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변하지 않을 진(眞) 꽃 화(花) : 멈추지 않는 운명(3)
정사연합은 북망산에서 혼현마제를 살려 준 뒤 제자 수오가 혼현마제를 데려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 이후, 백매단원들이 수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사람을 바꿔 가며 추적하길 여러 날.
백매단은 수오와 혼현마제의 최종적인 행선지는 놓쳤지만, 그들이 한 제국과 신 제국의 경계에 숨어들었다는 것은 알아냈다.
“지난 전쟁으로 파군 인근을 한 제국이 수복하긴 했지만, 완전히 한 제국 영역이라고 하긴 애매하지. 혼현마제에게 넘어간 문파들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니까. 그런 곳이 몇 군데 더 있지만, 우리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두 곳에 조를 나눠서 가게 될 거다.”
진화의 말에 남궁구와 남궁교명, 강무련, 나하연이 각자 고개를 끄덕였다.
숙청단에서도 눈에 띌 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인원이었다.
“다른 조는 누구누구입니까?”
“책임자로 진휘 형님과 진혜 누님, 소애검 호명기, 청수검 무현과 녹수룡 당혜평이 간다는군.”
“아…….”
진화의 말에 일행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단신으로 마제들을 상대할 수 있는 진화가 이쪽의 책임자였으니, 반대쪽도 어느 정도 비등한 실력자들로 구성한 듯했다.
하지만 일행이 탄성을 낸 것은 다른 것 때문이었다.
“저쪽 조는 어떻게 침투하려나?
“……또 팔겠지, 뭐.”
남궁진휘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남아 있는 일행은 다른 조의 운명을 예감한 듯 입을 다물었다.
* * *
“하하하, 좋네. 거래하지.”
남궁진휘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남궁진휘의 앞에는 뱃살이 두둑하고 돼지 꼬리 같은 수염이 인상적인 상인이 얄미운 소리로 웃고 있었다.
“홍홍홍, 요즘 귀천성 출신 무인 노예들이 간혹 있다더니, 저 정도 상태면 값을 제법 받을 겁니다요, 암.”
“오, 그거 잘됐군. 쓰러져 있는 저놈들 치료하는 데 돈이 꽤 들었거든.”
“암요, 암요. 제가 값을 잘 쳐드리라 전서라도 보내 놓겠습니다요. 홍홍홍홍!”
“하하, 이 사람 장사를 잘하는군. 좋아, 내 어르신께 자네 이름을 말해 놓지.”
“천하의 청하상단의 거래에 제 이름이 남는다니, 그거 영광입니다. 홍홍홍홍!”
남궁진휘와 상인이 마주 보고 웃었다.
남궁진휘가 거래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청하상단의 이름을 팔았는데, 상인이 ‘거래에 이름이 남는다’는 말로 넌지시 남궁진휘의 말을 확인해 볼 거라 협박을 한 것이었다.
‘만만치 않은 놈이로군.’
남궁진휘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상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런 만만치 않은 상인을 상대로 ‘포로를 파는 정파 상인의 호위무사’를 뻔뻔스럽게 연기하는 남궁진휘도 결코 만만하진 않았다.
가장 효과적인 거짓은 진실 속에 숨긴 거짓이라고 했던가.
상인은 남궁진휘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정파 무인의 기도와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깜박 속았다.
상인의 눈이 남궁진휘의 뒤쪽을 향해 탐욕스럽게 빛났다.
남궁진휘의 뒤에는 언젠가 많이 보았던 마차가 있었는데.
나무 창살과 낡은 자물쇠가 전부인 허술한 감옥 마차 안에는 당장이라도 수레를 부수고 나올 듯 튼튼한 사내 셋과 사내들보다 우락부락한 여인 하나가 이를 갈고 있었다.
“크으으으. 저 오라비 놈, 언젠가 죽여 버린다.”
“말리지 않겠습니다.”
남궁진혜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자 호명기가 비장한 얼굴로 동조했다.
“가신이 그래도 돼?”
“들키지만 않으면 돼.”
“아. 그러네.”
당혜평은 호명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에 품고 있던 단검을 집어넣었다.
일을 가장 은밀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확실한 타인에게 맡기는 것이라, 당혜평은 눈빛으로 남궁진혜에게 응원을 보냈다.
그사이 청수검 무현이 엉덩이를 꼼지락거리며 일행과 거리를 벌였다.
“하하하, 많이 기다렸나? 저 돼지 새끼가 은근히 돈을 바라는 것 같아서 떼어 놓는다고.”
상인과 대화를 마친 남궁진휘가 마부석에 앉았다.
호탕하게 웃으며 유들유들 거래를 이어 가던 젊은 무사는 어딜 가고 남궁진휘의 얼굴은 차갑다 못해 얼어 버릴 정도로 냉정하게 굳어 있었다.
남궁진휘는 등 뒤에서 자신들을 주시하는 상인의 눈길을 느끼며 얼른 마차를 출발시켰다.
“다행히 저놈과 연결된 상인을 만나는 조건으로 관문은 통과다. 다음 관문에 저놈과 연결된 상인이 직접 마중 나온다는군. 돼지치곤 의심이 많더라고.”
남궁진휘는 마지막까지 상인에게 웃어 주며 빠르게 관문을 통과했다.
관문을 통과하고 나자, 남궁진혜가 기다렸다는 듯 툴툴거렸다.
“그냥 돈을 줘 버리지, 돈도 많으면서!”
“하하,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을 쓰레기통에 넣는 건 너로 족하단다, 동생아.”
“하여튼 일 끝나고 봐. 가만 안 둬!”
남궁진휘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남궁진혜는 남자들과 같이 있든 말든 벌러덩 몸을 뉘었다.
허술해 보이지만 경지를 넘어선 무인인 남궁진혜가 편하게 있다는 건 뒤를 쫓는 인기척은 없다는 뜻이라 다른 이들도 한결 자세를 편하게 했다.
“저자와 한패가 마중을 나온다면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어찌저찌 관문을 통과한다고 해도 상인을 떨궈 내려면 무공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호명기가 조금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남궁진휘의 표정은 여유가 만만했다.
“그러려고.”
“네?”
“우리 임무를 잊었어? 검마제가 알아야지, 우리가 들어와서 누군가를 쫓고 있다는 걸.”
“아!”
남궁진휘의 말에 호명기가 탄성을 뱉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당혜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그 전에 혼현마제와 독마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 아닌가? 우리가 뭘 알아내기 전에 검마제가 우릴 노리면 말짱 꽝이잖아.”
“헉.”
“그, 그러네요!”
당혜평의 지적에 호명기와 무현이 놀란 얼굴로 남궁진휘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잠시 잊은 것이, 실수라는 말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바로 남궁진휘라는 사실이다.
“하하하, 걱정 마. 아까 그 상인이 구마문 소속이야. 마중 나오는 상인도 구마문 소속이니까, 잘 팔려 가다 보면 혼현마제 잔당이 나올 거다.”
남궁진휘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명쾌하게 답했다.
“……우리 진짜 팔려 가는 거였어?”
“크아아아! 말리지 마! 내가 오늘 저 오라비 놈을 죽이고 만다! 부모님 영전 앞에 대가리 한번 박지, 뭐!”
“멀쩡하게 살아 계신 가주님과 가모님은 왜 죽이고 그러십니까! 참아요, 아가씨!”
갑자기 손발에 감겨 있던 사슬을 끊고 일어선 남궁진혜 때문에 마차의 감옥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하하하, 무식한 게 기운이라도 좋아 다행이야.”
오직 남궁진휘만 편안한 여정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의 침투는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 * *
은밀하게 파군으로 들어간 남궁진휘 조와 달리 진화와 일행은 일사천리였다.
“이거…….”
“헉! 화, 황룡…… 읍! 읍!”
“우리는 그냥 조용히 지나가겠다. 비밀 유지 부탁하지.”
“읍읍!”
진화가 국경 지역의 강직한 병사에게 조용히 황룡금패를 내밀면, 나하연의 놀라는 병사의 입을 막고 남궁구와 남궁교명, 강무련이 진화와 병사의 모습을 가렸다.
진화와 일행이 관문을 떠나고 나면 그 관문에는 반드시 소란이 일어났지만, 어쨌든 진화와 일행은 조용히 관문을 통과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와, 세상에 이 관문을 이렇게 빨리 돌파할 수 있을 줄이야.”
남궁구가 그들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불과 얼마 전 신 제국에서 수복했거나 광마제의 공격에 빼앗겼다 이번에 다시 찾아온 곳들이라, 한눈에 들어오는 길 위에도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 세 군데가 넘었다.
파군에서 장기군으로 들어오는 동안 그런 길을 수십 곳 지났다.
불과 사흘 만에 말이다.
“권력의 힘이지.”
남궁교명이 진화를 향해 존경을 눈빛을 보냈다.
그때, 강무련이 힘없는 목소리로 일행을 불렀다.
“지금 이 거지 같은 몰골로 그런 말을 하면 부끄럽지도 않나? 일단 어디에 좀 들어가지. 일행 중에 여성도 있는데.”
“그렇다. 오늘 아침도 먹지 못해 몹시 배가 고프군.”
“…….”
관문 돌파가 빨랐던 만큼, 사흘 내내 이어진 노숙으로 일행의 행색도 초라해졌다.
강무련은 건장한 사내도 불편한 작금의 사태에서 여성인 나하연의 불만 사항이 아침을 거른 것뿐이라는 데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이렇게 티 나게 침투해도 되는 건가?”
강무련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그의 가벼운 마음과 달랐다.
“아, 우리는 저쪽과 좀 다르다. 죽이러 오라고 미끼를 흔드는 거니까.”
“뭐?”
“우리의 일차적인 목표는 혼현마제와 그 일당이 숨은 안가를 찾는 것이지만, 최종적인 목표는 소리마제와 살각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말에 강무련의 눈이 커졌다.
사랑탑대전을 더럽히고 달아난 배신자들을 목표로 한다는 건 기다리던 일이었지만…….
“우리…… 다섯 명이서?”
강무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화가 광마제를 죽일 정도로 강하다는 건 잘 알았다.
제 얼굴에 금칠하기지만 자신과 다른 동료들도 정사를 대표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상대는 살각이다.
암살자들의 수준은 무인과 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게 정론이 아니던가!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뜬 강무련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진화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지원이 조금만 늦는다면 우리끼리만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다.”
웃으며 답하는 진화의 모습에 강무련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하하…….”
웃다가 굳어 버린 얼굴과 달리 강무련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저 말이 무슨 뜻이지? 우리끼리만 살각을 상대해서 좋다는 건가? 상대는 그 소리마제와 암살자들인데…… 잠깐, 지원이 조금만 늦는다면, 지원이 조금만 늦는다면이라고 했지?’
“하, 하, 하.”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시간에 지원 요청을 한다! 반드시!’
수천만 사패천 동도들을 위해 살아 돌아갈 결심을 한 강무련이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 * *
신 제국 황성 대륜궁.
칠흑같이 어두웠던 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밤중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신 제국 조정도 이제 온전히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다.
파별군을 중심으로 진국을 공격하며 시끄러운 외부와 달리, 신 제국의 내정은 승상 복건주를 중심으로 빠르게 안정되었다. 거기에 흑수군이 성도를 지키고 서한군이 국경을 지켜 내며 동요하던 신 제국 민심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혼현마제의 배신과 광마제의 죽음으로 흔들릴 줄 알았던 귀천성 무인들은 오히려 눈앞에 펼쳐진 기회에 술렁이고 있었다.
“칠보선 광한후가 죽은 뒤, 그 자리를 적세방이 차지했다고?”
“예. 적세방주 원길이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허허허, 기회를 일찍 포착하는 것도 능력이지.”
역천마제가 자애롭게 웃으며 물밑에서 벌어지는 귀천성 무인들끼리의 전투 소식을 읽어 내렸다.
역천마제의 손에는 귀천성 소식뿐 아니라 조정과 군문에서 올라온 여러 문서들이 있었는데, 그는 의외로 성실하게 황제 업무를 수행하며 제국과 귀천성을 다스리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신 제국 조정이 빠르게 안정화된 데에는 병석을 털고 나와 이전의 황제들과 달리 제대로 업무를 수행해 주는 역천마제의 공이 컸다.
“정사연합 놈들이 파군을 통해 장기군 외곽까지 들어왔습니다.”
“호오, 배신자 놈들이 감히 내 영역에 숨은 건가?”
검마제의 보고에 이제까지 잠잠하던 역천마제의 눈빛이 순간 녹광으로 번뜩였다.
“진짜 혼현마제 일당을 쫓는 것인지 유인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수하들을 보낼까요?”
“허허허허. ……나도 그렇지만 너도 천수현인 그자를 제법 알지 않느냐. 그자가 고작 유인이나 하자고 귀한 목숨들을 보냈을까?”
검마제의 물음에 역천마제가 유쾌한 듯 웃었다.
역천마제의 되물음 속에 답이 있었다.
천수현인이 정파 무인들의 목숨을 제 목숨만큼이나 애지중지하여 하나의 목숨으로 두 배, 세 배의 결과를 얻지 못할 일에는 결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걸, 그와 싸워 본 역천마제와 검마제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예상대로 놈들이 혼현마제를 살려 둔 모양이다. 혼현마제를 인질 삼아 독마제를 건드릴 셈인 게야.”
역천마제가 천수현인의 생각을 꿰뚫을 듯 눈을 예리하게 빛냈다.
그리고 낮게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놈들이 널 노리는 모양이구나.”
역천마제의 시선이 검마제를 향했다.
예리하게 빛나는 눈 또한 검마제를 향했다.
검마제의 동요를 찾으려는 듯 구석구석 칼날 같은 눈빛이 검마제를 헤집었다.
하지만 검마제는 역천마제의 눈빛 앞에 어떤 동요도 없이 의연하게 섰다.
그의 충성심은 늘 시험당하지만, 늘 완벽했다.
“독부 은요의 운명이 너를 해하려 할 것이다. 그년의 독이 문제로구나. 하지만 상관없다. 독부를 죽이고 운명을 사슬을 끊거라.”
역천마제가 검마제에게 명을 내렸다.
검마제는 기꺼이 그 위험한 명을 받들었다.
“나는 운명을 완성하기 위해 광마제를 죽인 것이 아니다. 광마제를 죽이는 데에 운명을 이용한 것이지. 내 충직한 수하를 죽이는 것이 운명이라면, 끊어 버려도 좋다. 내 앞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운명이라도 부술 것이다!”
역천마제가 대륜궁 너머 어딘가를 향해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녹광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