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다 죽일 진(盡) 칼날 번뜩일 화(錵) : 정당한 복수란(3)
마룡검 무맥.
광마제가 만든 세 번째 광신기의 주인.
지금은 그가 세 번째 무맥이었지만, 이전 생엔 그가 두 번째였었다.
광마제의 사냥개로서 광룡귀면대를 이끌고 남궁세가와 잠삼현을 몰살시키고, 진화가 복수를 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죽어 버린.
사실 그가 몇 번째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무맥은, 그들은 그저 광마제가 묵철을 가지고 만들어 낸 광신기를 쥐여 준 광마제의 개일 뿐이었다.
몇 번째 무맥이든, 어떤 광신기를 쥐었든.
누가 되었든 그들은 광마제가 시키는 대로 남궁세가를 몰살시켰을 것이었다.
까드득.
언젠가 남궁교명을 보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어린 남궁자소의 미래를 망친 건 너무한 일이었을까.
이전 생의 남궁교명과 지금의 남궁교명이 전혀 다른 사람이듯, 다른 이들에게도 기회는 있었지 않을까.
아직 짓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 복수를 하는 것은 정당한 일일까.
물론 제갈세가 남매들과는 여전히 악연으로 얽혔고, 그들의 죄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 죄를 지은 이들에게만 복수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생각 이전에 진화의 증오가 진화를 움직였다.
쉐에에에엑-!
카강-! 캉! 캉! 캉!
마룡검을 쥔 무맥은 이제 막 세상에 나왔다.
그는 아직 남궁진혜나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고, 남궁세가는 안전했다.
그렇다면 저자는 죄가 없는 것인가.
그러다가 생각했다.
‘내가 왜 저들의 죄를 따지고 있지……?’
내게 감히 정당함을 따질 자격이 있는가.
캉! 캉! 캉! 채-앵!
눈앞에서 불꽃이 틔었다.
진화는 그 불꽃을 뚫고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엑-!
진화가 검에 묻힌 적의 피, 상대를 파멸로 몰아간 생각, 겁 없이 뒤바꾼 미래.
그 모든 것들도 사실 운명을 거스른 죄가 아닐까.
만약 그것이 죄라면 자신은 여기서 멈추고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 나는 계속 싸울 것이다!’
들끓는 복수심.
분노와 증오, 지키고 싶은 간절함까지도.
모두 진화를 싸우게 하는 것들이었다.
진화는 결론을 내렸다.
제게 복수는 정당한 것이 아니라 투쟁의 연속일 뿐이라고.
아직 죄가 없는 마룡검 무맥.
진화는 그에게 품은 증오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을 그만뒀다.
대신 그에게 품은 증오를 원동력으로 그와 싸우기로 했다.
* * *
쉐에에엑---!
그게 느껴질 리 없었건만.
무맥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온몸을 휘감은 듯했다.
‘이자가 주군의 제물!’
거의 완성 직전에 제왕검을 비롯한 십이좌회 놈들에게 빼앗기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주군이 몸을 바꿨을 제물.
주군이 직접 선별하여 어릴 적부터 체질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냈다 들었다.
광룡의 봉인을 풀기에 완벽한 역천지체라, 그래서 다른 무공을 익히기엔 힘이 들 것이라고.
그런데 이 정신없이 몰아치는 천풍검법은 뭐란 말인가.
챙-! 챙챙!
무맥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가면 속에서 마음껏 놀라고 있었다.
그러면서 눈으로 부지런하게 진화의 움직임을 좇았다.
‘팔방으로 흐르는 듯 밟는 보법과 자유롭게 나부끼는 검결은 그렇다 쳐도, 매섭게 회오리치는 내기의 운용만큼은 역천지체가 할 수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무맥이 뒤로 물러서며 진화의 검을 피했다.
살점이 사라진 왼팔의 움직임이 부자유스러웠다.
하지만 바람이란 한없이 자유스러우면서도 결국 한없이 하늘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라, 천풍검법의 요결을 파악한 무맥은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진화의 검을 흘려보냄으로써 회오리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때.
카---앙!
무맥이 검을 세워 진화의 공격을 막았다.
가슴이 울릴 정도로 강렬한 내기가 진동했다.
‘이번에는 창궁대연검법인가!’
파파파파팟---!
지진이 난 듯 무맥이 선 바닥이 뒤집어졌다.
무맥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타타타탓-!
진화가 창궁대연검법 파해일몰(波海壹沒)로 땅바닥에 파도를 일으키며 도망가는 무맥을 쫓아갔다.
진화의 눈동자에 새파란 청광이 빛나고.
파—팟!
진화의 검이 바닥에 꽂히는 동시에 땅바닥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무맥은 검과 팔로 앞을 막고 몸을 날려 폭발을 피했다.
하지만 진화가 터뜨린 기운의 여파와 땅에 박힌 돌과 흙이 그의 몸을 덮치면서.
쿠---웅!
무맥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갑주에 구멍이 뚫리고 온몸에 상처를 입었다.
“크읏.”
몸을 바로 세우던 무맥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었다.
고통스러운 곳에 손을 갖다 대니, 복부의 정면 갑주를 피해 그 옆으로 돌이 박혔다.
추적. 추적…….
무맥이 구멍이 난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돌을 꺼냈다.
“…….”
몸을 뚫은 돌을 맨손으로 꺼내면서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던 무맥이, 조금 생경한 눈으로 손을 붉게 물들인 피를 보았다.
‘천풍검법과 창궁대연검법 그리고 마지막에 바닥을 터뜨린 건 제왕무적검법인가? ……모두 역천지체로는 익히기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역천지체를 극복했거나, 역천지체의 혈맥을 치료했다는 것.’
역천지체를 극복할 순 없었다.
그건 경지를 넘었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주군께서 만들어 놓는 혈맥을 치료했다는 것.’
무맥이 고개를 들어 진화를 보았다.
그러곤 지독한 살기를 뿜고 있는 진화의 시선 따윈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너, 쓸모가 없어졌구나.”
마룡검 무맥은 진화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빛을 집어삼킬 듯한 묵빛 검을 들고 진화에게 겨누었다.
“허어!”
무맥의 모습에 진화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곧 진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게 네놈이지. 광마제를 위해서라면 타인은 물론 본인의 고통과 목숨까지도 아랑곳하지 않는. 네놈이 여전히 그러해서 다행이구나.”
진화가 환하게 웃었다.
마치 마지막 짐 한 자락까지도 털어 버린 듯 홀가분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진화의 눈동자 속, 끝도 없는 세상에 번개가 내리쳤다.
쉐에에에엑----!
무맥이 진화의 급소를 노리고 들어왔다.
진화는 창궁무애검법 동해창공으로 무맥의 검을 흘리고, 왼손에 천뢰장을 실어 무맥의 어깨를 때렸다.
파—앙!
무맥이 신형이 흔들렸다.
진화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반원을 그리듯 검을 휘둘렀다.
카-앙!
무맥이 검을 세워 진화의 검을 막았다.
“파악은 끝났다.”
무덤덤하게 말한 무맥이 전신에 광룡기를 끌어 올렸다.
스멀스멀 검게 피어오르는 기운이 무맥의 검을 감싸고 마치 수백 마리의 뱀처럼 꿈틀거렸다.
“죽인다-!”
무맥의 눈에서 검은 기광이 번뜩이고.
카아아아아아아---!
광폭한 검명과 함께 수십, 수백 가닥의 검기가 진화의 천풍검법을 피해 진화를 노렸다.
하지만 진화의 검이 그린 것은 천풍만이 아니었다.
진화는 역천지체를 극복하지 않았다.
물론 혼돈지체를 치료한 적도 없었다.
무맥은 상상도 못 했겠지만, 진화는 그저 혼돈지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하늘의 순리는 감히 인간의 규정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고, 진화의 혼돈지체 역시 그 순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콰과광----광!
수백 가닥의 검기를 정면으로 뚫고 들어간 제왕무적검법 일휘천낙이 무맥의 위로 철퇴를 떨어뜨렸다
일회천낙의 철퇴를 실은 검에 뇌전이 번뜩였다.
파--팟!
무맥의 검과 부딪힌 진화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크읏!”
진화의 검을 막아 낸 무맥의 팔이 뇌전에 휩싸이고 무맥은 고통을 견디며 검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눈빛을 번뜩였다.
무맥도 보았다.
진화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것을.
그때, 진화의 목소리가 무맥을 비웃었다.
“희망 따윈 품지 마라.”
파지지지직----!
진화의 검을 본 무맥의 눈이 커졌다.
산산조각 나서 흩어진 줄 알았던 진화의 검이, 푸른 검강과 함께 더 거대한 모습으로 뇌전을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화경을 넘어 현경을 밟은 진화의 내공은 몸속의 천뢰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어우러졌고, 이제 어떤 검법을 쓰든 형식과 상관없이 진화는 자유롭게 기운을 움직였다.
하지만 진화에게 가장 잘 익숙한 검법은 뭐니 뭐니 해도 천뢰제왕검법이라.
천뢰제왕검법 낙엽--!
파파파파파팟---!
수십, 수백 가닥의 번개가 무맥에게 쏟아지며.
투둑. 툭. 툭. 툭. 파-앗!
산산조각 났던 검 조각들이 모두 무맥의 몸에 박혀들었다.
“커헉!”
무맥이 피를 토했다.
그의 미간에 박힌 검 조각에서 뇌전이 번뜩였다.
“끄아아아악--!”
온몸의 혈맥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무맥이 비명을 질렀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한 줄기 섬광이 지났다.
쉐에에엑----!
천뢰제왕검법 현뢰일섬(玄雷一殲)이 무맥의 목을 날렸다.
퉁. 툭.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얼굴 그래도, 무맥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이전의 그가 남궁진혜에게 그러했듯, 무맥 또한 검을 놓지 못한 채로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선 채로 죽었다.
‘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
진화의 눈이 다시 번뜩였다.
* * *
파아아아아아---!
무맥의 목에서 분수처럼 솟구친 피.
비처럼 떨어진 뜨끈한 핏방울에 광룡귀면대는 물론이고 적호단과 숙청단 모두 피 비가 떨어지는 곳을 보았다.
그 순간.
파지지지지직---!
목을 잃은 무맥의 몸에 벼락이 떨어지고, 공중에 뿌려진 피에도 뇌전이 번뜩였다.
‘피가 번쩍거려?’
놀라운 광경에 눈을 크게 뜨는 찰나.
핏방울 속에서 번뜩이던 한 줄기 번개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번----쩍.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번뜩인 빛.
그와 동시에 전장에서 처음 듣는 듯한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악!”
숙청단과 적호단의 빈틈을 파고들던 광룡귀면대원들이 뇌전에 휩싸여 타들어 가고 있었다.
파지지지지직---!
광룡귀면대원들의 온몸을 타고 뇌전이 번뜩이는 것과 함께 피부가 타들어 가며 연기를 피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윽.”
보는 사람마저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때.
파팟-!
바닥에 떨어진 사슬 조각에서 불꽃이 튀었다.
놀란 이들이 한 걸음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파파파파팟--!
이번에는 사슬들이 번뜩이며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날아가 광룡귀면대원들의 몸에 박혀 들어갔다.
팍팍. 팍. 팍. 팍-!
“크아아악!”
쿠웅!
머리, 가슴, 팔, 다리 할 것 없이.
인정사정없이 날아든 사슬에 광룡귀면대원들 수십 명이 쓰러지고 뒤로 밀려났다.
그 사이로 덤덤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죽여야 하는 적입니다. 손 속에 사정을 두면 우리 편이 다칩니다.”
옥구슬처럼 맑은 목소리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호하고 잔인한 말.
무맥의 피로 얼굴과 몸이 흠뻑 젖은 진화의 모습에, 광룡귀면대원뿐 아니라 적호단마저도 흠칫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려는 순간.
“도련님…… 하하, 꼬라지가 그게 뭐야?”
“저 꼬라지를 하고도 우리보다 예쁘다는 게 환장할 노릇이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남궁구가 먼저 웃음을 터뜨리고 당혜군이 투덜대자 현오가 세상의 불평등을 한탄하듯 불경을 외는 것으로, 숙청단은 진화에게서 느껴지던 서늘한 공포를 날려 버렸다.
“진화야-! 내 동생!”
이전과 달리 두 번째가 되었지만.
이번에도 남궁진혜는 이곳이 전장인 것도,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옷자락을 들어 진화의 얼굴을 닦았다.
싸우다가 소매를 찢어 버린 그녀는 옷자락을 드느라 배가 훤히 보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진화의 안위만을 살폈다.
그런 남궁진혜의 모습에 진화가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꽤 센 놈이던데 다친 곳은 없고?”
“하하하, 전 괜찮아요, 누님.”
남궁진혜의 호들갑스러운 챙김에도 진화가 밝게 대답했다.
유별난 남매의 모습에 적호단주 팽치가 혀를 찼다.
“쯧, 하여튼. 여-어, 새끼들아! 대가리가 죽었잖아! 뭐 하고 있어? 숙청단주의 말대로 전부 죽여--!”
“추—웅!”
적호단주 팽치가 사납게 소리치고, 그의 투기를 전달받은 적호단이 다시금 투기를 끌어 올렸다.
“너희는 뭐 해? 현오, 넌 밥값 해야지.”
“갑니다, 가!”
“허허! 나 참, 나 같은 불자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진화의 장난스러운 명에 숙청단도 웃으면서 검을 들었다.
이미 광룡귀면대의 숫자도 많이 줄었다.
게다가 무맥을 잃고 사기마저 땅에 떨어져, 어렵지 않게 전투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콰------앙!
협곡을 울리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뭐, 뭐야?”
당황한 이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진화는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눈을 크게 떴다.
진짜. 그러니까 진짜처럼 보이도록 만든 가짜 함정이 있는 곳이었다.
진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긴 우리가 정리하지. 먼저 가 봐라.”
“예.”
적호단주 팽치의 말에 정신을 차린 진화가 급하게 몸을 날렸다.
아니,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런데 진화가 몸을 날리기 전에, 수가 줄어든 광룡귀면대가 한쪽으로 모여들면서 비어 있던 옆쪽 풀숲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내가 딱 좋을 때에 온 것 같군.”
“호, 혼현마제! 당신이 이곳에 왜!”
적호단주는 물론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한 얼굴로 혼현마제를 보았다.
진화는 협곡 너머에서 들리는 굉음에 마음이 급했다.
혼현마제가 적호단과 숙청단, 진화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