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꽃다울 화(花) : 혼돈의 중원(1)
신 제국.
한 황실의 반역자들이 세운 나라로 한때는 한을 멸하고 중원을 차지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현 황제의 활약으로 한 황실이 복권되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명실공히 중원의 지배자로 이전의 성세를 되찾자, 반대로 신 제국은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때 익주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영토는 한중과 파군 일대를 한 제국에 완전히 빼앗기고, 운남 일대는 이민족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아직 성도와 익주군 일대의 풍족한 평야와 폐쇄적인 지형이 신 제국의 중앙만큼은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귀천성의 반정으로 그마저도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혼현마제는 흔들리는 신 제국의 실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중산 일대에 반란이 일었다고 합니다.”
“반란이라기보단 그쪽 호족이 군량미를 내놓길 거부한 거지요. 본래 호족의 힘이 강한 동네가 아닙니까.”
“하지만 당장 중앙의 군을 움직이기도 힘듭니다. 지난 전쟁으로 성도의 호족들도 큰 피해를 보았으니 군사를 더 내놓으라면 들고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신료들의 말을 들으며 혼현마제는 차를 마시는 척 찻잔으로 입꼬리를 감추었다.
성도 호족 출신의 신료들은 열심히 혼현마제의 눈치를 살폈지만, 누구 하나 그의 속내를 읽어 내진 못했다.
‘큰 피해를 본 것 좋아하시네.’
혼현마제가 설레발치듯 미리 군사 차출을 거부 의사를 표하는 신료들을 보며 고소를 삼켰다.
‘예상대로 되어 가고 있군. 호족들이 이탈 조짐을 보이고 있어.’
무엇보다 폐쇄적인 지형으로 각 호족들의 세력이 어느 때보다 강한 곳이 익주였다.
식량과 재화, 유통부터 군사까지 호족들이 쥐고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본래 전 황제 또한 이곳의 호족 중 하나였다.
중앙 성도의 호족들 입장에서 귀천성 세력은 그야말로 집 안 안방에 들어온 힘센 강도들이라, 지금은 역천마제의 무력에 겁을 먹고 엎드려 있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인내할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도 은근히 혼현마제를 압박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 전쟁에서 군사를 잃었지만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앞으로는 군사를 내놓지 않겠다는 압박이었다.
하지만 혼현마제야말로 그들이 이렇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산이 움직였으니, 이제 월수와 운남이 남았군.’
지방의 호족들은 처음부터 충성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통성조차 없는 신 제국과 그 황실은 그들과 서로 이익과 보호를 주고받는 계약 관계라 보는 것이 옳았으니. 그들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한 황실이 물러가고 귀천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한들 귀천성의 지시에 순순히 따라 줄 리 만무했다.
앞으로 귀천성은 지방 호족의 통제는 물론 제국군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지도 몰랐다.
“가뭄이 길어지고 있어서 올해는 수확도 적을 듯한데 농사를 지을 인력과 땅마저 부족하니.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고 유리걸식하는 이들이 늘어날 듯하여 큰일입니다. 걱정이에요. 쯧쯧쯧.”
누군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혼현마제는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누가 들으면 꽤 민생을 챙기는 줄 알겠군.’
혼현마제가 속으로 신료들의 작태를 꼬집었다.
식량이 부족해진 것은 사실이나, 백성들의 생활이 힘들어지고 유리걸식하는 자들이 늘어난 것은 호족들 탓이 컸다.
가뭄과 전쟁으로 이득이 줄어들 것 같자, 호족들이 점점 제 이문만을 좇아 이기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역천마제는 신경도 쓰지 않는 일이지. 멍청한 무림 놈들은 힘만 있으면 지배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저놈들이 지금도 내 앞에서 마음껏 지껄이는데, 앞으로는 어찌할지 뻔하구나!’
힘 있는 호족들의 수탈을 제어할 중앙의 힘이 없어졌으니.
인도와 윤리는 땅에 떨어지고, 유학은 유명무실했으며,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신 제국이 바닥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겨우 이틀 뒤 새로운 황제가 등극식을 하는데, 제국은 벌써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오, 이런 이만 자리를 파해야겠군요. 등극식 준비로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말이오.”
혼현마제의 말에 신하들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독부 은요가 야릇한 미소를 띤 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독부 은요는 역천마제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여인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이 고착화된 신료들 사이에선 혼현마제의 첩실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일까.
혼현마제를 주축으로 세력을 만들까 하여 신건궁에 찾아온 이들은 혼현마제의 축객령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만만해서 찾아온 주제에, 버선발로 환영할 줄 알았나?’
혼현마제는 속으로 그들을 향해 코웃음을 치면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흔들려라! 뿌리부터 흔들려라. 이제 곧 끝이 난다. 역천마제는 나를 결코 쫓을 수 없을 것이다!’
돌아가는 신료들의 뒷모습을 보는 혼현마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완성되었다고?”
혼현마제가 실로 오랜만에 자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독부의 얼굴에 은은한 화색이 돌았다.
“겨우 두 개예요.”
독부는 아쉽다며 애교 부리듯 말했지만, 만년독수에 독부의 혈독이 들어간 필멸독(必滅毒)이었다.
수많은 정파 고수들을 암살하고 천수현인마저 쓰러뜨리며 결코 해독제가 있을 수 없다던 독.
독부의 기와 혈독을 받아 그녀의 손톱과 함께 자라나야 하는 그것은, 지난번 남궁진화에 의해 남은 것들이 부서지면서 하나밖에 남지 않았었다.
그때 이후 독부는 새롭게 독을 만들어 내느라 폐관하다시피 했다.
이제 보니 그녀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두 개면 충분하다. 이제 곧 모든 귀천성도와 만인을 모아 놓은 등극식인데, 등극식에서 황제가 황관을 안 쓸 수는 없을 테니.”
혼현마제가 황관을 쓴 역천마제를 상상하며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수고했다.”
“아아, 가가!”
혼현마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독부의 공을 치하하자, 독부는 창백한 얼굴이지만 더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 * *
이틀 뒤, 등극식 날이 되었다.
역천마제는 귀천성 성도와 만인이 보는 앞에서 황관을 쓰기 위해 과감하게 황궁을 개방했다.
수천 개의 깃발이 중원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무림인들의 등장에 예복을 입은 신료들이 불편한 기색을 풍겼지만, 역천마제는 귀천성 주요 문파의 수장들에게 등극식 제일 앞자리를 내주었다.
등극식을 진행하는 복건주와 몇몇 신료들을 제외하면 최측근 자리는 모두 귀천성의 인사들이 차지하면서, 역천마제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 주는 듯했다.
“황제 등극식에 개나 소나…… 쯧쯧.”
“확실히 시끄럽긴 하군요. 격식 없는 출신이시라 그런지…….”
한 신료가 말끝을 흐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귀천성 무인들부터 성도 백성들이 황궁이 미어터질 정도로 들어왔다.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을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신료들은 못마땅한 기색을 풍기며 자리에 시립했다.
붉은 옷을 입고 허리를 낮춘 그들의 모습은 자신들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을 거라 주장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황제 폐하 납시오-!”
황궁 태감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뒤로 검은 비단에 황룡이 새겨진 화려한 용포와 금빛 면류관을 쓴 역천마제 파륜이 등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태산이 움직이는 듯한 존재감이 황궁에 들어온 모두에게 전해졌다.
분명 출신도 알 수 없는 무림인이라 들었건만, 지금 역천마제의 모습은 마치 날 때부터 황제로 태어난 사람처럼 여유와 위엄이 넘쳤다.
마침내.
“황관을 받으시지요.”
복건주가 역천마제의 머리 위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황금 관을 씌워 줬다.
“와아아아아---!”
아직 등극식이 끝나지 않았건만, 이제까지 중 가장 큰 환호가 터졌다.
환호를 뚫고 복건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제고변-! 이 해 하늘을 새로 열어 하늘에 고변하니, 신 제국의 황제로 널리 알리나이다. 제국에 광영이 있으라!”
“제국에 광영이 있으라!”
복건주의 개천사를 따라 대소 신료들이 복창하였다.
이윽고 궁중 악사들의 연주와 함께 역천마제가 천로를 걸어 용좌에 앉고, 그 앞에 오체투지 한 대소 신료들의 축사와 충성 맹세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특별하게 귀천성 휘하 주요 문파 수장들의 충성 맹세도 이어졌다.
흉흉하긴 하지만 용맹한 기세의 무인들의 충성 맹세는 신 제국의 강건함을 보여 준 듯하여 백성들의 호응이 좋았다.
그렇게 등극식이 점점 끝을 향해 가고.
보통 이런 등극식이 끝이 나면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지기에, 분위기는 점점 기대감으로 달아올랐다.
그런데 그때.
“천제는 역적의 황위 찬탈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오체투지 하던 신료들 사이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천하의 역적! 황제 폐하의 시해범! 천벌을 받으리라!”
챙-! 챙-!
황궁을 경비하던 군사들이 돌변하여 검을 빼 들었다.
“까아아아악---!”
“아아악!”
놀란 백성들이 혼비백산 자리를 피해 황궁을 뛰쳐나가기 바빴다.
이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지, 역천마제도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역천마제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이…… 윽!”
“주군!”
놀란 검마제가 급히 역천마제의 곁으로 다가왔다.
잠깐 사이 역천마제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고 간신히 용좌를 붙잡고 선 몸에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역천마제는 눈을 부릅뜨고 누군가를 찾았다.
“너, 너……!”
역천마제의 시선이 혼현마제를 향했다.
검마제가 역천마제의 시선을 따라 혼현마제를 보았다.
갑작스러운 아수라장 속에서 혼현마제는 조용히, 서늘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한 얼굴로 역천마제를 보고 있었다.
‘설마…… 혼현마제!’
이상하다 했다.
전 황제에게는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해 줄 신하도, 인망도 없었다.
게다가 전 황제가 죽은 것은 벌써 수십 일이 지난 일.
등극식을 기회로 역천마제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등극식으로 달라질 만한 것!’
검마제의 눈에 역천마제의 황금 관이 들어왔다.
검마제가 다급하게 황관을 역천마제의 머리에서 치웠다.
챙-그랑!
멀쩡해 보이던 황금으로 된 관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검게 삭아 버린 시커먼 속이 드러나며, 황금 관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것을 본 검마제가 살기를 담아 소리쳤다.
“광-마, 배신이다-! 혼현 놈을 죽여라-!”
검마제의 외침에 광마제가 곧바로 좌수를 휘둘렀다.
쏴아아아아---!
불길할 정도로 검은 기운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채-앵!
혼현마제를 노리던 검은 기운은 그에게 닿기도 전에 뱀처럼 날아든 사슬에 찔려 흩어졌다.
“호오, 네놈도 넘어갔던가?”
광마제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번에 새롭게 소리마제의 자리를 차지한 살각주 보곡성을 보았다.
살각주 보곡성은 광마제를 보며 긴장감을 키웠다.
‘이, 이자가 유일하게 역천마제와 적수를 이룬다는 광마제 구훤이란 말인가!’
번들거리는 눈빛과 마주한 보곡성은 그럴 리 없겠지만 제 등 뒤의 암림혈귀갑이 겁을 먹은 것 같다고 느꼈다.
그때, 광마제의 시선이 보곡성의 뒤에 있던 혼현마제를 향했다.
“쥐새끼처럼 계산하고 있더니 겨우 이거였나? 소리마제를 회유한 뒤 역천마제를 쓰러뜨리면, 나와 검마만 상대하면 된다? 허!”
광마제가 혼현마제의 생각을 읽으며 코웃음을 쳤다.
실제 그의 추측이 맞았든 아니든, 혼현마제는 광마제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상황은 혼현마제와 독마제, 소리마제 거기에 소리마제가 확보한 한수림까지, 역천마제가 쓰러지고 검마제와 광마제만 남은 저들에 비해 확실히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혼현마제의 안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상에 내 편은 없다고 했던가? 네놈이 틀렸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혼현마제가 처음으로 광마제를 향해 웃어 보였다.
“새 하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렇지 않은가!”
“와아아아아---!”
혼현마제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지르자 뒤에 있던 귀천성 휘하 주요 문파 수장들 중 거의 반수 이상이 호응했다.
쉐에에에에---!
“크아아악!”
“이 새끼들! 이 배신자!”
챙! 챙!
“죽어라! 배신자!”
“닥쳐!”
귀천성 휘하 무인들이 반으로 나눠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을 등 뒤에 두고 혼현마제가 의기양양하게 광마제를 보았다.
“어떤가? 다 나의 편이다.”
“뭐? 너의 편? 허! 푸하하하하하!”
광마제가 혼현마제의 말에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예상과 다른 광마제의 반응에 혼현마제가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웃은 광마제가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혼현마제와 눈을 마주하고 물었다.
“정녕 저놈들이 너의 편인가? 너를 따르는 자들이 맞더냐?”
“…….”
광마제의 물음에 혼현마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때였다.
“이게 웬 떡이냐-! 가자-!”
“씨발, 우리 애 내놔!”
이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전혀 예상치 못한 자들이 끼어들었다.
“저…… 허!”
“……?”
소란도 소란이었지만 저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던 광마제가 어딘가를 정신없이 좇는 모습에, 혼현마제의 시선도 덩달아 광마제의 시선을 좇았다.
그곳엔 혼현마제의 악몽에 등장하는 푸른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콰과광----콰—앙!
“남궁, 진, 화!”
혼현마제가 한 자 한 자 짓씹듯 악몽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