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변하지 않을 진(眞) 꽃 화(花) : 멈추지 않는 운명(5)
지난 전쟁에서 중원 무림을 차지하고 있던 정파가 귀천성에 밀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
첫째는 갑자기 나타난 귀천성 고수들의 무공을 잘 알지 못해서, 둘째는 큰 전쟁을 치러 본 적 없었기에 귀천성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파 무림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유였다.
하지만 십이좌회로 대변되는 정파 지도층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총군사인 천수현인 제갈길현은 정의맹 패배의 가장 큰 이유로 역천마제와 검마제, 광마제를 꼽았다.
그들과 대등하게 싸울 절대 고수들만 있었어도, 아니 십이좌회가 힘을 합해 그들을 이길 정도만 되었어도 정도 무림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밀려나진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전쟁을 이끈 총군사의 생각이었다.
수십 년간 귀천성과 전쟁을 하며 수많은 희생을 통해 무림 절반을 지켜 낸 정의맹 수뇌부의 생각도 천수현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정파는 당연한 듯 중원 무림에 군림했다.
과시하듯 수련을 하면서, 다툼과 갈등은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일이 늘었다.
죽음과 희생을 두려워하며 현실에 안주한 무림인의 말로는, 결국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모든 터전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귀천성과의 전쟁은 안일했던 정파를 깨웠다.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지켜야 할 신념과 명예에 눈을 떴고, 문파와 가족,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정파 수뇌부는 인재를 키우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문파와 세가의 모든 무학을 집대성하고 학사들을 동원해 무공에 대한 해석을 다는 것부터 시작해 창고에 모아 두기만 했던 영약을 풀고 모자란 것은 중원을 뒤져 사들였다.
그 결과가 바로, 정의무학관을 졸업한 지금의 세대들이었다.
이전 세대가 귀천성을 두려워했다면 지금 세대는 그들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웠고, 이전 세대가 수많은 희생을 통해 겨우 얻었던 승리를 지금 세대는 귀천성과 싸워 쟁취했다.
지금은 오히려 상황이 역전된 듯했다.
* * *
콰—광!
퍼어어어억!
남궁진혜가 검을 휘두르자 구마문 무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이제는 온전하게 푸른 광채를 뿜은 거대한 강기가 검을 감싸고, 남궁진혜가 그것을 휘두를 때마다 어디든, 무엇이든 부서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퍼----억!
“꾸에에에엑-!”
내장이 끊기는 듯 절절한 비명이 울렸다.
실제로 남궁진혜의 검강에 얻어맞은 구마문도는 울컥 핏물과 함께 뭔가를 뱉어 냈다.
“자, 다음! 어디 와 봐!”
소매를 다 뜯어 버린 옷 밖으로 터질 듯한 근육을 뽐내는 남궁진혜는 수십 명의 구마문도를 상대하고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강도 높은 수련과 단단하게 쌓인 내공은 남궁진혜를 지치지 않는 괴물처럼 만들어 놓았다.
싸우는 내내 남궁진혜를 살피던 남궁진휘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적호단주한테라도 보내야 하나…….”
쉐에에에엑---!
남궁진휘를 노리던 구마문도는 검을 들고 달려들던 그대로 소애검 호현기의 검에 몸이 두 동강 났다.
파-앗!
단번에 척추를 끊어 내는 힘과 예리함.
남궁세가의 검이 가진 정수였다.
남궁진휘가 호현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남궁진휘와 호현기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당혜평이었다.
‘역시 남궁세가라고 해야 하나. 가신들에게까지 무공의 정수가 착실하게 전해지고 있군. 남궁진화는 논외로 치더라도, 남궁진휘와 남궁진혜도 감당하기 힘든데 그 가신들까지? ……당분간 남궁천하가 계속되겠군.’
당혜평이 제 목을 노리는 구마문도의 목에 단검을 찔러 넣고 비틀었다.
피가 터져 나오며 구마문도가 몸을 숙이자, 당혜평이 그의 등을 밟고 뛰어올랐다.
탓-!
휘이이이이익---!
이 층 높이까지 뛰어오른 당혜평의 손에서 만천화우(滿天花雨)가 쏟아졌다.
당혜군과 닮은 까만 피부에 야무진 이목구비, 매서운 눈매가 이 층 난관에서 공격 기회를 보던 구마문도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타타타타타타탓---!
비처럼 쏟아지는 대침은 막무가내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당혜평의 시선이 닿은 구마문도들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간 대침들은, 구마문도의 몸 위에 은빛 죽음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그들 중 가장 많은 구마문도를 죽이는 사람은 남궁세가 사람도, 당혜평도 아니었다.
청수검(淸秀劍) 무현.
그는 이전부터도 천하제일신룡이라는 남궁진휘에 버금가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현무단주 운해를 제치고 무당제일검의 자리를 차지한 후로, 무현은 청수(淸水)가 아닌 청수(淸秀)가 되었다.
쉐에에에에엑---!
파파파파팟-! 쉐에에에엑-!
흐르는 물처럼, 구름처럼, 이윽고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하얀 운해처럼.
무현의 손과 발, 온몸에서 태극혜검 칠십이변초가 운해처럼 끊어지지 않고 유려하게 펼쳐졌다.
쉐에에엑--!
거대한 산조차 막지 못하는 운해의 자유로움을 구마문도들이 막을 수 있을 리 없었고.
사천 무림을 잡아먹은 귀천성에 대항하는 최전선으로서 무당의 검은 망설임과 타협 따윈 없었다.
쉐에에엑-!
“크아아악!”
파팟!
핏방울이 안개처럼 퍼지고, 무현은 혼자서 그리던 태극무한진을 서서히 키워 갔다.
“마, 말도 안 돼!”
구마문주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았다.
아무리 정파에서 내로라하는 신진 고수들이라지만 겨우 다섯 명이었다.
겨우 다섯 명에게 구마문이 몰살을 당하고 있었다.
“이놈들-!”
구마문주 신형권이 문도들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쉐에에에엑-!
남궁진휘의 검이 구마문주의 코끝을 스치고 지났다.
남궁진휘는 처음부터 구마문주만을 막고 나섰고, 구마문도들은 사실상 네 사람에 의해 몰살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챙! 챙챙--!
사방에서 검병이 부딪히는 소리가 구마문주를 압박했다.
“안 돼! 안 돼!”
구마문주는 그저 소리만 지를 뿐,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구마문주가 나서려 할 때마다 남궁진휘의 검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아! 죽인다-!”
눈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한 구마문주가 양 주먹에 새빨간 불덩어리 같은 기운을 피워 올리며 남궁진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퍼-엉! 퍽! 퍽!
퍼---엉!
“허!”
남궁진휘가 검을 휘둘러 구마문주의 주먹을 막으며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소용없소. 주먹에 실린 권기는 제법 강하다만, 주먹을 휘두르는 주인의 평정심이 그렇게 무너져서야. 기본 중의 기본조차 잊은 게요?”
흥분해서 달려드는 마구잡이식 공격은 보기만 요란할 뿐 남궁진휘에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
“네놈---!”
구마문주가 벌겋게 눈을 부라리며 남궁진휘를 노려보았다.
사실 신진 문파라 할 수 있는 구마문은 경지를 바라보는 문주 신형권과 세 명의 멸사장로들의 무공은 뛰어나지만, 나머지는 핵심 전력이라는 이들조차 절정을 겨우 넘겼을 뿐이었다.
중소 문파의 한계였다.
문도들을 이끌고 가르칠 고수들도 적고 체계도 미흡한데, 문도들마저 명문 정파에 비해 심법을 익히는 시기가 늦어 성취가 더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다섯 명에게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모두 남궁진휘 때문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남궁진휘의 지시에 따라 남궁진혜와 청수검 무현, 소애검 호현기까지, 세 사람이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세 명의 멸사장로를 기습했다.
일격필살.
순식간에 세 명의 멸사장로들이 죽어 버림으로써, 이후 남궁진휘가 구마문주를 막아 내는 사이 남은 이들이 일방적인 전투를 이어 간 것이다.
“크으으, 젠장! 젠장! 이 비겁한 놈들! 네놈들이 그러고도 정파더냐!”
구마문주의 말에 남궁진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구마문주, 내가 왜 당신을 죽이지 않고 이렇게 붙잡고만 있는 것 같소?”
“뭐라!”
마치 언제든 죽일 수 있는데 일부러 살려 두고 있다는 듯한 말투.
구마문주가 이전과는 다른 분노를 담아 남궁진휘를 노려보았다.
문도들은 약하지만 스스로의 무공에는 자부심이 꽤 높은 듯하지만, 제왕검과 남궁세가 고수들의 등을 보고 자란 남궁진휘에게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저기 무현은 곡배령 출신이오. 아, 곡배령이라면 모르려나? 그대들이 검마제를 도와 형주를 도모할 때 집어삼킨 마을 중 하나, 이렇게 말하면 알겠소?”
“……!”
“역천마제가 멈추고 그대들 구마문이 고작 이 장기군 하나를 가지려고 죽였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에, 저기 무현의 가족들도 있었소. 이래도 우리에게 ‘정의’를 바라시오?”
남궁진휘의 눈빛에 살기가 일렁였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남궁진휘의 날카로운 물음에 구마문주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위로 올라선 사람이 있다면 그 아래에서 받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게 당연한 이치라, 남궁진휘는 정파의 군림만이 ‘정의’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여 남궁진휘는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자 정의맹 부군사로서 이 전투를 ‘복수’라고 말했다.
“역천마제도 없이 지리멸렬해 있는 귀천성이 절치부심 복수만 기다린 정사연합을 이길 수 있을까. 아차, 그대들은 이제 귀천성도 뭣도 아니던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중요한 건, 팔마제가 없는 그대들은 여전히 정파의 발아래 숨죽여 살던 오합지졸들이라는 사실이오.”
쉐에에에엑----!
핏줄기가 울컥 튀어 올랐다.
무현의 검에 베인 구마문도들이 뱉어 낸 피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거침없이 베어 가던 무현의 복수가 끝이 났다.
그리고 남궁진휘는 더 이상 구마문주를 막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이만 끝내지.”
냉정하게 검을 내리는 남궁진휘를 보며 구마문주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 이성을 잃은 분노가 두 눈 가득 차올랐다.
“누구 마음대로 감히---!”
두 주먹에 불꽃을 내뿜으며 구마문주가 제 앞에서 감히 검을 내린 남궁진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때.
쉐에에엑-!
구마문주의 앞으로 짙은 녹음을 닮은 청명한 기운이 쏘아졌다.
퍼---엉!
구마문주가 주먹을 들어 무당의 현문지기를 막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순식간에 구마문주의 앞에 나타난 무현은 망설이지 않고 양의현강의 묘리를 검에 담아 휘둘렀다.
쉐-----액!
한여름 뙤약볕처럼 매섭고 뜨거운 검기가 구마문주의 목을 가로질렀다.
* * *
삐이이이이----.
안에서 다른 일행이 구마문의 생존자를 확인하는 동안, 남궁진휘와 남궁진혜가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어느새 매응이 날고 있었고, 남궁진휘가 매응을 불렀다.
두 사람의 남궁세가 직계가 있었지만, 똑똑한 매응은 헷갈리지 않고 남궁진휘의 팔에 내려앉았다.
“구마문은 끝났는데 지원단은 불러서 뭐 하게?”
남궁진혜의 물음에 남궁진휘가 슬쩍 웃음을 흘렸다.
“여기가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줘야지.”
“……지원대는 우리와 함께하는 게 아니었어?”
남궁진휘의 애매한 답에 남궁진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남궁진휘가 씨익 웃었다.
“지원대의 임무는 은거지를 덮치는 거고. 우리의 임무는 혼현마제와 독부의 은거지를 확인하는 거지, 지원대와 함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으,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하는 거야?”
남궁진휘의 말에 이제야 상황이 진행되는 방향을 알아챈 남궁진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적에게 사로잡힐 경우를 대비해서 임무를 제외한 내용은 책임자밖에 알지 못하게 한 것이지만, 남궁진혜는 그것을 서운해하기는커녕 이제 와 알게 되는 것조차 귀찮은 듯 보였다.
남궁진휘는 남궁진혜를 놀리긴 하지만 그녀의 단순한 생활방식을 나무라진 않았다.
“동생아, 세상은 너처럼 단순하지 않단다. 우리가 적을 속이려 한다면, 적도 우릴 속이려 하지. 그러니 우리가 이기려면, 적보다 더 잘 속이거나 적보다 더 강해야 한단다.”
“나도 알아!”
“그래. 네가 적어도 바보는 아니라 참 다행이야. 후후후.”
“또, 또. 그렇게 재수 없게 좀 웃지 마! 재수탱이야!”
수십 명의 피를 전신에 적시고, 남매는 평소처럼 티격태격을 이어 갔다.
두 남매가 유일하게 다툼을 멈추는 때가 있다면.
“우리 진화는 괜찮을까?”
“우리 진화는…… 적을 잘 속이진 못해도, 적보다 강하니까.”
그것으로 남궁진휘는 진화를 걱정하는 남궁진혜에게 괜찮을 거란 말을 대신했다.
* * *
기면산 깊은 숲의 자정.
숲의 밤은 눈을 감은 것보다 어둡고 생각 이상으로 공포스럽다.
인간의 감각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각이 닫히고 나면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진다.
신경이 날카로운 속에 찌르르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귀가 아플 정도로 울어 대고, 먼 곳에서 들리던 짐승의 울음소리가 생각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울린다.
촉촉하게 젖은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냄새, 겹겹이 쌓인 낙엽 냄새가 코를 어지럽히고, 예민해진 감각이 손끝까지 긴장감을 준다.
동굴 속에 있던 무사들은 예민해진 손끝의 감각으로 깜깜한 어둠을 뚫고 길을 찾았다.
스스스스스슷.
스스스스스슷-!
무사들의 발소리가 벌레 소리, 바람 소리에 스며들었다.
모두가 떠나고 적막해진 동굴 안.
사르르르.
톡. 톡.
늘어진 옷자락을 끌고 독부가 걸어갈 때마다 그녀의 손톱에 닿은 촛불이 하나둘 꺼졌다.
그렇게 모든 불을 끄고, 독부가 천천히 동굴 제일 안쪽에 비밀스럽게 숨겨진 방으로 들어갔다.
짙은 약초 연기가 뿌옇게 방 안을 메우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가가만 움직이시면 돼요.”
독부가 발이 드리워진 침상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안쪽에 조용히 누워 있던 그림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쭉하게 선 그림자를 보며 독부 은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아…….”
짙은 한숨과 함께 그림자의 주인이 천천히 침상에서 걸어 나왔다.
“마침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어 다행이야.”
하얗고 고운 발이 계단에 닿았다.
혈색이 창백한 양손이 침상을 가린 발을 걷고.
“가가!”
“우리의 적들도 때마침 잘 도착했군.”
독부 은요의 감격스러운 눈빛 속에 젊은 사내가 걸어 나왔다.
수오였다.
“수백, 수천의 우리를 죽이고. 결국 놈들이 가지는 건 내 시체 하나뿐일 것이니! 후후후후, 그 꼴을 구경하지 못한다니 그것이 아쉽구나.”
수오의 눈이 침상을 향해 붉게 빛났다.
침상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누워 있는 듯 이불이 불룩 솟아 있었다.
독부와 수오는 방 안의 촛불을 끄고 또 다른 비밀 통로를 통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