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따를 화(化) : 잔인한 사랑(2)
콰-앙!
화르르르륵!
쿠르르르-콰광! 쾅! 쾅!
기면산 자락에 불꽃이 번뜩이고, 동시에 굉음과 함께 뿌연 연기가 퍼졌다.
불꽃 때문에 불이 번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무너지며 먼지구름이 피어오른 것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 중 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정의맹의 미친 곰이 꽤나 열이 받은 모양이군.”
“가가, 적호단주라고 어떻게 확신하시나요?”
수오의 얼굴을 한 혼현마제의 말에 독부가 궁금한 듯 물었다.
“놈들이 비밀통로를 찾을 수 없도록, 내가 직접 설치한 환영진의 최후다. 환영을 일으키던 현홍사를 불꽃으로 태워 동굴 전체에 균열을 만들고 마침내 무너지도록 하는 것. 그러니 제일 처음 불꽃이 터지기 전의 그 굉음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게다. 후후후후!”
“아! 저만한 파괴력이라면 그 미친 곰밖에 없겠군요. 호호호!”
혼현마제의 웃음에 독부도 따라 웃었다.
소년과 청년의 사이, 약관도 되지 못한 젊은 사내에게 중년의 미부가 ‘가가’라 부르며 교태를 부리는 건 일견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엔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혼현마제가 기면산을 보며 웃을 때 독부는 오직 혼현마제만을 보며 웃었다.
혼현마제가 수오의 몸을 차지한 이후로 부쩍 웃음이 많아진 터라, 그녀는 그것이 기쁠 뿐이었다.
“가가께서 부상으로 칩거했을 거란 선입견 때문에, 가가가 동굴에 뭔가 했을 거란 생각을 전혀 못 한 것이 저들의 패착이겠군요.”
“아니, 저들의 패착은 날 역천비지에 버려두고 간 것부터다.”
무너지는 동굴 쪽을 보는 혼현마제의 눈빛이 얼음보다 차갑게 굳었다.
“역천비지에서 중요한 건 풍수지리나 지형이 아니라 그 땅이 품고 있는 지력이다. 순리를 무시하고 기를 역류시키는 지력이야말로 역천비지의 핵심이지.”
무너지는 동굴을 보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적호단과 청룡단을 떠올리며 혼현마제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날 그곳에’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이 실수였다는 사실을 저들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었다.
* * *
혼현마제가 기억하는 그날.
적호단주와 남궁진혜의 합격은 혼현마제를 몰아붙였다.
쉐에에에엑-!
“트아아앗-!”
남궁진혜가 혼현마제의 현홍사를 검에 감고 잡아당겼다.
“이게 무슨……!”
상상치도 못했던 강한 힘에 끌려가며 혼현마제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카-앙! 카-앙!
혼현마제가 현홍사를 끊었지만, 남궁진혜가 무지막지하게 감아 놓은 바람에 현홍사끼리 얽히고설켜 끊어 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바로 그때, 적호단주 경격권 팽치가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혼현벽력장 파신각(破迅閣)-!
적호단주의 두 주먹이 붉은 기운을 두르고 혼현마제의 전신을 때렸다.
퍼퍽! 펑! 펑!
“읏!”
생각 이상의 충격에 혼현마제의 눈이 커졌다.
“크읏! 말도 안 돼!”
신체와 신력이 전혀 조화가 안 되는 남궁진혜의 힘도 그랬지만, 적호단주 팽치의 무공 또한 혼현마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오장의 급소를 노린 혼현벽력장에 혼현마제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온몸이 터져 나가는 듯한 충격은 덤이었다.
‘설마 이들이 전부 경지를 넘어섰을 줄이야!’
늦었다.
혼현마제는 적호단주와 남궁진혜의 무위를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이전에 맞붙었던 때만 생각하고 계획을 세웠으니, 일이 계획대로 될 리도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위기였다.
“안 돼!”
쉐에에에엑---!
현홍사가 혼현마제의 손끝에서 출렁이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팟-!
혼현마제의 기운에 반응하며 끊어진 현홍사가 남궁진혜를 향해 날아들고, 피처럼 새빨간 기운이 현홍사를 감고 있는 남궁진혜의 검을 흔들었다.
남궁진혜가 저 검을 놓치는 순간, 현홍사에 이끌려 나온 저 검이 적호단주의 심장에 가서 박힐 것이었다.
하지만.
“이 씨부렁탱이! 해보자는 거지!”
남궁진혜가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 그대로 밥 먹는 힘까지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온몸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고, 이마와 팔뚝에 흉할 정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남궁진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눈부시도록 푸르게 발광하며 남궁진혜의 의지에 따라 그녀의 검을 감쌌다.
“크아아아앗---!”
혼현마제의 기운을 따라 현홍사가 남궁진혜의 검을 뱀처럼 옭아매고 끌어당겼지만, 남궁진혜가 차라리 손이 끊어지라는 듯 힘으로 버텼다.
기어이 힘으로 버텨 냈다.
그리고 적호단주 팽치가 최후의 건곤신장(乾坤神掌)을 날렸다.
붉은 호랑이가 올라탄 양 주먹이 혼현마제의 가슴 중앙, 옥당혈과 거궐혈을 때렸다.
퍼-----엉!
혼현마제의 신형이 삼 장 가까이 튕겨 나가 절벽에 부딪혔다.
쿠웅! 쿵!
힘없이 종잇장처럼 떨어지는 혼현마제의 신형.
“…….”
적호단주와 남궁진혜는 물론, 교성흑오대와 싸우고 있던 적호단원들의 눈이 혼현마제를 향했다.
혼현마제는 바닥에 엎드린 채 어떤 미동도 없었다.
마치 죽은 듯이.
역천비지 전체에 침묵이 흘렀다.
그때, 적호단주가 남궁진혜와 단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남은 놈들을 전부 처리하고 안으로 이동한다!”
“추-웅!”
안쪽에 있는 ‘진짜처럼 위장한’ 가짜 역천비지에서는 여전히 심상치 않은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적호단주의 명에 상황을 파악한 남궁진혜와 적호단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혼현마제를 잃은 교성흑오단은 적호단주와 남궁진혜가 날뛰는 적호단의 상대가 될 리 없었고, 교성흑오단을 모두 죽인 적호단은 급하게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즈음이었다.
혼현마제의 정신이 돌아온 것이.
“크흣!”
혼현마제가 여전히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기침을 토했다.
기침 속에 붉은 핏덩어리가 함께 섞여 나왔다.
‘이게…… 왜…….’
눈을 뜨기 힘들었다.
정신이 혼미하고 속이 매슥거릴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혼현마제는 자신이 비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억지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일단 호흡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풀숲에서 푸스럭 소리가 났다.
혼현마제가 바짝 긴장한 채 숨을 참았다.
이렇게 쥐새끼처럼 겁을 집어먹고 숨을 참은 것이 얼마 만일까.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면 스스로를 향해 크게 비웃음을 터뜨려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살기 위해, 일단 살아야 했기에, 혼현마제는 죽은 척도 마다하지 않았다.
“스, 스승……님?”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혼현마제를 불렀다.
‘수오?’
혼현마제는 어렵지 않게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혼현마제가 수오를 광마제에게 보냈으니, 광마제가 이곳에 나타나며 수오도 함께 온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이어진 수오의 말과 행동이었다.
“주, 죽었나? ……설마?”
수오는 혼현마제가 죽었는지 의심하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겁을 먹었다면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오의 목소리에선 걱정이나 염려, 슬픔 따위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벅. 저벅.
수오가 천천히 혼현마제에게 접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혼현마제는 코끝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수오가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본 것임을 눈치챘다.
“수, 숨을 안 쉬어! 주, 죽었나? 정말 죽었어?”
제 손으로 확인을 하고도 쉽게 믿지 못하는 목소리.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혼현마제의 죽음을 확인하는 수오의 목소리가 점점 밝아졌다.
쓰러져 있던 혼현마제조차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수오의 태도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설마 했는데…….
“잘……된 건가?”
‘……!’
차마 눈을 부릅뜨지 못한 혼현마제는 제 동요를 알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았다.
하지만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필요에 의해서 사제지연을 맺은 다른 놈들과 달리, 수오는 혼현마제가 자식처럼 손자처럼 키운 제자였다.
배신감에 심장이 떨려 왔다.
그러는 사이, 수오가 흥분한 손길로 혼현마제의 몸을 뒤집었다.
“아! 스, 스승님……!”
적호단주의 건곤신장 때문에 함몰된 흔적을 발견하고 수오가 놀라는 한편, 이제야 그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흑. ……진짜…… 아…….”
수오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당장 혼현마제의 죽음을 기뻐했다가, 기뻐해도 되나 의문을 품었다가, 이제서야 스승의 죽음이 슬퍼 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수오의 반응을 모두 지켜본 혼현마제는 뒤늦은 수오의 슬픔이 반갑지 않았다.
‘크흐흐흐, 세상에 약한 놈의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오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언젠가 광마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혼현마제는 수오가 자신의 죽음을 기뻐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스승님…….”
수오가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혼현마제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푸-욱.
“컥! 아, 어…….”
순식간에 제 심장이 꿰뚫린 수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기를 머금고 있던 눈에서 혼현마제의 얼굴로 눈물이 떨어지는 동시에, 혼현마제가 눈을 떴다.
시리도록 차갑게 굳은 눈빛이 경악하고 있는 수오의 눈을 덤덤하게 마주했다.
말을 할 힘은 없었다.
대신 혼현마제는 분노로 끓어오른 힘으로 전신의 기운을 일으켰다.
혼현마제의 눈이 붉게 빛나고, 피처럼 붉은 기운이 그의 손을 따라 수오에게 움직였다.
꿀럭. 꿀럭. 꿀럭.
혼현마제에게 꿰뚫린 수오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오의 붉디붉은 피.
수오의 생명과 원기.
그 모든 것이 혼현마제의 혈관을 타고 혼현마제에게로 움직였다.
‘같은 운명. 나는 너를 내 분신처럼 아꼈다. 나는 결코 너를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기어코 네가 나를 배신했구나!’
혼현마제가 하얗게 백탁으로 물드는 수오의 눈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꿀럭. 꿀럭.
요동치는 심장에서 수오의 저항이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혼현마제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수오의 기운이 전해지며 혼현마제의 몸에 힘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혼현마제의 눈빛은 더욱 잔인하게 물들었다.
그리고.
꿀럭. 꿀럭. 꿀럭.
수오에게서 혼현마제로 움직이던 피와 생명이 혼현마제의 기운과 융화되며 이제는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명과 원기의 역류.
세상의 순리를 무시하는 힘을 품은 땅, 역천비지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진화가 역천비지를 부수기는 했지만, 풍수지리적 지형은 역천비지를 알아보는 데 유용한 겉모습일 뿐이었다. 땅이 품고 있는 지력은 바닥을 파헤치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끄어…….”
이제는 혼현마제의 눈동자가 백탁으로 물들고, 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건 혼현마제의 것이 아니었다.
혼현마제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수오의 눈동자가 붉은 안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네가 먼저 날 배신했으니, 억울할 건 없겠구나.
수오가 혼현마제에게 전음을 보내며 억지로 그의 눈을 감겼다.
그리고 축 늘어진 혼현마제의 몸을 안고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오는 혼현마제의 안에서 죽었다.
혼현마제의 시체가 썩어 가는 동안 그 안에서 함께 썩어 간 것이다.
죽음이라는 가혹한 벌을 내렸음에도, 혼현마제는 여전히 수오를 죽이고 몸을 빼앗은 죄책감보다 제 죽음을 기뻐하던 수오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다.
혼현마제가 무너지는 동굴을 보며 웃은 데에는, 자신에게 속은 적호단과 청룡단을 향한 통쾌함과 동시에 제 시체와 함께 사라졌을 수오를 향한 비웃음도 담겨 있었다.
“소리마제와 살각 전체를 보냈으니, 고작 다섯 명으로는 남궁진화도 어쩔 수 없을 게야. 소리마제와 살각이 남궁진화를 죽이고 돌아오면, 다음은 역천마제의 방패를 치울 것이다.”
“그래요, 가가.”
혼현마제의 말에 독부 은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혼현마제의 팔에 팔짱을 끼고 그와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 * *
챙-! 챙--!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벽을 타고 올라가 살각 암살자들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숨지 못한 암살자들은 그대로 나하연과 강무련, 흑살대의 사냥감이 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소리마제 보곡성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정확한 정보와 분석이 없다면 잘난 혼현마제의 계획도 다 무용지물이지. 게다가 그 계획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말해 뭐 할까.”
진화가 절반쯤 검게 타 버린 암림혈귀갑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보곡성을 비웃었다.
혼현마제는 소리마제와 살각 전원에게 진화를 비롯한 일행 다섯을 상대하라 했으니, 보곡성은 흑살대가 나타났을 때에 물러났어야 했다.
살아남으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