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 (308)화 (308/425)

남궁마제

떨칠 진(振) 바뀔 화(譁) : 어부지리(3)

“……하여 부덕한 소녀가 원귀빈의 강압에 못 이겨 그런 약초를 보내 황태자 전하께서 평정심을 잃으셨으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호양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바닥으로 몸을 엎드렸다.

누가 들으면 방금 자식 잃은 어미인 양 가슴 절절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진짜 눈앞에서 자식의 미래를 잃게 생긴 어미는 기가 막혀 입도 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허어, 호양공주께서 저리 말씀하시니…… 원귀빈은 달리 할 말이 있는가?”

황후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원귀빈을 깨웠다.

다급하게 눈을 굴리고 있던 원귀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억울하옵니다. 애초에 후궁인 저 따위가 폐하의 친누이를 겁박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소첩은 어찌하여 호양공주께서 이러한 사달을 만들어 제게 뒤집어씌우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원귀빈이 굳게 마음을 먹고 고개를 땅에 박았다.

탕!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후마마. 소첩은 억울하옵니다!”

탕!

원귀빈은 피가 나도록 땅에 머리를 박았다.

바닥에 박은 이마보다 질끈 깨문 입술이 더 아팠지만, 상처 난 입술보다 황후의 앞에서 비참하게 무너진 자존심이 더 아팠지만, 자식을 위해서 못 할 것이 없는 게 진짜 어미였다.

“이런이런,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가 없구나.”

곤란한 듯한 황후의 말에, 호양공주와 원귀빈이 숙이고 있는 고개 아래로 황후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망할 년! 아주 즐거운가 보구나!’

‘지금 마음껏 즐기시오, 황후. 다시는 없을 기회이니!’

두 여인은 울컥 분한 마음이 솟았지만 꾸욱 참았다.

지금은 눈앞의 적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흥! 죽어 보라지, 건방진 년!’

‘감히 이런 흉심을 숨기고 날 속여?’

고개를 숙인 채로 두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호양공주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원귀빈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그때, 황후가 마치 일부러 그들에게 시간을 주었다는 듯 천천히 입을 떼었다.

“진실을 알 수 없으니, 증좌와 증인을 불러와야겠지.”

황후의 말에 원귀빈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원귀빈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칠 뻔했지만, 극도의 인내심으로 참아 낸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경악한 표정은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그건 호양공주도 마찬가지였다.

호양공주는 제가 고발을 준비하면서도 소란을 만들 생각만 했지 증좌나 증인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황후는 두 여인의 눈빛을 받으며 태연하게 손을 들었다.

“들여보내거라.”

황후의 말과 함께 황후궁 궁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궁녀 하나를 끌고 와 바닥에 내던졌다.

“꺄-악!”

“너, 너는……!”

호양공주와 원귀빈, 두 사람 모두 바닥에 엎어진 궁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다만 호양공주는 그 궁녀가 동궁 소속의 궁인임을 알아본 것뿐이었고, 원귀빈은 죽은 사람이라도 본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원귀빈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헙!”

원귀빈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까맣다 못해 무저갱처럼 깊고 적막한 황후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원귀빈은 저를 지탱하던 기둥이 무너진 느낌을 받았다.

“너는 일전에 내게 증언했던 대로 다시 말하라.”

곱고 나긋나긋한 황후의 음성에 천근만근보다 더한 위엄이 깔렸다.

그러자 바닥에 내쳐진 궁녀가 몸을 조아리고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여, 염녕전 궁인에게 금전을 받아 정기적으로 황태자 전하의 수면초에 다른 것을 섞었사옵니다. 소, 소인은 자, 잠을 깊게 자도록 하는 것이라 들었을 뿐입니다!”

“갈-! 네년이 감히 윗전을 우롱하는 것이냐!”

황후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믿어지지 않는 호통이 황후궁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너는 살기 위해 제 발로 창신궁에 왔다. 그것이 단지 수면초라면 네가 이리 떨 이유가 없다. 말하라! 그것이 무엇이냐!”

“이, 이후에 소인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니, 그것이 악몽초라고…….”

“아아악-! 황후마마! 모두 소첩을 음해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 뿐입니다! 태자 전하의 침전에 수면초를 넣은 궁녀의 말을 어찌 믿는단 말입니까!”

잡혀 온 동궁전 궁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귀빈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황후가 아무 말도 없이 원귀빈을 보았다.

무저갱처럼 깊고 적막하던 눈동자에 감정이 깃들었다.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

‘뭐, 뭐야! 설마, 황후가 다 알고 꾸민 일이야?’

원귀빈의 눈이 점점 커지다가, 결국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귀빈, 이미 저자의 삼가약초라는 약초방의 주인과 점원, 그 식솔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 과정에 누가 나왔겠는가?”

“……!”

삼가약초는 원귀빈이 비밀스럽게 거래를 하는 곳이었다.

원귀빈의 어머니 때부터 쭈-욱.

그곳에는 원귀빈이 오랫동안 그곳과 거래한 내역과 대장군부 때부터 지금 귀빈전에 이르기까지 그곳을 오간 궁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수면초뿐 아니라 후궁전에서 독살당한 이들이 먹은 약초까지, 그때의 일을 들추었다간 자칫 폐서인 허씨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었다.

원귀빈의 머리가 빠르게, 아니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하게 굴러갔다.

“화, 황후마마, 토, 통촉하여 주십시오! 동궁전 궁인이 수면초를 구한다기에 소개를 한 적은 있사옵니다. 하나 다른 것과는 관련이 없사옵니다!”

빠져나올 길이 보이지 않으니 지금은 굽힌다!

원귀빈은 지금은 납작 엎드려 황후의 자비를 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탕-!

“귀빈, 그렇다면 어찌하여 처음엔 바른대로 고하지 않고 수면초를 모른다 하였는가. 또한 호양공주 마마의 일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저 궁인을 통해 호양공주 마마에게 악몽초를 넘긴 저의는 무엇인가!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황후의 호통이 원귀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완전히 항복하라. 황태자에게 수면초를 쓴 것과 황족을 겁박한 것까지, 완전히 인정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황후가 호양공주를 들먹이며 변명의 기회를 준 것은 그러한 뜻이었다.

하지만 원귀빈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삼가약초의 일을 들추지 않는 대신 지금 나온 모든 죄를 인정한다면 황후의 자비로 제 목숨을 구할 수 있으나 이전의 허씨처럼 강등당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 강등당하는 건 괜찮았다.

문제는 지금 ‘시기’였다.

황태자가 자리에서 꺼꾸러지는 것이 확실한 때.

지금 자신이 황후에게 밀려 강등당한다면, 죄인의 자식이 된 삼황자 또한 이황자에게 밀려날 것이 뻔하지 않은가.

‘노린 거야! 진즉부터 삼가약초방을 쥐고 있다가 지금과 같은 순간을 노리고 있었던 게 분명해! 이 교활한 년!’

원귀빈의 눈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패배감과 함께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까드드득.”

작게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황후는 자연스럽게 그 소리를 모른 척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항복 선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소, 소첩이 부덕하여 호양공주 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혔사옵니다. 다만 공주마마를 강압하고 악몽초를 보냈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공주가 거짓을 고했다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호양공주가 급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원귀빈을 노려보았다.

“삼황자가 다음 황위에 오르면 제 처지가 어찌 될지 생각해 보라는 말이 그럼 강압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황태자 전하를 없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부터 역심을 품은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청상과부가 된 소첩의 처지를 보고 우습게 여긴 것이겠지요!”

호양공주의 말에 원귀빈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며 아귀처럼 물어뜯는 상황.

하지만 지금 그들은 누군가를 사냥하는 맹수의 위치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황후에게 목을 내놓고 처결만 바라보고 있는 처지였던 것이다.

탕--!

“두 사람 모두 품위를 지키라!”

황후의 지엄한 꾸짖음이 두 여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원귀빈, 호양공주의 말을 증명할 길은 없으나 그대의 처신이 적절치 못했던 것은 명백한 바! 게다가 윗전에 고하지 않고 황태자에게 꾸준히 수면초를 보낸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귀빈 원승혜에게서 첩지를 거두고, 미인으로 강등할 것이다!”

“황후마마!”

황후의 처결에 원귀빈이 비명처럼 그녀를 불렀다.

황후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원귀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궁의 궁녀와 삼가약초방의 작자들은 감히 황태자에게 가는 수면초에 악몽초를 섞는 만행을 저지른 바, 모두 효수하겠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악몽초의 일과 그 전의 일을 덮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황후의 경고에 원귀빈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렸다.

악몽초의 일을 덮지 않는다면, 원귀빈도 허미인처럼 폐서인이 되거나 집안 전체가 역모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귀빈, 아니 미인, 지금처럼 시국이 어지러운 때에 황실까지 소란을 벌여 황제 폐하의 심기를 더럽히고 만백성의 웃음을 살까 우려되어 이쯤에서 이 일을 덮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처소에서 반성하며 내가 왜 그대에게 미인의 자리를 내렸는지 곱씹어 보라.”

“……화, 황공하옵니다, 황후마마.”

황후의 서슬 퍼런 눈빛에 원귀빈이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몸을 숙였다.

“호양공주.”

“예. 예, 마마.”

황후가 원귀빈을 무너뜨리는 것을 지켜본 호양공주는, 황후의 부름에 몸을 떨었다.

“그대는 폐하의 친누이로서 지난번 큰 실수를 하고서도 폐하의 자비로움에 기대 용서를 받았다. 이 일은 그대가 황태자를 생각한 충정으로 이해할 것이나, 무위종사정부인으로서의 몸가짐을 바로 하시는 것이 좋겠네.”

“황공하옵니다, 황후마마.”

무위종사정부인으로서의 처신.

황실의 일에서 손 떼고 물러나라는 황후의 경고에 호양공주가 한껏 몸을 낮추었다.

내명부의 소란이 끝나고, 두 사람 모두 황후궁을 나왔다.

“너……!”

원귀빈, 아니 이제 원미인이 된 원승혜가 원망과 독기로 가득 찬 눈으로 뒤에 오는 호양공주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호양공주를 부르기 무섭게.

짜-악!

“악!”

찰진 소리와 함께 원미인의 고개가 매섭게 돌아갔다.

“미인 따위가 감히 황제 폐하의 친누이에게 눈을 부릅떠?”

“너어!”

짝!

원미인의 볼에서 다시 불이 뿜었다.

“아직도 주제를 모르지! 감히 천한 무장 집안 출신의 후궁 나부랭이가 감히 황제 폐하의 유일한 친누이인 나를 농락하려 들었으니 지금과 같은 꼴을 당하는 게다!”

호양공주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원미인에게 매섭게 쏘아붙였다.

“내가 정말로 알량한 네 아들 하나에 우리 태자 전하를 버릴 줄 알았어? 너야말로 나보다 멍청하구나. 난 내가 가진 위치로만 오만을 부리지만, 넌 감히 폐하의 핏줄로 오만을 부렸으니. 덕분에 네 아들은 미인의 아들이 되었구나! 호호호호호!”

호양공주가 원미인을 비웃으며 시원하게 자리를 떴다.

원미인은 잔뜩 독이 오른 눈으로 호양공주의 뒷모습을 노려보았지만, 결국은 조용히 침전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명부의 일이라 하나 황제의 후궁과 친혈육에 대한 일이었다.

황제의 윤허가 없었다면 황후 또한 마음대로 처결하기는 힘든 사안임이 분명했으니.

이 일은 황제의 허락 아래에 황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었다.

* * *

다음 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원미인의 새로운 첩지와 파군의 승전보가 동시에 도착했다.

“귀빈 원승혜는 들으라. 그대는 황제 폐하의 후궁다운 처신을 보이지 못하고 황실의 위엄을 떨어뜨렸으니, 귀빈의 첩지를 거둔다. 단, 폐하의 아들을 생산한 공을 감안하여 미인의 첩지를 내린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다행히 황후는 그녀에게 염녕전을 거두지 않았다.

지금은 딱히 새로 염녕전을 차지할 후궁이 없었으니 자비를 베풀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미인의 첩지를 받아 들고 절을 해야 했던 원미인으로서는 그 장소가 염녕전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끔찍했다.

이제 염녕전의 아름다운 붉은 정원을 볼 때마다 오늘의 굴욕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모든 대소 신료들이 황제의 앞에 몸을 조아렸다.

“폐하, 표기군 대장군 표서량이 제국과 폐하의 은혜를 배반하고 수하들을 데리고 신 제국으로 전향하였나이다. 하나 파군 지휘관인 이황자 전하께서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 내고 신 제국의 공세까지 무사히 저지하였을 뿐 아니라 신 제국 병사 수백을 전향시켰다 하오니, 큰 승리를 거두었나이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이황자 저하의 공을 치하하소서!”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이황자 저하의 공을 치하하소서!”

“하하하! 과연, 과연 짐의 아들이다. 제국의 적통 황자답구나!”

모처럼 조정에서 황제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북회대장군 원수경 또한 신료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삼황자의 외숙이자 미인으로 강등된 원승혜의 오라비인 원수경의 얼굴은 원미인만큼 굴욕적이지 않아 보였다.

며칠 뒤, 승전을 거둔 파군 원정군이 황도로 귀환했다.

당연한 듯 이황자인 진화가 백성들의 선망 속에 군을 이끌었다.

황태자는 병중이라는 이유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황자 전하 천세---!”

“감축드립니다, 황자 전하!”

백성들의 환호 속에 진화는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황궁에 도착했을 때. 

진화는 그를 둘러싼 분위기 속에 확실한 이질감을 느꼈다.

“아이고, 우리 황자 저하,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손님 여러분.”

동 태감이 활짝 웃으면서 진화를 반기는 것까진 이해를 하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 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니.

그런데 건희전 궁인들이 남궁구와 남궁교명을 비롯한 적호단 십 조를 손님으로서 환영한다고? ……진화는 뭐가 이상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