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꽃다울 화(花) : 혼돈의 중원(5)
중독된 역천마제를 검마제가 급하게 데리고 떠나고, 포섭된 귀천성의 무인들과 소리마제로 하여금 적당히 광마제를 상대하게 하다가 놓아준다.
그리고 혼현마제는 황궁을 차지하고 남은 대소 신료들과 장수들을 설득한 후 신 제국을 수습한다.
……계획은 실패였다.
갑자기 끼어든 정의맹의 기습에 광마제의 주의를 돌린 대신 한수림을 빼앗겼다.
거기에 복건주가 배신을 하면서 신 제국 중앙 관리들과 황궁 장수들이 역천마제의 편으로 돌아섰으니, 신 제국 황성을 차지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역천마제가 중독된 마당이니 계속 싸워 볼 수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광마제와 검마제의 힘이 혼현마제의 예상을 웃돌았다.
그것이 혼현마제가 지금 아군을 이끌고 후퇴해야 하는 이유였다.
* * *
혼현마제가 쏘아 올린 신호를 보고 독마제 은요가 움직였다.
“열어!”
스르르릉----!
독마제의 명에 따라 성문이 열리고, 미리 준비해 둔 말들도 모두 나와 있었다.
독마제가 성문을 열자 계획한 순서대로 귀천성 무인들이 성문으로 빠져나왔다.
“빨리 나가!”
“갑니다-!”
가장 먼저 나간 야필문 문주가 독마제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독마제도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초롬하게 접힌 눈매에 살기가 번뜩였다.
쉐에에에에엑---!
파삭-! 퍽!
“크어어억!”
“커억! 독…… 컥!”
독마제의 살초가 빠져나가는 야필문 무인들의 뒤를 쫓던 귀천성 무인들의 가슴에 적중했다.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이들의 모습에, 그들의 뒤를 따르던 이들이 주춤거렸다.
“멈춰! 독마제의 독이다-!”
“성문에 독마제야!”
몇몇 이들이 성문 위에 있는 독마제를 발견했다.
독마제의 시선이 그들에게 닿자,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독마제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더 이상 성문으로 후퇴하는 이들의 뒤를 쫓는 귀천성 무인들은 없었다.
여유가 생기자, 독마제의 시선이 반대쪽을 향했다.
“그나저나 정의맹 녀석들 때문에 후퇴 시점이 가가가 원하는 때와 어그러졌네.”
정문으로 우르르 빠져나가는 백성들은 혼현마제의 계획이 아니었다.
‘그 녀석…… 남궁진화!’
독마제가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단 두 개밖에 남지 않은 독조(毒爪).
본래도 전쟁을 거치며 많이 허비했지만, 독마제가 독을 쓰기도 전에 독조를 깨뜨린 것은 남궁진화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오늘, 약관도 넘지 않은 남궁진화가 광마제와 대등하게 맞선 것은 큰 충격이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기운이기에 내 독조를 깨뜨리고 흑룡귀기를…….’
그때.
독마제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은요---!”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독마제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창백하게 질린 혼현마제의 얼굴과 그 뒤로…….
‘여, 역천마제!’
대낮에도 선연한 붉은색 안광이 번뜩이는데,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모골이 송연하고 온몸의 피가 바닥으로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문을 닫아! 어서!”
독마제가 비명을 지르는 듯 소리를 질렀다.
“예? 아직 다 나오지 못했는데…….”
“어서 닫아!”
독마제의 명령에 수하들이 급하게 성문을 닫기 시작했다.
스르르-릉, 덜-컹!
혼현마제와 소리마제가 제일 나중에 나오다시피 했지만, 여전히 안에는 그들을 따르던 무인들과 병사들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혼현마제와 소리마제가 성문을 지나자마자, 성문은 굳게 닫혔다.
“달려라! 최대한 멀리 달려라-!”
다급하게 도망쳐 나온 것도 모자라 혼현마제가 계속해서 수하들을 재촉했다.
혼현마제의 다급한 명에 따라 귀천성 무인들과 군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독마제도 성문에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우----웅.
“……!”
몸을 날리던 독마제 은요는 뭔가 거대한 기운이 등 뒤에서 그녀를 밀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퍼------엉!
단단한 성문과 성벽이 터져 나갔다.
“꺄---악!”
독마제 은요는 그녀의 몸을 밀어내는 충격과 함께 성문 앞에 있던 마장에 처박혔다.
쿠—웅!
저항할 수도, 도망칠 겨를조차 없는 압도적인 힘.
“커헉! 아, 안…… 돼…….”
피를 토하며 일어난 독마제 은요는 몸을 추스르거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필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성문과 성벽이 터져 나갔지만 흔한 바위 조각, 흙먼지 하나 날아들지 않았다.
남은 것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함뿐이었다.
대전 앞에 마련된 황좌로부터 혼현마제 일파가 빠져나간 성문까지.
거대한 산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
용의 발톱이 긁고 지나간 듯 거칠게 헤집어진 땅과 그 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죽었다.
남아 있는 시체만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아마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이들 또한 그 정도는 되었을 것이었다.
압도적인 광경 앞에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역천마제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기껏해야 몰래 도망가거나 뒤를 노리겠거니 생각했는데, 설마 짐의 황관에 독을 바르고 내 제국을 통째로 훔치려 할 줄이야. ……허허허! 혼현 놈의 욕심이 내 예상을 웃돌았구나.”
역천마제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주군, 몸은…….”
“독기를 제어한 정도다. 독부 년이 독조를 침으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넣게 했구나.”
“…….”
역천마제의 말에 검마제의 턱이 꿈틀거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조용히 숙인 고개 아래로 살기 어린 눈빛이 번들거렸다.
독기 혹은 이질적인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황관을 쓰기 전에 역천마제가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독부의 독조는 말 그대로 그녀의 피와 살, 기가 뭉친 손톱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생명체의 부산물이니, 향도 없고 맛도 없고 이질적 기운 또한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천하의 역천마제조차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역천마제는 그 사실이 재밌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허, 며칠은 꼼짝없이 정양해야겠군.”
역천마제의 웃음에 검마제와 광마제 그리고 복건주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곧 웃음소리가 멈추고.
역천마제가 남아 있는 등극식장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아수라장이 끝이 나고 엉망진창이 된 곳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눈에 독기가 가득 찬 수하들이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밌는 등극식이었어.”
엉망이 된 등극식과 뼈 아픈 수하들의 배신에 대한 감상으로 하기엔 너무도 짧은 소회였다.
역천마제는 남은 귀천성 수하들과 대소 신료, 군사 들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남은 이들을 치료하고 모두 황궁에서 불편함 없이 조치하게.”
“황명을 받드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복건주가 새로운 황제의 명을 공손하게 받았다.
자비로운 첫 황명에 남아 있는 신료들과 병사들, 귀천성 수하들이 모두 자리에서 부복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끝까지 그의 편에 남은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역천제가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검마제와 광마제가 따르고.
복건주와 남은 신료들은 아수라장의 흔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허!”
남은 흔적을 바라본 복건주가 저도 모르게 허탈한 듯 한숨 소리를 크게 뱉고 말았다.
다른 이들도 숨을 죽이고 있을 뿐 복건주와 같은 마음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세 곳의 세력이 얽혀서 벌어진 아수라장이었다.
그런데 남은 것이 너무 없었다.
역천마제의 가공할 한 수에 쓸려 나간 자리에는 핏자국도, 상처도, 죽음의 끔찍한 흔적 따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겨우 시체를 남긴 이들조차 팔, 다리 혹은 머리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가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마치 죽음이 본래 그러하다는 듯.
“하늘이 거두어 간 것 같군.”
복건주의 말에 몇몇 이들이 소리 없이 동의했다.
* * *
번쩍----!
심상치 않은 기운에 뒤를 돌아본 진화 일행은 강렬한 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느낌.
광마제나 검마제의 기운을 아는 진화조차 처음 느껴 보는 기운이 이었다.
‘역천마제인가.’
멀리서도 느껴지는 기운의 여파에 진화가 눈매를 좁혔다.
귀천성의 진짜 힘은 역천마제의 무위라 했던 제왕검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들이 도망친 뒤 신 제국 황궁에 뭔가 큰일이 있었던 듯했다.
그때.
“자, 자!”
남궁진휘가 신 제국 황궁 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일행의 주위를 환기했다.
“일단 우리는 가는 길 가자고. 저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우리에게 그리 나쁜 것은 아닐 테니까.”
남궁진휘가 일행을 다독이며 발길을 재촉했다.
갑작스러운 혼현마제의 반란으로 그들의 일이 수월해지긴 했지만, 신 제국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일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 소가주는 저런 것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나 보군.”
“뭔들, 저자가 놀랄 일이 있겠습니까?”
강무련의 감탄과 같은 말에 이천평이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신 제국에 와서 한수림을 구해 내기까지 내내, 남궁진휘의 모습은 얄미울 정도로 능숙하고 여유가 있었으니. 이천평이 느끼는 불만은 그저 질투 날 정도로 잘났다는 것 하나였다.
강무련도 그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 또한 남궁진휘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강무련은 겉으로 자신의 졸렬함을 드러내는 대신 제 품에 있는 한수림에게 눈을 돌렸다.
“고생했지?”
강무련의 따뜻한 말에 무엇이 불만인지 볼을 부풀리고 있던 한수림이 스르륵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별로 고생은 안 했어. 오랜만에 옆집 망나니 노릇도 해 보고 재밌었어.”
한수림의 말에 일행 모두가 안도한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겨우 열 살도 넘기지 못한 어린아이가 죽을 고비를 넘기자마자 납치까지 당한 터라, 아닌 척하지만 모두 한수림에게 신경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한수림이 강무련을 안심시키기 위해 부러 밝은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런 여유라도 있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한 공자가 있는 곳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황궁 안에서 민폐가 대단했다는데, 옆집 망나니라는 놈의 행패가 장난이 아닌가 봐?”
“사패천의 옆집이 어디지?”
“……녹림.”
남궁구와 남궁교명의 가벼운 물음에 강무련이 조금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모두의 시선이 소녹군 황계수에게 모였다.
“뭐! 산적이 다 그렇지!”
황계수가 당당하게 버럭 했다.
그때, 남궁진휘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자, 작은 이들, 헛소리할 시간에 도둑질하듯이 빠르게 짐 챙겨서 나오시게.”
“아우- 씨!”
“젠장, 남궁만 아니면…… 쓰불!”
남궁진휘의 말에 황계수와 이천평이 씩씩거리며 그들이 묵고 있던 객관으로 들어갔다.
“팽가 형제는 말 몰 줄 알지? 피난 가는 호족으로 위장할 거니까, 힘센 종놈 역할 제대로 하시는 거네. 다른 사람들도 마차에 타지.”
“…….”
왔던 때처럼 마차는 두 대였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문이 달린 마차와 엄연히 수레라고 말해야 할 그것.
다행이라면 이번 수레에는 나무로 된 살이 없다는 것이랄까.
“칫!”
“아우, 진짜 남궁만 아니면……!”
“우리도 남궁이라고…….”
당혜군과 초서비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수레에 오르고, 그 뒤로 나하연이 굳은 얼굴로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남궁구와 남궁교명도 짐수레행이었다.
“하하하, 소공자도 저쪽이네.”
남궁진휘의 취급에는 남녀는 물론 노소의 차별도 없이 공평했다.
한수림의 볼이 또 복어처럼 부풀어 올랐다.
“쓰불! 내가 돌아가면 별호부터 대호로 바꾼다!”
이천평이 거대한 보쌈과 함께 수레에 오르고, 그 뒤로 황계수가 더 큰 짐짝을 들고 수레에 올렸다.
쿵!
“아! 좁잖아!”
“어쩌라고!”
수레에 있던 일행이 아우성쳤지만, 한수림이 공언한 망나니답게 황계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올 때는 팔려 가는 노예처럼 갇혀서, 갈 때는 짐짝과 함께 끼여서.
“으악!”
“악! 살살 몰아! 굽어진 길은 조심 좀 하라고!”
“대체 보쌈이나 쌀 것이지 궤짝은 왜 챙긴 거야!”
“젠장! 다 닥치라고!”
일행의 아우성은 나루에 와 있던 배에 탈 때까지 이어졌다.
올 때보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사람은 팽가 형제밖에 없었다.
“하하하하! 도련님들, 고생이 많았나 보군요. 어서 타십시오.”
정의맹으로 일행을 데려갈 배는 처음과 달리 청화상단의 배가 와 있었다.
배에 기다리고 있던 남궁경옥은 아들인 남궁교명의 핼쑥한 얼굴을 걱정스럽게 보면서도 반가운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
“대체 청화상단이 어떻게 이곳까지 온 겁니까?”
이건 남궁진휘의 계획에도 없던 일이었던 듯, 남궁진휘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자 남궁경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본래 세상에서 상인들이 소식에 제일 빠른 법이지요. 지금 신 제국 국경은 개판이 되었습니다.”
“호오.”
남궁경옥의 대답에 남궁진휘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