍 내리깔아 보았다.
“무의미? 후후후.”
독부는 마치 부장을 유혹하듯 교태스러운 몸짓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긴 손톱 장식으로 부장의 목을 간질이고, 부장의 귀에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속삭였다.
“그런 건 너희 같은 벌레들이 판단할 일이 아니야.”
“무슨…… 컥!”
독부 은요의 독설에 반발하려던 부장이 목을 붙잡고 휘청거렸다.
“커헉! 컥!”
목을 시작으로 검게 죽은 핏줄들이 불거지고, 부장이 숨을 쉴 수 없는 듯 컥컥거리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거미줄처럼 검은 핏줄이 부장의 얼굴까지 타 올라왔고, 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독부를 보았다.
“너희 같은 벌레들은 죽어서야 의미가 생기거든. 그걸 너희가 알 리 없지. 너희는 벌써 죽어 버린 후일 테니까. 호호호호호!”
독부의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검은 거미줄이 부장의 눈마저 검게 물들이고, 부장은 독부를 향해 고개를 든 상태로 죽었다.
“밖에-!”
독부가 신경질적으로 막사 밖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막사를 지키던 병사가 뛰어 들어왔다.
“헉!”
병사는 바닥에 쓰러진 부장의 시체를 보며 경악했다.
그런 병사를 향해 독부가 요염하게 웃으며 명을 내렸다.
“다른 부장을 불러올래? 얼른.”
“추, 추, 추웅.”
독부의 명에 사색이 된 병사가 도망치듯 막사를 뛰어나갔다.
“호호! 호호호호호!”
병사의 모습을 보며 독부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깔깔대며 웃었다.
* * *
둥둥둥둥둥둥---!
술시(戌時).
해가 넘어가 산이 붉게 물든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공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술시에는 까맣게 밀려드는 신 제국 병사들의 모습의 제대로 보이지 않아 진시보다 더 병사들의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그건 신 제국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성벽 위에 서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으니, 언제 어디서 칼과 창이 날아들지 모르는 곳을 향해 기어 올라가야 하는 그들 또한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진군하라! 성벽을 공략하라!”
“……제, 젠장!”
병사들의 등 뒤에서 말을 탄 부장들이 소리치며 그들을 재촉했다.
하지만 두려움에 얼어붙은 병사들이 누구도 달릴 생각을 않자, 부장 하나가 큰 월도를 휘둘렀다.
쉐에에엑-!
“크아아악!”
뒤에서 주춤거리던 병사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기겁하며 앞으로 도망갔다.
“이놈들! 움직이지 않는 놈은 내 월도에 죽을 것이다! 어서 움직여라-!”
쉐에에엑-!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월도에 겁을 먹은 병사들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아아악!”
앞으로 가도 죽고 움직이지 않아도 죽는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죽으러 가는 병사들의 공격이 제대로 될 리 없었으나, 독부의 명을 받은 신 제국군 부장들은 그저 병사들을 재촉하기에 바빴다.
그때.
파지지지직-!
카—앙!
하늘에서 떨어진 푸른 번개가 부장의 월도에 내리꽂혔다.
거대한 월도가 불꽃과 함께 터져 나가고, 월도를 쥐고 있던 부장도 튕겨나듯 말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부장은 전신이 까맣게 타서 연기를 뿜고 있었다.
“이, 이…….”
“처, 천벌! 천벌이다-!”
일반 백성들에게 번개는 하늘의 무기라, 번개를 맞고 죽은 부장의 모습은 까맣게 타 죽은 것 이상으로 병사들에게 공포심을 자아냈다.
놀란 병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느냐! 동요하지 마라! 적의 공격일 뿐이다-!”
신 제국 부장들이 병사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공포로 인한 병사들의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게다가.
쉐에에엑--!
타타탁. 탁.
“컥!”
하늘에서 날아든 대침에 미간과 인중, 목이 꿰뚫린 신 제국 부장이 말에서 떨어졌다.
놀란 신 제국 부장들이 사태를 파악하려 했을 때, 관문의 성벽에서 미끄러지듯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건 순식간에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무, 무슨!”
“죽어라---!”
신 제국의 병사들은 누구도 대검을 들고 달려드는 남궁진혜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파-팟!
성벽을 타고 그대로 내달린 남궁진혜는 말과 함께 신 제국 부장의 몸통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고.
“으으. 으으으…….”
피를 뒤집어 쓴 남궁진혜에게 신제국 병사들이 겁을 먹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병사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주춤 그녀를 둘러쌀 때, 그들의 앞으로 다시 번개가 떨어졌다.
파파파파팟-!
번개가 땅을 헤집으며 병사들과 부장들이 있던 곳 사이를 더 크게 벌렸다.
“물러서라.”
고요한 목소리가 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신 제국 병사들이 주변을 돌아보자, 그들을 위협하며 전장으로 몰던 부장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제 그들의 뒤에는 붉은 옷을 입은 한 제국 무인들이 있었다.
‘단지 피를 보아서 혈성이 발동되는 거라면, 혈성이 깨어났어도 벌써 깨어났겠지.’
진화가 신 제국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잔뜩 겁에 질려 진화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조건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아직 조건이 충족된 것이 아니라면, 아예 조건이 충족될 여지를 주지 않는 것도 좋겠지.’
진화가 내공을 일으켜 신 제국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항복하라! 역도들의 조정은 너희들 생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머리 위에서 울리는 듯한 단단하고 위엄 넘치는 목소리에 신 제국 병사들이 크게 놀랐다.
“한의 백성이자 황제 폐하의 백성들은 역도들에게 휘말려 무의미한 죽음을 택하지 마라-!”
놀람은 어느새 경외심으로 바뀌고, 신 제국 병사들이 하나, 둘,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항복하라! 항복한다면 모두 한의 백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진화의 외침과 함께 신 제국 병사들이 그 자리에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이유도 없이 매일같이 사지로 나가는 지옥.
섬뜩한 칼날과 비릿한 혈향 속에 몸을 내놓아야 하는 지옥을 바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둘.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는 병사들이 늘어 가며, 이내 전장에 있던 수천 명의 병사들이 진화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경이로운 광경에 적호단원들마저 넋을 잃었다.
그때.
스르르르르릉--!
갑자기 파군을 지키던 관문의 문이 열렸다.
약속되지 않았던 일이라 진화와 적호단원들의 눈이 커졌다.
관문의 앞에서 뿌연 먼지구름과 함께 말을 탄 표기군이 신 제국 병사들을 무참히 짓밟으며 달려 나왔다.
“으아아악---!”
신 제국 병사들이 기겁을 하며 몸을 피하고, 그들의 눈이 진화와 표기군을 번갈아 볼 때.
파지지지지직----!
푸른 번개가 신 제국 진형으로 달려가고 있는 표기군을 향해 내리꽂혔다.
* * *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표서량도 막사에서 나왔다.
늘 그렇듯 적들이 공격할 낌새를 보이고.
이번에는 이황자와 무림인들이 뭔가 새로운 전략을 펼치는 듯했다.
근신 중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는 전략.
하지만 그 속에서 이질적인 북회군의 움직임이 표서량의 눈에 들어왔다.
성벽을 방어한다기엔 어색한 움직임.
이상할 정도로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표기장군 표서량의 눈동자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지난번 일로 진화에게 근신을 받으며, 표기군 또한 후열로 배제될 것이라 예상하긴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북회군의 낌새가 이상했다.
표기군을 후열로 밀어내고 성벽을 지켜야 할 이들이, 성벽을 빙 둘러 마치 표기군을 포위하는 듯하지 않은가.
이상함을 감지한 표서량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그때, 북회군 사이를 비집고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황태자가 전에 없던 굳은 얼굴로 표서량을 향해 말했다.
“표기군과 함께 잠시 대기하십시오.”
“전하, 신이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어째 표기군을 죄인 취급 하시는 듯합니다. 그런 것이옵니까?”
표서량이 황태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표서량과 눈이 마주친 황태자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냥! 움직이지 마십시오. 움직이지 마세요, 외숙.”
마치 우는 듯 애원하는 듯 말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표서량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어떻게 알았지?”
“외숙…….”
“그 어린 범 새끼의 눈치가 빨랐군.”
“외숙!”
갑자기 돌변한 표서량의 모습에 황태자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신호인 양.
차—앙! 챙! 챙! 챙
북회군의 창날과 장수들의 검이 일제히 표서량과 표기군을 향했다.
“하하하, 그렇지요. 폐서인의 핏줄은 황태자 전하만이 아니지요. 아니, 처음부터 내 핏줄이 그 아이와 전하께 이어진 것이지.”
표서량이 황태자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