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진압할 진(鎭) 시끄러울 화(譁) : 욕망의 힘(5)
진화는 기분이 나빴다.
저는 가만히,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을 뿐인데, 한 번도 황좌 따위에 욕심을 낸 적도 없는데.
황궁에 오고 난 이후 황제부터 일황자, 이제는 어린 육황자까지, 주변에서 저를 두고 이리저리 나불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이 비틀리는 만큼, 진화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네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하지만 형님께서는 무림의 일 외에 제국에는 관심이 없으시다고…….”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진화의 눈이 육황자를 보았다.
단지 내려다보는 것뿐이었는데, 육황자는 마치 거대한 산을 앞에 둔 듯 자신이 하염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점점……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
육황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모습을 보며 진화가 혀를 차며 싸늘하게 말했다.
“쯧, 그렇게 약한 주제에 주제를 모르니 네 형의 약점이 되는 것이다.”
“이황자님!”
내내 육황자가 마음에 걸려 하던 것을 정확하게 찌르는 말에, 육황자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키웠다.
육황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화를 노려보았다.
내내 형님의 짐이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나름 사교력도 발휘하고 형님에게 도움이 될 일을 찾았던 것인데, 육황자는 진화가 말 한마디로 자신의 모든 노력을 비웃는 듯했다.
하지만 진화에게는 육황자의 마음을 알아줄 이유도, 의무도 없었다.
“말이 심하십니다!”
“심해? 어디가? 네 일가가 몰살을 당한 것이 고작 엊그제 일이다. 그런데 너는 네 형은 또다시 죽을 자리로 밀어 넣는구나.”
“그, 그런……!”
“내가 하지 않아도 모두가 한다. 원미인과 삼황자 일파부터 허씨에 원한을 가진 이들이 지금도 벼르고 있다. 배경도 뭣도 없는 황자들 따위 꼬투리만 잡으면 모가지 날리는 거야 쉽지. 너희만 그럴까? 원미인과 삼황자가 내내 무시를 당하면서도 납작 엎드려 있는 이유가 뭘 것 같으냐? 그치들은 입이 없어서 내게 ‘부탁’을 못 하는 듯싶더냐? ……내가 무관심하다 하여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
“기다려라.”
진화는 제대로 답도 못 하고 어버버거리는 육황자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본래 선택이라는 것은 강자의 몫이다. 내가 관심을 가질지, 말지. 경쟁을 할지, 말지. 욕심을 낼지, 말지…… 너희들이 할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선택은 나의 몫이니.”
진화 자신이 강자라는 것이다.
오만한 답변이었지만 육황자는 감히 진화를 비난하지 못했다.
진화의 말처럼 그는 무관심한 것이지 제 처지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진화의 검은 눈에 새파란 번개가 내리치는데 육황자는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육황자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저, 저는 송구합니다. 저, 저는 그저…….”
육황자가 횡설수설 사과했다.
가뜩이나 병약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을 보며, 진화는 제가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고 내관이 또 다른 방문객을 알려 왔다.
“저하, 사황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드시게 해라.”
상황을 파악한 동 태감이 진화의 허락이 있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그러자 사황자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인아-! 너……!”
소식을 듣고 급하게 왔는지 사황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게 질린 육황자를 보자 차마 더 이상 다그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진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육황자가 아직 철이 없어 실수를 한 듯합니다. 제가 따끔하게 혼내고 따로 사죄 올리도록 할 테니, 오늘은 이쯤에서 용서해 주십시오.”
사황자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진화의 시선은 육황자에게 닿아 있었다.
“용서를 할지 말지, 그 또한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 오늘은 이만 데려가도록.”
사황자는 육황자가 뭔가 단단히 실수했구나 생각했지만, 진화가 한 말의 진의를 아는 육황자의 얼굴은 더욱더 창백하게 질렸다.
“다시 한번 송구합니다.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사황자가 육황자를 잡아끌듯 부축하여 데리고 나갔다.
그들이 나간 후.
‘너무 진지했나.’
부축까지 해서 나가는 모습을 보니, 진화는 이제야 약간의 민망함이 몰려드는 듯했다.
남궁세가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자꾸만 저를 흔들어 대는 것들에 짜증 나서 그것을 육황자에게 풀어 버린 것 같았다.
“쯧. ……괜한 화풀이를 한 것 같군.”
진화의 혼잣말에 남궁교명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적어도 대가리는 안 깨뜨렸지 않습니까. 조마조마했습니다.”
“…….”
진화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았지만, 남궁교명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사황자와 육황자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남궁구와 군조도 지붕 위에서 내려왔다.
“자, 이제 가 보자고.”
남궁구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진화와 육황자의 결말이 남궁구의 마음에 든 듯했다.
그런 남궁구를 보며 군조도 싱긋이 웃어 보였다.
“하오문 먼저 들를까요?”
“……수작 부리지 마.”
남궁구가 순식간에 정색하며 돌아섰다.
군조는 남궁구의 뒷모습을 보며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 * *
황궁에는 비밀이 없었다.
특히 건희전은 황궁 내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육황자가 건희전을 찾은 일은 알음알음 많은 사람들의 입을 탔다.
입이 무거운 건희전 궁인들 덕에 자세한 내용은 퍼져 나가지 않았지만, 기세등등하게 건희전을 찾았던 육황자가 부축을 받아 나간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물론 그 모든 소문에서 장추궁만은 예외였다.
“하하하, 녀석이 단단히 골이 났나 보오. 육황자가 호되게 혼이 났다는군.”
궁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황제의 것이었다.
낮 새도, 밤 쥐도 모두.
황제는 건희전에 있었던 일을 모두 듣고도 유쾌하게 웃었다.
“이황자 저하께서 화가 났다면 좋지 않은 일이 아닙니까?”
황제의 앞으로 문서를 출납하며 중서령 사마윤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가 부지런하게 올려놓는 장계는 황제의 책상뿐 아니라 반대편 책상 위에도 쌓여 갔다.
이번에 다시 승상 자리에 오른 조위례의 책상이었다.
“허허허, 그게 그렇지가 않네.”
“가르침을 청합니다.”
“가르침은 무슨.”
조위례가 은근하게 웃으며 사마윤을 보았다.
질문이 필요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였다면 중서령의 자리에 앉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다만 저렇듯 윗전의 귀에 거슬리지 않고 겸손하게 일을 잘하는 것도 재주라, 조위례가 흐뭇한 눈길로 사마윤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애초에 황태자 자리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없으시네. 생각해 본 일이 없으니 고민을 할 일도 없지. 그런 분이 골이 났다는 건, 그나마 생각은 해 봤다는 말이 아닌가.”
“아! 그렇군요.”
조위례의 말에 사마윤이 크게 깨달음을 얻은 듯 탄성을 뱉었다.
“그렇다면 이제 황태자 위에 황자님을…….”
“그건 아직이고.”
사마윤의 말을 끊고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의 말마따나 이제 겨우 생각이나 해 본다는 것뿐이니까.”
“하면 이제 어찌하실 것인지요?”
“글쎄.”
황제가 슬쩍 조위례를 보자 조위례가 황제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권력의 존재를 알았으니, 그 필요성을 아실 차례지.”
“욕망을 알았다면, 그게 얼마나 좋은지도 알아야 하니까.”
조위례의 손에 들린 장계는 새로 군을 꾸리는 데에 필요한 예산에 관한 것이었다.
조위례와 황제가 서로 눈을 마주하고 씨-익 웃어 보이니.
사이에 끼인 중서령 사마윤은 슬쩍 몸을 떨며 은근슬쩍 두 사람의 앞으로 장계를 높이 쌓았다.
* * *
낙양 저자 한복판.
남궁구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군조와 조금 떨어져 길을 지나고 있었다.
다 함께 낙양으로 들어오면서 “오고 또 와도 좋은 게 황도!”라며 연신 밝게 웃던 것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결국은 같이 가게 되었잖아요?”
“닥쳐. 남궁세가의 전서를 하오문에 맡길 수 없어서 그런 것뿐이니까.”
능글능글함의 대명사였던 남궁구가 차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굴고, 웃는 모습조차 얼음 같다던 군조가 능글능글 웃어 대니.
두 사람을 아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숙청단에서 두 사람은 항상 이러했다.
첫 만남 때와 다르게 군조는 남궁구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남궁구는 매몰차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게 군조를 밀어내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제 숙청단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런 남궁구와 군조 둘이 같이 하오문을 향하는 중이었다.
군조가 월하회에 가는 남궁구에게 억지로 따라붙은 것을 시작으로, 월하회에서 뜻하지 않게 남궁세가의 전서를 맡게 되면서 일이 틀어졌다.
남궁구는 하오문에, 그것도 군조와 함께 하오문을 찾는 건 내켜 하지 않았지만, 남궁세가의 전서를 군조에게 맡기는 더 싫었는지 함께 길을 나섰다.
“대체 왜 그렇게 싫어하는 겁니까?”
하오문으로 가는 내내 냉기를 풀풀 날리는 남궁구의 뒷모습을 보며, 군조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이제 곧 하오문주이자 어머니 채명화를 만날 것이라 마음이 급해진 면도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궁세가를 나온 후로 어머니께선 정말 그쪽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내가 질투할 정도로.”
“…….”
실수였을까.
군조의 말에 길을 가던 남궁구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가슴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얼굴로 군조를 돌아보았다.
“주제넘게 지껄이지 마.”
군조도 걸음을 멈추고 남궁구를 보았다.
정말로 놀랐다.
눈동자 속에 새파랗게 날이 선 것은, 분명 살기였다.
‘너무 성급했나.’
“하아.”
군조가 한숨을 쉬며 양손을 들었다.
남궁구의 눈빛에 쫀 것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이번에는 정말 위험하다 싶었다.
살벌한 경고를 남긴 남궁구가 다시 말없이 앞서가고.
‘남궁세가 창서각주의 아들로 곱게 컸다고 들었는데, 대체 저 눈빛은 뭐지……?’
군조는 앞서가는 남궁구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낙양에서도 가장 번화한 저자의 한복판.
월하객잔이 저자의 뒷거리에 거대하게 자리했다면, 하오문은 번화가 한복판에 작게 자리를 잡았다.
여느 상점처럼 버젓이 ‘하오(好)’라는 이상한 이름의 간판까지 걸어 놓고.
남궁구는 상점의 정문이 아닌 상점 옆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익숙한 듯 벽으로 위장한 문을 두드렸다.
뒤따라오던 군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 어머니가 알려 주신 겁니까?”
“……아니.”
군조의 물음에 남궁구가 그를 째려보았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짧게 답했다.
아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뻔했다.
짧게 ‘아니’라고 답하며 서늘하게 말려 올라간 남궁구의 입꼬리에 모든 답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알려 주신 게 아니라면, 대체 남궁세가에서 하오문의 비밀 접선은 어떻게 안 거지?’
이번에는 정말 심장이 철렁했다.
끼-익.
열리는 문으로 남궁구가 들어가고, 군조가 뒤따라 들어갔다.
곧바로 삼 층까지 이어진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는 남궁구를 보며, 군조의 눈빛에도 긴장감이라는 것이 생겼다.
“남궁세가에서 전하는 전서를 가져왔소.”
남궁구의 말에 하오문주의 방 앞을 지키던 문도가 문을 열어 주었다.
군조도 방문을 지키던 이와 눈인사를 하고 남궁구를 따라 들어갔다.
하오문주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끝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향기.
주황색의 아름다운 능소화가 하오문주의 방 안에 가득했다.
“어서 오세요.”
여전히 단아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 하오문주 채명지가 남궁구와 군조를 맞았다.
“군조도 왔니?”
“문주님을 뵙습니다.”
군조의 인사에 채명지가 놀란 눈을 떴다.
그리고 군조의 옆에 냉랭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궁구를 보자마자 무슨 일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후후, 쓸데없는 눈치를 보는구나.”
“…….”
하오문주가 사랑스럽다는 듯 군조를 보자, 군조가 슬쩍 턱을 긁었다.
남궁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보고 있었다.
“그래, 숙청단에서 전하는 말은?”
“역천비지가 준비되는 대로 사신들에게 말을 흘릴 것이라 했습니다.”
“사신들에게? ……오, 호호호, 남궁의 소가주가 재밌는 생각을 했구나.”
군조의 말 한마디로 하오문주는 일이 어찌 흘러가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하오문주가 중년의 여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눈치채지 못한 군조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무슨 생각인지 아시겠습니까?”
“호호, 글쎄. 네 옆의 남궁 공자도 아시는 눈치인데?”
“…….”
군조가 남궁구를 보았지만, 남궁구가 답을 해 줄 리 없었다.
그는 하오문주와 군조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냉정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었다.
군조가 슬쩍 하오문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오문주의 모습에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도가 너무 일렀을까.
“그리고 단주님께서 역천비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숙청단이니, 사전에 확인을 하겠다 전하십니다.”
멈칫.
자애롭게 웃던 하오문주가 한순간에 정색했다.
“……하오문의 일을 확인하겠다고? 너는 그걸 받아들였고?”
“그게, 저…….”
하오문주의 추궁에 군조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때,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남궁구가 끼어들었다.
“지금까지 역천비지를 가장 많이 경험한 건 우리 숙청단, 아니 적호단 십 조 출신의 무인들입니다. 문자로 전달되는 정보로는 알 수 없는 세심한 부분을 확인하겠다는 것이니, 받아들이십시오.”
“받아들이라? 하오문이 왜 그래야 하지?”
하오문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궁구를 쏘아보았다.
남궁구는 그런 하오문주에게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받아들일 이유와 안 받아들일 이유가 함께 있는데, 하오문이 단주님의 제안을 안 받아들여서 일이 실패했을 때 찾아올 대가가 훨씬 클 테니까요.”
남궁구의 눈빛이 지지 않고 하오문주의 눈빛을 받아쳤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날 선 눈빛이 오갔다.
하지만 결국 명분과 힘에서 남궁구가 앞섰으니, 하오문주가 물러섰다.
“남궁세가에서 전해 온 전서는 무엇이죠?”
하오문주의 물음에 남궁구가 조용히 품에 있던 전서를 건넸다.
남궁세가에서 청해상단도 아니고 월하회 상인을 통해서 보낸 전서였다.
전서를 읽던 하오문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이건…….”
하오문주가 처음과 달리 남궁구를 보는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끝내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쓸데없는 경고로군요. 이전의 하오문이 아닌데 말이죠.”
“남궁세가도 이전의 남궁이 아닙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남궁구의 모습에 하오문주의 눈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네 뜻도 아버지와 같은 거니?”
하오문주가 내색하지 않고 꾹꾹 눌러 왔던 말을 결국 뱉고 말았다.
예상 못 한 질문이었는지 남궁구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곧 남궁구의 눈빛이 단단하게 굳었다.
“이참에 말해 두죠. 저 녀석은 자꾸 날 엮어서 형제 놀이라도 해 보고 싶은 모양인데, 꿈 깨요. 그때 당신은 하오문을 선택했고,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이해는 해. 나나 아버지도 남궁을 선택했을 테니까.”
남궁구의 말에 결국 하오문주의 눈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남궁구의 눈빛은 독해졌다.
“그러니까 용서까지 바라진 마요. 전서에 쓰인 대로 입조심 하시고요. 모처럼 정사연합이 단단한데, 구태여 원수질 필욘 없잖아요?”
서늘한 비소를 흘리며 남궁구가 하오문주에게 경고했다.
하오문주는 그의 모습에서 어떤 그리운 모습을 찾았다.
“아버지를 닮았구나.”
하오문주가 애틋함을 담아 한 말에 남궁구의 눈이 매섭게 돌변했다.
“하하, 입, 조심하라고 했잖아, 방금.”
오싹할 정도로 살기를 품은 말에, 군조가 놀란 눈으로 남궁구를 보았다.
하오문주는 살기 따윈 아무렇지 않은 듯 이전보다 더 애틋한 눈빛으로 남궁구를 보았다.
“그때의 일…… 전부 아는 거니?”
하오문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차게 식은 남궁구의 말투에는 변화가 없었다.
“알아서. 달라질 것이 있나?”
비소가 섞인 되물음에 하오문주가 입을 다물고, 남궁구는 볼일을 다 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깍듯하게 고개까지 숙이고 나가는 길.
“능소화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남궁구가 기어코 한마디를 던지고 나갔다.
하지만 남궁구의 말을 들은 하오문주가 눈을 번쩍 떴다.
‘능소화를 잊지 않았구나!’
남궁세가를 떠나며 아들의 머리맡에 두고 나온 꽃.
일부러 던진 말일까?
하오문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주 작은 희망.
그것만으로도 하오문주 채명지의 눈빛에 단단한 각오가 섰다.
콰-직.
하오문주가 남궁세가에서 보내온 전서를 손에 쥐고 구겼다.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는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무려 남궁세가의 고혼암풍단주의 경고였으니 말이다.
남궁가주밖에 알지 못한다는 고혼암풍단의 정체를 알았으니, 그녀에게 그의 경고가 닿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그녀 또한 아들에게 용서받을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건희전.
남궁구와 군조가 돌아오고, 사신들을 미행했던 단원들도 돌아왔다.
월하회와 하오문에서 역천비지의 준비를 마쳤다는 연통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유인은 어떻게 하지?”
적을 유인하는 것이 숙청단의 일이라, 강무련이 단주인 진화에게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진화가 여유롭게 고개를 저었다.
“유인을 하는 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야. 그게 함정(檻穽)이라는 확신이 들면, 혼현마제가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진화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마침 사신들이 와 있으니, 그들에게 역천비지에 대해 흘리도록 하지.”
“어떻게? 살각 출신들이라 어지간해선 쉽게 속지 않을 거다.”
“걱정 마. 마침 딱 좋은 쥐새끼가 있으니까.”
진화가 여유롭게 만두를 집어 들었다.
만두를 든 진화의 시선이 건희전을 넘어 염녕전을 향했다.
“……보통 이럴 때는 고상하게 찻잔을 들지 않나?”
“술잔만 되었어도…….”
“모르는 소리, 물배 따위 채워 뭐 하나! 만두가 알차지.”
이천평과 황계수가 수군거리는 말에 현오가 진화의 편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