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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341)화 (341/425)

남궁마제

엿볼 진(診) 그림 화(畵) : 수읽기(6)

“저기! 포구다!”

육림군에서 낙양까지, 중원을 거의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고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올라오는 말에, 내려올 때와는 달리 청해상단에서 가장 큰 배를 타고 물줄기를 거슬러, 힘이 들 때는 배에서 내려 하루 이틀 쉬어 가기도 하면서.

불편함이 전혀 없고 힘든 것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강인한 무림인인 숙청단에게 이 정도 여정은 유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일까.

낙양 포구가 눈에 들어오자, 기운이 넘친 이천평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사패천 출신 일행은 다음 유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모두 뱃머리에 나와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감이 큰 모양이네.”

“현오는 왜 저기 끼어 있냐?”

“동 태감님이고 뭐고, 어제부터 황실 만찬으로 염불을 외더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텐데.”

당혜군과 남궁구, 남궁교명이 기대감이 큰 사패천 출신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와, 저기 봐요!”

이천평의 말에 사패천 출신 일행이 목을 빼듯 포구를 보았다.

수십 개의 황룡기와 사례군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갑주를 걸친 백여 명의 군사들이 모두 포구에 정렬한 채 진화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청해상단의 배가 포구에 닻을 내리고.

진화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군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진화와 숙청단을 맞았다.

“동해왕 전하의 귀환을 감축드리옵니다! 사례군이 황궁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와아!”

진화의 뒤에 있던 사패천 출신 일행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전하.”

“외숙부님.”

사례교위 조정호가 앞으로 나서고, 이제는 경계가 풀린 진화도 그를 반갑게 맞았다.

“강녕하셨습니까?”

“보시는 대로 저는 무탈합니다. 외조부님은 평안하시지요?”

“그분이야 뭐…… 이번에도 꽤 고생하실 겁니다.”

진화가 조위례의 안부를 묻자, 조정호가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낮추며 진화에게 경고했다.

지난번 황궁에 있을 때 조위례에게 서필 교정을 받느라 진화가 고생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하, 하아.”

조정호는 농담처럼 한 이야기였지만, 진화는 크게 웃을 수 없었다.

헤어질 때 조위례가 ‘이다음부터는 다음번에 뵐 때 이어서 하겠습니다.’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화와 일행이 화려한 마차에 오르고.

사례군이 둘러싼 행차가 황궁까지 직행했다.

“휘이, 휘이. 동해왕 전하 납신다. 물렀거라!”

앞에서 군사들이 백성들에게 소리치자, 백성들이 길 양쪽으로 물러나 깊게 허리를 숙였다.

“와아, 씨…….”

그때까지도 사패천 출신 일행은 마차의 창문을 열고 신기한 듯 밖을 구경하기 바빴다.

잠시 후, 진화와 숙청단을 태운 마차가 황성 앞에 멈춰 섰다.

황궁 안에선 황제와 황후, 황태후를 제외한 누구도 가마에 오르거나 말에 오를 수 없었기에, 진화와 숙청단도 성문 앞에서 내려야 했다.

“와아!”

이처럼 거대한 성문은 처음 본다는 듯 사패천 출신들이 고개를 들어 황성문을 구경하기 바빴다.

그때.

“황자 전하--!”

“전하--!”

애가 탄 듯 목이 멘 목소리와 함께, 동 태감과 건희전 궁인들이 진화를 향해 달려왔다.

“전하!”

“동 태감, 오랜만에 보는군.”

“참으로 야속하십니다. 어찌 이리 늦게 돌아오시는 겁니까?”

동 태감이 눈물을 글썽이며 진화를 맞았다.

그리고 나머지 건희전 궁인들…… 순식간에 숙청단원들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니, 왜?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오?”

“어휴! 지난번 나리들은 좀 낫더니, 이건 숫제 산적들이 아니십니까! 이 꼴로 어딜 들어가시려고요!”

“황도의 거지들이 형님 하시겠네! 그 꼴로는 건희전에 한 발자국도 못 들어가십니다!”

“절대! 궁에 보이는 정원석을 들거나, 뽑거나, 궐 내 지붕 위에 올라가시거나 벽을 타시면 안 됩니다. 호수를 뛰어넘으셔도 안 돼요! 손님 신분으로 수라방을 출입하거나, 창고나 곳간을 출입해서도 안 되고요! 이번에는 진짜로 군사들 부를 겁니다! 아시겠어요?”

“절대 황족의 몸에 손을 대거나 다른 방법으로 손을 댄 것과 같은 행위를 하시면 안 됩니다! 먼저 시비 털렸다며 궁인을 다치게 해서도 안 되고요! 전부 우리 황자님 얼굴에 똥칠하는 일이니까, 절대! 안 됩니다!”

“문을 발로 박차고 열거나, 손으로 열다가 떼서도 안 돼요! 그냥 궁인들이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세요. 거기, 그쪽에 덩치 큰 양반들, 잘 들으시라고요!”

“아시겠어요, 아가씨들? 누가 희롱하거나 건드린다고 입을 마비시키거나 손가락을 부러뜨리시면 안 돼요! 왕족이거나 고관댁의 망나니일 경우가 많은데, 그땐 상궁마마님께 알리시거나, 아니, 그냥 건희전 손님이란 것만 밝히시면 다들 도망간다고요!”

사패천 출신 일행은 쏟아지는 말들 속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궁인들의 손에 순순히 이끌리게 되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말끔하게 씻겨져서 깨끗한 옷을 입고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혹시 내 귀에 피 안 나나?”

“안 나.”

사패천에서도 이름난 대세가, 문파의 후계로서 처음 당하는 푸대접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산적 소리만 수십 번도 넘게 들은 이천평과 황계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강무련은 한동안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로 있다가, 정의맹 출신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자네들은 이 횡액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거지?”

“…….”

강무련의 물음에 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지은 죄가 있던 정의맹 출신들은 사패천 출신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 *

“황자……!”

“모후.”

황실의 법도가 무엇인지 황후를 어머니가 아닌 ‘모후’라 부르게 되었지만, 진화는 오히려 그 점이 더 편했다.

유일한 어머니로 생각했던 팽연화에 대한 마음과 친모인 황후에 대한 마음이 공존해도 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굴을 쓰다듬는 황후의 손길에도 진화의 얼굴이 이전보다 편안해 보였다.

“왜 이렇게 말랐느냐? 밖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으면…….”

현경의 넘어선 이후 진화의 육체는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머니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 자식들의 시간마저 보이는 듯했다.

“저는 편히 잘 지냈습니다. 모후께서 평안하셨습니까?”

“양주대부인이 시시때때로 황궁에서도 보기 힘든 귀한 약재를 보내 주는 통에, 이 어미는 전보다 건강해졌단다.”

“어머니께서요?”

“양주대부가 폐하께 술을 보내다가 대부인에게 들킨 탓에 이 어미가 호강을 했지. 호호호호!”

진화를 사이에 두지 않고도 황제와 황후는 남궁경과 팽연화와 따로 친분을 나누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와 황후는 정치나 권력과 상관없이 재밌는 친우를 사귄 듯 그들을 기꺼워했다.

“크흠! 그게 엄청나게 귀한 약재로 담근 술이라니까.”

“어머? 그러면 왜 그 술을 엄 태감에게 맡기고 저 몰래 마시셨어요?”

“그건…… 흠흠, 남자에게만 좋은 것이라 그런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소.”

“아이, 참, 폐하도 황자 앞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게 사실인 걸 어쩌오? 황자도 이제는 알 것 다 아는…….”

“폐하!”

황후가 뾰족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새침하게 황제를 쏘아보자 황제가 뜨끔한 얼굴로 헛기침까지 했다.

진화가 놀란 눈으로 황제와 황후를 보았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 모두 입꼬리를 말고 있다 금세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그들은 가끔 이렇게 사가의 평범한 부부들처럼 바가지도 긁고 아웅다웅하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

궁인들마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이전보다 손님들이 늘었다지? 엄 태감과 동 태감이 단단히 벼르고 있던데, 혹여 뭔가 실수는 하지 않는지 가 봐야겠구나. 오랜만에 부황과 담소를 나누렴.”

황후가 봐도 봐도 아쉬운 듯 다시 한번 진화의 볼을 쓰다듬고 장추궁을 나섰다.

아마도 일부러 자리를 비켜 준 듯했다.

황후가 나가고 단둘만 남은 부자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방금까지 훈풍이 돌았는데 그새 바람이 서늘하게 식어 버린 느낌이랄까.

은근하게 미소를 품고 있던 황제의 얼굴도 어느새 냉엄한 무표정이 되었다.

“황도에 일이 있다고?”

“예.”

“놈들이 생각보다 대단하더구나, 나라를 빼앗고 나라를 쪼개는 걸 그리 쉽게 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말을 하는 황제의 얼굴에 싸늘한 비소가 흘렀다.

“역적들은 늘 그러하지. 눈앞의 권력에 정신이 팔려 그 자리의 지엄함을 보지 못하거든.”

“…….”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형제를 죽인 현 황제.

그조차도 권력을 위해 친족을 베었다는 오명을 가졌기에, 진화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황제는 비소를 머금은 채로 진화를 보았다.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황성을 꺼려 한 이유도 있지. 무심해 보이지만, 머리가 아둔한 것은 아니니까.”

제 눈을 꿰뚫을 듯 정면으로 마주하는 황제의 시선에 답답함을 느낀 진화가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나 황제가 되고 싶다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허허, 이 자리가 가지고 싶다 해서 가질 수 있는 자리 같더냐?”

진화의 말에 황제가 웃음을 흘렸다.

진화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순진한 대답에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외면하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 짐은 아직 젊고 정정하니까. 하지만 명심하거라. 가지고 싶은 것이 많은 자가 권력을 탐하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도 권력을 탐하게 된다.”

“…….”

“귀천성이든 누구든 상관없다. 천하는 하나뿐이고, 가지고 싶은 자들은 모두 너의 것을 빼앗으러 올 테니까. 그게 재물이든, 권력이든, 자리든…… 네 사람이든.”

황제의 단언에 진화의 눈이 커졌다.

황제는 그런 진화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권력이나 자리 따위 내줘도 상관없다 말하겠지만, 글쎄. 네가 선 자리를 빼앗기면, 그 자리에 있던 풀 한 포기도 지킬 수 없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네 손안에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에 진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이 일렁이는 것을 보며, 황제가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꼭 닮은, 제 피를 이은 아들의 눈.

“걱정 말거라. 말했듯 이 자리는 네가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니까. 다만 욕망을 가지거라! 지키고 싶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을 한진화의 욕망. 네가 욕망을 가질 때까지 짐은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내 사람, 내 제국, 내 아들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황제가 인자한 눈으로 진화를 보며 말했다.

냉엄한 얼굴 위로 애틋한 부정이 느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진화가 순순히 고개를 숙여 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가 흐뭇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차라리 잘되었구나. 짐과 너의 적이 하나가 되었으니, 당분간은 복수에 집중할 수 있겠어.”

황제의 말에 진화가 눈을 크게 떴다.

황제와 진화의 적이 하나가 되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점이었다.

황제는 혼현마제의 배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제국을 가진 황제에게 교주의 끄트머리를 차지한 역도 무리는 그저 작은 도적에 불과했으니. 이제부터 한 제국과 무림은 귀천성이라는 공동의 적에 집중하고, 황제는 본격적으로 아들의 복수를 위해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황제의 눈빛 속에 그동안 깊게 쌓아 두고 있던 분노가 떠올랐다.

* * *

황제와의 독대는 진화에게 많은 생각을 남겼다.

‘욕망을 가져라…….’

복수와 남궁세가의 안녕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였던 진화에게 황제의 말은 새로 주어진 숙제 같았다.

그리고 숙제와 함께 전해진 황제의 부정도, 진화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동 태감이 황제와 독대 이후 심각한 얼굴로 나오는 진화를 걱정스럽게 보았지만, 진화는 그것도 모른 채 생각에 잠겨 건희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건희궁으로 오자마자. 

진화는 모든 상념에서 벗어났다.

차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가볍게 연합을 맺었던 맹족에게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정보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맹족의 정보가 정의맹에 전해지고, 남궁진휘가 급하게 매응을 보내왔다.

“무슨 일이야?”

전서를 본 진화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자, 남궁구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광마제와 광룡귀면대가 장안을 공격했다. 그리고…… 혼현마제가 진(眞)국을 선포하고 한 제국에 사신을 보냈다는군.”

“뭐?”

“……!”

진화의 말에 남궁구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진화가 들려준 소식에 남궁구뿐 아니라 숙청단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 *

교주 위림군 이화문.

혼현마제가 먹구름에 반쯤 가린 달을 향해 찻잔을 들었다.

“두 번째도 내 승리구나. 후후후후.”

혼현마제의 웃음소리가 서늘한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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