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꽃다울 화(花) : 혼돈의 중원(6)
남궁진휘를 위시하여 한수림을 구출하러 정의맹과 사패천의 젊은 고수들이 나선 가운데, 그동안 정의맹과 사패천은…… 전쟁을 벌였다.
“미친놈들.”
“허! 지금 우리 욕을 한 건가?”
“위선자들.”
“좋다고 따라나설 때는 언제고!”
“어쨌든 먼저 때리자고 한 건 네놈들이잖아!”
“허, 참. 기가 막혀서. 지금 누구 때문에 일을 서두르게 됐는데! 멍청하게 있다가 자식새끼도 뺏긴 놈이.”
“뭐야?”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천수현인 제갈길현의 말에 사패천주 한구혈이 버럭버럭했지만, 결국 말싸움에서는 졌다.
애초에 이길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제갈길현이 한 말 중에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 그러니까 내가 전에도 충고했지? 그 오만한 성정 좀 버리라고! 남의 말은 콧구녕으로 듣는 건지 똥구녕으로 듣는 건지, 그 말 해 준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사달을 벌여?”
“쓰불! 누가 그 얌생이 같은 놈이 뒤로 혼현마제 놈이랑 쿵짝 하고 있을 줄 알았나!”
“이놈이 그래도 입은 살아서! 알고 당하는 놈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모르니까 조심하며 사는 거지!”
제갈길현의 말에 사패천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 제갈가주가 있는 곳으로 눈을 힐끗거리며 말문을 돌렸다.
“어쨌든 네 자식 놈도 대단하다. 설마 신 제국이랑 전쟁을 하자고 나설 줄이야.”
사패천주의 말투에 감탄이 묻어 나왔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이제까지 귀천성 세력과 지지부진한 대치를 하고 있던 한중권문의 전장이었다.
제갈가주는 그곳에 적호단과 청룡단, 사패천 무인을 집결시킨 것도 모자라서 본인까지 직접 왔다. 그리고 매일 시간과 때, 장소를 달리하며 귀천성 문파들을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매일 치열하게 전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사연합의 무인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당연하다는 듯 제갈가주의 전략을 수행했다.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그 모습을 보며 감회에 젖어 들었다.
“……세상이 변한 거지. 우리 때야 귀천성 놈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다가 쳐들어오면 막기에 급급했지만, 언제까지 당하고 있을 수야 있나.”
“하긴. 그때 네놈들은 중원이 제 것인 양 늘어져 있다가 당한 거고, 요즘 것들은 반쪽짜리 중원에서 어릴 때부터 귀 아프게 귀천성 놈들에 대해 듣고 자랐을 테니까.”
사패천주의 맞는 말에 제갈길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흥, 너희는 뭐 달랐나? 중원을 전전하던 오합지졸들이 이제 겨우 사람 구실 하고 있으면서.”
“쓰불, 저 새끼들 사람 만드느라 진짜 고생했다.”
“니 새끼야말로 아직 사람 되려면 한참 멀었어.”
“내가 뭐!”
“뭐? 그렇게 말을 해 줬는데도 싸움질하다가 핏덩이 같은 자식 목숨이 간당간당…….”
“이런, 씨불! 그래, 내가 잘못했다! 됐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결국 사패천주가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귀천성 휘하 맹호문의 현판이 부서지고 맹호문의 깃발이 내려갔다.
“와아아아아아---!”
“씨부랄! 누가 술 나오기 전에 나발부터 불어? 빨리 남은 놈들 처리해!”
“예에에에이!”
“죽어라!”
환호 소리에 섞여 적호단주의 목소리가 묻혀 버렸다.
하지만 맹호문 깃발이 있던 자리에 정의맹과 사패천의 깃발이 올라오고, 결국 맹호문마저 멸문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언제 어느 곳을 공격할지 예측할 수 없으니 귀천성 휘하 문파들은 각자 자신들만 생각하기 급급했고, 앞서 두 문파가 전멸당할 때까지도 그들은 연계는커녕 서로 소식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제갈가주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것으로 한중권문 일대가 모두 정의맹의 손에 떨어졌다.
무사들 사이에서 모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제갈가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제갈길현이 불만스러운 듯 혀를 찼다.
“자식새끼들을 제 반만큼이라도 하게 키울 것이지, 쯧쯧쯧.”
자랑스러운 만큼 아쉬움도 크게 남았다.
“그 댁 큰손자는 장가간다더니 아직 그러고 있나?”
“……닥쳐. 니 새끼나 챙기라고. 니 새끼인지 남의 새끼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제갈길현과 사패천주가 비수를 주고받았다.
그때, 마침 백매단원 하나가 한수림의 소식을 들고 사패천주를 찾았다.
“무사히 한 공자를 데리고 광한을 넘었다고 합니다. 곧바로 물길을 따라 정의맹으로 갈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패천주가 한수림의 소식에 기뻐하는 가운데, 백매단원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다른 전서 하나를 제갈길현에게 전했다.
전서를 펼쳐 본 제갈길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런 미친놈! 허허, 허허허허허!”
제갈길현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한쪽에 강무련의 전서를 읽고 있던 사패천주가 놀라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혼현마제 놈이 역천마제의 뒤통수를 치고 귀천성을 반으로 뚝 잘라 나갔다는군.”
“뭐어?”
제갈길현의 말에 사패천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사이, 제갈길현은 냉정을 찾고 눈빛을 번뜩였다.
“백매단원이라고? 가서 제갈가주에게 내가 좀 보잖다 전해 주겠나?”
“아, 예! 예!”
제갈길현의 부탁에 백매단원이 당황한 기색으로 답한 것도 잠시, 순식간에 맹호문에 있는 제갈가주에게 달려갔다.
“어쩌려고?”
사패천주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제갈길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네. 이왕 이리된 거 전쟁을 일으켜야지, 완전 크게.”
제갈길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뭐가 그리 바쁜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전쟁을 또 일으켜? 무슨 말이야? ……젠장, 자식놈이나 그 아비나.”
사패천주는 제갈길현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제갈길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한중권문에서 날아오른 전서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정의맹.
늘 그렇듯 연맹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연맹회의의 주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명문 대파의 장문인들부터 세가의 가주들, 중소 문파 장문인들이 한쪽에 늘어앉아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고 있고, 상석에 있어야 할 정의맹주 운현대사가 그들의 옆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사패천 인물들이 앉아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그들의 모습 또한 조심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때.
벌-컥.
회의장이 문이 열리자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아……!”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군사부의 말단 군사임을 알아본 누군가가 실망한 듯 탄식을 뱉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단 군사의 말에,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 오십니다!”
“드디어!”
“흐음!”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잠시 후, 활짝 열린 문으로 제갈가주와 남궁진휘가 먼저 들어서고.
사람들의 시선이 이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했다.
“아……!”
누군가 탄성을 뱉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신비로운 푸른색의 창천무의를 걸친 제왕검 남궁강을 위시하여 무당파 옥허신검 청연, 소림의 전대 방주인 선승 각오, 쓰러졌다고 알려졌던 천수현인 제갈길현, 거기에 사패천주 한구혈까지.
무림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십이좌회에 속한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 고수라 불리는 이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니미아미쓰불,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잔뜩 모여 있어?”
“한구혈이 놈이 자식새끼 잃어버린 김에 다 모인 거지.”
“지 새끼는 확실하대? 관상에 자식이 없는데…….”
“닥쳐! 무당 도사가 왜 관상을 따지고 지랄이야.”
“……니들 전부 다 닥쳐. 대가리 뽀사 버리기 전에.”
“…….”
회의장에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살아 있는 전설들의 무게감 때문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모두 자리에 앉지.”
제왕검 남궁강이 상석에 앉고 다른 이들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 옆자리에 앉았다.
특히 사패천주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성승의 민머리가 손바닥 자국으로 붉어져 있는 것이, 감히 물어볼 순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 나름의 서열 정리가 있었던 것이 확실해 보였다.
남궁강이 제갈길현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길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모두 놀랐을 거야. 벌써 죽었어도 시원찮은 과거의 망령들이 또 나섰으니 말이야.”
“어, 어인 말씀을!”
“아닙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가문의 광영입니다!”
제갈길현의 말에 정의맹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그의 말을 부인했다.
탕-!
제갈길현이 탁자를 내리치며 좌중을 집중시켰다.
“환영해 주면 고맙고, 배알이 좀 꼴리더라도 참아. 우리가 나선 것은 오로지, 귀천성 놈들의 몰아낼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니까.”
제갈길현의 말에 사람들이 눈이 커졌다.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긴장하고, 또 누군가는 잔뜩 벼른 표정으로 제갈길현의 말을 기다렸다.
“모두가 알다시피 십이좌회는 오로지 귀천성과의 전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네. 그런데 마침, 혼현마제가 역천마제를 배신했네.”
“오!”
“허어!”
사람들의 입에서 저마다 탄성이 흘러나왔다.
“역천마제의 황제 등극식에서 혼현마제의 배신으로 귀천성이 양분되고 신 제국도 사분오열 나뉘었네. 양측이 부딪힌 결과, 혼현마제는 몸을 피했고 역천마제는 황궁에 칩거했으니. 아마도 양쪽 다 세력을 정비하고 힘을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가지려 하겠지. 우리는 지금이, 귀천성과 전쟁을 벌여 이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네.”
“맞습니다.”
“옳은 판단입니다.”
중원.
거대한 땅이었다.
비록 그 땅을 무림이 전부 차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림인들은 거대한 중원에서 자유롭게 살아왔다.
누군가는 빼앗긴 선조들의 영역을 찾을 생각에, 누군가는 이전처럼 모든 자유를 누릴 생각에, 모든 이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제갈길현을 보았다.
수십 년 동안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귀천성을 멈추고 수십 년 동안, 정파와 사파 무인들은 그들을 이기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당분간 십이좌회가 정사연합을 이끌게 될 것이네.”
“물론입니다!”
“믿고 따르겠습니다!”
불만은 없었다.
그저 이전의 영웅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새로운 영웅들과 함께하기 위해.
“지금부터는 제가 말씀드리죠.”
정의맹 총군사인 제갈가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체계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습대로일 것입니다. 정의맹은 옥허신검과 성승께서, 사패천은 지금까지처럼 사패천주님이 맡아 주실 것이며, 정의맹 군사부가 정사연합의 군사부로서 천수현인의 지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정사연합의 수장은 당분간 제왕검께서 맡아 주실 것이며, 외부적으로는 당연히 현학문과 월하회, 한 제국과 협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명성으로나, 업적으로나, 모두가 불만을 가질 필요 없는 인선이었다.
하여 사람들은 당연한 듯 제갈가주의 말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인선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더 관심을 가졌다.
“현재 혼현마제 일당은 익주군으로 물러나 있지만 앞으로는 교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정비할 듯합니다. 역천마제는 남은 신 제국 호족들의 이탈을 막고 힘을 회복하는 데에 중점을 둘 듯하고. 해서, 우리가 먼저 노릴 곳은 당연히 혼현마제 일당입니다.”
“집 나온 여우부터 친다는 건가?”
“흐흐흐, 재밌겠군.”
제갈가주의 말에 남궁세가 뇌선검 남궁조와 사패천 녹림산군 황계수가 자신감을 보였다.
각각 정파와 사파의 대표 격인 세가와 문파에서 자신감을 보이자, 다른 이들 또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적호단과 청룡단이 여우 몰이를 시작할 것입니다. 인원 보충을 위해 각 문파에 필요한 인력 차출이 있을 것입니다. 협조 부탁합니다.”
제갈가주의 말에 적호단주와 청룡단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어디를 어떻게 할지는 정한 것입니까?”
“역천비지.”
“에?”
“놈들이 힘을 회복하기 위해 숨어들 곳이야 뻔하지요. 놈들의 힘의 정수를 모아 놓은 역천비지(逆天秘地). 천수현인과 홍랑대부, 의선문의 협조로 확보하고 있던 역천비록의 해석이 모두 끝났습니다. 놈들보다 한발 먼저 역천비지를 찾아 모조리 없애 버릴 겁니다.”
제갈가주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불을 지펴야 여우가 나오겠지요? 소수정예로 움직이며 은밀하게 작전을 수행할 이들이 필요하여, 실력이며 실적이 출중한 이들로만 정사를 가리지 않고 뽑을 것입니다.”
“새로운 무단을 만든단 말입니까?”
“창천화룡 남궁진화를 중심으로 정과 사, 제국군을 가리지 않는 정예로만 이뤄진 새 무단을 만들 것입니다.”
제갈가주의 말에 사람들의 놀란 얼굴로 제왕검과 남궁진휘를 보았다.
생각해 보면 약관도 되지 않아 경지를 넘었다고 알려진 무위부터 한 제국의 황자라는 신분까지, 정사연합과 제국을 아우르는 무단을 이끌기에 남궁진화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었다.
다만, 남궁세가의 직계라는 신분을 가진 남궁진화가 소가주인 남궁진휘와 동등하게 선다는 사실에 제왕검과 남궁진휘의 눈치를 본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정작 제왕검과 남궁진휘는 시종일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궁세가의 소공자는, 정의무학관 졸업은 한 것이오?”
누군가의 물음에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