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따를 화(化) : 잔인한 사랑(10)
요석산과 박죽산은 작은 고개 두 개로 이어진 산맥의 일부였다.
진화와 일행은 젖 먹던 힘까지 빠르게 이동했다.
혼현마제가 역천대법에 성공해서 수오의 몸을 빼앗았다는 검마제의 말을 전부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수오를 죽이기 위해 그런 거짓말까지 해야 할 필요성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수오가 문제가 아니었다.
일행을 앞으로 보내고 진화가 뒤를 돌아서 검으로 길은 물론 근방 숲까지 베었다.
파파파파파팟--!
뇌전에 타들어 간 땅과 숲에는 검은 줄이 생겼다.
마치 검으로 경계를 그어 놓은 것 같았다.
물론 진화는 그렇게 되길 바랐다.
하지만 상황은 진화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독기를 막아 내기에 경계가 충분히 넓지 않았던 듯, 조금 떨어져서 뒤를 돌아본 진화는 독기가 뇌전으로 끊어 놓은 길을 넘어 여전히 그들을 쫓고 있음을 발견했다.
‘조금 더!’
박죽산에 남은 적호단, 청룡단, 흑살대가 어떻게 움직였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도망치는 잔당을 쫓기 위해 산 전체로 흩어졌을지도 몰랐다.
저 독기가 박죽산까지 넘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기에, 뒤를 돌아본 진화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번---------쩍!
기운을 모은 진화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며 천뢰기를 뿜었다.
다른 검이었다면 벌써 깨지고도 남았을 뇌기가 의천검을 타고 그대로 쏘아져 나갔다.
콰과광------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땅이 쪼개졌다.
쪼개진 땅을 따라 작은 언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현경의 고수가 온 힘을 다해 뿜어낸 검강이 작은 언덕을 무너뜨리고, 무너진 흙과 돌, 나무가 진화와 일행을 쫓던 독기를 덮쳤다.
뿌옇게 먼지구름이 높게 일고.
진화는 먼지구름 속에서 더 이상 숲이 쓰러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곤 다시 일행의 뒤를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간 남궁구와 남궁교명, 강무련, 나하연이 적호단주와 흑살대주를 만나고 있었다.
적호단주가 뒤늦게 진화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짜고짜 모두 데리고 산을 내려가야 한다니.”
“독마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온 산맥으로 독기가 뻗고 있습니다.”
“독기가? 그럼 방금 그 소리는?”
“독기가 박죽산으로 넘어오기 전에 길을 끊었는데,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어서 단원들을 모아 이곳을 피해야 합니다.”
진화의 심각한 표정에 적호단주와 흑살대주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삐이이이이익!
적호단주가 적호단과 청룡단에 신호를 보냈다.
“우리도 어서!”
강무련이 한 번 더 재촉하자, 흑살대주도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후우우우우웅---!
뿔 나팔 소리가 산 전체에 퍼져 나갔다.
* * *
다행히 적호단과 청룡단, 흑살대는 무사히 산을 빠져나왔다.
“독마제의 독이 무섭긴 하군.”
적호단주가 검게 죽어 버린 요석산을 보며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독마제의 독은 요석산을 모두 태우고도 모자라 주변의 크고 작은 산들까지 모두 태웠다.
노군산마저도 숲의 절반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다만 박죽산만은 숲의 가장자리만 조금 누렇게 변해 있었다.
“우리 피해는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결국 놈들을 놓쳤군. 혼현마제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적호단주가 아쉬운 듯 산을 보았다.
‘수오가 혼현마제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없던 미련도 생긴 듯했다.
“작정하고 수하들의 목숨까지 희생시키면서 도망친 놈들이다. 우리가 계속 쫓았어도 지리도 모르는 숲속에서 놈들을 찾긴 힘들었을 거다.”
청룡단주가 적호단주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미련을 떨구었다.
하지만 흑살대주 또한 적호단주처럼 아쉬움이 남는 듯했다.
“곧장 계속해서 숲을 뒤졌으면 또 모를 일이지! 아까운 기회를 날린 건지도 모르겠군!”
흑살대주가 난리를 치며 적호단, 청룡단, 흑살대를 끄집어 내린 강무련을 비롯한 진화 일행을 힐끗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보다 박죽산의 피해가 적은 것이 흑살대주의 아쉬움을 더 키웠다.
“앞에 있는 언덕이 무너지는 바람에 귀퉁이만 조금 타서 우리가 있던 쪽까지 아예 퍼지지도 않았구먼. 괜히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저 언덕은 왜 무너진 거야?”
“독부의 독이 산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했나 보지.”
흑살대주도 요석산과 연결되었던 작은 언덕이 무너진 곳을 가리키며 묻자, 적호단주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청룡단주가 무심한 눈으로 흑살대주와 적호단주를 보며 정확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저건 숙청단주가 한 거다.”
“제가 독기를 끊으려다 그만.”
“…….”
청룡단주의 말에 진화가 확인까지 하면서, 흑살대주와 적호단주의 불평이 쏙 들어갔다.
흑살대주는 뻣뻣한 얼굴로 진화 쪽으로 눈길로 주지 않았고, 적호단주는 무너진 언덕이 있는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화 일행을 비롯해서 적호단과 청룡단, 흑살대는 다시 북위군과 합류했다.
문산현 코앞까지 군이 들어와 있어서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북위군과 영동군이 새로 임시 진영을 꾸린 곳에는 반가운 사람들도 도착해 있었다.
남궁진휘와 일행이 합류해 있었던 것이다.
“진화야!”
“내 동생--!”
“형님, 누님!”
남궁진휘와 진혜가 진화를 마중 나와 있었다.
남궁진혜가 진화를 귀 끝이 빨개질 때까지 부둥켜안고 남궁진휘가 그런 진화를 구해 주는 척 다시 끌어안았다.
“누가 보면 한 십 년 동안 헤어졌다 만나는 가족인 줄 알겠네.”
“…….”
“키워 놔 봐야 소용없다고, 저 부단주 새끼 싹수 노란 건 처음부터 알았지.”
“부단주가 중요한가? 난 저놈들 숙부다. 저 버릇없는 놈들. 소가주까지 저럴 줄은 몰랐군.”
남궁구의 투덜거림에 남궁교명이 입을 꾹 다무는 동안, 남궁진혜의 상관과 남궁세가 웃어른이 남매 상봉을 몹시 고까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 * *
무림인들을 위해 따로 주어진 막사에서 정사연합 부군사인 남궁진휘와 각 무단의 단주들이 자리했다.
진화가 검마제에게 들은 말이 주요 안건이었다.
“저는 검마제의 말이 사실일 거라 생각합니다. 떠올려 보면 제가 부수긴 했지만 그곳은 분명 역천비지였고, 계획상 수오가 혼현마제를 챙겨 갔을 겁니다.”
“감시하던 백매단원에게 이상한 것을 느꼈다는 보고는 없었지 않나?”
“알 수 없지. 혼현마제는 제갈가주의 코앞에서 수십 년을 속이고 있을 정도로 연기가 감쪽같으니까.”
진화의 말에 당시 함께 계획을 진행한 적호단주와 청룡단주가 말을 보탰다.
하지만 진화가 검마제의 말을 믿는 데에는 당시의 정황보다 검마제 자체에 있었다.
“검마제는 그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혼란을 주려는 의도라면? 자신을 대신해서 수오의 뒤를 쫓게 만들려고 거짓을 말한 걸 수도 있지 않나?”
진화의 말에 흑살대주가 반론을 들었다.
하지만 남궁진휘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숙청단주의 말처럼 검마제가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지?”
제 의견이 단칼에 묵살되자 흑살대주의 반문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남궁진휘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시죠. 우리 측 현경 고수를 포함해서 십이좌회 어른들마저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상대입니다. 놈이 도망가고자 한다면 우리 전력이 얼마가 되었든 놈을 쫓을 수 없었을 겁니다. 누구보다 검마제가 그걸 잘 알았겠죠.”
이유는 실력 차였다.
남궁진휘가 ‘진화’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측 현경 고수’라고 한 것도 실력 차이를 꼬집기 위해서였다.
남궁진휘의 말에 흑살대주도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정사군사부에서도 혼현마제의 죽음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군사부에서도?”
남궁진휘의 말에 청룡단주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들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예. 적호단주가 발견했을 때 시체는 이미 부패가 진행되었을 정도로 죽은 지 시일이 지난 듯 보였는데, 그런 상태에서는 그 정도 수준의 환영술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군사부와 술사들의 생각입니다. 게다가 적호단의 상황에 따라 환술이 달라졌다면, 혼현마제가 근처에 있었을 거라는 것이 술사들의 의견이었습니다.”
“혼현마제가 아니라 다른 술사가 있을 가능성은?”
“없진 않습니다. 다만 적호단 전체를 밤새 속이고 마지막에 동굴까지 파괴할 만한 술사는 혼현마제 수준뿐이라고 하더군요. 혼현마제 수준이라니…… 그런 술사가 또 있을 리 없죠. 하여 군사부에서도 혼현마제의 발견 시점 상태나 죽은 시점에 대한 상세히 보고하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혼현마제가 언제, 어떻게 역천대법을 성공시켰는지는 차차 군사부에서 연구해 볼 사안입니다. 우리는 군사부의 판단과 여러 정황 그리고 검마제의 말을 종합하여, 혼현마제가 ‘수오’라는 제자의 몸으로 살아남은 것으로 가정하고 놈을 찾도록 합시다.”
남궁진휘의 결론에 더 이상 반론은 없었다.
“다행히 혼현마제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고 있고 독기가 다른 남은 길을 모두 끊어 버렸으니, 우리가 뭘 해야 할지는 다들 아시겠죠? 놈을 찾는 것도 시간문제일 겁니다.”
“…….”
반론이 아니라 다른 말도 없었다.
대체 다른 뭘 알아야 하는 걸까.
앞으로의 일은 아주 간단하다는 듯한 남궁진휘의 말에 진화를 비롯한 무단주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뭐가 시간문제라는 거지?
-젠장, 똑똑한 놈들은 이래서 문제야.
적호단주의 전음에 답하는 이는 흑살대주뿐이었다.
다만 진화와 남궁현도 남궁진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시선을 아래로 깔고 있었다.
* * *
남궁진휘가 진화를 데리고 움직였다.
정확하게는 진화를 앞세웠다.
“후후후후, 좋구나. 황자님을 앞세우니 군문에 닫힌 문 없이 죄다 길을 비켜서니.”
“……제가 오기 전에 뭔가 불편한 일이 있으셨습니까?”
“으음, 아니야. 그냥…… 권력자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기분이 좋달까. 후후후.”
남궁진혜가 음흉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웃음소리를 흘리는 남궁진휘를 보며, 진화는 그가 오기 전에 남궁진휘에게 뭔가 불편한 일이 있었을 거라 확신했다.
그 확신은 북위군의 지휘부 막사에 도착했을 때에 사실로 드러났다.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안에 위장군은?”
“계십니다.”
부장의 인사와 함께 진화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뒤쪽에서 남궁진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저도 들어가도 됩니까? 신분패나 증명서, 기타 관계 서류 구비는 필요 없나요? 안 그래도 무림세가 나부랭이의 청룡패로는 안 된다 하시어 정사연합에 신청해 놓았는데.”
“크흠, 일전에는 절차상 양해 부탁드립니다.”
“호오, 절차요……. 후후후, 괜찮습니다. 군문의 절차라 하시니 무림세가 나부랭이가 양해까지 할 필요야.”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뭘요. 황자님도 같이 오셨으니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후후후후.”
남궁진휘는 끝까지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저를 기다리는 진화에게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안에서도 막사 앞에서의 소란을 듣고 있었던 건지, 위장군 원수경이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진화와 남궁진휘를 맞이했다.
“허허허, 그래. 이번 전쟁에 무림과 우리 군이 협력할 방도가 있다고 했다지?”
“신 제국이 무엇을 노릴지 알고 있습니다.”
“신 제국이 무엇을 노릴지 안다?”
남궁진휘의 말에 위장군 원수경이 눈을 빛냈다.
가볍게 되묻는 말투와 달리 대장군이 뿜어내는 기세가 남궁진휘를 향했다.
물론 기세로 압박하며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해 줄 남궁진휘가 아니었다.
“군부에서 그들을 맞상대해 주시면 그동안 무림은 뱀 사냥을 할까 합니다.”
“우리가 놈들을 맞상대하지 않으면?”
답을 주지 않는 남궁진휘의 모습에 위장군이 어깃장을 한번 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위장군의 의도는 통하지 않았다.
애석하지만 남궁진휘는 어깃장의 전문가들 밑에서 구르고 구른 인물이었다.
“한 제국군의 군략에 따르면, 북위군과 영동군, 남해군은 이곳에서 오래오래 신 제국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놓고 있어야 하지 않나요? 이번 일이 그 절호의 기회일 거라 확신합니다.”
“무림의 뱀 사냥에 제국군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이번 일로 한 제국군이 놈들의 앞을 막는다면, 놈들은 장안보다 이곳에 군을 증원할 가능성이 큽니다.”
“……증원군이라.”
결국 한 제국군의 군략을 파악한 남궁진휘의 말에 위장군이 먼저 넘어갔다.
신 제국군을 오래 붙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증원군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면, 장안을 얻는 것은 물론 예정보다 북위군의 공로가 더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형님, 뱀 사냥에 군사들이 필요한 겁니까?”
진화가 이번 작전에 대해 처음 듣는 양 남궁진휘에게 물었다.
“그런 것이라면 제게 말씀하셔도 되는데요.”
진화의 손에는 백만 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황룡금패, 그러니까 위장군의 지휘권을 단번에 가져올 수 있는 그 황룡금패가 들려 있었다.
“이런 진화야, 의선께서 말씀하시길 세상에는 과로사(過勞死)라는 것이 있다더구나. 그러니 그 무서운 건 어서 넣어 주겠니?”
남궁진휘가 학을 떼듯 진화의 손에 들린 황룡금패를 물렸다.
그 모습을 보며 위장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설득이 아니라 협박을 하러 온 건가? 아니, 황룡금패를 거절하는 건 진짜 같은데…… 대체 뭐지?’
위장군이 남궁진휘와 진화의 의도를 고민했다.
하지만 그들이 설득을 하러 왔든, 협박을 하러 왔든, 그게 무엇이든 황룡금패는 확실히 통했다.
“정사연합 군사의 고견을 청하지.”
“군략이 아닌 무림의 지략이 필요한 순간이군요.”
이럴 것까지 예상했던 걸까.
위장군의 말에 남궁진휘가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
진화는 어느새 황룡금패를 집어넣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둘을 보고 있었다.
위장군은 이황자가 어쩌면 조정의 판단과 사뭇 다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