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바뀔 화(譁) : 어부지리(4)
대전.
황제가 굽어보고 대소 신료들이 양쪽으로 물러나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파군 원정군이 승전 보고를 하기 위해 자리했다.
“간악한 역적 군대를 물리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모두 폐하의 은덕이니,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잘 싸운 건 그들이었지만 모든 공은 일단 황제에게 돌리고 보는 것이 예의라 하니.
진화의 선창에 따라 북회군 사마 원자기를 비롯한 원정군 주역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황제의 은덕을 찬양했다.
황제가 흐뭇한 얼굴로 가볍게 손짓하여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제일 먼저 진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살폈다.
다친 곳이 없다 들었지만 그래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 진화의 건강한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얼굴에 가렸지만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눈빛.
제 자식이지만 대소 신료들의 칭송 앞에서도 심드렁할 줄은 몰랐다.
‘허허허, 녀석.’
황제가 고소를 머금었다.
황제는 진화의 덤덤한 눈빛이 나쁘지 않았다.
모름지기 큰 사내라면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화의 뒤로 시선을 옮기자, 거기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커다란 덩치가 눈에 띄었다.
‘성벽에서 무림인들의 활약이 대단했다지? 무림인들이라…….’
반쯤 혼이 나가 있는 듯한 적호단주를 보며 황제가 눈을 반짝였다.
적호단주의 뒤에 있는 이들은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감격과 열망, 희망과 야망으로 가득한 눈빛들.
그들은 잘 모르지만 황제는 제국의 유망한 장수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허허허! 그대들을 보자니 제국의 미래가 밝군.”
몸을 일으킨 이들 면면을 자세히 본 황제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대소 신료들도 몸을 낮춰 황제에게 축하를 전했다.
“제국의 홍복 또한 폐하의 은덕이옵니다.”
이번 원정군의 승리는 이황자를 비롯하여 젊은 장수들이 주축이 되어 얻어 낸 것이라 더욱 뜻깊었다.
제국의 밝은 미래. 든든한 노후.
“하하하하! 이 좋은 날을 이렇게 보낼 수 없지. 군사들을 위해 사흘 동안 연회를 베풀고, 공적에 맞게 후한 하사품을 내리겠다!”
“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이황자와 젊은 장수들을 바라보는 대소 신료들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훈훈했다.
대승을 기념하여 이어지는 연회.
황궁 전체가 흥겹고 들뜬 분위기 속에 특히나 훈풍이 불고 있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건희전이었다.
“우아아아---!”
현오뿐 아니라 적호단 십 조원들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관서겸을 제외하면 모두 어딜 가도 꿀리지 않을 부유한 문파나 세가 출신들이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그들의 거센 반응에 동 태감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오-호호호홋! 황궁 숙수들의 자랑, 낙양전석입니다! 중원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것들로만 진상된 것으로, 특별히 폐하께서 내리셨습니다.”
“오오오오! 부처님도 해탈하다 내려올 광경이로군!”
현오가 광기를 뿜으며 요리를 향해 달려들고, 평소라면 현오를 타박했을 남궁교명과 다른 이들도 말없이 음식 앞으로 달려가기 바빴다.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하는 음식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 태감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후후후후.”
동 태감이 손을 들자, 건희전 궁인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없어지는 요리들보다 빠르게 새 요리들이 채워졌다.
마치 경쟁하듯 음식을 없애고 다시 채워 넣는 광경을 보며, 진화는 수상쩍다는 듯 동 태감의 동태를 살폈다.
‘설마, 배를 터뜨려서 복수를 하려는 건가?’
진화의 의심 가득한 눈빛과 마주친 동 태감이 볼을 씰룩거리며 만면 가득 웃어 보였다.
“우리 황자님, 부디 많이 드십시오. 호호호호호!”
진화의 식사 시중에 직접 나서며 동 태감의 웃음소리가 더 높이 올라갔다.
‘……뭐지?’
진화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지만, 입 앞으로 다가오는 육즙 가득한 만두 앞에 자연스레 입을 벌리고 말았다.
* * *
진화와 일행이 배가 터지도록 대접을 받으며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서야 진화는 건희전 궁인들이 내내 기분이 좋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내 식탁에 오르는 ‘억’ 소리 나는 음식을 보고 모를 수가 없었다.
궁내부에서 내려오는 하사품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진 것이다.
‘신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늘 싸우는 것이 일인 무림인으로서 진화는 황궁이 유별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진화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신 제국에 승리한 공으로 내려온 하사품은 첫날 낙양전석으로 끝이었다.
다른 것은 모두 건희전으로 들어온 부식과 식자재 등이었다.
건희전으로 들어오는 부식과 식자재 등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해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황궁은 황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었으니.
최근 황궁에서 신 제국에 승리한 것보다 더 화제가 되는 것이 바로 황태자의 몰락이었다.
현재 조정에서는 현 황태자의 폐위론을 언제 꺼낼지 시기만 살피고 있었고, 강력한 경쟁자였던 삼황자의 모친인 원귀빈이 스스로 미끄러져 미인 자리까지 떨어졌으니.
적통 황자라는 혈통과 하남 조씨라는 든든한 배경, 스스로 빛나는 공과를 성취한 진화가 다음 황태자가 될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게 황궁의 분위기였다.
이번 전쟁으로 진짜 진화가 얻은 것은 황제의 하사품이 아니라 다음 황태자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여 눈치 빠른 궁인들은 벌써부터 건희전을 동궁 대하듯 했고, 황실의 자잘한 예산과 자재를 분배하는 궁내부조차 스스로 건희전의 눈치를 보고 내주는 물품들을 달리했다.
그러니 건희전에 예산과 물산이 넘쳐 나고 건희전 궁인들의 콧대가 하늘로 치솟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황자 전하, 밖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
그런 영문을 알 리 없는 진화는 호칭을 틀리게 말하는 동 태감을 의아한 듯 보았다.
“후후후후후.”
“…….”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눈까지 찡긋대는 동 태감의 추태에 진화는 그냥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진화를 찾아온 손님은 실로 의외였다.
“이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고모님.”
호양공주의 깍듯한 인사에 진화가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그 얼굴을 보고 호양공주가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지금 황태자 전하가 버젓이 계신데 호칭은 바로 써야지요.”
“당연합니다.”
진화는 대뜸 찾아와서 공격적인 호양공주를 이해할 수 없었고 호양공주는 호양공주대로 진화를 오해하자, 둘 사이의 분위기가 금세 얼어붙었다.
하지만 결국은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쉬운 사람은 진화를 찾아온 호양공주였다.
“저하의 위치를 바꾼 데에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이 이 사람입니다.”
“……?”
“그러니 부탁 좀 드리지요. 부디 어려운 위치에 있는 형제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태자 전하를 좀 도와주십시오!”
호양공주의 말에 진화는 물론 동 태감과 건희전 궁인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에 호양공주는 다급한 얼굴로 설명을 붙였다.
“태자 전하가 지금 위치를 지키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질서가 바로 흘러가기 위해서라도 태자 전하가 바로 설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궁에는 아무도 태자 전하를 신경 쓸 사람이 없습니다. 굳게 걸린 동궁의 문은 감히 이 사람도 열 수 없는데, 황후마마의 방문마저 거절하고 있으니. 부탁합니다. 부디 우리 태자 좀 꺼내 주십시오!”
호양공주가 몸을 숙이며 진화에게 부탁했다.
진화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호양공주가 쏟아 낸 말 중에서 진화가 제대로 이해한 것은 별로 없었다. 다만, 소맷자락 사이로 살짝 나온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모습에 진화는 호양공주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한테 황태자를 동궁에서 데리고 나와 달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얼떨떨한 진화의 물음에 호양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문을 열고, 끌고 나오기만 하면 됩니까?”
“아-니오!”
진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양공주가 아닌 동 태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됩니다!”
호양공주도 놀라서 동 태감을 보았다.
그리고 곧 ‘감히 내관 주제에 황실의 일에 관여하는 건가?’ 쌍심지를 켜려는 순간,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황족의 몸은 내 몸도, 남의 몸도, 절대, 함부로 손대거나 때리거나 부수면 안 됩니다! 절대로요! 오줌을 쌀 정도로 겁을 주거나 하는 일도 지양하시고, 혹여, 함부로 궁궐 지붕이나 담을 넘어서도 안 됩니다!”
“아…….”
호양공주가 낮게 탄성을 내었다.
무슨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이르나 했는데, 모두 전적이 있는 것들이었다.
이심전심이라.
하얗게 질린 낯빛과 나이를 뛰어넘는 기억력과 순발력.
진화가 황태자 자리에 앉기도 전에 사달을 일으키게 두지 않겠다는 동 태감의 간절함이 전해졌다.
* * *
진화가 동궁을 찾았다.
온 황궁이 축제 분위기이건만, 동궁은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다.
밖으로는 황태자가 전장에서 부상을 입어 요양 중이라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표서량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죽을 지경이니 궁의 분위기도 초상 중인 것처럼 가라앉았다.
무엇보다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황태자가 걱정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황후가 방문 요청을 했지만 동궁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황제는 그저 스스로 나오게 두라고만 하니.
지켜보는 사람들의 속만 타들어 가다가 결국 호양공주가 진화에게 부탁하게 된 것이다.
“열어라.”
“이, 이황자 저하를 뵈옵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안에 고하겠습니다.”
진화의 등장에 동궁 침소 앞을 지키던 내관이 크게 놀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황태자의 침전 문은 열지는 않았다.
“그냥 열어라.”
“하, 하오나…….”
“나도 일단 해 본 말이다.”
“네?”
황후가 와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었다.
황태자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황후의 앞을 막은 동궁 궁인들의 충정은 기특했지만, 애초에 진화는 황태자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퍼-엉!
“으아아악!”
‘동 태감이 궁 문을 부수면 안 된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동궁 내관의 것인지, 진화의 뒤를 따라온 건희전 내관의 것인지 모를 비명을 들으며 진화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뒤늦게 진화를 말리려는 내관들의 어깨를, 남궁구과 남궁교명이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의 침소에 들어서자마자,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굳이 찾지 않아도 황태자는 탁자에 널브러지듯 앉아 있었다.
그는 밖에서 나는 소란조차 듣지 못한 것인지 술병을 쥔 채 입에 털어 넣기 바빴다.
탁자 위와 바닥에는 이미 다 비운 술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가관이군.”
진화의 목소리에 황태자가 겨우 눈만 돌렸다.
술기운에 게슴츠레 뜬 눈이 진화를 보자마자 매섭게 변했다.
“네가,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잔뜩 혀가 꼬인 발음으로 묻는 황태자의 말을 무시하고, 진화가 그의 손에 잡힌 술병을 빼앗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젠 술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하는 거냐? 차라리, 차라리 날 죽이지그래? 날 죽이고, 이 빌어먹을 피도 전부 빼 가라고!”
타-앙!
쨍그랑!
황태자가 화를 터뜨리며 탁자에 있던 술병들을 바닥에 던졌다.
궁인들이라면 황태자의 이런 행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비명을 삼켰겠지만, 진화는 달랐다.
퍼-억!
“으-악!”
황태자의 발밑에 있던 술병이 터지자, 황태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무, 무슨…….”
퍼-엉! 펑! 펑!
“으아아악! 무슨 짓이야! 그만하지 못해?”
황태자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아래 널브러진 술병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갔다.
겁을 먹은 황태자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챙! 챙! 퍼-억!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고, 터진 술병의 파편이 사방으로 퍼졌다.
황태자도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잠시 후 진화가 술병을 터뜨리는 걸 멈추자.
그제야 황태자가 눈을 부릅뜨고 진화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신을 터뜨릴 수 없으니 술병을 터뜨린 거다.”
진화의 당당한 대답에 황태자가 할 말을 잃었다.
“당신 몸속의 피를 빼 달라고? 그게 그만한 가치가 있나?”
“……뭐?”
“혈성 따위, 용혈에 잡아먹혔을 거라 소리치던 건 어쩌고?”
진화의 말에 황태자는 멍한 얼굴로 진화를 보았다.
“나는 용자다! 천자의 자식이다! 혈성 따위에 용혈이 질 리 없잖아!”
진화는 그때 황태자의 말이 참 인상 깊었었다.
그가 황제의 자식이라는 사실에 얼마나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 말대로 너는 천자의 자식이다. 하찮은 혈성에 잡아먹힌 표서량의 배신이, 네가 이렇게 망가질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었나?”
“…….”
진화의 물음에 황태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젠 황태자도 그게 그렇게 간단한 우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어릴 적부터 외롭고 외로운 황궁 생활을 이어 가던 황태자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사람은 황제가 아닌 표서량이었다.
황제를 존경하고 우러러보았을지언정, 믿고 의지했던 사람은 표서량이었다.
그리고 그가 살아 숨 쉬는 동안 계속해서 원망했던 사람은 죽은 친모 표서은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뒤바뀐 것이다.
표서은은 표서량에 의해 미쳐 버린 것이고, 표서량은 자신을 위해 표서은과 황태자를 이용했던 것뿐이라니.
황태자는 평생 믿어 온 인생의 모든 뿌리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바닥이 무너져서, 단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구나. 산중 짐승들도 살 비비고 정을 나눌 대상이 있는데, 나는, 내게는 한 톨의 애정을 품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황태자가 곧 주저앉을 듯 비틀거리며 말했다.
멍하니 힘이 빠진 얼굴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화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건 나도 잘 모른다. 배워 본 적 없으니까. 하지만 날 구원해 준 남궁세가 사람들이 내게 목숨을 걸어 주었기에, 나는 그들의 애정을 믿는다. 당신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지 않나?”
“……?”
“동궁의 궁인들이 감히 내 앞을 막더군. 그들은 이미 황후마마의 걸음도 막았다, 당신을 위해. 호양공주가 내게 찾아왔다, 너를 살펴 달라고. 그 여자, 지금도 내게 이를 갈면서 너를 위해 고개를 숙이더군.”
“아. 고모님이……!”
진화의 말에 황태자가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사방에 행패를 부렸는데도, 그의 침소 안은 밝고 따뜻했으며 깨진 술병 외에는 어질러진 곳이 없었다.
동궁 궁인들이 그가 무너진 순간에도 조용히 그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주변을 돌아보던 황태자가 진화를 보았다.
“하나만 알려다오. 너는 그들에 대해 잘 안다지? 그들과 한편이 된 표서량은 날 구원한 은인일까, 날 배신한 역적일까? 정말로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이 내 어머니를 미치게 한 것이냐?”
황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진화에게 답을 구했다.
그의 눈은 흐리멍덩하던 방금 전과 달리 또렷하게 진화를 보고 있었다.
진화는 황태자가 이제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다.
“그런 건 당신이 알아서 해라. 표서량을 그리워할지, 그를 원망할지.”
정신을 차린 황태자에게 더 볼일은 없었다.
진화는 황태자의 물음에 어떤 답도 주지 않고 냉정하게 발길을 돌렸다.
그때, 진화의 등 뒤로 황태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는! 넌 원수에게 어떻게 복수하지?”
“……죽인다.”
“표서량은, 정말로 죽었나?”
황태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에 반해 진화는 냉정할 정도로 담담하게 답했다.
“잠시 숨은 붙어 있겠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다.”
진화의 대답에 황태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무슨 뜻이지? 그자가 살아 있다는 건가? 아니, 정말로 곧 죽을 거라는 건가?’
의아함과 안도, 불안, 아쉬움, 분노.
황태자가 복잡한 눈빛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진화에게 물었다.
“나는 네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냐, 네게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이냐?”
황태자의 물음에 진화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것도 알아서 해라.”
진화는 귀찮다는 듯 답을 던지고 몸을 돌려 나갔다.
* * *
진화가 황태자의 침소를 나오자, 동궁 궁인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진화를 보았다.
“들어가 보거라.”
진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동궁 궁인들이 달려가듯 침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진화 일행이 건희전으로 돌아가는 길.
건희전 궁인들을 조금 떨어뜨려 놓고 걸으며, 남궁구가 슬쩍 물었다.
“표서량이 이미 죽은 목숨이라니. 그때는 마녀가 다치는 바람에 화가 나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표서량에게 뭘 한 거야, 도련님?”
그 밝은 귀로 황태자의 침소에서 나눈 대화를 듣고 있던 남궁구가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자 진화가 나서기도 전에 남궁교명이 남궁구를 타박했다.
“공자님을 뭐로 보는 거냐? 반드시 무슨 짓을 하셨을 거다.”
단호하고 자신감 있는 말투.
“흐음, 하긴. 우리 도련님이 ‘죽였다’는 말을 그냥 할 리가 없지.”
남궁교명의 말에 남궁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도련님?”
남궁구는 물론 남궁교명까지, 이미 진화가 표서량에게 뭔가 했을 거라 확신하고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진화는 어쩐지 답을 해 주기 싫어졌다.
“……월하객잔으로 가지. 십이좌회 어른들이 찾으셨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