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 (307)화 (307/425)

남궁마제

떨칠 진(振) 바뀔 화(譁) : 어부지리(2)

공중에서 정신을 잃은 남궁진혜가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진화는 하늘이 까맣게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다시, 또.’

지키지 못하는 줄 알았다.

목이 잘리고도 검을 든 채 남궁세가 창천원 앞을 지키고 있던 남궁진혜의 주검이 떠올랐다.

진화가 차갑게 굳은 손을 잡아 주고서야 겨우 검을 손에서 놓았던.

그 처참함과 비통함이 다시 진화를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해독은?”

“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예?”

“왜 남궁진혜가 죽은 얼굴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아…….”

적호단주의 말에 진화가 저도 모르게 제 발밑을 보았다.

시커멓게 저를 끌어내리던 것들이 사라져 있었다.

“하아.”

여전히 멍한 얼굴의 진화를 보며 적호단주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손을 진화의 머리에 얹었다.

“가족이나 동료가 죽고 다치는데, 지나친 슬픔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쓸데없이 과한 걱정이란 건 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특히 검을 들고 전장에 선 무림인의 인생은. 살아 있는 동안을 쓸데없는 것으로 허무하게 흘려보내지 마라.”

“…….”

“마지막 순간에 떠올린 얼굴이 수심 가득한 얼굴인 것보다야 좀 바보 같아도 싱글싱글 웃는 얼굴인 게 좋지.”

진화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적호단주를 보았다.

“특히 네 얼굴이라면. 남궁진혜 녀석이 좋아서 사족을 못 쓰지 않느냐.”

적호단주가 진화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자신들이 표서량을 놓치는 바람에 위기를 자초했다며 적호단 전체가 침울한 분위기였다.

적호단주는 남궁진혜의 부상에 죄책감마저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적호단주가 진화를 향해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화는 이 사내의 단단함에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곧 누님이 깨어나실 테니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누님이 마지막 순간에 제 얼굴을 떠올리시는 것도 좋지만, 깨어나실 때에 마주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흐흐, 오냐.”

세상이 무너진 듯 앉아 있던 진화가 힘을 내어 일어서자, 적호단주가 기특하다는 듯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궁진혜에게로 가려던 진화가 뭔가 잊은 듯 뒤를 돌아왔다.

“참. 단주님, 황태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글쎄? 아마 막사에 있지 않을까?”

적호단주가 어색하게 진화의 눈을 피했다.

진화는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님 깨어나시는 거 보고 가 봐야겠습니다. 확인할 것이 있으니.”

“확인? 뭔데! 내가 해 주마!”

“네? 아니, 중요한 건 아니라 천천히 해도 됩니다.”

뜬금없이 자신의 일을 대신해 주겠다는 적호단주의 모습이 무척 다급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뭔가 수상쩍은 낌새에 진화는 적호단주의 호의를 거절했다.

“아…….”

적호단주가 불안한 건지, 아쉬운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진화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적호단주의 곁으로 일 조장 서장원이 다가왔다.

“말해 봤어요? 그래도 이황자니까, 단주님이 잡혀가는 건 좀 막아 달라고.”

“새끼, 넌 내가 어서 잡혀갔으면 좋겠냐?”

“그럴 리가 있어요? 단주가 잡혀가면 우리도 같이 끌려갈 텐데. 그러니까, 어떤 미친놈이 열 받는다고 황태자 대가리를 두들겨 패요! 그놈 안 깨어나면 우린 그 뭐야, 역적 되는 거 아닙니까!”

“진짜로 척추를 다져 놓을 순 없잖아! 그리고 그렇게 세게 안 때렸어!”

“세게 안 때리긴, 부단주 그렇게 되고 황태자 대가리에서 빠-각 소리가 났는데!”

“안 났어!”

“우기면 다입니까, 온 군인들이 다 들었는데? 아, 지금 단주가 멋진 척할 때입니까? 다시 가서 이황자님한테 말 좀 잘해요. 단주 때문에 적호단 전체가 역적으로 끌려가기 전에!”

일 조장 서장원의 잔소리에 적호단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말에 틀린 구석이 있었다면 그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의 입에 주먹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즉, 서장원은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고 있었다. 

두 시진 지났을까.

남궁진혜가 쓰러진 즉시 진화가 천뢰기로 독기를 태워 버렸다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남궁진혜는 고작 두 시진도 지나기 전에 눈을 떴다.

“오, 이런. 여기가 극락이냐?”

“하하, 누님.”

남궁진혜의 말에 진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화의 웃는 얼굴을 보며 남궁진혜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그렇게 일어나…….”

“응?”

“아닙니다.”

보기만 멀쩡한 것이 아니라 내기까지 완벽하게 평안한 상태.

두 시진 푹 자고 일어난 듯 멀쩡해 보이는 남궁진혜의 모습에 진화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내 주제에 이게 웬 극락인가 싶었다. 그래서 그년은 어떻게 되었어?”

“…….”

아무 답이 없는 진화의 모습에 남궁진혜는 독부를 놓쳤음을 알았다.

“젠장! 그년 손톱에 독이 들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지!”

“하하, 그러지 말고 좀 더 쉬세요.”

남궁진혜는 완벽하게 괜찮았다.

이불을 내리치며 분해하는 남궁진혜를 달래고 진화가 막사를 빠져나왔다.

그러고 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황태자를 찾은 진화는.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가볍지 않은 뇌진탕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원자기의 물음에 진화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어리둥절한 진화의 모습에 원자기가 한숨을 쉬더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말씀드리기 황망하오나, 적호단주가 황태자님의 후두를 가격하는 모습을 본 병사가 한두 명이 아닌지라…… 조용히 넘어가기는 틀렸습니다.”

“…….”

이제야 진화는 아까 적호단주의 수상쩍은 반응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할 말을 잃은 진화를 보며 원자기가 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군을 어찌해야 할지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표서량의 이탈로 남은 표기군의 질서를 잡아야 하는데…….”

표서량 다음으로 표기군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황태자는 지금 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누워 있었다.

원자기는 북회군의 사마일 뿐이라, 그 혼자 전장의 일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신 제국 진영이 소란스럽습니다. 후퇴를 준비하는 거라면, 앞으로 우리 쪽은 저들을 추격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현재 파군 관문 전장의 책임자는 진화였다.

결국 관문과 북회군, 남은 표기군까지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은 진화밖에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관문을 닫고 저들을 추격하지 않는다. 우리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관문을 사수하는 것이었고, 신 제국 병사 몇을 더 죽이는 것이 우리 측 피해를 감수할 정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다만 북회군과 표기군의 철수와 관련해서는 중앙 조정의 결정을 기다리지.”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추웅.”

이황자인 진화의 결정에 북회군 사마 원자기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대장군 표서량의 배신과 이성을 잃은 황태자.

남아 있는 표기군의 혼란과 북회군의 불안.

그리고 갑자기 전향해 온 수십 명의 신 제국 병사들까지.

신 제국의 공격을 또 막아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문 안에는 승리를 기뻐하기는커녕 당황스럽고 혼란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 제국이 후퇴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혼란만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

전력에서 우위에 있다 한들, 이런 분위기에서 병사들이 제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을지 북회군 사마인 원자기조차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황자인 진화가 현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에 집중하겠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관문의 유일한 장수이자 실무자라 할 수 있는 원자기는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진화가 원자기에게 말을 덧붙였다.

“갑자기 상관들이 사라졌으니 군이 혼란할 것이다. 남은 표기군과 파군 주둔군은 임무에 혼란이 오지 않도록 성벽 방비를 서게 하라. 북회군은 하던 대로 원 사마가 이끌어서 전향한 병사들을 관리하도록.”

“추, 충.”

기대하지 않았던 제대로 된 명에 원자기가 눈을 크게 뜨고 진화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누워 있는 황태자를 향해 잠깐 한숨을 쉬었을 뿐, 이황자는 이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군을 움직이는 장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평정심이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원자기가 깊게 고개를 숙이고 막사를 나왔다.

원자기의 얼굴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 * *

탕! 탕! 탕탕!

“크읏! ……젠장! 젠장! 젠장, 그 빌어먹을 애송이! 까드득!”

상의를 벗고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독부가 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를 치며 이를 갈았다.

놀라운 것은 그런 옷차림인 독부의 앞에 표서량이 태연하게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상처가 별로 심하지도 않구먼.”

“닥쳐!”

표서량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그게 독부의 성질을 건드린 듯 독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것과 상관없이 독부의 등에는 거무튀튀하게 짓이겨진 약초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그것을 치우면 아직도 붉게 달아오른 피부와 흉한 화상 자국이 있을 터였다.

“빌어먹을…… 그 빌어먹을 애송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독부가 환각제인 앵속을 씹으며 분노를 곱씹었다.

진화가 독하게 뿌린 뇌전은 막사로 돌아와 치료를 하는 순간까지도 퍼런 기운을 번뜩이며 독부와 의원을 곤란하게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화상 자국이 점점 커지던 것은 멈췄지만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놀랍군.’

똑같이 뇌전을 맞았지만 상대적으로 멀쩡한 표서량은 독부의 상처를 보며 짧게 감상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때, 막사 안으로 부장 하나가 들어왔다.

“이제 준비가 끝났…… 조, 죄송합니다!”

부장은 상의를 벌거벗고 있는 독부를 보고 깜짝 놀라 막사를 뛰어나갔다.

독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저런 멍청한!”

짜증이 오를 대로 오른 독부가 부장이 나간 곳을 보며 살기를 번뜩였다.

“대체 왜 저런 놈들까지 다 챙겨 가겠다는 거야? 저딴 놈들, 전부 다 죽여 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독부가 짜증스럽게 표서량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표서량이 탁자 위에 있던 앵속을 챙겨 일어섰다.

“저런 놈들이라도 잘만 다루면 쓸데가 있으니까. 표기군 군세를 절반 이상 잃었다. 그것을 회복하려면 저런 놈들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표서량이 앵속을 입에 털어 넣으며 씨익 웃었다.

“이제 군은 내가 이끌지. 너는 좀 쉬고 있으라고.”

“어서 꺼져 버려.”

독부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군대를 움직이는 건 귀찮은 일이라, 자신을 대신해서 표서량이 나서는 것을 말리진 않았다.

곧 표서량과 표기군이 신 제국군을 이끌고 황도로 출발했다.

여기서 황도는 당연히 신 제국의 황도였다.

* * *

파군 전장의 소식은 빠르게 황도로 전해졌다.

그리고 큰 파란을 낳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제국에 단 네 명뿐인 대장군의 배신이었다.

심지어 절반 가까이 되는 정예군 전체를 데리고 한 배신이라, 한 제국 조정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함께 간 이들 대부분 표서량이 사가에서부터 함께한 이들이고, 폐하의 병사들은 그대로라고 하니…….”

“지금 숫자가 문제입니까! 표서량이 누구입니까, 황태자의 외숙입니다! 외숙!”

“어허, 감히 황태자 전하까지 끌어다 놓자는 게요?”

“허! 그럼 누굴 끌어와야 합니까? 그놈이 바로 혈성이었습니다! 폐서인 표씨도 따지자면 그놈과 핏줄이 연결된 바람에 그러했고, 그러면 황태자 전하도…….”

타—앙!

서로 목소리를 높여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이 상황을 풀어 내려는 그때.

도를 넘어서는 한 신료의 발언이 끝나기도 전에, 신료들의 제일 앞에 앉은 조위례가 탁자가 부서질 듯 내리쳤다.

좌중이 조용해지면서 조위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직은 황태자 전하시오. 무례한 발언은 삼가시오.”

언제부터 실권도 없는 태사가 조정 신료들의 위에 서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조위례의 발언이라. 막말을 한 신료가 고개를 숙이고 조위례의 시선을 피했다.

명실상부 황후의 집안으로 황실의 유일한 외척이자, 이 일로 황태자가 엎어지면 다음 황태자가 될 가장 유력한 황자의 외조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표서량의 뒤를 쫓는 것을 황태자 전하께서 방해했다 들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이오.”

“병사들 사이에 파다하단 말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큰 문제가 아닙니까?”

“허어, 확실하지 않은 것이라니까요!”

“하나 큰 문제이긴 하지.”

우렁차고 단호한 목소리.

조위례에 이어서 또 다른 유력자의 목소리라,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삼황자의 외조부이자 대장군 원수경이 나섬에 따라 다시 조정 신료들이 입을 닫았다.

“황태자 전하께서야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혈육의 정을 보아 나선 것이겠지요. 하나, 황태자라는 위치가 어디 그러해서야 되겠습니까. 정에 이끌려 대의를 그르쳤으니, 이는 황태자 전하의 자질에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 아니겠소.”

대장군 원수경의 말에 대답을 하는 신료는 없었다.

하지만 입을 다문 조정 신료들 모두 알고 있었다.

다음 용좌에 누가 앉을지는 모르겠으나, 이 일로 황태자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조정 신료들의 눈이 부지런하게 조위례와 원수경 사이에서 움직였다.

하남 조씨라는 외가를 배경으로, 황후를 어미로 둔 제국 유일의 적통 황자냐.

북회대장군부와 원귀빈을 등에 업고 오랫동안 황도에서 세력을 키운 삼황자냐.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될 것인가.

조정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젊은 신료 하나가 급하게 조정으로 뛰어 들어왔다.

“큰일입니다. 호양공주께서 황후마마께 원귀빈을 고발했다고 합니다!”

“뭐라!”

“그, 그게 무슨……!”

젊은 신료의 말에 조정 대신들이 모조리 일어섰다.

파란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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