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다 죽일 진(盡) 칼날 번뜩일 화(錵) :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3)
한 제국의 황도, 낙양
흔히 중원이라 일컫는 천하의 중심지는 장안과 낙양, 양청현 너머로 이어지는 제국의 중심지를 말한다.
힘차게 흐르는 황하의 거대한 물줄기와 그 주변으로 황금이 요동치는 듯한 평야 지대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니. 세상의 중심을 논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가 갈 만하다.
그 중심에서 이어진 숭산 자락은 천하가 인정하는 명산 중의 명산이었다.
하지만 그 숭산 이전에 낙양 사람들에게 명산은 낙양 북쪽에 자리 잡은 북망산(北邙山)을 일컬음이었다.
바다처럼 거대한 강물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태양이 찬란하게 강의 남쪽에서 떠오르면, 강의 북쪽은 용의 비늘처럼 눈부시게 빛이 난다.
그 반짝이는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곳이 바로 북망산이었으니. 수려한 풍광과 빼어난 위치로 인해 황도의 고관대작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묫자리를 쓰지 못해 안달 난 곳이기도 했다.
다만, 가파른 산세로 인해 적벽이 있는 곳에는 사람의 인적이 드물었다.
바로 그 적벽으로 일련의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 *
-저곳이다.
앞서가던 형명이 신호를 하자, 사신들이 빠르게 몸을 숨겼다.
붉은 흙으로 된 적벽 사이로 저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좁은 길이 보였다.
그 안에서 형명과 사신들이 쫓고 있던 숙청단원들이 하오문도들과 조심스럽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적벽의 위쪽만 부수면 전부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현학문 학사의 말에 따르면 아래쪽을 건드리면 자칫 산 아래로 흙더미가 쏟아질 수 있다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예. 그럼 황자님께 그렇게 말씀드리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시일은 따로 연통을 보내겠습니다.”
“저희도 문주님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강무련의 말에 하오문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오문도들이 먼저 산을 내려갔다.
잠시 후.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강무련과 초서비가 서로 마주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강무련이 말문을 열었다.
“이 정도면 놈들도 착각하겠지?”
“예. 이렇게 완벽하게 입구까지 똑같이 만들었잖아요. 속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
-좋아.
초서비가 말을 하자마자 강무련이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칭찬했다.
하지만 초서비는 여전히 불안했다.
-알아들었을까요? 우리 대화를 들었다면 함정인 걸 알겠죠?
-그 정도로 머리가 나쁘진 않을 거다.
-그래도 혹시 이천평 같은 놈들이면…….
초서비의 구체적인 예시에 강무련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함정이라면 놈들을 순식간에 흙더미 속에 매장시킬 수 있을 거다.”
“그래요. 현학문 학사까지 주의만 한다면 성공을 보장한다고 했으니까요.”
“좋아. 그렇다면 우리도 황자님께 함정은 준비가 끝났다고 알리러 가지.”
“조, 좋아요.”
강무련과 초서비가 적벽에 있는 좁은 길을 풀숲으로 가리는 척했다.
그러면서 초서비는 그녀가 한 말과 전혀 다른 전음을 강무련에게 하고 있었다.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그럼 어쩌라고? 아, 됐어. 이미 기척이 사라졌다고.
-벌써요?
살각 미행자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강무련의 말에 초서비가 당황했다.
하지만 강무련의 말처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속았을까요?
-모르지! 나는 이런 거에 약하단 말이야.
확실히, 강무련은 음모와 술수보다는 정면 대결을 선호하는 사내였다.
사패천 후계 싸움조차 목숨을 건 사랑탑대전으로 선택한 남자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거 실패하면 전부 소천주님 연기가 구린 탓이에요!
-누가 들으면 초 낭자는 되게 자연스러웠는 줄 알겠군!
누가 들을 일은 없었다.
사신들의 기척이 사라진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그 실력으로 왜 나섰어요?
-황궁에서 나오려고!
초서비가 한심하다는 듯 강무련에게 눈을 흘겼다.
그런 초서비의 시선에 강무련이 발끈했다.
언제부터인가 사패천 무인들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편해도 너무 편해진 듯했다.
남궁진휘에게 밀려서 같이 노예로 팔려 갔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남궁진화의 뇌전에 다 함께 지져졌을 때부터였나.
강무련과 초서비가 투덕거리면서 산을 내려왔다.
조심스럽지 못한 강무련, 초서비와 달리, 당혜군과 남궁교명은 은밀하고 빠르게 산을 이동했다.
북망산 곳곳에 있는 붉은 흙으로 된 절벽.
강무련과 초서비가 있던 곳과 달리 당혜군과 남궁교명은 협곡을 따라 산속 깊이 들어갔다.
-기척은?
-없어.
산으로 들어오는 동안, 그들은 몇 번이고 뒤를 확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길을 일부러 돌아 들어오기까지 했다.
누가 보아도 비밀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들이 협곡 깊숙이, 적벽이 거의 끝나 가는 부분에 도착했을 때.
당혜군이 적벽 사이에 난 작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남궁교명이 그 앞을 지켰다.
잠시 후, 당혜군이 동굴을 나오고 남궁교명과 함께 왔던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밤.
당혜군과 남궁교명이 왔던 동굴 앞으로 검은 옷을 입은 인영들이 도착했다.
“흔적이 여기에서 끊겼군.”
“장로님이 아니었다면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형명과 사신들이 살각 장로 조엽의 추적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엽은 흙바닥에 있는 짐승의 발자국과 무인의 경공 흔적을 귀신같이 구분했다.
계곡 주변에서 더 이상 흔적을 찾지 못하는 일행에게 계곡 주변 바윗돌 위에 자국이 일정하게 이어지는 것만으로 경공의 흔적을 찾은 것도 조엽이었다.
“이곳인가?”
“예?”
“흙이…….”
아무것도 없는 적벽을 보며 형명과 사신들이 두리번거릴 때도, 조엽은 바람 소리의 이질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툭. 툭툭. 툭.
조엽이 휘파람처럼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를 따라 적벽을 건드리자.
투둑. 후두두두둑.
“엇!”
순식간에 흙벽이 무너지는 모습에 사신 중 하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오랜 세월 단단하게 굳어진 적벽과 달리 사람이 어설프게 쌓아서 연결해 놓은 흙더미는 조엽의 손에 금방 무너졌다.
흙벽이 무너진 사이로 작은 동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앞을 지키거라.”
“충.”
조엽은 수하 둘을 앞에 세워 두고 형명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엽과 형명은 깊어 이어질 듯하던 작은 동굴이 사실 유독 어두운 통로였음을 알게 되었다.
동굴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 환하고 너른 공터를 만났기 때문이다.
깎아지르는 듯한 적벽의 한복판.
곳곳에 소용돌이를 이루는 기묘한 바람의 흐름.
조엽은 이곳을 어디인지 한눈에 알 것 같았다.
“이곳이 진짜 역천비지로구나! 진짜가 따로 있었어!”
사방을 둘러보는 조엽의 얼굴이 희열로 가득 차올랐다.
* * *
어두운 북망산 적벽 위.
진화와 남궁구, 제갈상이 협곡 아래로 빠르게 움직이는 사신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던 것과 달리 내려갈 때는 암살자들의 날쌘 몸놀림으로 계곡을 미끄러지는 듯 달려 순식간에 나무를 타고 사라졌다.
스윽.
진화와 남궁구, 제갈상의 뒤로 바위의 그림자가 스윽 일어섰다.
“저렇게 나뭇가지를 잡아채면, 암살자가 다녀간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는데 말이죠.”
“헉!”
“왜 놀라?”
황계수가 저를 보고 놀라서 신음을 삼킨 제갈상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큰 덩치로 인해 주변 나무와 풀숲에 몸을 숨길 수 없어 볼품없이 웅크리고 바위로 위장하고 있던 것이 기분 나쁘던 차였다.
“나무 위로 다닌 걸 알아본다고?”
“산채에 있으면 나무밖에 볼 게 없으니까. 나뭇가지의 생긴 모양이나 나뭇잎 색을 보면, 나무가 어느 쪽으로 해를 받으려고 가지를 뻗었는지 알 수 있지. 저렇게 가지를 잡아당기면 자기들끼리 엉켜서 나무가 만들어 놓은 위치에서 벗어난다고.”
황계수가 어느새 조용해진 숲을 보며 말했다.
평소 황계수를 녹림 출신의 힘센 산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남궁구와 제갈상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았다.
“흐음.”
진화도 새삼스러운 눈길로 황계수를 보았지만 남궁구와 제갈상의 눈빛과는 달랐다.
“저놈들, 저렇게 빨리 내려가는 걸 보면 진짜라고 확신한 거 같은데?”
“확신할 수밖에. 역천비지와 가장 닮은 지형에 제갈세가의 모든 진법을 집결하여 바람의 온도를 바꾸고 기운의 흐름을 달리했으니! 기운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첫발을 들이자마자 역천비지라고 느끼게끔 만들었다고.”
남궁구의 말에 제갈상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자 황계수가 입을 삐죽거렸다.
“진법의 집결은 무슨, 정파 사기단도 아니고. 게다가 흙더미 만들고 흙벽 세우고 나무 옮겨 심고. 생고생은 나랑 이천평, 나하연이 다했는데 왜 네가 뻐기냐?”
“그걸 다 설계한 사람이 이 몸이니까.”
“제갈세가 사람 맞아? 무슨 제갈세가 사람이 이렇게 뻔뻔해?”
“편견을 버려. 첫 임무부터 노예로 팔릴 뻔했는데, 아직도 정파에 대한 환상이 남았나?”
제갈상과 황계수가 금방 티격태격했다.
사실 첫인상에서의 제갈상은 계산이 빠르고 행동이 신중한 것이 딱 제갈 사람 같았는데, 정의무학관에 들어 관서겸이나 진화 일행과 함께하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은 듯했다.
제갈상과 황계수의 모습을 재밌게 지켜보던 남궁구가 진화에게 물었다.
“미끼는 바늘에 끼워졌고, 혼현마제가 물까?”
“……글쎄.”
“무슨 대답이 그래? 고기를 잡으려고 만든 함정 아니야?”
진화의 대답에 남궁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진화의 입가에 차디찬 비웃음이 걸렸다.
“혼현마제는 겁쟁이야. 싸우는 걸 피하는 자지. 그자가 의심스러운 미끼를 덥석 물까?”
진화의 물음에 남궁구도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정사연합 군사부에서는 가짜와 진짜를 모두 던지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혼현마제가 진짜 역천비지를 지나치지 못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진화의 생각은 달랐다.
혼현마제는 제갈무진으로 아무런 위화감 없이 위장하고 수십 년을 살았을 정도로 문무 모두에 뛰어난 자였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자의 행적을 보자면, 일을 몰래 진행하거나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확보하지 않고서야 먼저 움직이는 일이 없었고 경지를 넘어선 고수와는 직접적인 부딪힘을 피했다.
이전 생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전쟁에 몰두한 진화는 알 수 있었다.
그자는 신중하고 치밀한 동시에 겁쟁이였다.
뒤에서는 수백, 수천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면서, 제 스스로는 어떤 대가도 바치지 않으려는 자.
그런 자가 벌써 진화에게 한쪽 눈과 팔을 잃었으니, 진화는 혼현마제가 결코 그냥은 제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의심스러운 미끼는 다른 곳에 던질 거야. 그리고 물러서서 미끼를 문 고기가 죽는지 사는지 확인하려 하겠지.”
“던진다면, 어디로?”
“장안, 광마제. 광마제는 참고 기다리는 자가 아니니까.”
진화의 말에 남궁구는 물론 제갈상과 황계수가 크게 놀랐다.
특히 남궁구는 진화의 생각이 정사연합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 때문도 있지만, 진화가 광마제를 입에 담았다는 것 자체에 더 놀라고 있었다.
‘도련님…… 뭐야, 자신감이 넘치잖아? 하하.’
놀란 눈으로 진화를 보던 남궁구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진화의 표정이 한 점 그늘 없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엔 꽤 할 만했었지? 흡정 흡기라니, 광마 당신도 꽤 급했나 보군. 얼마나 달라졌을지는 만나 보면 알겠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지난번 격돌에서 분명 열세를 느끼긴 했지만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화가 광마제에게 말했듯 ‘정체되었거나 계속 죽어 가고 있는’ 상태로는 시간은 계속 진화의 편일 것이었다.
어쩌면 이번엔 두 마리 고기를 한 번에 낚을 수도 있을 것이라, 진화의 눈이 기대감으로 번득였다.
실제 진화의 생각은 혼현마제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둘 다 함정이군.”
황도에서 날아든 급보를 받아 든 혼현마제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진짜 역천비지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수오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자 혼현마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진짜일 수도 있지. 그런데 수오야, 내가 가르치지 않았더냐. 가장 훌륭한 거짓말은 진실 속에 거짓을 숨기는 것이라고.”
“하면 역천비지는 진짜라는 말……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니 우리 대신 함정에 당해 줄 사람을 보내야겠지.”
혼현마제가 수오를 향해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늘 상대를 꿰뚫어 보던 그는 진화가 자신을 꿰뚫고 있을 거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