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꽃다울 화(花) : 혼돈의 중원(4)
진화는 광마제를 죽이고 싶었다.
이전 생에 제 몸을 터뜨려 광마제를 집어삼켰듯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죽이고 싶었다.
남궁세가를 몰살시켰던 광마제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광마제를 없앤다면 남궁세가의 위험도 없어지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광마제가 사라진다 해도 남궁세가를 위협하는 위기는 계속 닥칠 것이다.
귀천성은 계속해서 무림을 노릴 것이고 남궁세가는 그 대척점에 있을 테니까.
광마제는 여전히 죽이고 싶었지만…… 이전처럼 그와 함께 죽고 싶진 않았다.
이전 남궁세가의 복수를 하는 것만큼, 지금 남궁세가와 함께하고픈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다.
광마제가 쏘아 보낸 흑룡귀기(黑龍鬼氣)를 향해 뛰어들면서도, 진화는 그 속에서 죽을 생각 따윈 전혀 하지 않았다.
“트아아아압---!”
진화가 온몸의 기운을 쥐어짜 내며 기합성을 질렀다.
조금이라도 힘을 푸는 순간, 광마제의 흑룡귀기가 사정없이 저를 집어삼키고 사나운 이빨로 갈가리 찢어 놓을 것만 같았다.
진화는 기합 한 번으로 거대한 힘과 엄습하는 공포를 물리쳤다.
그리고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천뢰기로 둘러쌌다.
쉐에에엑--! 쉐에에엑!
파파파파팟-!
진화의 검에서 번개가 쏘아져 나오고, 진화는 사방을 둘러싼 흑룡귀기를 향해 번개를 휘둘렀다.
“크아아아악!”
흑룡의 것인지, 광마제 것인지 모를 비명이 울렸다.
“으드득!”
진화가 이를 악물었다.
흑룡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여전히 사납게 진화를 공격하고 있었다.
사나운 기운이 날아들며 진화의 피부를 찢었다.
그러면 진화도 지지 않고 천뢰기로 흑룡귀기를 긁어내렸다.
파파파파팟---!
새파란 뇌전에 흑룡귀기가 거칠게 찢어졌다.
그리고 점점, 진화의 뇌전이 흑룡귀기를 뚫기 시작했다.
“너……!”
새까만 흑룡귀기가 깨어지며 푸른 뇌전이 새어 나오자, 광마제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파지지지직-!
파팟--!
흑룡귀기가 흑룡의 머리부터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양쪽으로 쪼개졌다.
꺄아아아아아---!
퍼---엉!
흑룡이 긴 비명을 울며 터져 나갔다.
흑룡귀기가 사라진 자리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진화가 새파란 광채를 뿜으며 광마제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스륵.
저도 모르는 사이, 광마제의 발끝이 흔들렸다.
“……이 정도였군.”
감탄? 한탄?
진화가 천천히 고개를 까딱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혼잣말을 한 건지, 아니면 광마제에게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이 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광마제는 제물의 내면에서 뭔가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
저를 보는 눈빛,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운명?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당신이야. 이제 알겠어, 당신이 왜 거기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진화가 광마제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알았다……고? 네가? 무엇을!”
광마제가 소리치듯 물었다.
저래서는 안 된다.
저를 보는 눈이 저렇게 빛이 나선 안 되었다.
제물은 저를 보며 지난날의 고통을 떠올려야 했다.
고통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눈빛으로 저를 향해 복수심을 불태워야 마땅했다.
분명, 분명 공산 절벽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런 얼굴이었는데…….
제물이 달라졌다.
“대체 왜! 왜 달라진 거지!”
광마제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는 안 돼! 네가 달라지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너는 내가 만들었다! 세상에서 오로지 나, 구훤을 위해 내가 만든 존재라고! 너는 달라져선 안 돼! 그런데 왜! 뭐 때문에 달라진 거냐! 언제부터지?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대체 언제부터 바뀐 거야-!”
광마제가 미친 사람처럼 떠들어 댔다.
그의 눈은 광기로 붉게 물들고 표정은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정말로 진화가 뭔가 큰 잘못을 했다는 듯, 진화를 추궁하듯 노려보았다.
“큿!”
광마제가 광기와 함께 발산하는 기운에 주변에 있던 귀천성 무인들이 신음을 뱉었다.
사방을 향해 번들거리는 검은 기운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거대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진화는 더 이상 광마제의 광기에 겁을 먹지 않았다.
용기를 내고 힘을 내고 어쩌고가 아니라, 이제는 정말로 광마제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진화가 광마제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언제?”
푸-욱!
진화가 땅속에 검을 박았다.
그리고.
쏴아아-!
파파파파팟----!
땅을 파헤치며 거대한 뇌전이 광마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언제, 그건 참 중요한 거야. 안 그래? 시간이 흐르면 무엇이든 언젠가는 반드시 달라지지. 그런데 당신은 그걸 참 싫어해. 아니, 두려워하는 건가? ……죽어 가고 있으니까.”
진화의 눈이 오롯이 광마제를 향했다.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 광마제가 달라진다면, 그건 죽음일 것이다.
“이놈-!”
진화의 말이 광마제의 정곡을 찌르는 것과 동시에, 분노한 광마제가 제게 닿을 뻔한 뇌전을 발 앞에서 짓눌렀다.
쿠---웅!
광마제의 앞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이며 땅이 가라앉고,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뇌전의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진화는 광마제가 제 공격을 막아 냈다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제 확실히 알았어. 당신은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광마제는 강했다.
현경을 넘어서면서 광마제를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 우스울 정도로.
지금도 광마제는 광기를 넘실거리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만, 진화는 온몸의 기운을 한 수, 한 수에 끌어모아 광마제를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화가 웃을 수 있는 것은.
“시간이 흘러 내가 이만큼 강해질 동안, 당신은 그대로야. 당신은 이제 죽어 가고 있는 늙은 몸뚱어리뿐이니, 앞으로도 더 이상 약해지지 않는 것이 고작이겠지.”
시간은 진화의 편이었다.
“허, 그래서? 네놈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천지간이 개벽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쉐에에에에에에엑--!
거대한 악의가 진화에게 날아갔다.
진화가 땅에 박은 검을 빼 들고 날을 세웠다.
“큿!”
지금은 이렇게 버거웠다.
압도적인 힘 앞에 속도나 정확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공 초식조차 무색할 정도로 기운을 내던진 공격이었을 뿐이었지만, 진화는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막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거대한 기운 속엔 더 거대한 악의가 응축되어 진화의 기운을 죽이며 점점 진화를 짓눌렀다.
까득.
‘시간을 거슬러, 천지간은 이미 새롭게 열렸다.’
진화가 이를 악물었다.
“난 당신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죽일 거다!”
파----팟!
진화의 검이 불같은 뇌전을 뿜었다.
제왕무적검법 천하(天下)-!
진화의 검에서 펼쳐진 제왕무적검법이 그 증거였다.
이제 진화는 타고난 혼돈지체나 광마제가 없앤 혈맥에 구애받지 않고, 남궁세가의 모든 검술을 펼칠 수 있었다.
혼돈지체가 가진 천뢰기와 천뢰제왕신공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으며 벽을 넘어섰고, 진화는 드디어 남궁세가의 다른 검술을 펼칠 수 있다는 데에 기뻐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진화가 자신이 한계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넘어섰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진화도 이제 그것의 의미를 알았다.
퍼-----엉!
광마제의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거대한 기운의 여파가 등극식장 전체로 흩어졌다.
“크엇!”
땅이 흔들리고, 다수의 무인들은 내장이 진탕된 듯 몸을 비틀거렸다.
거대한 힘과 힘의 충돌.
이번에는 천뢰기가 번뜩이지 않았다.
아니, 빛을 뿜을 새도 없이 모든 충돌의 힘을 광마제의 기운과 맞서는 데 쓴 것이었다.
진화는 이제 자신의 힘이 번뜩이는 뇌전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진화야!”
남궁진휘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궁진휘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된 것이다.
“당신은 내 인생을 망치려 했던 악당이지. 단지 그것뿐이야.”
광마제를 죽이고 싶지만, 광마제와 함께 불행해질 필요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동귀어진의 수(手)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으니.
“다음엔 반드시 죽여 주지.”
진화는 이제 광마제의 죽음이나 그의 불행보다 저와 제 사람들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놈---!”
진화가 도망치려 하자, 광마제가 진화를 붙잡을 듯 손을 뻗었다.
쏘아아아아아--!
수십, 수백 갈래의 흑룡이 진화를 붙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진화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광마제의 집착을 베어 내듯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에에엑--!
제왕무적검법 불위--!
진화는 남궁세가가 제게 준 자유를 마음껏 휘두르며 광마제의 흑룡귀기를 베었다.
그리고 새파란 검기가 광마제를 향해 쏘아졌다.
퍼-엉! 펑펑!
광마제가 진화의 검기를 튕겨 내며 사방으로 그 여파가 튀었다.
“으아아악!”
“아악!”
본래도 아수라장이었던 등극식장이 더 혼란에 빠졌다.
그 틈에 진화는 남궁진휘가 있는 곳으로 갔다.
“형님-!”
진화를 본 남궁진휘가 환하게 웃으며 진화를 맞았다.
“어서 가자!”
“팽수, 팽신, 문 열어!”
“작은 이들이 길을 트게!”
“아오, 젠장-!”
“우아아아아아----!”
팽수와 팽신이 막고 있던 문을 열자, 그 앞에 바둥거리고 있던 백성들이 썰물처럼 쏟아져 나갔다.
진화와 일행은 그 틈으로 함께 사라졌다.
“크아아아아---!”
등 뒤로 분노한 광마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 *
한편.
챙! 챙챙!
성문이 열리기 전까지 소리마제가 된 살각주 보곡성은 검마제의 검기를 막아 내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검마제는 역천마제의 곁을 지키면서도 혼현마제와 소리마제의 동선을 조종하며 그들의 발길을 붙잡았고, 소리마제와 혼현마제는 그런 검마제의 검을 막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혼현마제도 검마제의 검기를 쳐 냈다.
챙-!
현홍사가 끊어지면서 혼현마제의 볼을 할퀴었다.
혼현마제가 신경질적으로 피를 닦았다.
“젠장!”
본래의 계획이라면 벌써 군대가 들어와서 힘을 쓰지 못하는 역천마제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몰아내었어야 할 시간.
하지만 와야 할 군대는 오지 않고, 오히려 혼현마제 자신의 군대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모든 것은…… 대사마 복건주 때문이었다.
“어째서 배신한 거지! 애초에 역천마제를 싫어한 것이 아니었나!”
혼현마제가 역천마제의 곁에 선 복건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복건주가 그런 혼현마제를 향해 코웃음을 날렸다.
“싫었지! 우리가 만든 제국에 갑자기 끼어든 자들이니까. 그런데 네놈은 역천마제와 다른 자인가? 제국을 노린 도둑인 건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왜 역천마제를 택한 거지?”
“허!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겁이 많든 적든, 여우가 어찌 호랑이가 될 수 있을까!”
복건주의 말이 비수처럼 혼현마제를 찔렀다.
혼현마제의 머릿속에 광마제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약한 놈의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혼현마제가 분한 얼굴로 복건주와 검마제, 그리고 아직 용좌에 쓰러진 듯 앉은 역천마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군대마저 반으로 나뉜 이상 상황은 자신들에게 불리했다.
신 제국의 대소 신료와 장수는 혼현마제보다 복건주를 더 따랐다.
게다가 지금은 광마제가 남궁진화에게 정신을 쏟고 있지만…….
‘한수림! 놈을 빼앗기는 것도 문제지만, 놈을 뺏기고 정파 놈들이 물러서면 광마제의 분노가 우리를 향할 거다. 그 전에 물러서야 해.’
혼현마제의 눈이 부지런히 상황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에 남궁진휘와 한수림을 안은 강무련이 보였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군. 이만 물러나지.”
“괜찮소?”
“이미 계획이 서 있으니 걱정 마시오.”
혼현마제의 말에 소리마제 보곡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혼현마제는 하늘 위로 기운을 쏘아 신호를 보냈다.
퍼-엉!
혼현마제 쪽 사람들이 서 있는 뒤편으로 혼현마제의 기운이 부딪히고, 신호처럼 그곳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싸우고 있던 귀천성 무인들과 군사들이 성문 밖으로 나갔다.
“은요, 그년이 준비하고 있었던가!”
검마제가 살기를 뿜으며 성문 쪽을 노려보았다.
파앗--!
소리마제가 흑 가루가 담긴 암기를 역천마제를 향해 던지고, 검마제는 그것이 시간을 벌기 위한 유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분한 얼굴로 그것을 막았다.
그때.
검마제의 뒤편에서 무언가,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섬뜩한 기운.
등 쪽에서 오싹할 정도로 불길한 기운을 느낀 혼현마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혼현마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역천마제……!”
혼현마제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하게 굳었다.
“서, 서둘러라-! 서둘러 나가--!”
혼현마제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는 몸을 날렸다.
소리마제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우--------웅!
거대하고 압도적인 기운이 그들의 등 뒤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