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성낼 진(嗔) 합칠 화(和) : 새로운 무단(4)
진화의 방에 모두가 모였다.
일행은 저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흥, 조장들이 고상하게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서 뭘 알아냈을라나 몰라?”
이천평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남궁교명을 보며 정의맹 출신들을 도발했다.
그의 도발은 남궁교명 대신 남궁구가 받았다.
“하하하, 우리 조장 얼굴을 보면 몰라? 저 외모를 가지고 어떻게 밖을 나가, 날이 흐려도 얼굴에서 빛이 나고, 거적때기를 걸쳐도 귀태가 좔좔 흘러서. 안 나서는 게 도와주는 거지. 아, 그쪽은 그런 걸 알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모르려나?”
남궁구의 말에 강무련과 초서비가 얼굴을 굳혔다.
외모와 관련해서는 도무지 진화를 부정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흐, 흥. 성실 어쩌고 하더니, 뭘 알아내긴 했나요?”
“그쪽이야말로. 사람들이 뭘 물으면 답은 해 줬어?”
초서비와 당혜군의 눈빛이 날카롭게 부딪혔다.
남궁진휘의 밑에서 함께 고생하면서 정사에 연연하지 않고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마주 앉은 정의맹 출신과 사패천 출신들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때, 그들 사이로 끼어들듯 진화가 입을 열었다.
“알아 온 정보부터 나누지. 일 조부터.”
진화의 말에 남궁구가 나섰다.
“마을 사람들 소문이 흉흉합니다. 신제국이 국경을 닫은 이후 외부인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는데, 한 달 전부터 서너 명의 무인과 학사로 보이는 이들이 나타나더니 지금은 그자들이 심심치 않게 늘어났나 봐요. 마을 사람들이 무복을 입은 무인들을 상당히 경계 중입니다. 그자들이 나타난 뒤로 실종된 사람들이 열이 넘는다고…….”
말을 하는 와중에도 남궁구의 시선이 이천평과 황계수를 향했다.
그들은 처음 남궁구의 경고를 듣지 않고 여전히 검은 무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다.
남궁구는 이천평과 황계수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어떤 눈총을 받았는지 알 만하다는 눈빛으로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이……!”
이천평과 황계수가 눈을 부릅뜨고 남궁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서기 전에 진화가 먼저 다음 정보를 재촉했다.
“이 조.”
“우리는 이 마을의 주변 지형을 돌아봤어요. 사전 정보에 따르면 아가리를 벌린 용의 눈이 있는 곳이 역천비지라, 연기현에서도 이 마을이 유력하다고 했잖아요. 거기에 이제까지 우리가 보았던 역천비지의 공통점을 접목했어요.”
당혜군이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러자 일 조와 삼 조의 반응이 달랐다.
“공통점? 아! 그걸 찾은 거야?”
“역천비지를 본 적이 있다고?”
역천비지를 겪어 본 적 있는 남궁구와 남궁교명, 팽가 형제는 공통점이라는 말에 금방 뭔가를 알아차렸다.
반면, 사패천 무인들은 정의맹 무인들이 자신들에게는 없는 역천비진에서의 전투 경험을 가졌다는 데에 눈살을 찌푸렸다. 진화의 외모만큼이나 부정하기 힘든 확실한 차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꼬투리를 잡자면 못 잡을 것도 없었다.
“그쪽들이 모든 역천비지를 본 것도 아니고, 고작 몇 개의 경험을 가지고 공통점을 확신할 수 있나?”
강무련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러자 제갈상이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역천비지를 본 사람들은 하나를 겪든 수십 개를 겪어 보든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지요. 피와 만년 독수가 흐를 수 있는 수로(水路). 역천비지의 ‘용루가 흘러 모이는 지형’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여 마을 주변에 은밀한 위치에 수로를 만들 수 있는 곳을 중심으로 조사하고 있습니다.”
제갈상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삼 조원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일 조와 이 조가 모두 유의미한 조사를 해서인지, 자신만만하던 삼 조 사패천 무인들의 얼굴이 처음처럼 밝지 못했다.
“삼 조.”
“우린 마을에 있는 수상쩍은 사람들을 조사했소. 확실히 마을에 이방인이 우리만 있는 게 아니더군. 걸음걸이와 행동이 확실히 정파 무인은 아닌 듯했소. 지금 군조가 그들의 뒤를 쫓고 있소. 곧 정체를 알 수 있을 거요.”
강무련이 김이 샌 듯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진화의 표정도 처음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일 조와 삼 조의 정보가 겹치는군. 일 조는 실종된 사람들에 대해 조사하고, 삼 조는 수장한 자들의 정체에 대해 집중하지. 그들이 만약 귀천성 무인이라면 이미 역천비지를 찾고도 남았을 테니까.”
진화의 정리는 가타부타 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간결했다.
진화의 말에 남궁구와 강무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역천비지를 찾아 놓고, 실종된 마을 사람들은 제물로 데려갔는지도 모르지.”
남궁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에 초서비가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놈들의 뒤를 쫓는 우리가 역천비를 찾는 데에 유리하겠네! 제대로 물었어!’
그런 생각을 초서비만 한 것은 아닌지 사패천 무인들이 은근히 미소를 머금었다.
“이 조는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해라. 나와 현오도 합류하지. 각자 조사를 마치고 이틀 뒤 다시 모이는 걸로.”
드르륵, 드르륵.
진화가 마지막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번에도 사패천 무인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못마땅한 듯 보던 남궁구와 남궁교명, 팽가 형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놈들이 뭘 알아내기 전에 마을 사람들한테서 뭐라도 얻어내야겠어.”
“어쩌려고?”
“글쎄. 없어진 사람들이 대부분 늦게까지 술을 즐기던 사람들이라니까. 주정뱅이나 되어 보자고. 누가 알아? 진짜인 줄 알고 그놈들이 우리한테 먼저 붙을지?”
남궁구가 먼저 나간 사패천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일 조원들이 나가고, 이 조도 움직일 준비를 했다.
“멍청하긴. 어차피 역천비지의 위치가 제일 중요한데.”
“우리가 제일 먼저 알아내야 해!”
제갈상과 당혜군이 관서겸과 나하연을 끌고 일어섰다.
그들은 삼 조 사패천 일행은 물론 일 조까지 이겨 먹을 생각으로 기세가 등등했다.
그런 이들의 모습을 보며 진화가 조용히 일어섰다.
“…….”
현오는 진화의 모습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 뒤를 따랐다.
객잔을 나서는 길.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자들이 먼저 알아내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군조 녀석이 뒤를 쫓고 있지만, 주루에서 꿈쩍도 안 하고 있답니다. 그러다 저놈들이 먼저 알아내면 어쩝니까?”
날카로운 초서비의 목소리에 이어지는 이천평의 말.
사패천 무인들 또한 정의맹 일행과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한 놈 데려오죠?”
“…….”
황계수의 의미심장한 말에 대화가 뚝 끊겼다.
더 이상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이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모두 저 말 들었지? 우리도 어서 가자!”
“무슨 일 있어도 먼저 찾아내겠어!”
당혜군과 제갈상은 물론이고 관서겸과 나하연마저도 눈을 빛냈다.
마을 뒤쪽을 향하는 이 조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가는군. 저 녀석이 언제까지 잠자코 있을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분명 한 발자국만 떨어져도 잘못된 점이 한가득 보이는데, 진화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현오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의도적으로 존재감을 줄이고 이 조원들의 뒤를 따르는 진화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일어서던 모습이, 아무래도 멀찍이 떨어지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 * *
그날, 주루조차 문을 닫은 새벽.
“으하하하하! 한잔 더 할까? 한잔 더?”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지.”
“아아앙-! 왜에? 한 잔만 더 하자고, 한 잔마-안!”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내와 그 일행으로 보이는 자들이 술집 앞에 서 있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
마을 사람들도 그들이 이번에 상행을 왔다가 객잔에 묵고 있는 이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크게 경계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난 뒤에는 달랐다.
인사불성이 된 사내들을 걱정스럽게 보면서도,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다들 자리를 피한 것이다.
“…….”
조용해진 주변 분위기를 느낀 사내, 남궁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부러 더 큰 소리로 주사를 부렸다.
“한 잔만! 한 잔만! 아아앙-! 우리 도련님은 너무 까악쟁이야앙!”
“…….”
남궁교명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팽가 형제가 고개를 돌렸다.
연기라는 걸 알지만 역겨운 건 역겨운 거였다.
남궁교명과 팽가 형제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버리고 가지.”
“좋은 생각이다.”
“동의한다.”
남궁교명과 팽가 형제가 남궁구를 길바닥에 던지고 그대로 돌아섰다.
감정이 실리긴 했지만, 분명 그들이 계획한 대로였다.
잠시 후,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남궁구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데려가도 될까? 피는 다 모았다고 했는데…….”
“많아도 나쁠 건 없으니까. 쓸 만하면 돈을 챙겨 주시겠지.”
어둠 속에서 다가온 두 명의 사내가 남궁구에게 손을 뻗었다.
-간다!
-걱정하지 마라. 곧바로 뒤따르고 있다.
남궁교명과 팽가 형제의 전음을 들으며 남궁구가 사내들의 등에 업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한편.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며 황계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의 다리를 걷어내듯 툭 찼다.
“이런 끈질긴 새끼. 결국 불 거면서 버티긴 왜 버텨? 퉷!”
황계수는 피투성이로 죽은 듯 쓰러진 사내를 향해 침을 뱉고는 캄캄한 창고를 나갔다.
밖에는 탁자와 의자에 기대 잠을 청하고 있는 조원들이 있었다.
“흠! 크-흠!”
황계수의 첫 헛기침에 강무련과 군조가 번쩍 눈을 뜨고, 두 번째 헛기침에 초서비가 일어났다.
그리고.
“크흠흠! 이런 씨!”
퍽!
세 번째 헛기침에도 꿈쩍하지 않는 이천평에게는 황계수의 발길질이 돌아갔다.
“일어나, 이 새끼야!”
“아오! 왜 치고 그래? 끝났어? 뭐 좀 알아냈어?”
하품을 하고 일어난 이천명의 물음에 황계수가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황계수의 입으로 모든 일행의 시선이 모였다.
“역시 귀천성 놈들이었습니다. 연기현에 위치한 교룡방 놈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혈정인가 뭔가를 만드는데 인근에서 사람들을 잡아다 모으고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이 있는 곳을 발견한 마을 사람들은 죽였고요.”
“놈들이 있는 곳이 어딘데? 알아냈어?”
초서비의 질문에 황계수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작게 앞으로 턱짓했다.
“저기래.”
황계수의 말에 일행이 눈을 마주쳤다.
“……가 봐야지?”
“위치만 알아내는 거라면 그놈들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확인할 수도 있지 않나……요?”
초서비와 이천평은 물론 황계수와 군조도 강무련만을 보았다.
이글이글 불이 붙은 눈빛이 뭘 원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라, 강무련 또한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내일은 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군.”
“예이!”
“좋았어!”
그동안 정의맹 무인들과 대립하는 걸 불편해하던 강무련의 허락이 떨어지자 삼 조 조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그들은 아직 아침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 따윈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곧장 황계수가 알아낸 곳을 향해 출발했다.
* * *
진화와 현오가 함께 나선 이 조는 넘치는 의욕과 달리 첫날에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두 번째 날.
채 해가 다 뜨기도 전에 이 조는 진화와 현오를 끌고 이번에는 마을 서쪽 산을 뒤지고 있었다.
“분명 여기 있을 거예요.”
“어제는 거기가 분명하다지 않았소?”
“용이 어떻게 틀어 앉았느냐에 따라 용루가 모이는 곳이 다르단 말입니다! 어제 그곳이 아니었으니, 이곳밖에 없습니다! 제갈세가의 명예를 걸 수도 있습니다!”
당혜군의 말에 현오가 툴툴대자, 제갈상이 제갈세가까지 들먹이며 발끈했다.
하지만 그만큼 확신한다는 제갈상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어제보다 더 의욕적인 모습으로 산을 뒤졌다.
진화도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적은 물론이고 짐승들의 기척도 없다. 불이 난 것도 아닌데 숲의 짐승들이 죄다 겁을 먹고 도망갈 일이라면, 더 큰 짐승이 나타난 것밖에 없지.’
진화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기감을 열었다.
솨아아아아아아…….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듣지 않고 있던 부스럭거리는 낙엽 소리, 쥐나 뱀이 지나는 소리, 새의 심장박동이 한 번에 진화의 감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진화가 한곳을 향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저쪽.”
“찾았습니다! 저기 너머입니다!”
진화의 말과 동시에 제갈상의 목소리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오르막길을 올랐던 제갈상이 그곳에서 뭔가 발견한 것이다.
“무복을 입은 사람들이 풀숲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인기척을 줄이고 접근해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갈상이 진화에게 보고하고, 모두가 진화의 결정을 기다렸다.
진화가 현오를 비롯한 이 조원들 하나하나를 보았다.
현오, 당혜군, 나하연, 제갈상, 관서겸.
실력도 실력이지만 팽가 형제가 있는 일 조에 비한다면 은밀한 은신도 가능할 것이었다.
“일단 확인해 보지.”
진화의 말에 이 조원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서로 눈을 맞췄다.
그렇게 조용히 언덕을 넘었다.
언덕 너머에는 가파른 비탈길이 있었고, 비탈길을 내려가면 좁은 협곡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왔다.
‘입구가 좁아. 하지만…….’
확실했다.
사람 두 명이 어깨를 맞대야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길을 따라 협곡 안쪽으로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진화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때.
쉐에에엑---!
검을 뽑는 소리와 함께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젠장, 네놈들 때문에 들켰잖아!”
“그게 우리 때문이라고?”
“그럼 우리 탓이냐? 애초에 우리가 먼저 왔잖아!”
“허어, 조-끼 입고 뒈질 소리 하네! 여긴 우리가 먼저 발견했잖아!”
퍼-억!
챙-! 챙!
싸우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말소리.
분명 익숙한 목소리들이었다.
“남궁 공자!”
“조장님!”
놀란 이 조 일행이 진화를 보았다.
안에서 들리는 남궁구와 남궁교명, 사패천 무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진화는 서늘한 눈으로 좁은 길을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실력 행사밖에 없는 건가.”
낮은 혼잣말과 함께 입김이 찬 새벽 공기를 뚫고 새하얗게 번졌다.
그 모습이 어쩐지 서리가 내리는 듯 서늘한 것이.
진화가 순식간에 좁은 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어, 저거?”
당혜군과 제갈상은 진화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번뜩인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말할 사이도 없이.
파지지지지직--!
새파란 번개가 새벽을 번쩍번쩍 빛내며 좁을 협곡을 뚫고 들어갔다.
쿵! 쿵!
협곡을 이루던 바위가 부서지고 좁은 길이 넓어졌다.
그리고 그 안으로 일 조와 삼 조원들이 잿빛 무복을 입은 처음 보는 무인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 있었다.
“으아아아악---!”
“우아아악!”
“뭐, 뭐야!”
간신히 번개를 피한 조원들이 놀란 눈으로 진화를 보고, 진화가 쓰러진 잿빛 무복의 무인들을 밟고 섰다.
“내 명은 분명 은밀하게 역천비지를 파악하고, 역천비지만 파괴할지 지원단에 전갈을 보낼지 결정한다는 거였을 텐데? 결국 천둥벌거숭이들처럼 함부로 날뛰다가 일을 그르쳤군.”
덤덤한 말투와 새까만 눈동자가 단원들 하나하나를 지나갔다.
“아, 아니, 그게…….”
“우리 때문이 아니라 저놈들이 끼어들어서…….”
진화의 질책에 일 조와 삼 조원들이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들어 줄 생각이 없는 진화는 그저 손에서 뇌전을 번뜩였다.
“침입자다!”
“젠장! 정의맹 놈들이다!”
협곡 안쪽에는 제법 너른 공간이 이어졌고, 한쪽에는 작은 동굴의 입구도 있었다.
그 안에서 잿빛 무복을 입은 무인들과 흑의 복면, 익숙한 모습의 교성흑오대가 뛰어나오고 있었다.
역시 귀천성 무인들이 확실했다.
하지만 진화의 시선은 그들이 아닌 단원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남궁구와 강무련을 비롯한 단원들은 당황한 얼굴로 진화와 뒤에서 달려오는 귀천성 무인들을 번갈아 보았다.
“단원들이 천둥벌거숭이들처럼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는 것도 단주의 실력이라더군. 제대로 임무를 마치지 못한다면, 최선을 다해 실력을 발휘해 주지.”
파지지직……!
새파랗게 번뜩이는 번개가 눈동자 안에서 요동치고, 진화의 손에는 뇌전이 쏘아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파파파파파팟---!
펑! 펑!
“조용히 해결하긴 글렀으니, 모두 죽이고 모든 걸 파괴한다.”
“추, 충!”
진화의 뇌전이 일행을 덮치던 교성흑오대원들을 태워 버리고.
그와 동시에 진화의 명을 받은 단원들이 일 조, 삼 조 할 것 없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실력이 그 실력이 아니었을 텐데…….”
현오는 단원들을 겁박하는 진화를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당혜군의 팔이 그를 끌어당겼다.
“단주가 우릴 보잖아! 어서 움직여, 땡중!”
진화의 눈이 번뜩이며 이 조를 향하고, 이 조원들도 진화와 눈이 마주칠까 얼른 동굴로 몸을 날렸다.
퍼—엉! 쿵! 쿵!
“으아아악!”
콰—앙!
퍽. 퍽. 퍽. 퍽.
“사, 살려…… 줘!”
“아악!”
분명 은밀하게 역천비지만 확인하는 임무였는데…….
이전 생에도 진화는 무단의 단주로서 임무에 나서 본 적이 있었다. 다만 이전 생의 진화는 무단과 함께 움직였을 뿐, 그들을 이끌어 본 적이 없었다.
이번이 단원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임하는 첫 임무였다.
여러모로 아직 서툰 단주 역할이었다.
다만 이전 생에 전쟁을 겪어 본 진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결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화는 조금 소란이 있었지만 결과만큼은 최대한 고요하게 끝내리라 마음먹었다.
잠시 후.
피범벅이 된 일행이 동굴 밖으로 나오고.
진화의 검이 협곡을 베어 무너뜨렸다.
파파파파파팟---!
쿠르르르-쾅! 쾅!
바위가 무너지고 먼지가 자욱하게 퍼졌다.
동굴은 물론이고 협곡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도록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생명의 목소리는 어떤 것도 들리지 않았다.
단원들조차 숨소리를 참았다.
진짜 단주의 실력 발휘를 저렇게 하는 건 아닐 텐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현오가 불경 외는 소리만 조용히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