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따를 화(化) : 잔인한 사랑(4)
양청현 정의맹.
정사연합 군사부로 외부 임무에 대한 결과가 전해졌다.
총군사인 천수현인 제갈길현은 곧바로 정사연합 총회의를 열었다.
“들었습니까? 혼현마제가 죽었다지요?”
“그때 입은 부상을 회복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럼…….”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이제까지 구체적인 임무가 극비에 부쳐져 있던 터라 그 결과가 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코 화제가 된 것은 진화의 존재였다.
“소리마제를 죽이고, 흑살대와 함께 살각을 멸문시켰다지?”
“벌써 네 번째인가?”
“직접 죽인 건 환마제, 혈마제, 광마제, 소리마제까지니까. 하지만 혼현마제의 한쪽 눈과 팔을 잘랐고, 권마제 색출 작업에 이전의 소리마제가 남궁세가에서 죽은 걸 생각하면…….”
“허어!”
한쪽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모든 마제들의 죽음에 진화의 힘이 닿아 있었다.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지금도 가세가 절정에 달했다는 남궁세가 소속.
게다가 한 제국 황실의 유일한 적통 황자인 데다 차기 황태자로 확실시되는 것도 무림인들 입장에선 꼭 반길 일만은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이 시선을 마주치며 미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또 다른 몇몇이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경계하는 거 같죠?’
‘호북 쪽 문파와 세가 사람들이로군. 무림과 황실은 너무 가까워도 꺼림칙하고, 너무 멀어도 불편하니까.’
‘그래도 그렇지 벌써부터 경계를 하다니, 하여튼 정파 놈들은.’
사파를 대표해서 참석한 하오문주 채명지와 홍랑대부, 녹림채주가 정파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제왕검 남궁강을 비롯해 정사연합을 이끌고 있는 십이좌회 고수들이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드르르륵.
먼저 와 있던 정사 수뇌부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군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던 회의장에 긴장감이 돌았다.
제왕검 남궁강과 사패천주, 옥허신검과 성승, 단 네 사람의 존재감이 모두를 압도했다.
진화의 존재가 장차 위협이 될지 어떨지 문제로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입이 무겁게 닫혔다.
“앉지.”
상석으로 간 제왕검이 자리를 권하는 말에, 모든 사람들이 착석했다.
-기도가 달라지셨군.
-사람들 말을 들으신 모양이야.
눈치 빠른 몇몇이 단호하게 굳은 얼굴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십이좌회 고수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라는 것 아니겠나.
-제왕검이 창천화룡을 아낀다더니. 아니, 어쩌시려고 저러시지? 소가주의 위세마저 뛰어넘는다면 장차 황실의 힘으로 남궁세가까지…….
-어허! 그 입!
-아, 뭐 어때? 전음이잖나! 전음까지 제왕검과 남궁세가 눈치를 봐야 하나!
신중한 성격의 점창파 장로 강자린의 만류에 청성파 장로 이나용이 버럭 했다.
그의 말처럼 전음인데, 전음까지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이전까지는 말이다.
“허허허, 남궁세가 눈치는 보지 말고, 내 눈치만 봐.”
“……!”
“예, 예?”
제왕검 남궁강의 말에 청성파와 점창파 장로가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강이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남궁 눈치는 볼 필요 없어. 아니꼬우면 한판 붙으면 되지.”
무서운 말이었다.
천하제일 세가로 거듭난 남궁세가와 전쟁이라니.
“그런데 여기서, 내 눈치는 보라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정사연합 대빵이라고 앉아 있잖아. 내가 허수아비도 아니고, 나랑 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안 그래?”
더 무서운 말이었다.
공식적으로 천하제일 고수라는 제왕검과의 한판 승부라니.
전자는 신중한 남궁가주의 성품상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후자는 알려진 제왕검의 성품이라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점창파와 청성파 장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황이 이쯤 되자,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둘 눈치채기 시작했다.
“……!”
“헉!”
제왕검이 청성파와 점창파 장로의 전음을 엿듣고, 그에 대해 답을 한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의 전음을 듣는다니, 기(氣)에 대한 깨달음이 어디까지 닿으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제왕검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럴수록 제왕검 남궁강은 사람들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아,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지은 죄가 있는 청성파 장로 이나용은 말까지 더듬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핼쑥하게 질린 모습이었다.
그때, 성승이 끼어들었다.
“갈 길도 바쁜데 괜한 사람 겁주지 말고 어서 가세.”
“흐음…….”
제왕검도 끝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낮은 헛기침을 하며 끝까지 이나용에게 두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너 두고 본다.’라는 의미가 명백해 보였다.
제왕검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까마득한 경지에 닿은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제 진화에 대한 시기, 질투가 사라지고 제왕검에 대한 경외만이 남았다.
사각. 사각.
거친 종이 문서가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어디선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 조용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제야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일어섰다.
때에 맞춰 제갈가주가 군사부의 사람들과 함께 귀천성과 무림 문파들의 분포가 표시된 거대한 지도를 들고 들어왔다.
“다들 들어서 알겠지만 혼현마제와 소리마제, 살각이 물러났네. 특별히 선별한 정사 고수들과 함께 적호단, 청룡단 그리고 사패천 흑살대가 모두 나서서 얻은 승리지. 자세한 일에 대한 설명은 보고서를 확인하고, 지금 당장은 앞으로의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네. 역천마제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이젠 우리도 기지개를 좀 펴야 하지 않겠는가?”
“…….”
천수현인 제갈길현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사람들의 놀란 얼굴을 하나하나 보며,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끼리니까 톡 까놓고 말하지. 지난 전쟁에서 우리가 밀려난 건, 오로지 그 세 놈! 역천마제와 검마제, 광마제 때문이었네. 그런데 우리에게 하늘이 무슨 복을 내려 줬는지, 광마제를 잡은 창천화룡 남궁진화를 줬단 말이지.”
진화에 대한 칭찬으로 이어지는 말에 몇몇 이들이 당황스러운 듯 제갈길현을 보았다.
그 순간.
타-앙!
제갈길현이 탁자를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찬물을 맞고 정신이 번쩍 든 듯한 얼굴로 제갈길현을 보았다.
“다른 건 따지지 말게! 머리를 어떻게 굴리든 귀천성 놈들이 차지한 중원의 반쪽을 되찾아오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테니! 지금은 고작 그런 약소한 이득 따위에 침 흘릴 필요가 없네. 천고의 기재! 내 새끼가 아닌 건 뼈아프지만, 어쨌든, 역천마제 놈을 때려잡을 하늘이 준 기회란 말일세!”
“아……!”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뱉은 탄성이 들렸다.
모든 것이 맞는 말이었다.
남궁세가가 지금보다 더 커져 봤자 천하제일 세가였다.
그들의 것을 조금 나누거나 갉아먹는 것과 자신들이 빼앗겼던 터전을 되찾는 것은 비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본산을 되찾는다는 것. 그것은 문파의 역사와 전통을 다시 잇고 잃어버린 명예와 자존심 또한 다시 세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천고의 기재가 또 남궁세가라는 건 배 아픈 일이지만, 정말로 역천마제를 잡을 수 있다면……?
체면이고 위신이고 뭐고, 정사 연합 수뇌부마저도 가슴 떨리는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역천마제가 배신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네. 우리는 죽은 광마제가 빼앗은 것부터 찾아오도록 하지.”
천수현인 제갈길현의 말에, 얼마 전 장문인과 문파 어른들의 희생을 딛고 도망쳐 왔던 종남파의 제자와 정의맹에서 문파의 몰락 소식을 들었던 장로, 아니 이제는 장문인이 된 현청비가 견낙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종남이 살려 보낸 장안의 장가, 면가, 종가, 견가의 후계들도 복수를 갈망하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천수현인을 보았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군들, 복수(復讐)를 바라지 않는 이들이 누가 있겠는가.
종남파와 장안 세가들의 비극이 최근의 일이라 그들의 복수심이 활활 불타고 있다면, 사천무림을 비롯한 다른 문파들의 복수심은 오래 묵다 못해 가슴을 찌를 만큼 깊어졌다.
“한 제국군과 함께 움직이게 될 것이네. 밀어낼 수 있는 곳까지 밀어내 보자고.”
반짝이는 눈빛들을 마주하며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미소로 화답했다.
“성승 각오와 옥허신검 청연, 두 사람이 직접 전력을 이끌 것이네.”
제왕검 남궁강의 말이 있고, 성승 각오와 옥허신검 청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수십 년 만의 일이건만, 그들은 한 번도 전쟁터를 떠나 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앞으로 일의 진행 순서와 각자의 임무를 전달했다.
회의가 끝나고, 군사부로 돌아온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생각에 잠겼다.
제갈가주와 홍랑대부가 이상하다는 듯 서로에게 눈빛으로 이유를 물었지만, 함께 회의에 참석하고 함께 돌아왔으니 두 사람 다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뭐 걸리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처럼 기쁘고 의욕적으로 회의를 마친 날에 어째 아버님만 뒷간 갔다가 석연치 않게 뒤처리를 하고 온 얼굴이십니까?”
조심스러운 홍랑대부 대신 제갈가주는 좀 더 직접적이었다.
하지만 제갈가주의 말에 생각에 빠져 있던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제갈가주를 째려보았다.
“……더러운 놈.”
“아버님 표정이 딱 그렇게 불결하고 불길합니다.”
“질풍노도의 오십기인 거냐?”
“그런 건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를 지지 않지. 어휴. ……이상해서 그래! 영 꺼림칙해서!”
제갈가주를 노려본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유를 말했다.
“그래서 그 꺼림칙한 것이 무엇입니까?”
“혼현마제 말이야. ……시전자가 죽었는데 환술이 이어질 수 있나? 진법이나 기관이 설치된 것이 아니라, 환술이 말이야.”
제갈가주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천수현인이 속내를 풀어놓았다.
순간, 제갈가주와 홍랑대부의 눈이 커졌다.
그들도 이상한 점을 알아차린 것이다.
“적호단주의 보고서에는 분명 이미 부패가 시작된 시체라고 적혀 있었지?”
천수현인의 물음에 제갈가주와 홍랑대부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남궁 부군사가 가 있습니다. 제왕검께 부탁해서 남궁세가의 매응을 이용한다면 오늘 안에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남궁 부군사와 숙청단주가 합류하지 않았을 겁니다. 백매단을 통해 적호단과 청룡단에도 ‘최대한 빨리 혼현마제가 죽은 시점을 파악해서 보고하라.’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척하면 착.
제갈가주와 홍랑대부가 빠르게 해결 방법을 내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신 제국 대륜궁.
탕-!
좀처럼 감정 동요를 보이는 일이 없던 역천마제가 몹시 화가 난 얼굴로 용좌를 내리쳤다.
역천마제는 방금 적호단과 청룡단을 감시하던 수하들에게 혼현마제의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 구렁이 같은 놈이 또……!”
역천마제의 분노를 보며, 검마제가 누군가를 향해 물었다.
“혼현마제가 죽고 환영진만 남겼을 가능성은 없나?”
검마제의 물음에 검은색 도복을 입은 중년인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유감스럽게도 진법에 걸린 환술은 한계가 있습니다. 적의 움직임에 따라 환술을 조종하려면 살아 있는 환술사의 기운이 필요합니다.”
송마문 장문, 마학선생 일유신은 귀천성에서 혼현마제 다음으로 진법과 환술에 일가견이 있는 고수였다.
결국 그의 대답으로 혼현마제가 살아 있다는 확신만 얻은 셈이다.
“역천비지에서 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거기서 달고 다니던 제자 놈의 몸을 빼앗은 거겠지! 정파 놈들의 어리석음이 화를 불렀구나.”
역천대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역천마제는 이전에 들었던 정보와 지금의 정보를 취합하여 가장 사실에 가까운 추리를 해냈다.
“늙고 약해 빠진 무뇌라면 모를까, 젊고 건강한 육신을 가진 무뇌는 어떤 의미로는 정의맹보다 더 귀찮은 존재다. 천흠.”
“예, 주군.”
“상황이 귀찮게 되었으니, 네가 나서야겠구나. 놈이 모든 힘을 회복하고 중원을 빠져나가기 전에 놈과 독마제를 처리해라.”
“존명.”
역천마제의 명에 검마제가 단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대전으로 군복을 입은 장수가 급히 뛰어들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말하라.”
“급보입니다. 지금 국경에 한 제국군이 나타났다 하옵니다!”
장수의 말에 역천마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놈들이 어디에 나타났다는가?”
“전부입니다! 북부와 남부, 접경 지역 전부입니다!”
“……!”
장수의 대답에 역천마제의 미간이 구겨졌다.
스스스슷.
역천마제의 분노에 용좌의 한 귀퉁이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