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다 죽일 진(盡) 칼날 번뜩일 화(錵) : 정당한 복수란(5)
쾅! 콰-광! 쾅!
한번 크게 충격을 받은 적색 흙벽이 연이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피,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
‘분위기 좀 봐라, 멍충아!’
‘이 씨, 분위기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을 막아 주는 것도 아니잖아!’
‘이 흙먼지는 또 어떻고! 실컷 잘 싸우고 거지꼴을 하고 들어가면 그 소문은 다 어떻게 할 거야!’
‘그, 그건 그렇다. 게다가 여기서 떨어지는 거 다 맞고 서있는 것도 좀 멋이 없지 않나?’
‘…….’
남궁구와 남궁교명, 당혜군, 강무련이 빠르게 눈을 마주쳤다.
눈썹과 입 모양, 눈빛으로 대화하던 그들은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다행히 상황 또한 그들을 돕고 있었다.
“이놈---!”
분노에 찬 혼현마제의 목소리에, 숙청단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양쪽으로 퍼졌다.
‘자연스러웠지?’
‘좋아.’
남궁구와 남궁교명을 따라 현오와 팽가 형제가 움직이고, 당혜군을 따라 나하연과 초서비가, 강무련을 따라 군조, 이천평, 황계수가 모르는 척 적벽에서 떨어졌다.
숙청단의 움직임을 본 적호단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약삭빠른 놈들.’
‘깔려 죽기 전에 우리도 가자!’
혼현마제의 뒤편에 숨어 있을 것이 뻔한 교성흑오대를 경계하며, 적호단 여섯 개 조가 숙청단의 뒤로 움직였다.
그리고 적호단주와 부단주, 진화의 곁에 남았어야 했던 일 조와 이 조, 삼 조는 그들을 향해 부러움을 담아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 치사한 새끼들!’
‘두고 보자!’
일 조 조장 서장원이 혼현마제를 경계하듯 슬금슬금 앞으로 나와 적벽에서 떨어지자, 다른 이들도 모두 그를 따라 했다.
다행히 무너질 만한 적벽은 모두 무너지고, 역천비지는 그 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숙청단과 적호단이 혼현마제를 경계하며 전투태세를 보이자,
“적호단주의 뜻도 저자와 동일한가?”
이제는 예의상 하고 있던 존대마저 치워 버린 혼현마제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런 혼현마제의 물음에 적호단주가 한숨을 쉬었다.
무맥을 해치운 건 진화였지만 적호단 또한 수적 열세에서 어렵던 싸움을 방금 마쳤다.
희생은 크지 않았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 아직 수습하지 못한 수하들의 시체가 계속 눈에 밟혔다.
콰---광! 콰---앙!
적벽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 큰, 범상치 않은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일단, 너는 얼른 가 봐라.”
적호단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혼현마제가 아닌 진화를 향한 말이었다.
“…….”
“저쪽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으니까, 얼른 가 봐.”
진화가 대답 없이 그를 보자, 적호단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진화를 재촉했다.
숙청단주로서 혼현마제의 거래 제안을 거절하는 것까진 괜찮았다.
전장에 있는 단주들에게는 그만한 결정권이 주어지니까.
다만 진화가 이 갑작스러운 결정을 적호단주인 자신과 의논할 생각조차 없었다는 건 문제였다.
정사연합은 몰라도 이제까지 정의맹은 ‘적을 놓치더라도 희생을 줄인다.’는 대원칙이 있어 왔기에, 적호단주로서는 뒤에 수하들을 두고 고민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경험이 없어 그랬겠지만, 그래도 상의도 없이 멋대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려는 놈한테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혼현마제와 일이 틀어진 마당에, 지금 고민해야 하는 것은 효율적으로 적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진짜처럼 꾸며 놓았던’ 가짜 현장이 있는 곳에서 들린 범상치 않은 굉음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콰-------광!
마침 다시 그쪽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이번에는 땅도 같이 흔들렸다.
“거치적거리지 말고 얼른 꺼져!”
“그래, 진화야, 얼른 가 봐.”
적호단주가 으르렁거리며 진화의 등을 떠밀고, 남궁진혜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굉음이 들린 곳을 힐끗거렸다.
이 함정으로 잡을 수 있는 가장 큰 적은 혼현마제였다.
그런데 혼현마제는 지금 이곳에 나타났고, 다른 곳에서 지축을 흔들 정도로 위력적인 힘의 여파가 느껴진다면…….
‘무맥에 이어서 광마제마저 나타난 게 분명해!’
적호단주가 본인의 감정을 누르고 진화를 재촉하는 이유였다.
진화도 광마제가 나타났음을 눈치챘기에, 적호단주와 남궁진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쪽은 최대한 무난하게 일을 처리해도 좋습니다.”
“……!”
진화의 말에 적호단주가 눈을 크게 떴다.
저는 가니까 여긴 무난하게 처리해도 좋다……?
혼현마제와 잠시 손을 잡아 전투를 피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처리해도 된다는 걸 아는 놈이 지금까지 혼현마제를 거절한 건……?
거절해도 되니까.
진화 자신은 혼현마제를 큰 피해 없이 죽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저…… 건방진 새끼!”
적호단주가 숙청단과 함께 떠나는 진화의 뒷모습을 향해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때.
“광마제가 온 모양이군.”
혼현마제가 적호단주와 남궁진혜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보였다.
혼현마제의 표정이 말하는 것이야 뻔했다.
“저 천둥벌거숭이 황자가 내 거래를 파투 내는 바람에,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무단과 정의맹 적호단이 모두 다 죽게 생겼구나. 재미있게 되었어. 후후후후후!”
“하하하하, 웃어? 아…… 씨발.”
억지로 따라 웃던 적호단주가 순식간에 정색을 하며 쌍욕을 뱉었다.
그리고 혼현마제를 노려보았다.
적색 안광이 이글거리며 온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아, 씨발. 단주 맛 갔다.”
“예?”
“꼭지가 돌았다고.”
남궁진혜와 일 조 조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적호단주 경격권 팽치.
하북팽가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조차 거부한 팽가의 망나니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한 눈빛으로 혼현마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혹시 하나 남은 눈깔이 무지개-눈깔이냐? 온몸을 적-갈색으로 물들여 줘 볼까, 이 미친 늙은이야?”
“허어! 입이 험하구나!”
적호단주의 막말에 혼현마제 또한 한쪽 눈으로 녹광을 번뜩이며 살기를 뿜었다.
“치기 어린 결정으로 내 대계를 흔든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혼현마제의 한 손에서 현홍사가 뿜어져 나왔다.
적호단주 팽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현홍사를 보며 양손을 뻗었다.
퍼---엉!
적호단주의 팔을 자를 듯한 현홍사가 모두 터져 나가고.
적호단주의 양 주먹에 횃불이 타오르는 듯 적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언제 적 귀천성이고 언제 적 팔마제야? 계속 도망치면서도 주제 파악이 덜 됐나 본데, 수박 씨 바르듯 강냉이부터 털어 주마, 늙은이-!”
적호단주 팽치가 혼현마제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피에 미친 호랑이라는 적호단의 위명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보여 주는 듯, 날아드는 현홍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도 간다-!”
“추-웅!”
남궁진혜가 푸른 기둥을 들고 외치고, 적호단이 그 뒤를 따랐다.
* * *
챙-! 챙-!
촤라라라라라락----!
날아드는 갈고리는 각 조의 조장들이 검기로 끊어 버리고, 검에 사슬이 감기면 그곳을 중심으로 조원들이 원을 그리듯 움직이며 상대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채—앵!
광룡귀면대원들이 사슬을 끊고 물러섰다.
그러자 원형을 그리던 조의 앞으로 다시 다른 조가 나타나 광룡귀면대의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타타타타탓--!
마치 소용돌이치는 대양 같았다.
소용돌이를 그린 창궁무애단이 적을 그들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면, 파도처럼 밀려든 제왕무적단이 지원을 끊어 버리듯 적을 분리시킨다.
소용돌이 속에 갇힌 소수의 적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창궁무애검법 낭파석파(浪破石破)에 정신없이 검을 맞으며 죽어 갔다.
그렇기에 겁이 없고 무지막지하기로 유명한 광룡귀면대가 쉽사리 공격해 들어가지 못했다.
백서가 입술을 깨물고 누군가를 노려보았다.
창궁무애단 단주 단애구검 호방련.
잘 다듬어진 콧수염 외에는 흔하디흔한 동네 아저씨 같은 사내가 바로, 광룡귀면대가 주인의 곁에 있으면서도 힘을 쓸 수 없게 한 원흉이었다.
“파진(破陳)-!”
호방련의 말에 창궁무애단이 일제히 흩어지고.
모여 있는 창궁무애단을 향해 단검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던 광룡귀면대의 공격이 무산되었다.
“쳇.”
새하얀 쥐 가면 쓴 백서가 혀를 차며 호방련을 보았다.
‘대체 뭘 보는 거지? 어떻게 알고 움직이는 거야?’
백서의 눈이 호방련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평범한 칼에 평범한 무공.
조금 강하긴 하지만 호방련은 보이는 것만큼 평범한 무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남궁세가 밖의 사람들은 결코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남궁경이 타고난 무재와 신체 조건으로 남궁세가의 모든 검술에 능통한 검술의 천재라면, 호방련은 다수의 무인들을 이끄는 집단 전투 지휘의 천재였다.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호방련이야말로 남궁세가 무인들의 희생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전쟁을 치르도록 창궁무애진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다.
그게 벌써 수십 년 전, 그가 처음 신입 무사로서 첫 전투에 나섰을 때였다.
단주가 된 지금의 호방련은 그때보다 창궁무애진을 세분화하고 발전시킨 동시에 남궁세가 무인들을 완벽하게 전쟁에 적합하도록 조련하면서, ‘남궁세가의 움직이는 철벽’이라는 현재 창궁무애단의 위상과 명성을 완성시켰다.
호방련이 비록 일신의 무위가 뛰어난 무인은 아니었으나 집단 전투를 이끄는 데 있어서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창궁무애단의 전투에 있어서 호방련이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지금, 광룡귀면대가 광마제를 곁에 두고 수적 우위마저 높은 상황임에도 힘 한번 못 쓰고 주춤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저자가 창궁무애단 전체를 움직이고 있어! 저자를 죽여야 창궁무애단에 빈틈이 생긴다!’
백서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리고 결단을 내린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고 매섭게 호방련에게 접근했다.
쉐에에엑---!
가볍고 날렵한 몸이 화살처럼 전장을 뚫고 호방련의 뒤를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때.
채----앵!
창궁무애단의 부단주, 한령신검 남궁위가 백서의 검을 막아 내고 시리도록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단주님께 발톱 들이대지 마라, 쥐새끼.”
호방련의 천재성을 가장 잘 아는 남궁세가는, 남궁경에 버금가는 세가 최고의 검술 천재를 호방련의 부단주로 붙여 두었다.
* * *
절벽을 뒤에 둔 좁은 길.
그 속에서 호방련과 창궁무애단은 자유자재로 소용돌이를 만들고 막다른 길을 만들어 내며 광룡귀면대를 상대했다.
남궁세가 최강의 무단이라 불리는 제왕무적단은 개개인이 광룡귀면대의 무력을 상회하면서 창궁무애단을 보호했다.
체력과 내공의 한계가 없다면 그들은 언제까지고 광룡귀면대의 공세를 버텨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남궁경이었다.
콰광-----!
쾅!
날아드는 검기를 손으로 쳐 내자, 절벽이 움푹움푹 패며 흔들렸다.
“하하하하! 제왕검의 자식이 팔딱팔딱 개구리처럼 싸우는구나!”
광마제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남궁경을 조롱했다.
하지만 이내 웃고 있는 광마제의 뒤로 남궁경이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에엑---!
창궁무애검법 동해창공의 눈부신 검강이 광마제의 등을 가를 듯 날아들었다.
“허어!”
거대하고 새파란 검강을 보며 광마제가 감탄하듯 웃었다.
하지만 손바닥을 펼쳐 광룡기로 여유롭게 남궁경의 공격을 막았다.
콰----앙!
남궁경과 광마제의 기운이 부딪히며 사방으로 흩어지자, 기운의 여파로 지축을 흔들었다.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궁경이 터져 나가는 절벽을 파헤치며 창궁대연검법 파해일몰을 광마제의 머리 위로 떨어뜨렸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공격과 공격.
남궁경은 남궁제일검이라는 명성답게 남궁세가의 모든 검술을 동원하여 광마제의 빈틈을 노렸다.
하지만 힘을 찾은 광마제는 넘치는 광룡기로 여유롭게 남궁경의 검강을 막아 냈다.
검술은 결국 검을 휘두르는 다양한 방법일 뿐이었다.
광마제는 남궁경이 어떤 방향, 어떤 식으로 공격하든 절대적인 힘으로 그것을 깨어 버렸다.
파파파파파팟---!
이번에도 광마제는 한 손으로 검은 광룡기를 뿜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윗덩어리와 남궁경의 검강을 모두 날려 버렸다.
동시에 다른 쪽 팔을 남궁경을 향해 뻗었다.
“젊은 시절의 제왕검보다 빠르고 다채롭구나. 하지만…… 약해.”
광마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리고 남궁경을 향해 뻗은 손에서 거대한 광룡기가 쏘아져 나갔다.
파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흑룡이 입을 벌리고 남궁경을 집어삼킬 듯 사납게 날아갔다.
“젠장!”
아직도 더 커질 힘이 남아 있었다니.
남궁경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검을 세웠다.
쉐에에에엑----!
새파랗게 빛나는 거대한 기둥이 흑룡을 반으로 갈랐다.
제왕무적검법 일휘천낙-!
퍼—엉!
콰과광---쾅!
철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날카롭고 정확하게 광룡기를 반으로 가르자, 사방으로 기운의 여파가 퍼져 나갔다.
절벽이 부서져 떨어지고, 남궁세가 무인들과 광룡귀면대원들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돌 크게 땅이 흔들렸다.
광룡기를 반으로 가른 남궁경은 다음 공격을 이어 가기 위해 뛰어올랐다.
그런데 그때.
섬----뜩.
남궁경은 정수리에 송곳이 박히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몸을 날렸다.
쉐에에엑-! 채-앵!
파--팟!
퍼-----엉!
남궁경이 뛰어오른 자리를 지난 새까만 구체가 그대로 바닥으로 박히며 터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펑! 펑! 펑! 펑! 펑!
수도 없이 떨어지는 광룡기의 연사에, 몸을 날려 피하던 남궁경이 마지막엔 급하게 검과 팔을 들어 기막으로 충격을 막았다.
남궁경을 중심으로 삼 장 정도 움푹 파인 거대한 원이 생겼다.
“크읏!”
몸속의 내장이 진탕된 듯 흔들리는 느낌에, 남궁경의 입에서 작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호오, 확실히 제왕검보다 빨라.”
광마제가 자신의 공격을 견딘 남궁경을 칭찬하듯 감탄했다.
그 표정과 여유로움에, 남궁경은 속이 진탕된 것보다 더 배배 꼬이는 느낌이었다.
“이 망할 늙은이 대가리에……!”
배알이 꼴린 남궁경이 용감하게 악담을 퍼부으려는 그때.
파파파파파팟--! 파파팟-! 파---팟!
남궁경의 악담이 현실이 되었다.
땅이 까맣게 타는 동시에 거칠게 파헤쳐졌다.
급하게 물러서는 광마제가 있던 자리에 새파란 뇌전이 번뜩였다.
“오랜만에 그 미친 대가리나 뚫어 줄까 했더니, 늙은 것치곤 빠르군.”
낭랑한 목소리가 남궁경이 다 하지 못한 악담과 칭찬을 하며 끼어들었다.
“진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