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다 죽일 진(盡) 칼날 번뜩일 화(錵) :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1)
황궁은 바다와 닮았다.
평소의 황궁은 대체로 조용했다.
궁인들은 숨소리, 발소리를 죽여 가며 일하고, 신료들은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으니.
깊고 넓은 물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수면 위는 언제나 잔잔하고 평온하기만 했다.
하지만 잔잔한 수면 위에는 사실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물결이 치고 있듯, 황궁의 조용함 속에는 시작을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소문들이 끊이지 않았고.
언젠가 시작을 알 수 없는 작은 파랑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천지를 휩쓸 듯, 시작을 알 수 없는 작은 소문은 황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천하로 번져 나가기도 했다.
바다가 만드는 재앙처럼 황궁의 결정 또한 수천, 수만 아니 수십만의 목숨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재앙.
사람들은 바다의 재앙을 두려워하듯 황궁의 결정을 두려워하면서도, 수면 위의 파랑처럼 끊임없이 소문을 만들어 내고 전했다.
넓은 황궁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
진화가 신기한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한 이곳에 적막강산처럼 조용한 곳이 있을 줄 몰랐던 얼굴이었다.
“예전 그 여자가 자주 찾던 곳입니다. 사람을 죽인 곳이라 소문이 와전되어, 궁인들도 관리가 필요할 때가 아니면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사내가 공손한 말투로 사정을 설명했다.
그의 말에 진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서 그리 오래 지낸 것은 아니지만, 이곳만큼 온갖 미신이 횡횡하는 곳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궁녀들은 아침부터 향을 태우는 것은 예사고 어떤 날에는 손목에 붉은 줄을 감고 있거나 어떤 날엔 너 나 할 것 없이 이상한 냄새를 풍기며 돌아다닐 때도 있었으니.
‘한을 품고 죽은 처녀귀신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 짓이니, 품어 주실 것이 아니라면 모르는 척하시라.’는 동 태감의 조언에, 진화는 그들의 행동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기로 했던 적이 있었다.
진화가 잠깐 그때의 일을 기억하며 정원 구석에 눈길을 줄 때, 곁에 있던 사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금……?”
슬쩍 흘리듯 묻는 말에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가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흠, 지금 또 황궁을 나가신다고요?”
“아아, 무림의 일이 바빠서.”
“무림의 일이라니, 위험한 일인가요? 폐하와 황후마마의 걱정이 크십니다.”
“아니, 별로 위험한 것은 아니다. 귀천성, 아니 지금은 신 제국을 차지한 놈들이 힘을 얻는 특별한 땅이 있는데, 그것을 없애러 다니고 있다.”
“아! 그러면 이번에 황도에 오신 것도……?”
“놈들이 힘을 얻는 땅, 역천비지가 황도 어딘가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없애러 온 것이다.”
진화의 말에 사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정말로 처음 드는 내용이었다.
“황도 어딘가라니…… 찾을 수는 있는 것입니까?”
사내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진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벌써 찾았다. 역천비록의 해석이 모두 끝나가고 있거든.”
“아, 그렇군요. 하하하!”
진화의 말에 사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천비록이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는 웃고 있는 사내를 빤히 보며 그를 압박했고, 사내는 눈동자를 굴리며 답을 찾았다.
“어…… 그, 역천비지를 없애기만 하면 됩니까?”
“아니.”
진화가 기다렸다는 말했다.
“혼현마제가 무슨 꿍꿍이로 사신들을 보냈는지 알아보려고.”
“예? 어, 어떻게요?”
“역천비지. 앞서 말했지만, 마제들이 좌활백설옥을 두고 수련을 하면 몸의 회복은 물론이고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대해 말을 흘려서 함정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놈들이 걸려들면, 잡아다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내야지.”
“잡아다…… 예? 사신을 잡는다고요?”
이번에는 정말 놀란 듯 사내의 목소리가 커졌다.
진화는 그런 사내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어 보였다.
“아직 사신은 아니지. 폐하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니까.”
진화의 말에 사내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풀숲에 웅크리고 있던 쥐새끼가 움직였으니까.
푸스럭, 샤샤샤-샤샷!
진화가 정원 한쪽을 지긋이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자, 사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잠깐 침묵이 흐르고.
“……이제 된 것입니까?”
사내, 사황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것은 작은 웃음소리였다.
“우습지도 않지. 이 황궁은 아직도 무림에 대해 전혀 모르는구나. 한낱 궁녀 따위가 무림 고수의 기감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비웃은 것이 아니었다.
진화는 정말로 저 어리석은 부주의함이 우스웠다.
처녀귀신이 될 것을 걱정해서 인분 가루까지 품고 다니던 저 궁녀는, 오늘 진화가 마음만 먹었다면 뼛가루도 남기지 않고 저를 태울 수 있었다는 걸 알기나 할까.
그때, 이제 볼일은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던 사황자가 조심스레 질문을 해 왔다.
“삼황자는 속을지 몰라도 사신들은 무림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질문이 생각지도 않게 정곡을 찔러 왔다.
“속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
진화가 살짝 놀란 눈으로 사황자를 보았다.
사황자의 질문 때문이 아니었다.
무저갱처럼 검고 깊은 눈이 저를 빤히 보자 살짝 흔들리긴 했으나, 역시 사황자의 눈빛에 있는 감정은 오로지 ‘걱정’뿐이었다.
“그것까지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선을 긋는 듯한 진화의 말에 사황자의 표정이 흐려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흔히들 사람은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말한다.
그 순간을 벗어나고 나면 은혜는 잊히기 쉽고, 사람의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황자는 진화가 ‘거래’라고 말했던 일을 끝까지 ‘은혜’라고 말하더니, 여전히 진화에게 호의적이었다.
진심으로 진화를 걱정하고, 진화의 냉정한 태도에 서운해했다.
심지어 바로 엊그제 진화가 그의 동생을 위협했음에도 말이다.
“……이것으로 네 동생의 실수는 없던 것으로 해 주마.”
진화 딴에는 사황자의 표정이 나아질 수 있는 말을 던졌다.
하지만 진화의 말에 사황자는 더욱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 일은 정말 송구합니다. 녀석이 아직 철이 없어서……. 학문이나 지식은 금방 따라가는데, 생각하는 것은 아직 어릴 적 그대로입니다. 단단히 주의를 주었으니, 곧 사죄드리러 갈 것입니다.”
“아니, 그럴 것까지 없다.”
진화는 사황자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죽일 수 없는 철딱서니를 상대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황자는 진화의 말을 조금 달리 받아들인 듯했다.
“압니다, 이렇게 일부러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내주신 거. 하지만 사죄드릴 것은 제대로 사죄드리도록 해야지요.”
전혀 아니었다.
“진짜 괜찮다고.”
진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사황자의 말을 거절했다.
그러나 사황자는 진화의 거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걱정스럽다는 듯 진화가 보았던 정원 구성을 보았다.
“조금 전에는 생각을 못 했는데, 일부러 영수전까지 찾아와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니. 삼황자도 안 믿으면 어쩌죠?”
사황자는 진화가 육황자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준 것이라 철석같이 믿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화는 정말로 그에게 기회를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영수전이라서 믿을 거다. 건희전엔 쥐새끼들이 파고들 구멍이 없거든.”
“네?”
“없던 구멍이 이제 와서 생기는 것도 이상하잖아. 심지어 지금은 무서운 고양이들까지 있는데.”
건희전에는 진화에 대한 독살 시도 사건 이후로 첩자에 대한 경계가 철저했다.
다른 궁의 나인들이 건희전에 알짱대다가 그대로 황후전에 끌려가 영영 사라진 경우가 몇 번 있은 후로는, 건희전 소속이 아니고서야 건희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진화와 숙청단이 건희전에 들어와 있었다.
“군조.”
진화의 부름에 검은 인영이 진화와 사황자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사황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까지 이런 사내가 근처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게 이상할 정도로 붉은색 머리칼과 큰 키가 눈에 띄는 사내였다.
“방금 궁인. 따라가라. 염녕전으로 갈 것이다.”
“충.”
진화의 말에 또다시 군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군조의 모습에 사황자가 다시 한번 놀랐다.
‘고양이라더니…….’
군조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사황자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무림인들은 실로 신출귀몰하군. 그래, 이러니까 기회가 아니라 하신 거지. 형님께서 함부로 황좌를 논한 인아를 살려 두신 것부터가 이미 인아를 용서하신 거였어!’
진화는 저를 보는 사황자의 눈빛이 이전보다 촉촉해진 것을 보며, 왠지 모르지만 그의 오해가 더 깊어졌다는 걸 느꼈다.
* * *
건희전 뒤편, 숲이라고 말할 수 있는 커다란 정원 깊숙이 임시로 지어진 창고.
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큰 나무들 한복판에 지은 창고였지만, 이제 창고 안에는 피비린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죽었나?”
여린 목소리가 잔뜩 움츠러든 채 물었다.
“입에 새빨간 피거품을 물고, 귀와 코, 눈에서 피를 흘리며 꼼짝도 하지 않는 사람을 ‘살아 있다’고 하긴 힘들지 않냐?”
남궁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당혜군이 발끈했다.
“아, 씨, 그냥 기절한 걸 수도 있잖아!”
“말이 되냐? 어떻게 기절한 자가 제 사지를 저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꺾어서 기절을 하냐? 그러게 내가 독의 강도 좀 조절하라고 했잖아.”
“암살자들은 기본적으로 독에 내성이 있단 말이야!”
“내성도 어느 정도지!”
당혜군의 말을 남궁구가 하나하나 받아쳤다.
당혜군의 우김을 적당히 넘기는 것도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지, 미모에서 밀려 함께 노예로 팔려 갈 뻔했던 사이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칫, 그것도 못 견디다니, 약해 빠진 놈!”
당혜군이 신경질적으로 죽은 시체를 걷어찼다.
그러자 남궁구가 ‘저놈의 성질머리하곤.’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네 오라버니에게 써먹을 독을 내가 잡은 포로에게 실험하지 말라고!”
“흥, 그 바퀴벌레 같은 당혜평이 겨우 이 정도에 죽을 거 같아?”
“그런 섬뜩한 가문의 비사도 제발 혼자 있을 때 말할래?”
“싫어. 만약 내가 당혜평을 독살하고 그 사실이 퍼져 나가면, 범인은 무조건 너희들이야.”
당혜군이 남궁구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남궁구가 몸서리를 치며 질색을 했지만 그게 또 진짜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둘의 모습에 진짜 겁을 먹은 건, 황계수였다.
“너희 덕분에 정파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군.”
황계수가 완전히 질렸다는 듯 당혜군과 남궁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당혜군과 남궁구가 어깨를 으쓱이며 씨-익 웃었다.
“어차피 알아낼 건 다 알아냈으니까 괜찮잖아.”
“쉿, 비밀이야. 지켜 줄 거지?”
남궁구가 한쪽 눈을 찡긋하자, 황계수가 질겁을 하며 떨어졌다.
그러면서 남궁구가 은근슬쩍 뒤처리를 황계수에게 떠맡겼다.
사실 황계수가 그들을 따라온 이유도 그만큼 숲에서의 뒤처리에 능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신으로 온 자의 시체가 발견되면 곤란하니까.”
“벌레가 끓지 않게, 개나 돼지로도 시체를 찾을 수 없도록, 흔적 없이 처리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황계수 또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시체를 어깨에 들쳐 멨다.
“안은 너희가 더럽혔으니까 너희들이 청소해 놔.”
“정확히는 당혜군 짓이지.”
“치사하게 이럴 거야?”
황계수가 던진 불덩어리가 다시 남궁구와 당혜군 사이에 떨어졌다.
그들이 다시 투덕거리기 시작하고, 황계수는 그 소리를 노동요 삼아서 밖으로 나갔다.
“이것으로 놈들이 건희전에 오는 일은 없겠네.”
“위협을 느끼면 판단이 급해질 것이고, 결국 삼황자에게서 얻는 정보에 매달릴 수밖에 없겠지.”
건희전에 숨어든 사신 일행 중 하나를 잡아다 죽인 것은, 꼭 알아낼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몇 시진의 수고로 살각 출신인 그들의 정보나 소리마제에 대해 알아내긴 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이득일 뿐이었다.
“어쨌든, 우리가 놈들에게 되게 관심이 많아 보이긴 했을 거야.”
남궁구의 시선이 나무 위를 향했다.
* * *
남궁구의 시선에 놀란 사내가 황급히 숲에서 자리를 떴다.
사신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돌아간 사내는 습관적으로 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혼현마제가 보낸 사신단에서 가장 젊어 보이던 사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안으로 들었다.
“장로님, 정호당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뭐?”
사내의 말에, 사신단의 대표로 있던 중년인, 살각의 장로 조엽이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자세히 말해 봐라. 확인된 것이냐?”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있어서 제법 깊은 안가까지 쫓아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고문을 당한 듯 엉망이 된 정호당주님의 시체가 나왔습니다.”
“흐음…….”
젊은 사내의 말에 조엽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형명은 소명의 뒤를 이어 살각의 후계가 될 인재다. 하지만 남궁진화는 물론이고 정호당주를 잡아낸 이들의 눈을 속일 정도의 실력은 아니야. 혹시…… 일부러 보내 준 것인가?’
조엽이 젊은 사내, 형명을 향해 의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그의 의심이 깊어질 때.
사신들의 접대를 맡은 궁인이 문을 두드렸다.
“대인, 삼황자 저하께서 긴히 뵙기를 청해 오셨습니다.”
“……!”
궁인의 말에 조엽이 굳은 얼굴로 일어섰다.
심각해 보이는 조엽을 형명이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일단 다녀와서 이야기하자꾸나.”
“네.”
조엽의 말에 따라, 그가 앞장서고 형명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형명의 얼굴은 밝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엽의 표정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역시…… 유인책일 수도 있겠어.’
적의 의도를 의심하는 순간 들어오는 삼황자의 부름.
조엽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