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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332)화 (332/425)

남궁마제

성낼 진(嗔) 합칠 화(和) : 새로운 무단(1)

구전으로 전해지던 신화가 문화가 되고, 쪼개진 권력은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그렇게 인간의 역사가 더해지는 동안 사람을 평가하는 가치도 변했다.

인품과 능력 이전에 가문과 혈통, 신분, 재력이 더 절대적인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전 생의 진화가 뇌왕이라 불릴 정도의 무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세가의 사냥개로, 군식구로, 주워 온 화근 덩어리로 불렸던 것은 그러한 가치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화는 지금 제갈가주가 하는 말이 무척 어색했다.

“별도의 무단을 맡게 될 것이네. 무림 명숙들 모두가 자네의 실력은 인정하는 바이니, 큰 반발은 없었네.”

실력을 인정한다라…….

진화가 속으로 제갈가주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경지를 넘어섰으니, 무위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 생에서도 진화는 경지를 넘었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는데, 그때는 모두가 진화에게 무단을 맡길 수 없다고 했었다.

나이가 어리고 인품과 소양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역시…… 그때 내가 반쯤 미쳐서 모조리 죽이고 다니던 걸 알아차렸던 건가?’

남궁세가의 몰락을 비웃던 이들, 남궁세가의 몰락을 바라던 이들, 남궁세가의 몰락을 발판으로 삼던 이들…… 이전 생에도 진화는 귀천성의 잔인성과 전쟁의 혼란함을 틈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었다.

아마 지금 연맹회의에 참석한 이들 중 진화의 손에 죽었던 이들도 몇 있을 터였다.

‘그때는 기를 쓰고 반대하더니 지금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내 손에 무단을 쥐여 준다? ……내가 달라져서일까, 저들이 달라져서일까.’

진화가 조용히 제갈가주를 보았다.

제갈세가는 진화로 인해 이전 생과 입지가 크게 달라진 곳 중 하나였다.

모든 자식들이 죽거나 망가진 가운데, 특히 후계자가 되어 제갈세가를 크게 일으켰을 제갈지현은 지금 한지로 귀향까지 가 있는 상황이니. 모두 그들이 자초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진화나 남궁세가가 깊게 얽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제갈가주의 태도는 처음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니 이전 생에도, 제갈가주는 지금처럼 냉정한 표정과 못마땅한 듯한 눈빛으로 진화를 보았다.

한결같은 제갈가주의 태도에 진화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문제는 자네가 아직 정의무학관 관도생 신분이라는 건데, 마침 이번에 금의생으로 올라갈 시점이니 정의무학관주님과 상의해서 조기졸업으로 처리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되네.”

“조기졸업이라면…… 저 외에 다른 사람들도 가능한 것입니까?”

진화의 물음에, 제갈가주가 진화와 눈을 마주쳐 왔다.

마치 속을 꿰뚫을 듯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다른 이들 같았으면 제법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는 제갈가주가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뚫어져라 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형님께서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쳇.”

진화의 말에 제갈가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는 약간 김이 샌 듯한 표정이었다.

“역시 그 십 조원들을 빼 갈 생각인 모양이군. 하지만 자네 외의 사람들은 장담할 수 없네. 정의무학관은 독립된 기관으로 정의맹에서 여타 부타 상관할 수 없거든. 필요하다면 부탁이야 해 보겠지만, 그것도 관주님의 판단에 따라 결정될 걸세.”

“필요하다면 부탁을 해 주신다고요?”

진화가 놀란 눈으로 확인을 하듯 물었다.

그러자 제갈가주가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당연히 나는 해 줄 생각이 없네. 자네 형님이나 제왕검께 부탁해 보게.”

“역시…….”

변함없이 냉정하고 불친절했다.

하지만 묘하게 우습고 얄밉기만 한 것이, 이전 생처럼 자신을 사지로 모는 느낌은 아니었다.

“무슨 뜻이지?”

제갈가주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다만, 딱히 제가 원한 자리도 아닌데 마음대로 무단을 맡기니 어쩌니 해 놓고 지원까지 없다 하시니, 역시 유명무실한 역할만 하면 되는 건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협박인가?”

“그럴 리가요.”

진화가 소처럼 순진하게 눈을 꿈뻑이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제갈가주를 보았다.

‘협박이군.’

제갈가주가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의맹 무단의 단주라면 다른 무인들이야 출세와 명성을 위해서 앞을 다투어 나설 자리였지만, 진화는 이미 황자라는 신분과 창천화룡이라는 충분한 명성을 가졌다.

정의맹에서 원치도 않은 자리를 맡아 달라 진화에게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쯧, 나는 자네 일에 발 벗고 나설 만큼 시간이 많지 않네. 그러니까 자네 형님이나 제왕검께 부탁해 보라는 것일세. 그 사람들이라면 정의무학관주의 멱살을 흔들어서라도 조기졸업을 내놓게 할 테니.”

제갈가주가 진화를 달래듯 말했다.

실제로도 벽창호보다 답답한 정의무학관주 나무열에겐 그의 성의 없는 부탁보단 남궁진휘나 제왕검의 협박이 더 효과적일 것이었다.

진화도 제갈가주의 도움은 기대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진휘 형님이 공문을 넣어 놓는다고 하시더군요.”

“……!”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형님의 공문을 보셨는지 정의무학관 관주님께서 한번 보자고 하셔서요.”

진화는 황당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제갈가주에게 생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힌 제갈가주의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었다.

“허어! 허……!”

등 뒤로 들리는 제갈가주의 헛웃음 소리에 진화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자식들의 복수를 하거나 제갈지현의 일로 진화를 원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제갈가주가 나름 공명정대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교활하고 뱀 같은 처세로 전쟁을 통해 제갈세가의 이문만 챙겼던 제갈지현과는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주어진 의무와 사명밖에 모르는 양반이다. 가주로서 가문을 최고의 자리에 올리고, 정의맹 군사로서 귀천성을 멸하는 것. 본인의 가치관과 기준을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한 것이 문제였지. 정도를 지키면서 열심히만 한다면 최고가 되는 것이 본인에게는 숨 쉬듯 자연스러웠으니까, 자식들도 잘못된 것만 지적해 주면 본인처럼 될 줄 알았던 거지. 제갈세가가 자식 교육에 실패한 이유이자, 내가 제갈가주를 신뢰할 수 있는 이유다.”

진화는 이제 남궁진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제갈후현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제갈가주를 가까이하는 이유도.

하지만 괜히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고 쓸데없이 오해를 쌓게 한 데에는 제갈가주의 탓도 있었으니, 오늘 일은 이전 생의 마음고생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제갈가주가 자식들의 일로 남궁세가를 원망하지 않는다면, 진화도 자식들의 일로 그를 적대할 일은 없으니. 제갈세가와의 은원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 * *

진화가 정의무학관을 찾은 건 근 이 년 만이었다.

백, 청, 홍의전 때에도 그랬지만, 동의전에서 진화와 일행은 다른 동기들과도 압도적인 무위 차이를 증명했다.

그 이후 진화와 일행은 은의전을 생략한 채 적호단 소속으로서 전장을 경험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더 효과적이라는 게 윗전의 판단이었다.

여기서 ‘윗전’은 정의맹이 아닌 정의무학관 관주와 무사부들이었다.

정의무학관은 엄연히 정의맹과 다른 독립 기관으로, 모든 관도생의 신변은 관주와 무사부들의 책임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왔는가? 앉게.”

백발백염에도 불구하고 크고 단단한 풍채를 가진 장년인.

금룡일권 나무열이 반가운 얼굴로 진화에게 자리를 권했다.

진화의 앞에는 찻잔이 따끈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처음입니다.”

“그런가?”

기품 있는 얼굴로 찻잔을 들던 나무열이 그대로 찻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별로 농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군.”

“송구합니다.”

“허허허허! 괜찮아. 나도 별로 농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진화가 슬쩍 고개를 숙이자 나무열이 호쾌하게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하지만 곧,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정색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경지를 넘은 무인에게 금의생 수업을 받으라 할 정도로 남은 수업이 고품격 고품질의 수련은 아니니 생략하지. 조기졸업 하시게.”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필요하신가?”

“예. 새로운 임무에 함께할 만큼 믿을 수 있는 이들입니다.”

진화의 말에 나무열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흐뭇하게 웃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자네는 온통 무심하더군.”

뜬금없는 말에 진화가 의아한 듯 나무열을 보았다.

“주변에 실력 있는 또래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도통 관심이 없었지. 귀천성 놈들이 관도생들을 습격했을 때에도 자네의 행동은 그렇게 필사적이지 않았어. 마치 남궁세가가 아닌 다른 무인들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보였지.”

나무열의 말에 이번에는 진화의 눈이 커졌다.

그가 진화를 지켜보고 있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지만, 정확하게 진화의 행동을 꿰뚫고 있는 것이 더 놀라웠다.

“수십 년째, 중원 각지에 모인 어린 후기지수들을 수백, 수천 명을 보았네. 수백, 수천 명에게는 수백, 수천 가지 사연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자네와 현오는 특별했지. 귀천성의 손에 크면서 그 속에 무엇을 키웠을지 모르는 이들이니까.”

나무열의 말과 함께, 그와 진화의 눈이 마주쳤다.

일선에서 물러나 허허롭게 차나 마시며 지낸 사람이라기엔 번뜩이는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하지만 곧 나무열이 진화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소림은 현오에게 차별 없는 자비를 베풀어 소림에 대한 애정을 심어 주었고, 남궁은 자네에게 무한한 애정과 가족을 주었지.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우리 정의무학관 또한 자네들에게 제 역할을 한 듯하니.”

진화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나무열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그곳엔 무사부들을 따라 움직이는 일행이 보였다.

“남궁에 대한 애정만으로 가득한 자네의 세상이 저들로 인해 조금 커지지 않았나.”

나무열의 말에 진화의 눈이 커졌다.

저 시끄러운 친구들에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나무열의 말처럼, 진화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남궁세가가 아니라 무림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친우라 부르는 이들과 적호단에 소속되어 청룡단을 비롯해서 많은 정파 무인들을 겪으며, 이전 생에 가졌던 정파 무인들에 대한 원망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남궁이 아닌 다른 무인들이 어찌 되든 무신경하던 처음과 달리, 진화에게도 정의맹에 소속감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그게 전부, 저 시끄러운 녀석들 덕이라고?

저들이 내게 남궁세가만큼의 의미를 가졌다고?

진화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그 모습에 나무열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허! 본래 그런 것이네. 옆에 있는 동무 놈들이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법이지. 허허허!”

나무열이 흐뭇하게 웃는 가운데, 진화가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무열의 웃음이 뚝 끊겼다.

“하지만 우정이 조기졸업을 시켜 주는 건 아니지. 자네처럼 경지를 넘어서서 무사부들 뒤통수를 때릴 정도가 되던가, 아니면 수업을 일찌감치 통과해야만 조기졸업을 허락할 걸세.”

“…….”

“아, 내 뒤통수를 때려도 안 되네.”

진화는 그저 나무열의 얼굴을 본 것뿐이었다.

결코 ‘관주의 뒤통수를 때리면?’ 따위의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두 시진이 지난 뒤.

정의무학관 관주 나무열은 뒤통수를 크게 맞은 얼굴로 진화와 ……그 일행을 보았다.

“허허허허허허허허!”

호탕한 웃음소리가 허탈하게 울렸다.

쟁쟁한 무사부들 중 유이하게 흑면과 백면을 쓰고 있던 무사부들이었다.

그들은 처음 정의무학관에 입관 했을 때에 자기소개를 한 이후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우리는 첩보를 위한 기술을 가르친다. 구체적으로는 정보 수집과 고문 기술 전반이다.”

흑면과 백면 무사부들의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니, 그들의 수업 자체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니까 고문에 대해서 ‘익숙’했다고?”

나무열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남궁구와 당혜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어진 흑면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팽가 형제와 나하연은 실험체를 으깨 놓았고, 현오는 실습을 계속할수록 실험체를 죽이는 손 속도 빨라지더군요. 더 이상의 실습은 무의미했습니다.”

“돼지들을 그렇게 빨리 죽였어?”

“죽은 돼지를 식당으로 보낸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요.”

흑면의 눈이 현오를 향해 번뜩였다.

그리고 흑면의 손가락이 남궁교명과 제갈상, 관서겸을 향했다.

“저 녀석들은 제대로 정형과 정육을 배운 듯했습니다.”

“먹을 것으로는 장난하지 않습니다.”

“시키는 대로 뼈와 살을 바른 것뿐인데요.”

“가난한 소문파 후계자에게 고기는 귀해서 말입니다. 한 점이 아깝죠.”

세 명의 대답에 나무열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긴, 전장에서 이미 이 꼴 저 꼴 다 보았을 테니까. 그런데 백면, 자네도인가?”

나무열이 이번에는 백면에게 물었다.

그러자 백면이 남궁구와 현오를 꼭 집으며 말했다.

“올빼미보다 귀가 밝고, 개보다 코가 좋습니다.”

“…….”

“눈치가 빠르고.”

제갈상과 당혜군이었다.

“눈치를 볼 생각 자체가 없으며.”

나하연과 남궁교명, 관서겸이었다.

“신체조건 자체가 첩보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팽가 형제는 당당했다.

“평가 성적은 ‘하’. 하지만 수업을 통과할 수준입니다.”

마지막 백면의 말에 ‘유감스럽게도’라는 말이 들린 것 같았다.

“젠장, 오늘 정의무학관 식당에 고기가 푸지겠군.”

실험체 하나하나가 예산이라, 오늘 저들이 죽인 돼지 수만 해도 올해 금의생들 예산을 넘어섰으니.

나무열이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현오와 일행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허! 이런 씨…… 새 무단의 이름은 시발단이 어떤가?”

나무열의 물음에 진화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저런 사람들이 남궁세가만큼의 의미를 가졌다니.

진화야말로 시발점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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