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이길 진(進) 바뀔 화(譁) : 비틀린 운명(3)
팔봉산.
박죽산 대봉을 내려와 여덟 개의 봉우리로 이어진 산으로, 특이하게 일곱 개의 작은 봉우리가 가장 큰 봉우리를 감싼 형국이라 그 군락을 모아 팔봉산(八峰山)이라 불렀다.
혼현마제와 일당이 숨은 곳이었다.
네 개의 봉우리는 검마제와 귀천성, 신 제국군이 둘러싸고 있었고, 세 개의 봉우리는 정사연합과 한 제국군이 에워쌌다.
양측은 서로를 견제하는 동시에 협력 아닌 협력을 하고 있었다.
모두 혼현마제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 * *
“찾았습니다!”
피가 흘러나왔다.
혼현마제가 설치해 둔 진법이 기의 흐름을 바꾸고 적의 심신은 가둘 수 있었지만, 물리적으로 흘러나오는 피까지 막을 순 없었다.
그것을 송마문 학사들이 발견한 것이다.
“포분하라!”
파-앗! 팟! 팟! 팟!
뿌연 가루가 곳곳에 흩어졌다.
송마문주의 명과 함께 학사들이 혼현마제의 옥혼진을 깨기 시작했다.
“수기, 파기!”
펑! 펑! 펑!
학사들의 손에 맺힌 수인이 쏘아져 나가 가루들을 깨뜨리자 진법 속에 숨어 있던 현홍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던 수신방 무사들이 익숙한 듯 현홍사를 잘라 냈다.
이번 임무에서 부쩍 가까워진 두 문주의 관계만큼이나 두 문파의 협력 작업도 속도를 더해 갔다.
채---앵!
마지막 현홍사까지 잘려 나가고, 옥혼진에 갇혀 있던 안쪽 상황이 드러났다.
“흡!”
“크흣!”
“저, 저기!”
시체가 썩으면서 만들어진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동시에, 조각조각 흩어진 신체의 일부들, 그 안에서 줄줄이 늘어진 내장과 형태를 알 수 없는 장기들 그리고 반쯤 잘린 머리에서 흐른 허연 뇌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짐승처럼 해쳐진 시체들.
너무할 정도로 잔인한 광경 앞에, 죽음과 시체가 익숙한 귀천성 무인들마저 할 말을 잃었다.
“혼현마제가 할 법한 짓이군.”
“바닥을 보시게.”
“바닥?”
다른 무사들처럼 혼현마제의 흔적 앞에 인상을 찌푸리던 수신방주가 홀로 심각한 송마문주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송마문주가 바닥을 가리켰다.
모두가 지독한 냄새와 잔인한 광경에 주의를 빼앗긴 동안, 송마문주는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바닥이 젖은 것은 피 때문이지. 그런데 흙 속에 스며 들어간 것을 감안하더라도 피의 흔적이 모자라네.”
“피가 모자라다? 그렇다면!”
수신방주의 눈이 커졌다.
그도 송마문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혼현마제가 힘을 회복하고 있네.”
“젠장! 벌써……!”
송마문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수신방주가 낭패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혼현마제가 여기에 숨었다는 것을 알아냈으니, 일단 돌아가지.”
“그러다가 혼현마제가 도망친다면?”
“여덟 봉우리 전체에 진법을 설치할 수는 없네. 그리고 놈은…… 혈정을 흡수하고 있지.”
“당분간 혼현마제가 이곳에서 우릴 사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사방이 포위당해서 온전치 않은 몸으로는 뚫어 내지 못할 테고. 혼현마제도 그걸 알고 있으니, 이대로 무모하게 도망치는 것보단 하루라도 빨리 몸을 회복하는 쪽을 택할 것이네.”
송마문주의 판단을 들은 수신방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검마제 님께 보고하고 놈이 완전히 힘을 찾기 전에 움직이지.”
수신방주와 송마문주가 마음처럼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송마문주와 수신방주가 검마제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하지만 그들의 다급함과 달리 검마제는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검마제는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 듯했다.
“검마제 님……?”
송마문주와 수신방주가 의아한 듯 검마제를 불렀다.
애초에 혼현마제가 새로운 몸에 적응을 마치고 힘을 모두 되찾기 전에 죽여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 검마제였지 않은가.
그때, 조용하던 검마제가 송마문주를 꿰뚫을 듯한 눈빛으로 보았다.
“우리 쪽에 가깝다곤 하지만 우리가 산을 점령한 것도 아니고. 정사연합 놈들이 우리보다 최소 이틀은 먼저 도착했는데, 옥혼진이 있다는 걸 몰랐을까?”
“……!”
검마제의 날카로운 질문에 송마문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일전에도 정사연합 놈들이 나와 독마제의 뒤를 노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또 그럴 가능성은?”
“……송구합니다.”
송마문주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이번에도 정사연합이 뒤를 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인 동시에 미처 그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다.
‘검마제 님이 아니었다면 놈의 미끼로 쓰일 뻔했군.’
송마문주가 티 나지 않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송마문주를 보며, 검마제가 방금 전과 달리 덤덤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마학선생.”
“예, 검마제 님.”
“혼현마제를 잡고 정사연합을 상대할 계책을 말하라.”
송마문주를 재촉하는 명인 동시에 여전히 송마문주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에 송마문주가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정사연합이 그들의 뒤를 노릴 경우를 대비하여 답했다.
“놈들의 계책을 역이용하여, 이번에는 우리가 놈들을 미끼로 쓸 것입니다.”
송마문주가 고개 숙인 아래로 살기를 흘리며 말했다.
* * *
한편.
송마문주가 정사연합을 미끼로 쓰기 위해 뭔가 애를 쓰기도 전에 진화와 남궁진휘 일행과 적호단, 청룡단, 흑살대가 빠르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정사연합의 움직임은 귀천성 무인들이 산에서 잠시 물러나기도 전에 결정된 것이었다.
적호단주가 급하게 귀천성 무인들의 소식을 알려 왔을 때였다.
“귀천성 놈들이 옥혼진을 깨뜨렸다! 팔봉 중에 세 번째 봉이다.”
“좋습니다! 지금 바로 가죠!”
남궁진휘가 반색하며 벌떡 일어섰다.
적극적인 남궁진휘의 모습에 되레 당황한 건 적호단주를 비롯한 무단주들이었다.
“음? 바로? ……이번에도 귀천성과 검마제를 이용하지 않고?”
떨떠름한 적호단주의 물음에 남궁진휘의 눈매가 대번에 가늘게 변했다.
“도대체 절 어떻게 보신 겁니까?”
“…….”
‘음흉한 놈.’
‘제갈 같은 놈.’
‘적이라면 뼈도 발라 먹을 놈?’
모두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한가득 있는 얼굴들이었지만 누구 하나 선뜻 답하지 못했다.
남궁진휘 때문이 아니라 그 옆에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무단주들을 보고 있는 남궁진화 때문이었다.
‘저놈이 저런 눈깔로 귀천성 놈들을 도륙 냈지.’
흑살대주가 슬쩍 진화의 눈을 피했다.
남궁진휘가 무단주들의 모습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복수는 우리 손으로 직접 해야지요.”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인 듯 무단주들의 눈이 커졌다.
“예상되는 희생이 너무 크거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해야 할 싸움을 피할 정도는 아닙니다. 혼현마제의 손에 직간접적으로 죽은 이들이 지난 전쟁부터 헤아리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처음부터 혼현마제의 목만큼은 다른 놈들의 손에 맡길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섰고요.”
남궁진휘의 시선이 진화를 향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무단주들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처럼 깊고 검은 눈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해한 척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며 청룡단주와 흑살대주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적호단주의 감회가 남달랐다.
‘많이 달라졌군.’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호단주는 알 수 있었다.
저 무해한 척하는 검은 눈이 이제야 ‘남궁이 아닌’ 것들에도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큰 변화인지.
처음 저를 보았을 때에 무슨 신기한 물건을 보는 듯 무정했던 시선을 떠올리며 적호단주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귀천성 놈들이 겁을 먹고 쫄았습니다. 당분간 뒤로 물러서 있을 테니, 서두르시지요.”
“좋아!”
“가-자!”
남궁진휘의 말에 적호단주와 흑살대주가 우렁찬 목소리로 기합을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청룡단주 역시 검을 챙겨 일어섰다.
무단주들이 씩씩하게 막사를 나가고 그 뒤를 따라 나가며, 남궁진휘가 진화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당연한 듯 자신을 따르는 진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화야, 뱀 사냥의 대미는 대장 땅군이 단숨에 뱀 머리를 누르는 것이란다.”
“맡겨 주십시오.”
남궁진휘의 따뜻한 시선을 마주하며 진화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궁진휘가 진화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진화야, 혹여 네가 다칠 것 같거든 놈을 그냥 놓아주렴.”
이게 진짜 남궁진휘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의 계산은 틀림이 없을 것이나, 세상에 있을지도 모를 만의 하나의 일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혹여나 말이다. 네가…….”
남궁진휘의 말에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가 제 어깨에 있는 남궁진휘의 손 위에 손을 포갰다.
“형님,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남궁을 해쳤던 건 그게 무엇이든 세상에서 치워 버릴 것입니다.”
“……그래.”
평소와 달리 단호한 진화의 말에 남궁진휘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현마제를 잡을 대장 땅꾼.
정사연합 무인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승리를 굳히기 위해선 진화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
남궁진휘조차 그렇게 판단하고 진화에게 맡긴 일이니, 이제는 정말로 진화를 믿고 물러서야 했다.
‘그런데 왜, 남궁을 ‘해쳤던’이라고 한 거지?’
남궁진휘가 막사를 나가는 진화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정사연합 무인들이 빠르게 팔봉산 세 번째 봉우리를 에워싸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맥이 한 번 매듭지어진 듯.
팔봉산은 일곱 개 봉우리가 대봉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진 곳이었다.
그중 세 번째 봉우리는 귀천성의 영역과 조금 더 가까운 동시에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길이 한쪽밖에 없었다. 뒤쪽으로는 주강이 흐르는 절벽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방해가 없군.”
“뒤통수를 두 번이나 맞을까 봐 겁을 먹은 게 맞는 모양이야.”
“앞에서 길이 갈라진다. 일행을 나누지.”
적호단주와 흑살대주, 청룡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진화 일행과 남궁진휘 일행이 곧장 산꼭대기로 향하고, 적호단과 흑살대, 청룡단은 산 중턱에서 흩어지면 산을 포위해서 올라가기로 했다.
“가자.”
남궁진휘의 말과 함께 진화를 비롯한 일행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반다경 정도 경공을 펼치며 산을 올랐을까.
“잠깐.”
심상치 않은 기운의 흐름에 진화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느냐?”
“앞에…… 기운의 흐름이 이상합니다.”
진화가 무학사나 진법술사는 아니었지만, 현경에 이르고 난 뒤로는 기운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시각적으로 확인을 한다기보다 기감이 눈으로 보듯 생생해지는 것이었다.
진화의 감각에는 일행이 앞으로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성벽보다 크고 단단한 성벽이 서 있었다.
“혼현마제가 앞에 뭔가 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
진화의 말에 남궁진휘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덩달아 일행도 긴장감을 높이며 주변을 경계했다.
“뭔가 느낌이 쎄-해. 예전에 옥혼진인가 뭔가 그거에 당했을 때랑 비슷한데, 그게 동굴이 아니라 그 전의 것 같단 말이지.”
남궁진혜의 말에 남궁진휘와 진화가 귀를 기울였다.
기감에 관한 거라면 본능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민한 남궁진혜였으니 그녀의 말을 허투루 흘릴 수 없었다.
“동굴이 아니라 그 전이라면, 네가 옥혼진에 갇혔던 때를 말하는 거냐?”
“느낌이 그래.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어.”
남궁진혜의 말에 남궁진휘가 생각이 많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때.
쉐에에에엑-! 휙! 휙! 휙!
어떤 낌새도 없이 갑자기, 일행의 앞쪽에서 매서운 검기와 단검이 날아들었다.
파지지지지직--!
놀란 일행 앞으로 푸른 번개로 된 막이 서면서 검기와 단검들을 모두 막아 냈다.
“진화야!”
“앞에.”
남궁진혜가 진화를 돌아보는데, 진화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휘휘휘휘휘휙---!
앞에서 또다시 단검과 표창이 쏟아졌다.
챙! 챙챙-!
이번에는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일행이 날아드는 공격을 쳐 냈다.
“젠장, 오라버니, 이제 어쩔 거야?”
남궁진혜가 남궁진휘에게 물었다.
하지만 남궁진휘도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이대로 이곳에 있다간 계속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해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니 앞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현마제의 옥혼진 속에 들어가는 형국이니.
남궁진휘의 고심이 깊어질 즈음, 일행의 뒤쪽에서 거대한 번개가 쏘아졌다.
파파파파파파팟---!
눈앞에서 눈부시도록 푸른 불꽃이 쉴 새 없이 튀었다.
“진화야?”
“진법을 푸는 방법은 모르겠지만, 그냥 부수는 거라면…….”
파파파파파팟--!
퍼----엉!
진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행의 정면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기운의 여파가 퍼졌다.
“읏!”
강력한 기운의 여파에 몇몇 이들이 단단히 몸을 버티면서도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기운의 여파가 일행을 치고 사라진 후.
“뭐, 뭐야?”
황당한 일행은 그들보다 더 당황한 얼굴을 한 수십 명의 적과 마주할 수 있었다.
“형님, 저는 안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뭐?”
“저 안에 혼현마제가 있는 것 같거든요. 뱀의 머리부터 눌러야지요. 이곳은 맡기겠습니다.”
남궁진휘를 향해 한번 씨익 웃은 진화가 발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수십 명의 적을 뛰어넘어 앞으로 사라졌다.
“진화야!”
이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남궁진휘나 진혜에게 적을 맡기고 자리를 옮기는 일 따위.
하지만 지금의 진화는 기꺼이 그들에게 뒤를 맡기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뒤에서 당황한 남궁진휘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진화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보지 못했다.
진화의 눈앞에 보일 듯 생생하게, 옥혼진이라는 거대한 굴속에 숨은 혼현마제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기 숨었군.”
진화가 단숨에 혼현마제의 앞에 섰다.
그때까지도 커다란 바위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혼현마제가 고개를 들어 진화를 보았다.
“그렇군. 역시 네놈이었어. 네놈이 광마제 구훤의 운명을 이었구나!”
수오의 모습을 한 혼현마제가 붉게 물든 눈으로 진화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