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 (360)화 (360/425)

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따를 화(化) : 운명의 굴레(5)

진화가 깨어나자 건희전은 물론 황궁 전체에 훈풍이 불었다.

제국의 꽃, 황궁의 꽃이라는 황후가 활기를 찾으면서,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조심스레 행동하던 궁인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건희전 궁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호호호호, 현오 스님, 숙수님이 오늘은 향주식 복만두 어떠시냐고 물으셨어요.”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복 받으실 겁니다.”

“어머? 제가요? 호호호호, 재밌는 분이세요.”

건희전 궁인들은 현오의 재미없는 말에도 웃어 줄 정도로 숙청단에 호의적으로 변했고, 심지어 건희전 숙수는 진화가 깨어난 이후로 숙청단에 매일 매끼 다른 만두를 제공하고 있었다.

현오는 며칠 사이에 탱글탱글 오른 볼살을 씰룩이면서 궁인들에게 웃어 주었다.

아니, 웃겨 주고 있는 것일까.

톡 치면 데구루루 굴러갈 듯한 몸, 아슬아슬 간신히 연결된 끈과 승복, 중간중간 엉덩이에 낀 바지를 빼 주면서 곰살맞게 걸어가는 모습까지.

확실히 황도에 오기 전보다 살이 많이 쪘다.

“넌…… 그 승복 끈에 미안하지도 않냐? 움직일 때마다 끈이 부들부들 떠는구먼.”

“대체 뭘 먹기에 그렇게 단번에 찌는 거지? 그것도 소림비기 같은 건가?”

남궁구가 현오의 목을 끌어안고 남궁교명이 현오의 뱃살을 찔렀다.

얼핏 보기에는 현오를 괴롭히는 듯 보였다.

그러자 건희전 곳곳에서 날카로운 눈길이 날아들었다.

숙청단에 대한 건희전 궁인들의 호의가 물만두 한 알이라면, 현오에 대한 호의는 숙수 특제 왕고기만두였으니. 결정적으로 진화를 깨운 사람이 현오라는 것이 알려진 후부터 현오에겐 건희전 궁인들의 절대적인 비호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 시선.”

“눈길이 따갑군.”

“흐흐흐,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거네.”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궁인들의 눈치를 보며 현오를 놀리던 손길을 거두고, 현오가 위풍당당하게 배를 내민 채 건희전 장원을 거닐었다.

건희전 정원.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인 영수전에 버금갈 정도로 꽃이 화려하게 만발한 정원이었다.

진화는 정원 안에 지어진 전각에서 꽃들을 보고 있었다.

꽃구경은 이전 생을 통틀어 진화가 한 번도 즐겨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꽃구경이라니. 한가한 사람들이 할 짓 없어 하는 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가 그 한가한 사람이 된 건가?’

이제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능소화, 갈라진 꽃잎이 처연한 부용, 어떤 색으로 필지 알 수 없는 채송화, 피처럼 짙은 붉은색의 계관초, 연못에는 갖가지 색의 수련이 한창이었다.

‘꽃을 보면서도 떠올리는 게 피라니, 나도 어지간하군.’

진화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웃음이 씁쓸하다거나 애처롭지 않았다.

꽃 이름을 떠올리며 함께 떠올린 사람 때문이었다.

진화가 이렇게 꽃 이름을 많이 아는 건 전부 황후의 덕분이었다.

진화가 깨어난 뒤로 황후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진화에게 다가왔다.

진화에게 남는 시간을 청하던 이전과 달리 어미를 위해 잠깐 시간을 내어 달라 요구했고, 진화가 좋아하는 것들만 물었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하나둘 이야기했다.

그중 하나가 꽃이었다.

진화를 위해 하나, 하나 고르고 골라 심고 손수 가꾸었다고.

진화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팽연화가 제게 음식 하나하나를 쥐여 주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조심스럽고 애정 가득한 눈빛과 손길을 떠올리며, 서서히 황후를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진화의 곁으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다가왔다.

몇 번이나 건희전에 오고도 연못을 한 바퀴 둘러야 올 수 있는 전각엔 눈길도 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현오, 무슨 일 있나?”

진화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모습에 현오가 웃음을 흘렸다.

분명 웃었는데 눈을 찡긋한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현오가 조용히 진화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진화가 보고 있던 정원을 보았다.

잠시 동안, 둘은 옆으로 조금 틀어 앉아 각자 정원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저걸 보면서 평화롭다, 예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가?”

현오가 물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물었다면 ‘그럼 넌 꽃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냐?’고 되묻겠지만, 현오는 꽃을 보고 ‘예쁘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현오 또한 그런 자신이 비정상적이라는 걸 잘 알고 묻는 말이었다.

진화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현오의 얼굴을 보며, 이번에는 진화가 웃음을 흘렸다.

“저걸 계관초라고 한다는군, 꽃이 닭벼슬을 닮았다고. 나는 저걸 보고 피 색깔 같다고 생각했지.”

“푸-핫.”

진화의 대답에 현호가 진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안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현오는 같은 제물양육실 출신에 특별한 체질을 가진 진화에게 나름 동질감을 느껴 왔다.

고기를 좋아하는 것 외에는 평생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기 힘들었던 현오. 심지어 소림에선 고기를 좋아하는 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현오가 진화에게 동질감을 느낀 건, 소림과의 가족 같은 유대감과는 다른 것이었다.

현오에게 진화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이해자였다.

그래서 현오는 최근 들어 달라진 진화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원수를 죽인 느낌은 어떤가?”

“무슨 말이지?”

“자네는 광마제의 제물, 나는 역천마제의 제물. 따지자면 광마제야말로 자네의 진짜 원수라 할 수 있지 않나. 자네를 제물로 만든 장본인이니까.”

“글쎄…….”

현오의 물음에 진화가 즉답을 피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쉬울까.

잠깐 고민하던 진화가 현오와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속이 안 풀려.”

“……뭐?”

진화의 대답에 현오가 놀란 얼굴로 멈칫하다 되물었다.

그런 현오의 반응에 되레 진화가 이상하다는 듯 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그게 목숨 하나 거둔다고 사라질 원한인가?”

“그래서, 광마제의 피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고 태워 버리고도 속이 안 풀린다고?”

“놈과 관련된 건 피 한 방울이 아니라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태워 버리고 싶다. 그 빌어먹을 역천비록에 귀천성까지 전부.”

“허어! 허, 허허허허허!”

광마제를 죽이다 죽을 뻔한 주제에 귀천성까지 전부 없애겠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하다니. 진지한 얼굴이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라 현오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현오의 모습에 진화가 싱긋 웃어 보였다.

“참고로 저 계관초가 닭벼슬을 닮았다는 말에 진혜 누님은 ‘저것도 뜯어먹냐’고 물었지. 당혜군은 저걸 즙으로 짜서 자네에게 복통과 설사를 일으킬 거라 말했고, 나하연 낭자는 ‘저 붉은 꽃보다 내 가슴이 더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시주들은 들은 척도 안 했겠군. 큭큭.”

진화의 말에 현오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리며 낄낄댔다.

진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비정상적인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이상하다는 건가?”

“……그냥 사람은 전부 제각기 다른 거라고.”

“하긴 부처님께서 보시기에 우린 다 똑같이 손바닥에 올려놓을 정도로 작고 이상한 것들이겠지? 흐흐흐.”

“하아, 그래.”

대충 맥락은 통하는 것 같으니까.

진화는 현오의 깨달음을 바로잡는 건 금방 포기했다.

“광마제를 죽이면서 생각했지. 복수가 끝이 아니라고.”

“복수가 끝이 아니라고?”

“이전에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광마제만 죽인다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놈들을 다 죽이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잘 살겠다고 생각한다.”

“…….”

단호하다 못해 선언과 같은 진화의 말에 현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뒤늦게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뭐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가!’ 하며 박장대소를 터뜨리긴 했지만, 현오도 진화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 * *

진화가 깨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적호단주와 조장들, 창궁무애단주 호방련과 부단주 남궁위를 비롯해서 황자와 공주들, 심지어 호양공주까지 들렀다.

“형님 저하, 일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쾌, 쾌차를 감축드립니다.”

사황자와 함께 온 육황자는 다소 어색한 태도로 진화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일전에 제가 실수가 컸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사과를 해 오는 육황자의 모습에 진화가 놀란 눈을 떴다.

“실수? 아……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하자던.”

“으아아! 소, 소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진화의 말에 육황자가 기겁을 하며 목소리를 키웠다.

놀리려던 것은 아닌데 육황자는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사황자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 녀석에 제 생각 해 준다고 의욕이 과했습니다. 당사자는 생각도 없는데 말입니다. 많이 반성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사황자가 의젓한 얼굴로 동생의 옆에서 같이 사과했다.

의젓하고 유연한 형의 얼굴과 함께 묘하게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 듯한 말투.

진화가 고개를 숙인 사황자와 육황자를 빤히 보았다.

생각도 없는 당사자이기는 진화도 마찬가지라, 황태자 위에 뜻이 없다는 걸 몇 번씩 다른 식으로 전하는 사황자의 행동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런 부담스러움이 절정으로 치달은 건 일황자와 호양공주가 찾아왔을 때였다.

그들은 사황자나 육황자보다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쾌차 축하 연회는 안 여신답니까?”

“그런 것도 엽니까?”

“아무렴, 적통 황자가 병석을 털고 일어난 일인데요.”

호양공주가 큰일이라도 난 듯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 복잡미묘했던 귀환 축하연이 엊그제 같은데 또 연회라니, 진화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조만간 황태자 등극식도 해야 하니 그때 몰아서 할 생각이겠지요.”

“네?”

일황자의 말에 진화는 놀란 눈을 했다.

일황자는 그런 진화의 반응이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이제 네가 황태자 위에 오르는 것이 온 조정에 기정사실로 굳어졌는데.”

“아니, 그게 왜 기정사실입니까?”

욕망을 가지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게 황태자 위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진화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일황자는 그런 진화의 반응이 새삼스럽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나는 폐위되었고, 오황자, 육황자, 칠황자는 나이와 건강상의 문제로 탈락. 사황자는 스스로 뜻이 없다 공언했고, 유일한 경쟁자나 다름없던 삼황자는 완전히 몰락했지. 상수원씨 가문과의 끈조차 끊어졌다는 소문까지 났으니 재기할 가능성도 없네. 무엇보다 폐하의 눈 밖에 났지. 결국 남은 사람은? 이황자 너뿐인 거지.”

황당해하는 진화를 향해 일황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씨익 웃는 얼굴이 얄미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 정말이네! 그럼 우리 등극식 전에 축하하는 뜻에서 작은 연회나 열까?”

“아니오!”

“고모님, 제발 참아요!”

반색하는 호양공주의 말에 당황하고 있던 진화는 물론 일왕자까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제 겨우 황제와 황후를 부모로 완전히 받아들이고 궁에도 정이 들어간다 싶은 생각이 든 것이 바로 오늘 오전이었지만, 진화는 당장이라도 황궁을 떠나고 싶어졌다.

다행히 진화가 황궁을 떠날 일은 없었다.

조정에서는 다들 뭐라 언질이라도 받은 듯 황태자 위에 대한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진화를 불행하게 할 일은 연회밖에 없었다.

황후궁 주최의 큰 연회가 열렸다.

진화에겐 다행스럽게도 역도들을 물리친 이황자의 공을 치하하고 이황자의 회복을 축하한다는 명분의 연회였다.

오랜만에 대소 신료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모두 참석하고, 궐 밖에 있던 적호단과 남궁세가 무인들까지 일부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휘황찬란한 황궁 연회의 장식과 무희들의 공연, 입을 황홀하게 하는 음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양공주는 연회장을 본인이 꾸미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지만 오랜만의 큰 연회에 누구보다 화려한 행색으로 참가해서 연회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런 호양공주의 옆에서 난처한 듯 웃고 있는 일황자도 사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일황자는 황태자 위에서 물러나고 살성의 자식이라는 소문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지만, 이황자전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최근에는 황제의 장남으로 위상을 쌓아 가는 중이었다.

모두가 오랜만의 연회를 즐기는 가운데, 한 사람.

오직 진화만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진화의 옆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네가 불편함을 느끼는 걸 보니, 네게도 눈치라는 게 생긴 모양이구나.”

“…….”

황제가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진화가 그런 황제를 슬쩍 째려보듯 보았다.

지금 진화가 느끼는 불편함의 절반은 황제의 탓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황실 연회는 황제와 황후가 가운데 앉고, 그 양옆이나 아래로 황족들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순서대로라면 황제의 옆에는 장자인 일황자가 앉아야 했다.

그런데 오늘 연회에서는 황제의 옆자리에 진화가 앉아 있었다.

미리 이야기가 된 듯 엄 태감이 연회장에 들어오는 진화를 자연스럽게 이 자리로 이끌었다.

심지어 다른 황자와 공주, 황족들은 모두 단 아래에 자리했다.

아무리 연회의 주인공이라지만 법도에도 어긋나는 노골적인 처사였다.

게다가 높은 자리에 앉으니 연회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황자에게 말을 거는 이들은 그냥 편한 친우 관계이거나, 폐헌 인근에 본가가 있는 호족들이다. 사황자와 육황자의 곁에 있던 문신들이나 황도 호족들은 이전과 달리 자기들끼리 모여 있거나 남궁세가에 말을 걸고 있고, 삼황자 측은…… 끈이 떨어졌다더니, 상수원씨나 군부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었군. 군부 무인들조차 남궁세가에 관심을 보이고 있군.’

세력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아무리 눈치를 안 보는 진화라도 누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지 모를 수가 없는 눈에 띄는 변화였다.

진화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때,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황제가 말했다.

“황태자가 되어라.”

“……!”

황제의 말에 진화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진화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군부 무인들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남궁경과 남궁진혜를 찾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