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변하지 않을 진(眞) 꽃 화(花) : 멈추지 않는 운명(1)
잠잠하던 신 제국군이 움직였다.
국경의 동요는 한 제국에도 급하게 전해졌지만, 한 제국은 국경을 경계할 뿐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신 제국군이 아직 나라의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진국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첩자들이 오가고.
신 제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문을 열어라! 성문을 열어라-!”
산길을 타고 숲에 숨었던 군사들이 일제히 밖으로 뛰어나왔다.
숲에 있던 작은 관문으로 신 제국 군사들이 몰아치고, 순식간에 관문이 무너졌다.
그리고 신 제국 군사들은 산불이 번지듯 진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신 제국의 절반도 진국과 같은 지형이었기에, 신 제국군은 진국의 공략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높고 험준한 산지 중간중간 분지에 곡창지대와 마을이 있는 진국의 특성을 이용해서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새도 없이 마을 하나하나를 각개격파 해 갔다.
마을 단위의 호족이나 군대뿐 아니었다.
귀천성 무인들 또한 배신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밀려들었다.
쉐에에엑---!
챙! 챙!
“배신자들을 전부 죽여라!”
“누구 마음대로!”
챙-!
검은 옷을 입은 지신문 무사들과 붉은 옷을 입은 이화문 무사들이 치열하게 맞부딪혔다.
그때.
휘-익! 휙휙휙휙---!
어디선가 날아든 검은 철선이 이화문 무사들의 뒤를 노렸다.
동시에.
화라라라락--!
불이 붙은 채찍이 철선을 때렸다.
채----앵!
채찍에 맞은 철선이 주인에게 돌아갔다.
홍매궁 궁주 전화(戰花) 주화란이 철선의 주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칠보선 광한후! 당신까지 나서다니 역천마제께서도 꽤 급하셨나 보군요.”
“허허허, 전화, 그대 같은 인물이 이화문에 있으니 이 노구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소. 감히 역천마제 님을 배신하다니. 그대답지 않은 어리석은 결정이었소.”
칠보선 광한후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주화란을 비꼬았다.
그의 눈이 마치 ‘사방을 둘러봐라.’라고 말하는 듯했다.
홍매궁주 주화란이 눈매를 사납게 굳히며 광한후를 노려보았다.
“이런다고 달라질 건 없어요. 혼현마제께서는 이 모든 사태를 내다보셨고,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진국 무인들은 안가로 이동하고 있을 거예요.”
진국은 시작할 때부터 범과 늑대 사이에서 시작했다.
그들이 이화문에 자리를 잡았던 순간부터, 혼현마제는 어느 한쪽의 공격을 대비하여 모든 무인들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홍매궁주는 단지 남아 있는 진국 무인들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고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홍매궁주의 생각을 읽어 내기라도 한 듯, 칠보선 광한후가 홍매궁주를 비웃었다.
“어차피 전부 죽을 목숨이오. 빠르고 늦음의 차이일 뿐이라오. 모르겠소? 전쟁의 업화가 진국 전체를 덮쳤소! 그분이 움직이셨단 말이오!”
칠보선 광한후의 말에 홍매궁주 주화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광한후는 그런 주화란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하얗게 질려 벌벌 떠는 꼴이 볼만하구려, 전화. 언젠가, 그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흐흐흐흐.”
주화란을 조롱하며 칠보선 광한후가 비열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와 함께.
푸-욱!
“컥! 이, 이게 무슨……?”
광한후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뱀을 보았다.
뚫어져라 다시 보고 또 보아도, 노랗고 검은 줄무늬 뱀이 제 가슴을 뚫고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어…….”
광한후가 입에서 피를 울컥울컥 뱉어 내며 뭐가 말을 하려 했다.
그때,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온 뱀이 말을 걸었다.
“그러게. 전장에선 그 못된 심보에 취해서 방심해선 안 된다고 누누이 일렀지 않았나. 감히 본 이화문에 왔으면서 나를 만날 생각도 안 했던 겐가?”
“……!”
뱀의 입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곧 그의 귀 옆에서 들렸다.
광한후가 붉게 충혈된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자, 뱀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노랗고 검은 눈과 마주쳤다.
“시, 식귀!”
지금 귀천성 무인들이 공격하고 있는 이화문의 문주 식귀 사멸찬이었다.
광한후가 급하게 다시 제 가슴을 보자, 노랗고 검은 뱀은 사람의 심장을 먹는 식귀 사멸찬의 손으로 변해 있었다.
“역천마제가 움직였든 뭐든 상관치 않는다. 혼현마제께선 이미 모든 걸 예측하셨으니. 네놈들을 죽이고 우리는 진짜 사도들의 이상향을 찾을 것이다!”
선언과 동시에 이화문주가 광한후의 심장을 잡아 뜯었다.
진국 무인들의 반격이 시작되고, 귀천성과 진국 무인들의 싸움이 점점 더 치열해졌다.
* * *
정사연합 군사부.
이전에 정의맹 군사부였던 이곳은 연합 군사부로 바뀐 뒤로 ‘들어간 군사들은 있는데 나오는 군사들은 없다’는 전설의 장소가 되어 가고 있었다.
군사부 소속 군사들 대부분이 철야 후 새벽 퇴근과 야근 후 야밤 퇴근을 밥 먹듯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군사부에서도 전설이 사실화되어 가고 있는 곳이 있었으니.
“그러니까 역천마제 놈이 진짜로 움직였단 말이지.”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역천마제가 자신의 예상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한 듯했다.
역천마제의 행동을 맞춘 것만으로 그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국이라니,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놈이 배신자를 용납할 리 없지, 역시 뒤통수를 맞는 척한 것뿐이었어. 음흉하고 속 좁은 영감탱이. 크흐흐흐.”
대체 누가 누구더러 음흉하고 속이 좁다고 하는지.
제갈길현의 웃음소리야말로 누구보다 음흉하게 들렸다.
한쪽에서 제갈가주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제발 그 나이에 누워서 음식 먹지 마십시오. 공동의 침구가 더러워지지 않습니까! ……불결한 영감탱이.”
“뭐야, 이놈아?”
“들리셨습니까? 그 나이에도 아직 귀가 밝으시니 자식으로서 기쁜 일이군요.”
“그럼, 코앞에서 말하는데 그걸 못 들을까! 아비 아직 안 죽었다. 송장 취급하지 마, 이놈아!”
“아, 예. 아버님께서 그제부터 공동 침구에 혼자만 누워 계셔서 혹시나 했네요.”
“뭐야, 혹시나? 뭘 혹시나 했는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최소한 기절하는 일만은 막아 보고자 집무실 한편에 들여놓은 침상이었다.
그 침상을, 나이를 깡패로 강탈한 천수현인이나 그걸 보고 꼬박꼬박 시비를 거는 제갈가주나.
도긴개긴 부자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친 남궁진휘와 홍랑대부 초산하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러지들 마시고 앞으로 일에 대해 의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어쨌든 혼현마제의 배신이 성공했을 때부터 지금과 같은 사태를 예측한 천수현인 어른의 혜안이 정말 탁월하지 않았습니까.”
남궁진휘의 중재와 홍랑대부의 칭찬에 제갈가주와 천수현인이 못 이기는 척 중앙의 탁자로 모였다.
“허허허, 뭐, 혜안이랄 것까지야. 역천마제 놈이 어떤 놈인데, 군사들은 계획을 세울 때 놈의 본질만 잊지 말고 기억하면 돼. 역천마제는 눈에 거슬리는 건 그게 온 세상이라 해도 치워 버려야 직성에 풀리는 놈이야. 그런 놈이 왜 눈에 거슬리는 광마제와 혼현마제를 그냥 두었을까, 답은 간단하지.”
“인내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천수현인의 말에 제갈가주가 이어 답했다.
이럴 때 보면 죽이 척척 맞는 부자간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티격태격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 놓고 둘이서만 신난 천수현인과 제갈가주를 보며, 조용히 있던 남궁진휘가 피식 웃었다.
“참 대단한 부자지간입니다. 저런 호부호자 밑에 어째서 견손들만 났을까요.”
이틀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자의 감상이었다.
“허어! 거참! 거참! 알고 보면 속은 저 젊은 남궁 놈이 제일 좁은 거 아니냐?”
“이 경우에는 뒤끝이 긴 겁니다. 지은 죄가 있거든요.”
“끄응.”
천수현인이 버럭 했지만 제갈가주의 자기반성적인 솔직한 말에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천수현인과 제갈가주가 조용해지자 남궁진휘가 조금 개운한 얼굴이 되었다.
“어쨌든 역천마제가 역천비록에 나온 운명을 완성하고 있다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참 잘된 일이 아닙니까?”
역천비록의 운명.
그 빌어먹을 것에 대한 말이 나오자 천수현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운명의 중첩에 따라 역천마제와 혼현마제, 광마제의 운명이 얽혀 있었지. 그중에서도 을해년 정사월 계유일 묘시, 광마제의 운명은 ‘청돼지가 피 흘리는 뱀을 타고 검은 닭의 목을 비튼다’는 것이라.”
“마지막으로 해석한 역천비록이었지요. 후후후.”
“그래. 그것으로 역천마제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왜 혼현마제의 배신을 두고 봤는지 납득할 수 있었지.”
역천비록의 해석에 나섰던 천수현인과 홍랑대부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제갈가주도 마지막 역천비록을 해석하며 역천마제를 죽일 방법을 찾았을 때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단 한 사람, 남궁진휘만 마음 놓고 웃지 못했다.
“혼현마제의 운명대로라면 ‘흰 뱀이 붉은 용으로 청돼지를 태운다.’는 거였으니까요. 붉은 용이 설마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아들인 진화일 줄은 몰랐지만요.”
남궁진휘가 웃음 끝이 씁쓸했다.
진화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전투 이후 쓰러졌던 진화의 건강부터 앞으로 계속 범상치 않을 진화의 미래까지.
“혼현마제는 잘 살려 두었겠지?”
“예. 죽었다고 확신한 것처럼 적호단이 자리를 떴습니다. 이후 제자라는 자가 혼현마제를 수습해 가는 것까지 확인했고요.”
모든 것이 치밀한 계획하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였다.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남궁진휘는 물론이고 홍랑대부와 제갈가주의 얼굴에도 확신이 떠올랐다.
“혹시 모르니까. 혼현마제가 살아 있는 편이 독부를 움직이기 좋을 거야. 독부 은요가 검마제를 죽이는 운명을 완성하는 날…… 우리에게 역천마제의 목을 비틀 기회가 찾아올 테니.”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차갑고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오랜 세월 끌어온 전쟁을 끝낼 때가 다가왔음에, 천수현인은 날카롭게 갈았던 마음의 칼을 꺼내 들었다.
“역천마제가 운명을 완성하게 두어야 하네. 그 운명이 놈의 명을 끊을 때까지.”
“계획대로 각 무단에 전달하겠습니다.”
“각 문파들에도 협조가 필요한 부분을 미리 알리겠습니다.”
“한 황실에도 다음 계획을 전달하지요.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천수현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갈가주와 남궁진휘, 홍랑대부가 움직였다.
* * *
신 제국이 진국을 공격한 것이 한 제국의 기회임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한 제국과의 국경에서 군사들을 치운 것은 아니지만, 전쟁 시 지원군이 곧바로 오지 못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제국은 이 절호의 기회를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잠잠한 황실이나 조정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의아함을 표했다.
한 제국 장추궁 황제의 집무실.
“결국 도망을 가셨다고요?”
승상 조위례가 떠보는 듯 물었다.
사실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을 물으며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대사마 원희나 대사농 정조인, 위장군 원수경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중신들 가운데 다소 젊은 나이인 중서령 사마윤만이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끄응. 어젯밤에 급한 일이 있다며 패거리를 이끌고 야반도주했다는군.”
황제가 신음을 내었다.
“허허허, 야반도주라…… 폐하의 아드님이 확실하십니다.”
“크! 흠!”
아픈 곳을 찌르는 말에 황제가 헛기침을 했다.
조위례가 그런 황제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제가 천천히 하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도망가실 거라고요.”
“오, 이미 충고를 하셨군요.”
“하긴, 연회장 분위기를 보고 기겁하셨을 터인데 거기다 대고 ‘그’ 말씀을 하셨으면…… 도망가실 만도 합니다.”
승상 조위례가 약을 올리듯 말을 덧붙이고, 거기에 대사마 원희와 위장군 원수경이 한마디씩 보탰다.
결국 참지 못한 황제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황제를 욕보이다니, 이 무엄한 작자들 같으니!”
“어이쿠! 욕보이다니, 큰일 날 말씀을 하십니다.”
황제가 발끈하자, 대사농 정조인이 거기다 대고 펄쩍 뛰는 척을 했다.
결국 황제와 신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허허허허.”
“흐흐흐.”
승상 조위례는 황제의 스승이자 한때는 딸 도둑의 다리뼈를 진지하게 노리던 황제의 장인이었고, 대사농 정조인과 대사마 원희는 황제와 함께 수학한 동문이었다. 또 위장군 원수경은 황제와 전장에서 함께 싸운 동료였다.
중서령 사마윤을 제외하면 모두 황제가 황제가 아니었을 때부터 함께했던 오랜 동지들이었다.
이렇게 한 사람을 희생시켜 다 함께 농담을 나누고 웃는 것은, 전쟁을 시작하는 그들만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래, 놈들이 어디까지 들어갔다고?”
“익주를 넘었다고 합니다. 귀천성 무인들은 위림군까지 들어갔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황제의 물음에 중서령 사마윤이 답했다.
“그 정의맹인가? 그자들의 정보력이 보통이 아니군.”
“목숨을 담보로 하는 첩자 운용과 상인들을 이용해서 연계하더군요. 정보처만도 여러 단체가 따로 존재합니다만, 운용 방법만큼은 모방해 볼 만할 듯합니다.”
황제와 승상 조위례는 황실 정보기관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국에 그만한 사람과 중원 전역을 다니는 상단을 가진 사람은 하남조씨와 몇몇 가문뿐이라, 승장 조위례의 주도하에 준비 중이었다.
“그래.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고…….”
말끝을 흐린 황제가 눈을 번뜩였다.
“일단은 군을 움직여야지 않겠소?”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폐하!”
황제의 물음에 대사마와 대사농이 읍하고, 위장군 원수경이 앞으로 나섰다.
“그 녀석에게 패를 주었네. 위장군에게 맡기지. 역도들을 죽이고, 내 아들에게 제국의 싸움을 보여 주게.”
“명을 받자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위장군 원수경이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 * *
패.
들고 있기 무서울 정도 귀한 황금 덩어리로 만들어진 패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문양과 제국을 상징하는 한(韓) 자가 새겨져 있었다.
“황제를 대신하는 황룡금패다. 전에도 말했지? 욕심을 버릴수록 편안해진다는 말은 다 개소리라고. 그건 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변명이다. 힘은 가질수록 좋다. 힘이 있을수록 지킬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 이 제국의 백만 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패다. 일단 한번 쥐어 보거라. 네 손에 쥐어진 힘이 얼마나 유용한지 느껴 보거라!”
진화가 가슴에 숨겨 놓은 패의 감촉을 느꼈다.
무슨 장난감을 던져 주듯 황제가 쥐여 준 패였다.
‘백만 대군을 움직일 패라니…… 대체 이걸로 뭘 하라고.’
진화가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