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변하지 않을 진(眞) 꽃 화(花) : 멈추지 않는 운명(4)
장기군 외곽의 작은 마을.
작은 마을이었지만 국경 길목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마을도 제법 크고 사람들도 많았다.
코앞에 한 제국 군대가 있었지만, 저자의 사람들은 전쟁 걱정이라곤 모르는 사람들처럼 활기가 넘쳤다.
“신기하네.”
강무련이 저자를 둘러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그러자 남궁교명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데?”
“이 사람들, 불과 얼마 전에 옆 마을이 다른 나라가 되었어. 그런데도 전혀 아무 일 없다는 듯 살고 있잖아?”
강무련이 저자의 백성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남궁구가 보기엔 전혀 신기할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무림인들은 내일 죽을지 오늘 죽을지 모르잖아.”
“응?”
“옆 마을이 다른 나라가 됐다곤 하지만 성문이 무너지고 신 제국군이 물러난 후에 저절로 편입된 곳이야. 본래 관리도 없던 곳이라 호족들도 그대로고 사는 사람들도 그대로지. 관문이 설치되면 그땐 좀 달라지겠지만, 저 사람들 입장에선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소리다. 그리니 저들이 보기엔 우리처럼 칼 들고 다니는 무림인들이 더 하루살이 같지 않겠어? ……실제로도 그렇고.”
장황하게 말을 이어 가던 남궁구가 중간에 조금 움찔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강무련과 남궁교명이 바짝 긴장했고, 나하연은 주먹을 쥐었다.
“……갔나?”
“어이, 하연 낭자, 주먹은 왜 쥔 거냐?”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만.”
남궁구의 날카로운 물음에 나하연이 슬쩍 주먹을 내렸다.
그리고 일행이 다 같이 약속이나 한 듯 한숨을 쉬었다.
“흑오문이라고 했나? 무슨 소매치기 놈들이 이렇게 노골적이지? 너무 티 나게 손을 대니까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잖아.”
남궁구가 전낭이 있던 허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자 남궁교명이 남궁구에게 얄미운 비소를 흘렸다.
“거짓말, 나하연 때문에 쫀 거잖아.”
“젠장, 저 주먹이 눈에 보이는데 너는 안 쫄 것 같아?”
“…….”
정직한 남궁교명은 ‘나는 안 쫄 거다.’ 확신하지 못했다.
“일단 여기가 귀천성에서, 아니 혼현마제 일당 중 하오문 역할을 한다는 흑오문의 영역이고, 우리는 순조롭게 놈들의 표적이 된 것 같네.”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지만.”
남궁교명과 강무련이 한시름을 놓은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은근히 느껴지는 시선이 아직도 놈들이 이쪽을 주시 중인 듯했다.
“도련님, 너는 이제 제법 천연덕스럽게 모른 척을 잘하네?”
“남궁 공자는 만두를 사고 있다.”
“아…….”
남궁진휘나 남궁구처럼 뻔뻔스럽게 연기를 잘할 자신이 없었던 진화는 진짜 저자 구경에 집중하기로 한 듯 자연스럽게 만두 가게 앞에 줄을 서고 있었다.
잠시 후, 차례가 된 진화가 남궁구를 불렀다.
손에는 만두 봉지가 들려 있었다.
“도련님, 왜?”
“계산해라.”
“아, 잠시만 여기…… 헉!”
진화의 만두를 계산하려던 남궁구가 갑자기 신음을 내었다.
일행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이 새끼들…… 진짜 전낭까지 다 털어 갔는데?”
남궁구가 낭패한 얼굴로 텅텅 빈 허리를 보였다.
“미쳤어? 그걸 그냥 다 넘기면 어떡해!”
“젠장!”
“놈들을 빨리 잡아야 할 이유가 생겼군. 가지!”
이제 겨우 사람다운 위생 상태를 유지하는가 싶었는데…….
남궁교명과 강무련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나하연이 결연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낭패한 사람은 다름 아닌 진화였다.
“보슈, 어쩔 것이오?”
“…….”
만두 가게 주인이 험상궂은 얼굴로 묻는 말에, 진화는 만두 봉지와 흑오문 소매치기를 잡으러 간 일행을 번갈아 보았다.
가슴 속에 딱딱한 무언가가 크게 느껴졌다.
타닥타닥타닥타닥.
저자 뒷골목을 이리저리 달리는 급한 발소리.
막다른 골목 구석으로 들어가며 지친 발소리가 조금씩 느려질 즈음,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고 지붕 위에서 두 명의 인영이 뛰어내렸다.
“멈춰.”
“일단 돈부터 내놔라.”
남궁교명과 강무련이 진지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씨!”
잿빛 옷을 입은 마른 사내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 뒤를 돌았다.
그러자 막다른 길을 막고 남궁구와 나하연이 걸어왔다.
“못 간다.”
“맞기 전에 일단 돈부터 내놔.”
나하연이 기세를 뿜으며 길을 막고 남궁구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들의 뒤에 진화가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젊은 사내는 당황한 얼굴로 진화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표정이 돌변하더니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흐흐, 전부 쫓아왔네?”
젊은 사내의 비웃음과 함께, 막다른 골목을 둘러싸고 있던 건물들 안에서 잿빛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네놈들이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기회만 보고 있었지.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흑오문 사내들이 빼곡하게 진화와 일행을 둘러싼 가운데, 그들을 가르며 입에 담배를 문 중년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자상에 한쪽 눈이 하얗게 멀어 버린 중년인은 흑오문 문주 백안사였다.
“혼현마제께선 네놈들의 행적을 모두 알고 계셨다. 다른 쪽 놈들도 지금쯤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게다. 지금 너희들처럼.”
백안사는 멀쩡한 한쪽 눈으로 진화와 일행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청하상단 분이시죠? 이 사람들입니까?”
남궁진휘와 일행이 마지막 성문 앞에 도착하자, 뚱뚱한 상인이 말한 사람이 나와 있었다.
건장한 사내는 마치 잘되는 식당의 점소이처럼 친절하고 살갑게 남궁진휘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가 다가오기 전 남궁진휘를 보고 살짝 움찔거리는 것을 모두 놓치지 않고 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네. 게다가 풍기는 기도도 범상치 않고…… 역시 남궁이라 이건가?’
사내가 데구루루 눈알을 굴리며, 감옥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빠르게 훑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군.’
사내의 시선이 남궁진혜의 잘 쪼개진 삼각근에서 머물자 남궁진휘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그때, 사내가 짐짓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남궁진휘를 보았다.
“아, 하하하, 물건들이 좋네요. 그런데 이걸 어쩌죠? 안쪽 상회가 있는 곳에 가려면 마차에서 내려야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 그게…… 이 사람들이 귀천성 출신 무인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마차에서 내려 상회까지 가야 하는데, 통제는 되는 겁니까? 하하하, 제가 겁이 많아서요.”
사내가 민망한 듯 웃는 동시에 남궁진휘의 표정을 세밀하게 살폈다.
남궁진휘는 그런 사내에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감옥의 문을 열었다.
덜컹!
“아, 아니, 잠깐……!”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남궁진휘가 놀라는 사내를 향해 호탕하게 웃으며, 남궁진혜의 손과 발에 감긴 쇠사슬을 보여 주었다.
철렁철렁.
남궁진휘의 손짓에 따라 쇠사슬이 출렁거리며 소리를 내자, 불안하던 사내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이게 웬 떡이냐! 흐흐흐, 멍청한 놈들.’
사내는 진심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본거지까지 잠입한 정사연합 고수에 남궁세가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잔뜩 긴장하던 차였다.
그런데 스스로 쇠사슬을 차고 가겠다니!
‘이제 이놈만 경계하면 되겠군.’
사내는 남궁진휘를 힐끗거리며 위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눌렀다.
출렁출렁.
차르르르르…….
남궁진혜와 호명기, 무현과 당혜군이 걸을 때마다 발에 달린 사슬이 부딪치고 끌리는 소리가 났다.
사내는 일행을 저잣거리에서도 제일 안쪽에 있는 인적이 드문 건물로 안내했다.
흔히 있는 붉은 부적조차 붙이지 않은 검은 기와와 검은 기둥, 검은 현판이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남궁진휘가 사내를 보았다.
“이 안쪽입니다.”
“네에…….”
남궁진휘가 한숨을 쉬듯 말끝을 흐렸다.
떨떠름한 대답에 사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다 왔는데, 뭔가 눈치챈 건가?’
혹시 남궁진휘가 발을 멈출까 봐 사내가 얼른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특별히 값을 잘 치르라는 전갈도 받았습니다. 마,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그런가요.”
사내의 재촉에 남궁진휘가 마지못한 듯 안으로 들어갔다.
출렁출렁.
캉캉캉캉캉.
남궁진휘를 재촉하는 듯 공격적인 쇠사슬 소리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일행이 모두 안으로 들어서자.
덜컹. 쾅! 쾅!
급하게 문이 닫히고 걸어 잠그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도저히 거래를 앞두고 있다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적막한 분위기 속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단상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도열해 있고 이 층 난관에도 빠짐없이 서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과 눈빛들이 남궁진휘 일행을 향했다.
단상에 앉은 검은 도포를 걸친 사내가 남궁진휘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잘도 이곳까지 왔군.”
위엄이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
피식- 웃음이 새는 소리와 함께 남궁진휘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너무 대놓고 수상쩍어서 무시당하는 기분은 처음이었어.”
비틀어진 속내처럼 비꼰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헉!”
일행을 안내한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쿵! 쿵!
철컹. 철컹. 철컹.
포로, 아니 포로로 위장한 정사연합 무인들의 손발에 메여 있던 쇠사슬이 동강동강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젠장. 모르는 척하고 있기도 더럽게 힘들었네. 뭐가 이렇게 어설퍼? 성의 없게.”
남궁진혜가 구시렁거리며 다른 일행의 쇠사슬을 힘으로 끊어 주고 있었다.
“그 덕에 숨기고 있던 검은 안 들켰지 않습니까.”
남궁진혜가 쇠사슬을 끊어 주자, 청수검 무현이 부자연스럽던 다리에 숨기고 있던 검을 꺼냈다.
청수검 무현은 물론 소애검 호명기와 청명화 남궁진혜도 모두 검을 쓰는 이들로, 그들의 걸음이 부자연스러웠던 건 쇠사슬 때문이 아니라 다리에 숨긴 검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당혜평도 숨기고 있던 검을 꺼내 남궁진휘에게 주었다.
“쇠사슬만 보고 몸 수색조차 안 하다니. 잘도 안 들킬 거라 생각했나 봐?”
남궁진휘가 단상에 앉은 구마문주 구마멸살 신형권을 향해 들었던 말을 돌려주었다.
구마문주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았다.
“알았다 해도 소용없다. 혼현마제께선 모든 것을 읽고 계셨으니까. 네놈들은 눈치를 챘다고 해도, 과연 다른 쪽도 그럴까?”
구마문주가 말하는 ‘다른 쪽’이 누굴 말하는 것인지는 명백했다.
남궁진혜조차 발끈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남궁진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남궁진휘 또한 남궁진혜 못지않게 진화를 아꼈지만, 동시에 진화가 광마제를 단신으로 죽일 정도로 강하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이 모든 걸 다 알면서 막다른 길까지 따라 들어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범이 막다른 길에서 사슴을 대면하면, 그건 사슴과 만났다고 하지 않아. 막다른 길로 사슴을 몰았다고 하지.”
“……!”
남궁진휘의 자신만만한 말에 구마문주의 눈이 커졌다.
크게 뜬 눈으로 살기가 번져 나왔다.
“광오하구나. 그 광오함 때문에 제왕검이 손자, 손녀를 잃겠어.”
구마문주는 이미 남궁진휘와 일행을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 말인즉, 남궁진휘 일행의 목숨을 노리기에 구마준의 준비가 부족하진 않을 거란 의미였다.
동시에 ‘다른 쪽’, 진화와 일행을 노린 자들의 준비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었군. 내 말의 요지는, 이제 네놈들이 사슴 같은 약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남궁진휘의 눈매가 사납게 가라앉았다.
* * *
장기군 전체에 걸쳐 있는 기면산의 어느 동굴.
깊은 산속 동굴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체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긴 복도를 따라 여러 개의 방들이 줄지어 있고, 방들끼리도 복잡한 구조로 이어져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든 안가.
“복잡하네.”
“멋모르고 들어오면 함정에 빠지거나 마제님의 환각에 빠지겠지.”
“우리의 안전을 위해 만든 안가니까.”
동굴을 드나드는 무사들은 동굴의 복잡한 구조에 불편함을 느끼기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내다본 혼현마제의 혜안에 탄복했다.
그 복잡한 동굴에서도 복도가 아니라 몇 개의 방을 지나쳐야만 나오는 가장 깊은 방.
방에는 환자라도 있는 듯 독한 약재 냄새와 연기가 자욱했고, 침상에는 누워 있는 사람을 가리기 위해 촘촘한 발이 처져 있었다.
독부 은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침상을 보았다.
독부가 이처럼 애틋하게 볼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놈들이 함정에 들어왔다고 해요.”
“……그렇군.”
독부가 전하는 소식에 침상에서 조금 늦게 대답 소리가 들렸다.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들렸다.
독부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가가, 저는 걱정이에요. 가가의 몸이 정상이 아닌 때이니만큼, 지금은 조용히 은거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독부 은요가 걱정스러운 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침상 안에 비치는 그림자가 들썩이며 격한 기침 소리가 났다.
“콜록! 콜록! 콜록! ……컥!”
“가가!”
독부 은요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침상으로 다가가는데, 침상에 있던 그림자가 손을 들어 독부를 막았다.
“피, 콜록! 필요 없다. 나는 괜찮다. 잠시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가가…….”
“콜록! 나는 이대로 시간을 가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앞으로를 위해 정리할 것은 정리를 해야지. 처음부터, 모든 계획이 최선의 길에서 어긋난 것은 변수 때문이었다. 이참에 그 변수를 없애야 한다! 콜록! 콜록!”
“가가!”
급해지는 기침 소리에 독부 은요가 약재를 피우는 향로에 검은 가루를 더 넣었다.
그러자 기침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정파 놈들이 일부러 날 살려 둔 거다, 지금을 위해. 날 인질로 삼아 널 이용해서 검마제를 처리하려 했겠지. 흐흐흐, 천수현인다운 방법이야.”
침상 위의 그림자가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독부가 넣은 약재 때문일까.
기침 소리가 잦아든 목소리가 한결 맑아졌다.
“그놈 앞에 내 시체를 던져 줄 것이다. 내 시체를 본 놈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구나. 하하하하!”
맑아진 목소리는 마치 소년의 그것처럼 낭랑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