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다 죽일 진(盡) 칼날 번뜩일 화(錵) : 정당한 복수란(2)
챙! 챙챙!
사방에 시뻘건 불길이 일었다.
“저쪽! 저쪽이다!”
불길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곧 온몸을 산 채로 익혀 버릴 듯 뜨거웠고, 시커먼 연기는 점점 폐부에 쌓이면서 숨을 틀어막았다.
모두 죽을 것 같았다.
그때, 어김없이 목소리라 울렸다.
“견뎌라-!”
쇠를 간 듯 거칠고 투박한 목소리가 간절하게 울려 퍼졌다.
“견뎌라!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 옷으로 코와 입을 막고 그냥 견뎌! 내가 전부 죽이고 출구로 데려가 주마! 견뎌--!”
파지지지지직-----!
불길을 뚫고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졌다.
“미친 대장. 번개로 어떻게 불을 끈다고…….”
펑! 펑펑--!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답이라도 하는 듯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불길 위로 떨어졌다.
파아아아아--!
번개를 맞은 불길은 성이 난 듯 크게 일어났지만, 곧 잇달아 떨어진 번개에 맞아 반으로 쪼개지고, 다시 쪼개지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흙더미와 함께 폭발했다.
퍼--엉!
“……되, 되네?”
검은 연기가 눈앞을 가릴 정도로 가득했지만, 살을 태울 듯한 열기는 사라졌다.
신기한 듯 되묻는 목소리엔 황당함이 가득했다.
파지지직! 파직!
세상 천지에 번개가 떨어졌다.
“크아아악!”
“으-악!”
비명이 난무하고, 살이 타는 냄새가 퍼졌다.
그러나 그건, 방금까지 고통받고 있던 남궁세가 결사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남궁세가 결사대는 천천히 코와 입을 막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까만 연기 속에서 사방에 번개가 수십, 수백 개씩 떨어지고 있었다.
“대장이…… 미쳤나 봐.”
미쳤다.
미친 것이 확실했다.
아무리 경지를 넘어선 고수라고 내공이나 체력이 무한할 리 없는데, 결사대 대장 뇌왕 남궁진화는 세상을 깨뜨릴 듯 뇌전을 난사하고 있었다.
마지막 목숨을 불태우는 듯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때.
“여기! 출구입니다!”
함정을 부수던 남궁진화의 귀에, 그를 걱정하던 결사대원들의 귀에 기적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깜깜한 지옥 속에서 그들 모두를 건지는 소리였다.
“가자! 집으로-!”
지옥에서 나왔다.
모두를 살려 돌아갈 수 있다 생각한 진화가 기뻐서 소리쳤고, 결사대원들도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건 곧 경악에 찬 비명으로 바뀌었다.
지옥을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을 기다린 것은 진짜 지옥이었다.
전장에 나가는 결사대원의 무사 안녕을 빌던 솟대에 늙은 어머니의 목이 걸려 있었다.
아내는 시체마저 농락당한 듯 알몸으로 양쪽 젖가슴에 검을 꽂고 마당에 널브러져 있고,
저녁이면 고소한 밥 냄새를 풍기던 아궁이엔 토막 난 조각들이 불쏘시개 대신 박혀 있었다.
머리가 깨지고 온몸이 찢긴 앙증맞은 작은 조각들은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고,
소천로를 지나 의천문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남궁의 무사들은 눈도 감지 못한 채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양팔, 양다리, 머리와 몸통…… 여섯 개로 조각난 남궁가주의 시체가 창천원을 따라 쭉 이어지고,
창천원 앞에서 검을 들고 서 있는 누이 남궁진혜는 머리가 잘린 채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천풍무의를 온통 붉게 적시고 있었다.
“아…… 아…….”
“가, 가주님……. 크흑!”
“아…… 영애…… 진혜 누님…… 누님! 아아아!”
숨이 턱턱 막히고, 눈에서 폭포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런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억장이 무너졌다.
검은 쥔 단단한 손을 잡고 그저, 그저…… 처음으로 누님이라 불렀다.
“누님……. 아아악! 제발 누님…….”
무엇 때문에 빌었는지 모르지만 빌고 빌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빌고 빌었다.
그대로 숨을 쉬지 못해 죽어 버릴 듯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진화의 손이 닿자 남궁진혜가 쥐고 있던 검이 스르륵 떨어졌다.
툭.
힘없이 떨어진 남궁진혜의 팔.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곁에 있던 남궁세가 무사들이 안아 들었다.
그리고 진화는 제 손에 남은 남궁진혜의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으려는 제게 남궁진혜가 복수라는 짐이라도 남겨 그를 살리려는 듯했다.
그래서 천화정에서 두 개의 목 없는 어미를 안아들었을 때에도 진화는 죽지 못했다.
콰—앙!
무맥의 마룡검과 남궁진혜의 청아검이 부딪혔다.
스스스슥.
남궁진혜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단 일합.
무맥의 검에 실린 광룡귀형공이 남궁진혜의 검을 타고 그녀의 내부를 공격했지만, 남궁진혜의 몸에 창궁대연심법으로 탄탄하게 쌓인 내공이 그것을 밀어냈다.
두 사람의 내공이 부딪혀 흩어지고.
지금 남궁진혜가 밀리는 건 순순한 힘에 있어서였다.
“크읏! 무슨 힘이…… 씨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힘에서 밀린 남궁진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하제일 세가라는 남궁세가의 유일한 영애로, 가끔 망나니, 천둥벌거숭이라 불리긴 하지만 그것이 구박을 빙자한 애정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랑받는 영애였다.
타고난 무재로 이제까지 그녀의 능력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위대한 집안의 유일한 직계 영애라는 위치가 항상 더 후한 점수를 받게 했다.
남궁진혜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실력으로 증명하려 안달이었고, 더 위험한 전장으로 나갔다.
남궁진혜는 그녀의 자존심을 남궁세가의 직계 영애가 아니라 무인 남궁진혜에 걸었다.
“안 밀릴 거다……!”
남궁진혜가 이를 악 물렀다.
그녀의 눈동자에 선명한 청광이 빛나고, 창궁대연신공을 따라 정순한 내기가 그녀의 온몸에 힘을 불어 넣었다.
“크아아아---!”
기합과 함께 점점 뒤로 밀려나선 남궁진혜가 뒷발을 단단하게 버티고 멈춰 섰다.
남궁진혜가 유일하게 가면에 가리지 않은 무맥의 눈을 노려보았다.
빛을 집어삼킨 묵빛 검처럼 감정을 잡아먹힌 듯 무맥의 눈동자엔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괴물 같구나!’
뭘까.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속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은.
이렇게 유리알을 박아 넣은 듯 아무것도 없는 눈은 처음이었다.
무심함도, 냉정함도, 살기도.
결국은 그것들도 어떠한 감정인데, 무맥에게서는 그러한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통 넘치는 애정과 호의 혹은 적의 속에서 살아온 남궁진혜로서는 그런 무감각한 눈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공포(恐怖).
그래, 남궁진혜는 저를 어떤 무기질하고 하찮은 것을 보는 듯 눈빛에 존재를 부정당하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남궁진혜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때.
파지지지지직----!
그녀를 깨우듯 새파란 빛줄기가 무맥을 향하고, 무맥이 재빨리 남궁진혜의 검을 떨치고 그것을 막았다.
퍼—엉!
번개를 막아 낸 무맥이 세 걸음 밀려났다.
남궁진혜가 멍하니 그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푸른 무복을 입은 누군가가 무맥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화야-!”
정신을 차린 남궁진혜가 놀라 소리쳤다.
그런 남궁진혜의 뒤로 적호단주 팽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궁진혜, 움직여!”
적호단주의 말에, 남궁진혜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무맥의 수하로 보이는 광룡귀면대에 맞서 적호단, 숙청단이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짝-!
“정신 차려, 남궁진혜!”
남궁진혜는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제 뺨을 세게 때리며 뭔가 정신이 팔린 듯 멍해졌던 머리를 깨웠다.
그리고 무맥을 공격하는 진화를 한 번 돌아 본 뒤, 검을 들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 * *
무맥과 남궁진혜가 검을 부딪치고 남궁진화가 무맥에게 뇌전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검은 숲에서 하나둘, 광룡귀면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둠 속에 까맣게 내려앉은 그들은 하나같이 흉악한 동물 원귀 가면을 쓴 채, 먹이를 노리는 듯 적호단과 숙청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짐승 같은 눈빛.
그런 것이 수 개에서 수십 개, 수십 개에서 수백 개로 점점 늘어났다.
꿀꺽.
“준비해라.”
적호단주의 명에 적호단이 등을 맞대고 진형을 만들었다.
“우리도, 간다!”
강무현이 숲 속에서 자신들을 노리는 광룡귀면대를 노려보며 긴장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카---앙!
남궁진화와 무맥이 부딪히던 중 푸른 불꽃이 튀며 굉음이 울렸다.
그것을 신호로 광룡귀면대가 쏟아져 나오고.
“가자-아!”
적호단주의 목소리와 함께 적호단과 숙청단이 앞으로 나서 그들과 부딪혔다.
적호단과 숙청단.
모두 정사연합이 자랑하는 최고의 무인들이라, 그들 또한 적을 기다리지 않았다.
캉! 캉!
검을 든 이들이 앞서 부딪히는 사이.
쉐엑! 쉐에에엑-!
촤르르르르---!
달빛이 밝은 하늘을 뚫고 갈고리가 달린 사슬이 적호단과 숙청단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런데 그 앞으로 팽가 형제와 나하연, 적호단주와 남궁진혜가 뛰어나갔다.
“크아아아-!”
촤라라라---!
팽수가 팽신의 몸을 잡고 휘두르듯 돌리는 것과 동시에, 팽신이 날아드는 사슬을 양팔에 감았다.
불끈.
팽신의 양팔과 팽수의 양다리에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들은 마치 한 몸처럼, 팽수가 팽신을 휘두르면 팽신이 휘감은 사슬을 휘둘렀다.
“으아아악-!”
사슬을 잡고 있던 광룡귀면대원들이 뽑혀 나왔다.
휘청이는 그들을 향해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검을 휘둘렀다.
팔, 다리, 가슴, 얼굴까지.
매서운 천풍검법과 포악한 창군대연검법에, 광룡귀면대원들은 남궁구와 남궁교명의 검에 닿는 대로 몸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하아아아압---!”
나하연이 용수팔반의 연속기로 수십 개의 사슬을 하나하나 터뜨려 나가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사-알! 핫핫핫핫핫! 성불해라-!”
현오가 붉게 달아오른 눈을 빛내며 광룡귀면대원들의 원귀 가면을 하나하나 부숴 나갔다.
불호를 외는 것은 그들의 명복을 비는 것이 아닌 현오가 소림을 떠올리며 제 이성의 끈을 붙잡기 위해 습관처럼 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자비로운 승려가 아닌 피 칠갑을 한 지옥의 관장이 다음 아귀를 찾아 헤맸다.
당혜군과 제갈상, 관서겸이 거리를 두고 동료들을 지켰다.
이제까지 몇 번의 경험으로, 그들은 광룡귀면대와 싸우는 방법을 알았다.
적들은 그때보다 더 빠르고 강해졌지만, 그들 또한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으니. 그들은 그들보다 많은 숫자와 정신없는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치열하게 광룡귀면대원들과 싸워 나갔다.
정의맹 출신 동료들이 싸우는 것을 본 강무련과 초서비, 군조, 이천평, 황계수가 눈을 마주쳤다.
“황계수, 이천평이 앞으로, 사슬을 막고 적을 끌어들인다. 내가 죽이고, 초서비와 군조가 우리를 보호한다!”
“예!”
“알겠어요!”
중원의 반쪽 숲 속을 지배하는 호걸들의 우두머리.
소산군 황계수가 터질 듯 부푼 근육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거대한 나무도, 사나운 맹수도 한 방에 쪼개던 그 힘으로 사슬 한가운데를 쪼개들 베었다.
벌어진 사슬 그들 한가운데로 이천평이 뛰어들어 팔을 휘둘렀다.
붉게 물든 손가락은 마치 맹호의 발톱처럼 벌어진 사슬을 뜯어 버렸다.
카-앙!
팽팽하던 힘이 무너지면서 흐트러진 광룡귀면대원들에게는, 미친 소가 된 강무련이 뛰어들어 날뛰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쇠뿔처럼 강한 주먹이 한 방, 한 방 살을 뚫고 뼈를 부러뜨렸다.
군조는 이천평과 황계수의 앞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초서비가 비검을 매섭게 휘두르며 강무련의 뒤를 노리는 적의 손발을 잘랐다.
한편.
적호단의 움직임은 그들보다 더 체계적이었다.
파파파파팟-!
“진형을 유지하고 검을 찔러라! 벨 필요 없어! 다가오는 놈을 찔러 죽이는 거다!”
파갑추를 휘두르는 적호단주의 주먹에 갈고리들이 부서졌다.
그 사이로, 남궁진혜가 끼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엑---!
캉! 캉! 캉!
남궁진혜가 휘두르는 천풍검법이 태풍이 되어 사슬들을 휘감고, 불꽃이 튀는 것과 함께 남궁진혜의 태풍에 휘말린 광룡귀면대원들이 날아들면.
적호단원들이 남궁진혜와 적호단주를 보호하며 그들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일 조, 이 조, 삼 조…… 십 조까지.
지치지 않고 서로 등을 맞댄 그들은 누군가가 적을 막으면, 누군가는 적을 죽였다.
바다의 거친 소용돌이처럼 적호단주와 남궁진혜의 주변을 보호하듯 돌면서, 숙련된 대원들이 신입들을 지키며 최소한의 희생으로 적들을 죽여 나갔다.
수적으로 조금 열세이지만, 압도적인 몇몇 개개인의 무력과 체계적인 작전으로 광룡귀면대와 팽팽하게 맞선 동료들.
믿음직한 동료들을 등 뒤에 둔 진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너를 죽일 거다.”
진화가 무맥을 향해 선언했다.
이제 그토록 기다렸던 복수를 시작한다고.
파지지지직----!
뇌전이 진화의 검을 회오리처럼 휘감고 번뜩거렸다.
마치 번개로 만들어진 뇌룡이 검을 감고 꿈틀거리는 듯했다.
“…….”
무맥이 진화의 검을 보았다.
덤덤하게 가라앉은 눈빛과 가면에 가려진 표정 때문에 그의 생각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무맥과 달리 진화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사납게 일그러졌다.
가주님…… 누이…….
어머니……!
어머니 팽연화와 가모인 하후민도 목이 베여 죽었다.
정확하게 경동맥을 자른 흔적이 천화정 바닥에 손으로 퍼 담지도 못할 피 웅덩이를 만들었을 것이었다.
모든 걸 한 길로 끊어 낸 예리한 흔적.
그 흔적의 주인이야말로 어쩌면 진화가 광마제보다 더 증오를 불태운 존재일 것이다.
“나는, 네놈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거다.”
진화가 무맥에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진화의 검에 베였던 무맥의 왼쪽 팔뚝은 단단한 근육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허연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말끔하게 태워진 그곳은 핏방울조차 흘러내리지 않았다.
생을 거슬러 지금까지 품었던 증오.
“그분들보다 고통스럽게, 이 세상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진화가 지독한 증오를 내뿜으며 무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진화가 복수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