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꽃다울 화(花) : 혼돈의 중원(2)
신 제국 황궁을 코앞에 둔 한 객관.
“정의맹은 본래 임무를 이렇게 하나?”
강무련이 창밖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진화도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답했다.
“아니요. 우리도 늘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진의 한복판.
내일 그들의 적이 저 화려하고 거대한 황궁을 제 편으로 가득 채우고 황제에 등극한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 황궁의 코앞에 와 있는 것이다.
창을 열어 밖을 보면 귀천성 무인들이 우글거리고, 한 걸음만 내디뎌도 자신들의 원수를 만날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하다면 다행한 것이, 남궁진휘가 이 객관을 통째로 빌렸다는 사실이랄까.
등극식을 앞두고 값이 오를 대로 오른 곳을 말이다.
강무련이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젖은 이유였다.
“정의맹은 참 돈이 많군.”
“형님 사비로 하신 것으로 압니다.”
“이런 곳을 사비로 빌리다니, 남궁세가 소가주는 돈이 많군.”
“제가 알기로 형님께서 여길 사신 것으로 압니다.”
“……!”
휙!
강무련이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뜨고 진화를 돌아보았다.
진화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강무련을 향해 눈을 끔벅거렸다.
그런 진화를 보며 강무련은 내심 크게 놀랐다.
‘도, 돈이 너무 많아서 이런 객관 하나 사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강무련은 진화가 부족한 경제관념 때문에 ‘상하하하!’를 받은 전설의 만두공자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남궁 공자는 그 남궁세가의 막내이자 한 제국의 적통 황자…… 헉! 지금 적성국 한복판에서 창문 열고 저러고 있던 거야?’
진화가 만두공자인 것은 모르지만, 잊고 있던 진화의 신분을 떠올린 강무련은 다시 한번 놀란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한 제국의 유일한 적통 황자이자 유력한 황태자 후보로서, 진화는 귀천성 이전에 적성국에 와 있는 것이었다.
그 적성국 황궁을 코앞에 두고 여유로운 진화의 모습에 강무련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놀라운 배포로군. 저 정도는 되어야 약관에 경지를 넘을 수 있단 말인가!’
“허어, 흠…… 과연.”
진화는 저를 두고 나른했다, 놀랐다, 감탄했다를 반복하는 강무련을 보며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한수림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정한가 보군.’
진화는 한수림을 아끼던 강무련의 우애를 떠올리며 그의 상태를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 * *
등극식이 있기 하루 전 남궁진휘가 일행을 불러 모았다.
“뭐야? 이제 작전 회의 같은 걸 하는 건가?”
“정파 놈들은 무슨 생각인지.”
사패천의 이천평과 황청산이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말끝마다 ‘정파’를 운운하며 시비조로 구는 것에 대해선, 유감스럽게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일행의 인솔자이자 임무의 책임자인 남궁진휘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작은 이들, 어서 자리에 앉게.”
“이……!”
“이 덩치를 봐! 대체 뭐가 작다는 거야!”
“하하하! 우리 소(小)호와 소(小)녹군의 덩치는 물론 크지만, 앞으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 짧게 줄인 말은 유용하지 않겠나? 우리만의 암호일세.”
흑수파 소호 이천평과 녹림의 소녹군 황청산의 항의는 씨알도 먹혀들지 않았다.
언뜻 남궁진휘가 그들을 놀리는 듯하기도 했다.
이천평과 황청산이 씩씩 콧김을 뿜으며 자리에 앉자, 남궁진휘가 모두 자리한 것을 둘러보며 말문을 열었다.
“자, 내일 드디어 등극식인데, 우리 임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나?”
“무사 탈출?”
“아니, 그 전에 임무 완수부터 해야지.”
“귀천성 놈들이 바글바글한데, 아무나 죽여도 귀천성에 타격을 줄 수 있겠군요.”
남궁진휘의 말에 일행이 말 잘 듣는 학생들처럼 한마디씩 꺼냈다.
강무련은 물론이고 이천평과 황청산도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남궁구, 남궁교명, 팽가 형제와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초서비도 당혜군, 나하연과 어울려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동안 남궁진휘에게 팔려 온 노예부터 힘센 무희, 짐짝, 하인 등등 두루두루 하찮은 취급을 당하느라, 나름 유대감이 쌓인 듯했다.
남궁진휘가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모두 틀렸네.”
얄미운 한마디에 모두가 주목했다.
“그럼 뭡니까?”
“한수림.”
남궁진휘의 대답에, 곳곳에서 김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니, 그건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애초에 우리 애를 구하러 여기 온 건데요?”
“그러니까. 한수림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나?”
“아!”
“그걸 알아낸 겁니까? 어떻게요?”
이제야 크게 감탄하는 소리.
저들은 설마, 그냥 황궁에 쳐들어가서 한수림을 찾을 생각이었던가.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당연한 말에 감탄하는 사패천 무인들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보았다.
어쨌든 남궁진휘는 원하는 답을 얻은 듯 씨익 웃어 보였다.
“마제들이 한 공자를 돌보고 있을 리 없고, 궁녀들이 신건궁 모처에서 어린아이를 돌보고 있다는 소식을 알아내었네.”
“그걸…… 알아내었다고요?”
“후후, 애 키우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나? 신건궁에도 한바탕 소란이 있었나 보더군. 한 공자가 잘해 준 덕에 알아내는 게 쉬웠어.”
남궁진휘가 그렇게 말하면서 은자 주머니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무련을 비롯한 사패천 무인들은 ‘아, 저자가 무슨 짓을 했든 또 돈으로 해결했구나.’ 생각했다.
“그런 걸 보면 세상에 우리 진화 같은 아이는 참 흔치 않아. 우리 진화야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까지 완벽한 아이였으니까.”
“…….”
그런 적 없었다.
진화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귀가 붉어진 진화가 뭔가 부정하기도 전에 남궁진휘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나와 소천주가 한 공자를 구할 것이네. 신 제국 황궁의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덕에, 한 공자가 있는 곳을 찾아 데려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하네. 자네들은 그 잠깐 동안만 등극식에서 모두의 시선을 잡아 두면 되는 것일세. 다만 한 공자를 구한 즉시 백성들 틈에 숨어 탈출해야 하니,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말 것. 무엇보다 퇴로를 만들어야 하는 그대들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네.”
“결국 정신없게 깽판 치고 있으라는 거네.”
남궁구가 깔끔하게 임무 내용을 정리했다.
“에이, 깽판이라면 우리 특기지!”
“치고 빠지는 거라면 우리도 어디 가서 지지 않는 편이다.”
황청산과 남궁교명이 경쟁적으로 말하며 자신감을 보였다.
남궁진휘가 한수림의 위치와 호위 상태에 대해 알아 온 덕에 임무는 몹시 수월할 듯 보였다.
다들 의욕적인 모습으로 흩어졌다.
그때, 남궁진휘가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 진화를 붙잡았다.
“몰래 잠입해서 한 공자를 구하려다가 놈들의 집중 공격을 받는 것보다, 등극식이라는 소란을 이용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이 작전에서 중요한 건, 한 공자를 구하는 즉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남궁진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진화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마치 ‘할 수 있지?’ 하고 묻는 듯했기에, 진화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진화의 대답에 남궁진휘가 안심한 듯 웃으며 진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미 제 키만큼 다 자란 동생이었지만 남궁진휘의 손길은 언제나처럼 애틋했다.
* * *
물론 소란을 일으키려 준비했던 진화 일행도 이런 걸 예상했었던 건 아니었다.
너무 당연하고 여유롭게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가야지!’라던 남궁진휘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았다.
‘설마 형님께선 알고 계셨나?’
그런 생각을 진화만 한 것은 아닌지, 남궁구와 초서비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이내 말도 안 된다며 털어 버렸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들이 난리를 피우지 않아도 난리가 저절로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남궁진휘의 주장대로 일단 등극식장으로 뛰어들었다.
남궁진휘와 강무련은 어느새 한수림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고, 이제 진화 일행이 움직일 차례였다.
쉐에에엑--!
챙챙! 채-앵!
등극식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군사들은 군사들끼리 싸우기 시작하고, 거기에 귀천성 무인들까지 한데 섞여서 전투를 시작했다.
진화의 눈이 부지런히 상황을 파악했다.
“일단 우리의 퇴로를 확보할 수 있도록 백성들이 빠져나가는 속도를 통제한다.”
“어, 어떻게?”
진화의 말에 이천평이 되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진화가 팽가 형제를 보았다.
“……팽수, 팽신, 이곳에 남아 문을 열지 말고 버텨.”
“알겠다.”
“충.”
남궁진휘가 없을 때 적호단 일행은 자연스럽게 진화의 명을 따랐다.
그러다 보니 사패천 무인들도 강무련이 없을 때는 진화의 생각을 우선했다.
“나머지는 상황을 잘 보고 움직인다. 시선을 끌 필요가 없어진 만큼, 적당히 끼어들어서 놈들의 싸움이 한쪽에 유리하지 않도록 전부 죽인다.”
“충!”
“그럼…….”
진화의 시선이 등극식 제일 앞줄에 있는 광마제를 향했다.
마침 광마제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앞줄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가지.”
“오오-! 가자아-!”
“우리 애 내놔라-! 이 쉐끼들아-!”
이천평과 황청산이 검을 들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당혜군과 나하연, 초서비가 귀천성 무인들 사이를 파고들고, 남궁구와 남궁교명은 그저 닥치는 대로 귀천성 무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화는.
콰과광----콰-앙!
다짜고짜 역천마제가 있는 단상으로 천뢰제왕검법 천뢰우전을 떨어뜨렸다.
쉐에에엑-!
퍽! 퍽!
“막아!”
“젠장, 저놈들은 대체 뭐야!”
진화 일행, 아군이 없는 자들은 그야말로 깽판을 부리듯 귀천성 무인들을 몰아붙였다.
그들은 전략적으로 밀리고 있는 귀천성 무인들의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그들에게 구함을 받은 귀천성 무인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태는 결코 반란을 계획한 혼현마제가 예상한 혼란이 아니었다.
혼현마제와 광마제, 검마제는 귀천성 무인들을 상대하는 진화를 금방 알아보았다.
마치 귀천성 무인인 양 흔한 잿빛 무복을 입고 있었지만, 화려한 외모와 그보다 더 화려한 푸른 뇌전이 눈에 띄지 않으려야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검마제가 진화의 검기를 막고 역천마제의 곁을 지킨 사이.
“푸하하하하! 이놈! 제 발로 내 손에 들어왔구나!”
광마제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진화에게 날아가듯 다가갔다.
“이놈--!”
광마제의 목소리에 진화가 그를 보았다.
차분한 표정과 달리 진화의 눈에도 불꽃이 튀었다.
쉐에에에엑---!
“허! 제법이구나!”
퍼-엉!
진화가 마음을 먹고 매섭게 날린 검기를 여유롭게 쳐다본 광마제가 손짓 한 번으로 그것을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진화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쉐에에에엑--!
쉐엑! 쉐엑! 쉐에에엑!
천뢰제왕검법 낙엽이 빛처럼 빠르게, 사방으로 날아갔다.
펑! 펑! 펑!
“크하하하핫! 제법이구나!”
광마제는 뭐가 그렇게 유쾌한지 웃음을 터뜨리며 진화의 뇌기를 막았다.
하지만 그사이, 진화는 광마제의 코앞까지 거리를 깎아 먹었다.
“즐겁나?”
진화의 눈에 푸른 번개가 치고, 광마제가 놀란 얼굴로 진화를 보았다.
광마제의 앞으로 번개가 떨어졌다.
하나둘이 아니라 수천 개의 번개가.
쉐에에에엑--!
섬전십삼검뢰 여여일식-!
펑! 퍼버버버버펑-! 펑!
채 한 호흡을 내쉬기도 전에, 광마제는 안계를 넘어 쏘아지는 뇌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수백의 허초와 수천의 실초가 사정없이 날아들고.
광마제의 얼굴에 희열감이 차올랐다.
‘네가 여기까지 왔구나!’
“크하하하하-!”
광마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퍼—엉!
광마제의 온몸에서 폭발한 기운이 진화의 뇌전을 모두 터뜨려 버렸다.
그리고 광마제의 양손에서 피어오른 검은 실타래들이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수천 마리의 뱀처럼 사악한 기운을 뿜으며 꿈틀거렸다.
“좋아! 좋아!”
광기로 물든 얼굴.
검게 변한 눈동자가 진화를 향하고.
광마제가 진화를 향해 좌우로 입을 찢듯이 웃어 보였다.
“와라! 내게 와라-!”
광마제가 진화를 향해 양팔을 펼치자, 그의 손에 있던 수천 마리의 뱀들이 독니를 드러내고 진화를 향해 날아들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집요하고 잔인할 정도로 폭력적인 소유욕이 진화를 향했다.
저마다 다른 전투를 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진화와 광마제를 향해 모여들었다.
혼현마제는 여전히 충격에 빠진 듯.
“저놈이 왜!”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한 채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혼현마제의 모습이 낯설었다.
“저자를 아시오?”
소리마제 살각주 보곡성은 진화와 일면식이 없었다.
“남궁진화!”
“남궁?”
“정의맹 놈들이 대체 왜! 설마……?”
혼현마제는 보곡성의 물음에 대답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남궁진화의 이름을 곱씹은 것이다.
그리고 뭔가 떠오른 것이 있었던지, 혼현마제의 안색이 돌변했다.
“한수림! 한수림이구나!”
반복적으로 소리를 지른 혼현마제가 신건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쉐에에에엑---!
검마제의 검기가 혼현마제와 소리마제의 발밑을 갈랐다.
“네놈들은 주군의 허락이 있기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검마제가 역천마제의 앞을 가리며 그들을 향해 살기를 뿜었다.
온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혼돈의 아수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