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따를 화(化) : 잔인한 사랑(7)
요석산 깊은 숲.
나무로 빼곡하게 둘러싸인 공터에 나무 막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속에서 일련의 무사들이 한창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 누가 어디로 갈지는 마지막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혼현마제는 떠나는 당일이 되어서야 수뇌부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가 떠나는 대로 이곳에 함정이 발동될 것이네. 노군산 쪽으로 떠날 일행과 박죽산 쪽으로 움직일 일행을 지금 정할 것이네.”
혼현마제의 말에 자리에 앉은 일행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이들 중 화려한 수가 놓인 붉은 무복을 입은 사내가 혼현마제를 향해 말했다.
“저는 무조건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화공문주 권열휘가 충성스러운 수하처럼 우렁차게 말하며 혼현마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수성보주 금오진 또한 다급하게 나섰다.
“저, 저도 주군을 모시겠습니다! 주군을 두고 어떻게 저희들끼리 움직일 수 있단 말입니까! 마지막까지 주군을 보좌할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열렬하게 충성을 다투는 듯 보였다.
“자네들은 어찌하겠는가?”
혼현마제가 남은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이화문주 사멸찬과 홍매문주 주화란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주군과 떨어져서 적들을 유인할 사람도 필요할 것입니다. 저희들이 박죽산 쪽으로 가겠습니다.”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 시간을 끌도록 하겠습니다.”
이화문주와 홍매문주의 말에 혼현마제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마제가 이곳에 놈들의 발길을 잡아 둘 것이네.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고 난 뒤에는 일전에 말했던 마지막 안처에서 만나지. 가서 준비들 하게. 오늘 밤에 떠날 것이네.”
“예!”
혼현마제의 명에 각 문파 문주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상의 끝에 마련해 두었다는 마지막 안처로 향하는 긴 여정을 위해서는 따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수뇌부들이 자리를 뜨고, 혼현마제가 독부 은요의 손을 잡았다.
“놈들의 발길만 막고 나면 곧바로 합류하도록.”
“그럴게요. 걱정 마세요, 가가.”
독부 은요가 화사하게 웃으며 혼현마제를 안심시켰다.
마지막 안처(安處).
역천마제를 배신할 준비를 하면서부터 혼현마제는 세상의 혼란을 피할 장소를 마련해 두었다.
역천마제와 한 제국, 정사연합이 양패구상 한다면 좋겠지만, 만약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한다면 어차피 진국에는 미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상의 안은 한 제국과 손을 잡고 신 제국을 치고 정사연합과는 데면데면한 사이로 남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진 마당에 괜스레 중원에 남아 둘의 표적이 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귀천성을 배신하고 혼현마제를 따르기로 한 이들 또한 천하에 욕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평온한 세상을 꿈꾸었던 것뿐이었다.
적어도 이화문주와 홍매문주는 말이다.
“이러다가 정말 세상 끝까지 쫓겨나겠군.”
“……음.”
“안 그런가? 그냥 서남 땅에서 주인 노릇 좀 해 보려다가 본 문에서도 쫓겨나게 생겼으니. 우리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젠장!”
혼현마제와 함께 가기로 한 화공문주와 수성보주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언뜻 듣기엔 또 먼 길을 도망쳐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는 것 같았지만, 단지 그뿐이라고 하기엔 둘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오늘 밤이라니, 이동 속도를 높이기 전에 연락을 해야지 않겠나. 마침 우리에게 혼현마제까지 있으니 거래를 거부하진 않을 거네.
-혼현마제의 신변을 거는 건 최후의 수단일세! 어차피 귀천성에서는 수신방이 왔을 거네. 우리 수성보와는 오래도록 가깝게 지냈으니,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진 알을 걸세. 출발하기 전에 수하를 보내겠네.
화공문주 권열휘와 수성보주 금오진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눈빛을 번뜩였다.
그날 밤.
“가시지요!”
“뫼시겠습니다.”
거무튀튀한 무명 무복으로 갈아입은 일련의 무사들과 함께, 화공문주와 수성보주가 혼현마제에게 길을 재촉했다.
혼현마제는 자신과 반대쪽을 향하는 이화문주와 홍매문주에게 인사를 전했다.
“꼭 다시 보지.”
“예, 주군.”
이화문주와 홍매문주가 결연한 얼굴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만나지 못할 것까지 모두 각오한 얼굴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손을 한번 꾹 잡아 준 혼현마제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요석산에 홀로 남게 된 독마제가 있었다.
-꼭.
말로 전할 것은 다 전했다는 듯 혼현마제가 독부 은요에게 눈빛을 보내고, 독부 은요 또한 애틋한 눈빛으로 답했다.
결국 혼현마제와 화공문, 수성보가 먼저 노군산 행로를 향해 길을 떠나고, 곧이어 이화문주와 홍매문주가 문도들을 이끌고 박죽산 행로를 향했다.
* * *
이른 아침.
문산현으로 진화 일행과 적호단, 청룡단, 흑살대가 들어섰다.
무림인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이곳까지 오는 데에 특별히 힘든 것은 없었다.
장족과 야오족이 많은 이곳은 관문을 지키는 군사나 현을 보살피는 호족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진국의 안팎이 신 제국과 한 제국 군대에 위협을 당하고 있는 터라 힘 있는 호족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살길을 찾아가고, 외부와 교류가 적고 사방이 산과 구릉으로 둘러싸인 부족 마을 사람들은 전쟁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장이 선 저자로 보이는 곳에서도 특이한 복색의 사람들이 진화 일행과 각 무단을 쳐다보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대부분은 제각기 거래를 이어 가기 바빴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지. 요석산이라는 곳으로 길을 안내해 줄 사람도 찾아야 하니까.”
오면서 이미 말을 맞춘 것인지, 적호단주의 말에 청룡단주와 흑살대주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흩어졌다.
다섯 명밖에 안 되는 진화 일행은 적호단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길잡이가 꼭 필요하긴 하겠어요. 눈에 보이는 곳은 다 산이라서 현지 사람이 아니면 어디가 무슨 산인지 구분을 못 하겠어요.”
“독마제나 혼현마제를 따르던 일당들도 그걸 알고 있으니 이쪽으로 도망을 쳤겠지.”
남궁구의 말에 남궁교명이 맞장구를 쳤다.
진화가 보아도 눈에 보이는 산들이 죄다 같아 보이긴 했다.
“이대로 산을 타고 익주로 통과하면 그때부턴 중원을 벗어날 경로가 수백 가지야. 일이 복잡해지기 전에 놈들을 죄다 잡아야 한다. 오늘은 일찍 쉬어라.”
“예.”
적호단주의 말에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어?”
진화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남궁구가 뭔가 발견하고 눈썹을 들썩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얼굴을 숨기고 목소리를 낮췄다.
“단주님, 남쪽 묘시 방향. 저놈…… 문산 들어오기 전에도 보이던 놈입니다.”
남궁구의 말에 진화와 적호단주가 눈동자만 돌려 남궁구가 가리킨 사람을 확인했다.
화려한 복장의 소수민족들 사이에서 잿빛 무복이 눈에 띄는 사내였다.
“움직인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사내가 사라졌다.
진화가 기감을 펼쳐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확인했다.
“구.”
“갑니다.”
진화의 명에 남궁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순식간에 이뤄진 일을 보며 적호단주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냅두지, 뭘. 어차피 귀천성 놈들일 거다. 검마제와 놈들이 벌써 도착했거나 아니면 수신방 놈들만 미리 와 있는 거겠지. 우리 목표는 검마제와 독부가 한판 뜨면 그 뒤를 노려서 어부지리를 취하는 거니까, 너무 안달하지 않아도 된다.”
“놈들이 우릴 먼저 노리면요?”
“흐흐, 나쁠 건 없지. 가만히 앉아 있는데 귀천성 놈들이 제 발로 굴러들어오는 것도.”
남궁교명의 다소 반항적인 물음에 적호단주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적호단주는 정사연합의 정예 무단이 셋이나 넘어왔으니 검마제와 귀천성 무리가 자신들을 노린대도 전혀 꿀릴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정의맹의 미친 호랑이, 미친 곰, 미친 개.
뒤에 붙은 맹수는 달라도 앞에 붙은 수식어는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는 사내였다.
사납고 영리하며 한번 문 적은 끝까지 놓치지 않는 끈질긴 사내는 평생 걸어온 싸움을 피해 본 적이 없었다.
“일 터지면 검마제는 내 거다.”
“…….”
진화가 희희낙락 잡아놓은 객잔으로 들어가는 적호단주를 보았다.
하지만 느긋하게 적들을 기다리려는 적호단주의 게으른 전략은, 수상한 사내를 쫓아갔던 남궁구가 돌아오면서 완전히 틀어졌다.
“흐흐흐, 일이 재밌게 돌아가던데요. 남은 잔당끼리 서로 배신했어요. 아까 그놈이 간 곳은 아니나 다를까 귀천성 수신방 놈들이 있는 곳이었는데, 알고 봤더니 그놈은 수신방이 아니라 수성보 놈이더라고요. 수성보주가 귀천성 놈들에게 안위를 대가로 독마제와 이화문, 홍매문 놈들의 행방을 거래했어요.”
남궁구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 * *
요석산.
검은 무복을 입은 일련의 무리가 산 아래 들어왔다.
수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이들은 산 아래에 길이 통하는 입구 네 곳을 모두 막아섰다.
붉은 수술이 달린 부채로 얼굴을 가린 중년 학사가 앞으로 나섰다.
“길목을 모두 막아섰습니다. 산이 사방으로 열려 있으니, 산 아래를 막고 최단거리를 쫓아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중년의 학사가 공손하게 읍소하며 의견을 말하자, 검은 삿갓을 쓴 사내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검은 삿갓을 쓴 사내, 검마제는 일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수성보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 덕에 귀천성 무인들은 길잡이를 구할 것도 없이 수성보 문도에게 요석산까지 안내를 받았다.
“길은 틀림없겠지?”
“무, 물론입니다.”
검마제의 물음에 안가의 위치를 알려 주기 위해 함께한 수성보 문도가 잔뜩 얼어붙은 얼굴로 답했다.
구태여 유심히 보지 않아도 수성보 문도는 면전에서 검마제를 속일 만큼 간이 커 보이지 않았다.
눈빛으로 사내를 압박하던 검마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마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중년의 학사, 송마문주 마학선생 일유신이 본격적으로 명을 내리기 시작했다.
“혼현마제가 마련해 놓은 안가다. 게다가 독부까지 있으니, 선두는 함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라.”
“충.”
송마문주의 말과 함께 송마문 법사들과 함께 귀천성 무인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신방 방도들은 빠른 속도로 나무 위를 뛰어넘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잠깐.”
송마문주가 급하게 검마제와 일행을 멈추고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콰과광---쾅!
“크아아악!”
“아악!”
굉음과 함께 비명이 들리며 귀천성 무인들을 긴장시켰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급하게 확인하러 가자, 땅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그곳에 귀천성 무사들이 떨어져 있었다.
구멍에는 현홍사가 거미줄처럼 널려 있어서 떨어진 이들의 몸이 조각조작 걸려 있었다.
송마문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혼현마제의 함정이 시작된 듯합니다. 기문이 닫힌 것으로 보아 옥혼진은 확실한데, 다른 함정들은 들어가면서 확인해야 합니다.”
쿵! 쿵!
“아아악!”
송마문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커다란 나무들이 쓰러지며 비명이 울렸다.
나무 위로 움직이던 수신방 무인들이 변을 당한 듯싶었다.
“기관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저기 앞쪽에…… 헛!”
휙! 휙휙!
사방에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고, 송마문주가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검마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쉐에에엑-!
챙챙챙챙챙!
바람이 바람을 가르자,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졌다.
검마제의 검기가 순식간에 사방에서 공기를 찢을 만큼 빠르게 날아드는 현홍사를 잘라 낸 것이다.
조각난 현홍사가 바닥에 떨어지고, 목표를 잃고 돌아간 현홍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스스스스슷---!
세찬 바람이 분 듯 사방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
침묵이 흐르고.
송마문주는 물론 귀천성 무인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하고 깜깜한 숲속.
이번 공격은 실패했지만, 그들을 둘러싼 숲 전체에 그런 함정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혼현마제가 했을 법한 짓이로군.”
검마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 * *
요석산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이 산세에 부딪히며 널리 퍼졌다.
요석산을 떠난 혼현마제와 화공문주, 수성보주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렸다.
“놈들이 벌써 요석산으로 간 모양이구나. 예상보다 빠르군.”
혼현마제가 고개를 돌려 요석산이 있는 방향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그러자 화공문주와 수성보주가 서로 눈빛을 마주쳤다.
“일찌감치 출발한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주군의 시기 선택이 적절했습니다.”
화공문주와 수성보주가 앞을 다투어 혼현마제의 결정을 칭찬했다.
아부로 화제를 돌리려는 속셈이었다.
혼현마제는 요석산을 보다가 별다른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제아무리 검마제 네놈이라도 쉽진 않을 것이다.’
혼현마제가 눈빛을 싸늘하게 굳혔다.
하지만 그때.
“여어,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깊은 산속 흔히 들릴 법한 익숙한 대사와 함께, 산적만큼 거대한 사내가 혼현마제와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붉은 무복 대신 호랑이 가죽이 더 어울릴 법한 적호단주였다.
적호단주의 뒤로 적호단원들이 넓게 줄 지어 길을 막았다.
“어째 우리가 산적 같지 않습니까?”
“단주가 저 모양이라…….”
적호단원들 사이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적호단주의 얼굴은 잔뜩 신이 나 보였다.
“적호단주 팽치!”
적호단주를 알아본 화공문주의 외침에 수성보수 또한 당황한 기색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수오의 모습을 한 혼현마제가 조용히 그들의 뒤로 몸을 숨겼다.
“어딜 그렇게 보나? 혹시 우릴 찾나?”
그들의 뒤로, 숨어 있던 진화 일행과 청룡단 그리고 흑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룡단과 흑살대!”
화공문주와 수성보주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이들을 보며 남궁구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얍삽하게 다른 놈들의 행방을 분 놈들이, 본인들은 어디로 갈까 생각했지.”
“저, 저자는……!”
“창천화룡 남궁진화!”
얄밉게 말을 한 것은 남궁구였는데, 화공문주와 수성보주는 그 옆에 진화를 먼저 알아보았다.
경악을 금치 못한 얼굴들이 진화를 보고 단숨에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