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벼락 진(震) 태울 화(火) : 혼돈의 시작(4)
신 제국 조정.
이제 신 제국 조정에 혼현마제와 광마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천마제의 부름 없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은 확실히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전령이 늦는군.”
“궁문을 통과했다니 곧 오겠지요.”
광마제에 비해 혼현마제는 웃음을 비칠 정도로 여유로웠다.
남궁진화에게 눈과 팔을 잃은 후로 가장 즐거워 보일 정도였다.
잠시 후, 연락받은 대로 전령이 도착했다.
전령은 광마제와 혼현마제에게 각각 따로 전서를 전하고 자리를 떴다.
“…….”
전서를 받아 든 광마제와 혼현마제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 혼현마제의 눈이 광마제에게 향했다.
[희멸문, 고혈방, 성심당, 광룡귀면대 전멸.]
광마제의 전서에는 짧은 한 줄이 전부였다.
콰직.
광마제의 손에서 전서가 구겨졌다.
광룡귀면대의 전멸이라니.
그 말인즉, 그가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흑룡수조차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아닌가.
광마제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전서를 쥔 손을 떨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혼현마제는 자신의 전서를 마저 읽었다.
광마제의 것과 달리 혼현마제의 전서에는 희멸문 전투의 자세한 정보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창천일검 남궁경의 검에 양손과 목을 내주고 죽었다는군요. 그 아들 창천화룡, 그러니까 당신의 제물이 남은 광룡귀면대를 전멸시켰다니, 허허, 쌓여 있는 원한이 제법인 모양입니다.”
혼현마제의 말에 광마제의 눈이 커졌다.
‘그 녀석이 광룡귀면대를 몰살시켰다고?’
혼현마제는 이전에도 광마제에게 ‘위험한 괴물을 만들었다.’며 경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광마제는 눈과 팔을 잃고 온 혼현마제를 비웃듯 대수롭지 않게 그 일을 넘겨 버렸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혼현마제가 고소를 삼키지 못했다.
‘그때의 일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후후후.’
광룡귀면대의 전멸과 흑룡수의 죽음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창천일검의 무위가 흑룡수를 죽일 정도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약관도 넘기지 않은 남궁진화의 무위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혼현마제 자신에게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 이렇게 광마제를 비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혼현마제에게는 희소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광룡귀면대가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 주고 죽은 덕에, 검마제가 무사히 소리마제와 한수림을 데리고 국경을 넘었다니까. 사패천이 쫓고 있지만 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럴 것을 대비해서 내가 미리 군을 움직여 뒀으니.”
전서를 노려보고 있는 광마제를 향해 혼현마제가 의기양양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쨌든 그의 계획과 안배대로 귀천성은 사패천주의 손에서 한수림을 빼 왔고 그들의 추격도 따돌렸으니.
실패한 사람은 광마제 혼자뿐이었다.
애지중지 만든 흑룡수와 광룡귀면대를 제 제물의 손에 모두 잃었으니, 그 속이 오죽할까.
‘후후후후후! 묵은 체증이 날아가는 듯하군.’
혼현마제는 광마제를 향해 박장대소를 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런 혼현마제의 시선을 읽었을까.
광마제가 서슬 퍼런 눈으로 혼현마제를 보았다.
“좋아하는군, 어리석게.”
광마제의 일갈에 혼현마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혼현마제가 매서운 눈빛으로 광마제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이지?”
“싸움에서 진 주제에 술수에서 이겼다고 좋아하다니. 그러니 네놈의 그릇이 거기까지인 게다.”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설마, 네놈 수하들이 약해빠져서 죽임을 당한 걸 내 탓이라도 할 셈인가?”
혼현마제의 바뀐 말투와 눈빛에서 명백하게 적의가 느껴졌다.
광마제는 그런 혼현마제의 적의를 받고도 코웃음을 쳤다.
“약한 놈의 편을 들 생각은 없다. 세상도 그렇지. 그러니 네놈의 손에 무림이 쥐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무슨 뜻이냐!”
“흥.”
광마제는 혼현마제의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고 차가운 비소만 남긴 채 대전을 나갔다.
“그래 봐야 실패한 건 네놈이다! 그렇게 자랑하던 수하들을 멍청하게 제 제물에게 전부 잃은 건 네놈이라고!”
혼현마제가 광마제의 등 뒤로 발악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광마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전을 나가 버렸다.
타-앙!
혼자 남은 혼현마제는 분을 참을 수 없는 듯 책상을 내리쳤다.
그리고 언제 흥분했냐는 듯 냉정해진 얼굴로 광마제가 나간 문 쪽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늙은이!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네놈이 뭘 알았든 이미 늦었다!”
혼현마제의 한쪽 눈알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번들거렸다.
대전을 나오는 광마제는 오랜만에 생각지도 않은 인물과 마주쳤다.
혼현마제의 제자인 수오였다.
자신을 보고 멈칫하는 수오에게 잠시 시선을 둔 광마제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광마제가 지나가고, 수오는 약간 안심한 듯 한숨을 흘렸다.
일전에 혼현마제를 배신하며 광마제에 협력한 뒤로, 수오는 광마제와 가까워지기는커녕 광마제가 그 일을 언제 발설할까 걱정했다.
다행히 광마제는 수오를 소 닭 보듯 무심하게 대했지만 수오는 내내 불안했다.
그때, 수오의 귀로 광마제의 전음이 들렸다.
-혼현이 진실로 모르는 것 같더냐? 혼현이 왜 아무 일 없는 듯 널 계속 옆에 두고 있을까? 혼현은 왜 제물을 찾지 않을까?
‘……!’
광마제의 전음에 수오의 눈이 커졌다.
수오가 놀라 광마제를 돌아보았지만, 광마제는 이미 본궁을 나가고 있었다.
수오의 시선이 황급히 광마제를 좇았다.
-궁금하다면 찾아오너라.
마제들의 약점은 늘 그들의 제물이었다.
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혼현마제 또한 별반 다를 게 있을까.
광마제는 제 등 뒤에서 흔들리고 있는 수오의 시선을 느끼며 여유롭게 본궁을 빠져나갔다.
* * *
남해 검문에서 정의맹으로 복귀하자마자 진화 일행은 전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수림이 납치를 당했다고요?”
이전의 일로 진화 일행도 고 요망한 사패천 소공자와 꽤 친분도 쌓고 정도 생겼던 참이었다.
가뜩이나 권마제의 일로 출생에 의문이 생기면서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되던 소공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또다시 귀천성의 손에 납치를 당했다니.
진화 일행이 놀라움 반 걱정 반으로 연유를 캐물었다.
“대체 어쩌다가요?”
“아니, 사패천에서 어떻게 소공자를 납치했다는 겁니까?”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그 일에 대해 묻자, 적호단주가 인상을 쓰며 주먹을 들었다.
“그걸 너희가 알아서 뭐 하게?”
“아니, 뭐 굳이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남궁구가 말끝을 흐리는 동시에 진화 일행이 전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적호단주의 얼굴엔 설명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설명하기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터라, 진화 일행은 뒤로 물러나면서도 불만들이 가득했다.
물론 적호단주가 주먹을 내릴 때까지 그걸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너희들을 이렇게 부른 것은 그 일로 너희 중 몇을 차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적호단주가 진화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진화와 일행은 적호단 십 조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위치는 조금 애매했다.
그들은 여전히 정의무학관 소속 관도생의 신분으로 적호단에는 임시로 적을 두었을 뿐이고, 개개인이 무위는 일반 적호단원들의 그것을 훨씬 상회했다.
게다가 관서겸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정파의 내로라하는 명문 대파의 후기지수들이라, 특히 조장인 진화는 남궁세가의 직계인 동시에 제국의 황자로서 황실과 정의맹을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조장인 진화가 적호단주 자신은 물론 정의맹 전체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강한 고수라는 것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적호단의 임수 수행 중에도 진화와 함께 특별대처럼 움직이던 이들은, 이번에도 적호단과는 다른 임무를 받게 되었다.
“사패천에서 한수림 구출에 정의맹의 도움을 요청했다. 십이좌회의 협약에 따라 사패천주가 혼자 신 제국으로 쳐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정의맹은 사패천의 요청을 수락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공교롭게도 정의맹에서 진행할 임무와 때가 겹쳤다. 해서 적호단에서 소수 정예를 선별하기로 했고, 내 생각에는 한수림과 친분이 있는 너희 중 지원을 받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지원할 사람 있나?”
적호단주가 진화와 적호단 십 조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원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이번 정의맹 임무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아, 남궁진화는 사패천의 특별한 요청이 있었다. 넌 그냥 참가해.”
적호단주의 말에 진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머지 일행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우리 도련님이 간다면, 나도 가야지.”
“저도 참여합니다.”
“허허, 그럼 소승도…….”
“아, 넌 안 된다. 이유는 알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남궁구와 남궁교명까지는 괜찮았으나, 현오의 지원은 단호하게 거부당했다.
현오는 답지 않게 침울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으나, 누구도 그가 한수림을 돕지 못해 침울한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적호단주는 물론 진화 일행은 현오가 소림 밖으로 나돌 기회를 놓쳐서 안타까워하는 것이라 확신했다.
“소공자를 돕지 않는다면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긴 것이 되니,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이 바보야, 소공자가 어떻게 되어도 네가 이긴 건 아니라고!”
나하연이 정정당당을 외치며 앞으로 나서고, 당혜군은 이러니저러니 불평을 하면서도 나하연의 옆으로 섰다.
“우리도 함께하겠습니다.”
“의리.”
팽가 형제가 임무에 자원하고, 제갈상과 관서겸은 서로를 한 번 본 뒤 고개를 저었다.
“소공자를 돕고 싶지만, 저희는 이번에 정의맹 임무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제갈상은 후계들이 사라진 제갈세가에서 촉망받는 인재였고, 관서겸은 앞으로 자신의 문파를 이끌며 정의맹에 협력하게 될 것이라, 그들은 특별한 임무보다 정의맹 전체 임무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모두 각자의 입장에 따라 결정을 내렸고, 적호단주는 그들 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결국 한수림을 구하는 임무에는 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 팽가 형제와 나하연, 당혜군이 참여하게 되었다.
며칠 뒤, 각자 임무를 준비하기 위해 헤어지기 전.
“전부 같은 날짜에 일을 벌인다고? 그래서 정의맹 전체 임무는 뭔데?”
남궁구가 가벼운 마음으로 제갈상과 관서겸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갈상과 관서겸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특히 제갈상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씨-익 웃어 보였다.
“역천마제가 신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는 등극식이 있다는군. 그날에 맞춰서 정의맹과 사패천에서 대대적인 깽판을 놓기로 했네. 그놈들 꽤나 열 받겠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지.”
제갈상과 관서겸이 신이 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남의 잔칫날에 깽판을 놓는 거라는데.
“그거 정말 재밌겠군.”
“부럽다.”
팽가 형제가 노골적으로 제갈상과 관서겸을 부러워했다.
남궁교명과 당혜군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팽가 형제와 같은 눈빛으로 제갈상과 관서겸을 보고 있었다.
그때, 남궁구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전부 같은 날짜에 일을 벌이는 거면 우리도 포함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우리는, 너희가 깽판 쳐 놓은 잔칫집에 쳐들어가야 하는 건가?”
“…….”
일순 모두가 조용해졌다.
* * *
이름하여, 이안환안(以眼還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귀천성에게 타격을 돌려주기 위한 정의맹과 사패천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지난 전쟁 이후, 정사가 대대적인 전투를 함께 계획하고 움직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받은 대로 돌려줘야겠지? 귀천성이 남해 검문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척 사패천에서 한수림을 납치한 것과 같이, 우리도 정의맹과 사패천에서 대대적으로 공격을 하는 동안 신 제국에 있는 한수림을 구해 온다.”
간결한 설명에 열 명의 눈이 동시에 끔뻑거렸다.
사패천에서는 사패천주가 나설 수 없는 대신 소천주인 강무련과 사파칠봉이라 불리는 대붕 군조, 홍련 초서비, 소호 이천평 그리고 소녹군 황청산이 왔고, 정의맹에서는 남궁진화와 남궁구, 남궁교명, 팽가 형제와 나하연, 당혜군이 나섰다.
하나같이 정의맹과 사패천에서 손에 꼽히는 후기지수들이었고, 실력만 보자면 후기지수라고 말하는 것도 민망할 정도로 명성 높은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전혀 상황을 이해한 눈빛이 아니었다.
툭. 툭.
누군가의 손에 등이 떠밀린 강무련과 진화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두 사람 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결국 일행을 대표해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임무가 힘들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선 예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강무련과 진화의 물음을 끝으로, 모두 강렬한 시선으로 앞에 선 인물을 보았다.
“하하하하! 예까지 무슨 일은. 복장을 보면 모르겠느냐? 이번 임무의 인솔자는 내가 맡았으니 그렇지. 정의맹 부군사로 있는 남궁진휘일세. 이번 임무대의 대장은 본인이 맡았으니, 모두 그렇게 알고 잘 따라 주도록.”
화통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남궁진휘의 말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누구도 정의맹 부군사가 직접 나설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특히 진화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