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따를 화(化) : 잔인한 사랑(1)
인적인 드문 막다른 뒷골목.
다섯 명의 젊은 남녀를 잿빛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빼곡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혼현마제께서 모든 걸 예상하셨다. 다른 쪽 놈들도 위험할걸, 지금 너희들처럼.”
대충 그런 자신감이 넘치는 말들이었다.
담뱃대를 물고 여유를 부리는 흑오문주 백안사의 말에 다른 흑오문도들도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남궁구가 황당한 듯 물었다.
“……미친 건가?”
남궁구는 진심으로 믿기지 않는 듯 백안사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귀천성에서 하오문과 같은 존재라더니, 그냥 좀도둑들의 소굴이었나 보군.”
그것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오합지졸을 데리고 자신들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무림에서 소식 좀 듣는 이들이라면, 광마제와 단신으로 붙어 승리한 정파의 떠오르는 신룡 창천화룡 남궁진화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아니, 몰라서도 안 되었다.
“아니면 백안사의 다른 쪽 눈도 보이지 않는다던가.”
남궁구의 옆에 있던 남궁교명 역시 백안사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적어도 역천마제의 등극식에서 진화의 활약을 보았다면 지금처럼 문파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드는 결정을 하진 않았을 텐데.
그에 강무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진 문파 문주들의 문제점이지. 본인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어리석은 결정으로 수하들의 목숨을 함부로 버리거든.”
사패천의 그늘 아래에 사파 고수들이 성장을 이루며 사파에도 신진 문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들 중 순조롭게 성장하는 문파는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문주의 경험 부족과 성급한 혈기로 몰락했다.
강무련은 흑오문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하연이 마침표를 찍었다.
“상관있나? 본인이나 그 수하들이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더 이로운 자들일 텐데.”
나하연의 말에 흑오문주 백안사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정파 애송이들이 간덩이가 부은 건가?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백안사가 소리를 지르며 하는 말에, 진화가 그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일단 돈부터 주고 이야기하지.”
만둣값을 외상하고 온 진화는 돈이 급했다.
파지지직.
백안사 앞으로 내민 손에서 뇌전이 번뜩였다.
* * *
수십 명의 적에게 둘러싸이고도 농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
진화와 일행이 백안사와 흑오문을 무시한 것은 싸우기 전 기선을 제압한다거나 그들을 흥분시키려는 등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화와 일행은 진심으로 그들에게서 어떤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정의맹의 미친개라는 적호단에서 쌓인 경험들과 숙청단으로 활동하면서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해 낸 자신감 그리고 불과 얼마 전 광마제와 광룡귀면대를 대면했던 일들이 모두 그들의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진화처럼 경지를 넘어서고 크게 도약하는 일은 없었지만, 목숨을 건 실전을 반복하면서 무공에 대한 이해와 숙련도가 크게 늘었다.
이제는 적의 도열 상태, 눈빛, 기세만 보아도 적의 경지를 가늠할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파파파파파팟----!
백안사의 앞에 손을 내밀며 진화의 천뢰장이 향한 곳은 백안사의 뒤에 있던 외벽이었다.
진화의 뇌전이 막다른 뒷골목을 둘러싸고 있던 건물 외벽을 터뜨렸다.
“우아아아악!”
건물 안에 숨어 있던 흑오문도들의 모습이 비명과 함께 드러났다.
“같잖은 수작이군.”
퍼어어억!
나하연이 흑오문의 의도를 비웃으며 건물 기둥을 주먹으로 찢어 버렸다.
다른 쪽에서는 남궁교명이 반대편 기둥을 검으로 갈랐다.
쩌어어어억!
“으아아악!”
“사, 사람 살려!”
흑오문의 본거지로 보이던 건물의 한쪽이 완전히 무너졌다.
성인 남자의 허벅다리만 한 기둥 몇 개와 나무를 얽어 만든 어설픈 건물은 금세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사이.
“여기가 어딘지 뻔히 아는데 정사연합의 이름난 고수들이 들어왔다면, 그 이유가 뭔지 한 번은 고민해 봤어야지!”
한 걸음에 삼 장까지 도약한 강무련이 백안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용의 발톱처럼 오므린 강무련의 양손에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고.
퍼-억! 퍽! 퍽!
백안사가 놀라서 강무련의 패천아룡권을 막았지만, 사파를 일통한 낭아왕의 패도적인 무공 앞에 뱀처럼 교활한 움직임 따윈 설 곳이 없었다.
“이런……!”
촤아아아악-!
백안사가 급하게 몸을 날려 피하자, 강무련의 발톱 같은 손가락은 백안사를 대신해서 그의 뒤에 있던 건물 외벽을 완전히 뜯어 버렸다.
퍼-엉!
“우아아악!”
거칠게 뜯긴 나무 외벽이 무방비로 있던 흑오문도들의 등을 때리며 그들을 덮쳤다.
강무련을 피한 백안사의 앞에는 남궁교명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상성이 안 맞는군. 아쉽네.”
남궁교명의 말은 백안사를 향한 것이 아닌 강무련을 향한 것이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백안사의 경지는 강무련이나 일행에 비해 모자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한 문파의 문주라기엔 오히려 아쉬울 정도.
다만 강무련의 패도적인 무공이 백안사를 완전히 잡아내기엔 상성이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궁교명의 창궁무애검법은 유연하고 빠른 상대를 만났을 때에 빛을 발했다.
“헛!”
쉐에에에엑-!
휘이이익!
쉐에에엑!
어느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검을 표방하는 남궁세가의 검법 중에서도 창궁무애검법은 한껏 자유로운 창공의 영활함을 좇는 검이라. 백안사의 사사일권의 빠르기와 유연함을 쫓아가기에 충분히 날카롭고 다채로운 변화를 품고 있었다.
쉐에에에엑--!
남궁교명의 검에서 펼쳐진 창궁무애검법 일파석파가 몸 전체를 회전하며 빈틈을 찾아 나가는 백안사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퍼---엉!
빠르고 유연한 사사일권의 핵심은 연계 동작으로 얻은 힘이었다.
뱀처럼 상대의 품을 파고드는 동안 연계 동작에서 얻은 힘과 내력으로 적의 급소에 일격을 가하는 움직임.
하지만 백안사는 지금 그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었다.
파팟!
“큿!”
방향을 트는 백안사를 향해 뭔가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파파파파파팟----!
“크아아아아아-!”
“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과 울부짖음이 골목 전체에 가득 찼다.
진화의 손짓에 따라.
파-팟!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그대로 공중에 떠오르는 동시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파파파팟!
“으악!”
“제, 제발!”
뇌전을 품었든, 뇌전을 견디지 못하고 불이 붙었든.
그렇게 만들어진 수십 개의 흉기가 혼란스럽게 뒤섞인 흑오문도들에게 쏘아져 나갔다.
“으아아악!”
흑오문도들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혹시 운이 좋아, 아니 운이 나빠서 한 번에 쓰러지지 못한 이들에겐.
퍼어어어억! 퍽! 퍽!
어김없이 나하연의 사천패룡권이 날아들었다.
빠각-!
뚜둑. 뚝-!
“아아악!”
은밀하게 남궁구의 전낭을 훔치고 달아났던 처음의 흑오문도는 자신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으며 쓰러졌다.
좁은 공간에서 다수의 적은 크게 힘을 쓰지 못한다.
더욱이 혼자서 다수를 쓰러뜨릴 수 있는 무공을 가진 고수들의 앞에선, 그저 수련용 목각 인형을 세워 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제, 젠장! 이게 아닌데! 대체 왜!”
이렇게 압도적으로 밀리는 모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아니면 이런 상황 자체가 그의 예상과 다른 것인지.
어쨌든 백안사는 순식간에 쓰러져 가는 수하들과 제대로 힘을 못 쓰는 자신의 상황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진화의 눈에 그런 백안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당황스러운 표정,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불안하게 사방을 둘러보는 눈빛이 뭔가를 찾는 듯하고, 하늘에 뜬 해나 그림자를 여러 번 확인하는 것도 수상쩍었다.
‘뭔가 기다리는 것이 있나?’
그때.
쏴아아아아아----!
갑자기 사방에서 짙은 그림자가 좁혀 들어오며 일행을 덮었다.
“아!”
백안사가 반색하며 탄성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피—잉!
남궁교명을 향해 뭔가가 날아들었다.
파-앗! 파지직…….
“……!”
진화의 뇌전이 날아든 뭔가를 태워 버리고.
놀란 남궁교명이 진화를 돌아보았다.
진화의 시선이 내부가 완전히 드러나 위태롭게 서 있는 건물의 지붕으로 향해 있었다.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이유.
지붕 위에는 검은 무복에 복면을 쓴 이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진화 일행이 순식간에 진화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살각 놈들이군.”
강무련이 굳은 얼굴로 지붕 위에 내려앉은 이들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피---융!
휙휙휙휙휙---!
“…….”
비가 내리듯 뭔가가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진화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진화가 손바닥을 펼쳐 기막을 뿜어내자, 간발의 차이로 뭔가가 부딪히며 요란하게 타들어 갔다.
파파파파파파파팟---!
“으아아아악!”
“크아아악!”
강무련을 비롯한 일행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비명은 진화 일행이 아닌, 흑오문도들의 것이었다.
진화가 뇌전으로 만든 기막에 보호받지 못한 이들 전부, 온몸에 검고 뾰족한 철 가시가 박혀 죽었다.
백안사 또한 온몸에 철 가시가 박혀 있었다.
“끄어…… 어…….”
백안사는 양쪽 눈에 가시가 박히며 피 눈물을 흘리는 듯한 모습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털-썩.
쓰러진 백안사의 옆으로 암림혈귀갑을 입은 전 살각주, 살선 보곡성이 내려섰다.
그리고 비릿하게 웃으며 진화와 일행 앞으로 걸어왔다.
“소천주는 오랜만이군.”
보곡성이 느긋하게 말을 걸어오자, 강무련의 얼굴이 무겁게 굳었다.
“아아, 그런 얼굴 할 것 없네. 저놈들의 역할은 우리가 나타날 때까지 자네들을 붙잡아 두는 것뿐이었으니까.”
보곡성이 죽은 백안사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며 진화 일행의 앞으로 다가왔다.
촤아아아아---!
보곡성이 진화 일행의 앞에 서자, 흥분한 그의 기운에 반응하듯 암림혈귀갑의 사슬들이 진화 일행을 향해 출렁거렸다.
살선 보곡성이 새로운 소리마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절로 실감이 났다.
하지만 그동안의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 경험이 키운 것은 실력과 자신감만이 아니었으니.
“쇠사슬 줄줄 감고 멋진 척하기엔 너무 늙지 않았어?”
“말은 바로 하자고. 저놈들이 우릴 붙잡은 게 아니라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거다.”
“댁이 늦었다.”
소리마제와 살각이라고 겁을 먹기엔 일행의 간덩이도 너무 커졌다.
“괜찮아. 우리도 좀 늦었으니까.”
강무련이 살선 보곡성을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일행을 뒤덮은 그림자에 균열이 생겼다.
소리마제 보곡성의 뒤, 막다른 골목에 하나 있는 출구에서 누군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많이 늦었습니까?”
“흑살대주.”
“여어, 오랜만이야, 배신자들.”
흑살대주가 거대한 검을 어깨에 걸치고 보곡성을 노려보았다.
흑살대가 건물 외벽이 있던 자리를 따라 빼곡하게 들어오고, 흑살대주는 보곡성의 도주로를 막듯 길 가운데에 섰다.
보곡성이 미간을 찌푸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계획과 달리 흑살대까지 나타난 상황.
‘흑살대라…….’
수적으로나 전력적으로 피해가 없진 않으나 해볼 만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이들…… 패황권문의 여식에 남궁세가 놈들, 그리고 사패천 소천주다.
‘저놈들을 사로잡거나 죽이기만 한다면, 본 좌와 살각은 살선이 아니라 살신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보곡성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그런 보곡성을 보며 진화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의 예상이 들어맞고, 누가 함정에 빠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생사는 결국 싸우는 자들의 몫이니까.”
그간의 경험으로 자신감과 간덩어리를 얻은 건 일행만이 아니었다.
진화 또한 광마제를 죽이며, 스스로에게 확신을 얻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살아 나갈 자신이 있나 보군, 같잖게도!”
귀천성의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거란 확신.
소리마제와 살각은 정사연합이 처음부터 노렸던 사냥감이었다.
* * *
챙-!
퍼억! 퍼억!
“놈들을 전부 죽인다-!”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 앞에 있는 이들은 발밑을 주의하라!”
적호단주와 청룡단주가 단원들을 이끌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적호단과 청룡단은 적들을 동굴로 몰아 놓고 그들을 전부 죽이며 천천히 전진했다.
횃불을 밝히긴 했지만 여전히 어두컴컴한 동굴 안.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적들과 미로처럼 퍼져 있는 방들, 혼현마제나 독마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적호단과 청룡단의 전진 속도를 늦췄다.
그렇게 싸워 나가길 한참.
“단주-! 여기!”
방 하나하나에 모두 들어가 적들을 죽이고 마침내 끝이 보일 때쯤.
남궁진혜가 뭔가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적호단주와 청룡단주가 단원들을 두고 남궁진혜가 부른 쪽으로 먼저 움직였다.
그렇게 들어간 마지막 방.
코가 매캐할 정도로 짙은 약초 향기와 함께 시야가 흐릴 만큼 뿌연 연기가 방 안에 가득하고. 그 사이로 속을 뒤집는 악취가 풍겼다.
지독하지만 익숙한 악취였다.
성큼성큼 걸어간 적호단주가 침상의 발을 걷었다.
촤---악!
“윽! ……젠장!”
발 안에서 뭉쳐 있던 썩은 내에 인상을 찌푸린 순간, 적호단주는 침상에 누워 있는 시체를 알아보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혼현마제로군.”
적호단주의 곁으로 온 청룡단주도 굳은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는 시체 보았다.
그때.
“단주! 숙부님!”
남궁진혜가 다급한 목소리로 적호단주와 청룡단주를 불렀다.
적호단주와 청룡단주가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빌어먹을……!”
“……허어!”
적호단주가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청룡단주가 기가 막힌 듯 허탈한 숨을 뱉었다.
방 밖.
“어엇?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전부, 환영이었던 거야?”
밤새도록 적들과 싸우고 있던 적호단원들과 청룡단원들이 의미 없이 휘두르던 검을 놓고 어리둥절해하거나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침상의 발을 걷는 순간 환영진이 깨어지게 해 두었군. 시체가 되어서라도 밤새도록 환영과 싸운 우릴 비웃으려고 한 건가?”
“이 개새끼가……!”
푸욱!
분을 참지 못한 적호단주가 혼현마제의 시체에 검을 박았다.
하지만 애먼 화풀이로는 그들이 속았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았다.
‘후후후후후후!’
어디선가 혼현마제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