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이길 진(進) 바뀔 화(譁) : 비틀린 운명(5)
파파파파팟----!
푸른 뇌전이 사방으로 번뜩이며 거미줄처럼 사방을 감싸고 있던 현홍사를 부쉈다.
눈부신 은빛 비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숨는다고 소용없다.”
진화의 눈이, 시야를 가리는 빛 속에 숨은 혼현마제를 정확하게 찾았다.
“고작 현홍사를 부순 것으로 의기양양할 것 없다!”
혼현마제는 곧바로 두 팔을 움직여 은빛 비처럼 떨어지던 현홍사를 거둬들였다.
“소용없다고 말을 했는데도…….”
진화가 덤덤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이전 생에 진화의 수련은 체질을 이겨 내는 데에 있었다.
온몸에서 부딪히는 기운의 혼돈을 이겨 내고 어떻게 하면 내공을 순행할 수 있을까.
혼돈에서 발생된 뇌전을 어떻게 하면 잠재울 수 있을까.
역천지체의 뒤바뀐 몸을 어떻게 하면 무공의 움직임에 거슬리지 않도록 적응시킬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진화는 성공했다.
무림인들의 기준으로 진화는 갓 마흔을 넘길 즈음 절대고수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경지를 밟았으니 말이다.
진화는 천뢰제왕검법의 격한 움직임을 견딜 수 있도록 근육을 단련했고, 다행히 혼돈지체는 찢어지고 다친 신체를 회복하는 것이 빨랐다.
철저하게 몸 안의 뇌기와 기운의 혼돈을 무시하고 단련한 내공은 깨달음을 통해 중단전을 여는 것으로 하단전의 부족함을 메꾸었다.
싸우는 내내 전투로 인한 부상보다 무공을 펼치다 다치는 일이 많았고 고통도 컸지만, 당시의 진화는 그 고통을 마땅한 벌이라 생각했다.
저로 인해 죽어 가는 남궁세가 무인들에 대한 천벌.
‘지독한 열등감과 스스로 세운 마음의 벽에 갇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였지! 진짜 남궁세가가 망가져 가는 것조차 모르고 마지막엔 소중한 가족마저 지키지 못한 바보천치!’
진화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노력이 부족하진 않았지만 바보 같은 방향이었음을 이제는 알았다.
지금의 진화는 현경을 밟았다.
이전 생에선 꿈도 꿔 보지 못한 경지였다.
이전 생에도 화경을 밟았지만, 오히려 자신의 한계만 확실하게 깨달았으니까.
그런 현경을 고작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올라섰다.
세상의 순리에서 벗어난 존재라 생각했던 자신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진화의 세계가 달라진 것이다.
진화는 이전과 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훨씬 거대하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진화가 ‘고작’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결코 ‘고작’이 아니었다.
바람은 구름을 따라 불지만, 기운의 흐름은 그것과 달랐다.
불고 있는 바람 안에도 음과 양의 기운이 존재하고 그들 나름대로 순환하고 있었다.
진화가 보는 것은 세상의 모든 기운이었다.
쉐에에에에엑----!
카—앙!
휘이이이이익---!
진화는 자신을 향해 매섭게 달려드는 붉은 현홍사의 회오리를 보며 검을 휘둘렀다.
이전의 진화가 혼현마제의 손안에서 회오리치는 현홍사밖에 보지 못했다면, 지금의 진화는 현홍사의 회오리 속에서 음과 양으로 흐르는 혼현마제의 기운을 보았다.
샤아아아아아----!
진화의 검에 맞아 튕겨 나간 현홍사가 다시 혼현마제의 손안에서 뭉쳤다.
붉은 혼현마제의 기운이 현홍사를 뭉치고 회전시키며 다시 더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었다.
그것은 곧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 강력하게 진화를 향해 날아들었다.
진화의 눈에 푸른 번개가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천뢰제왕검법 낙엽-!
화살처럼 쏘아진 푸른 뇌전이 붉은 회오리를 과녁처럼 명중시켰다.
파지지지직---!
먼저 음과 양의 고리가 부서지고.
펑! 펑! 펑!
그다음은 뇌전에 담긴 음과 양의 기운이 흩어진 혼현마제의 기운들과 부딪혔다.
그리고 마지막엔.
파파파파파팟---!
진화의 뇌전이 모든 것을 태워 버렸다.
“이놈-!”
혼현마제의 손에서 다시 현홍사가 쏟아졌다.
빛보다 빠르고 바람이 지나갈 틈조차 없을 정도로 촘촘했지만, 진화에겐 그것들의 움직임이 눈으로 보이는 듯 훤히 느껴졌다.
“발버둥 치기도 전에 죽여 주마!”
파파파파팟-!
진화가 섬전십삼검뢰 붕격우산의 연속기를 펼치며 춤을 추는 듯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의천검을 휘두를 때마다 푸르고, 붉고, 환한 색색의 번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저, 저……!”
혼현마제가 당황한 듯 진화를 보았다.
‘단신으로 광마제를 죽였다고 했던가! 광마제가 방심한 순간 당했다고 생각했거늘……!’
변명이었다.
천하를 무력만으로 몰아붙이던 세 명의 마제 중 하나였다.
요행이든, 방심이든, 그 무엇이든, 단신으로 광마제를 죽였다면 그것만으로 인정했어야 했다.
저 약관도 되지 못한 애송이가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되었다고!
혼현마제는 그 변화(變化)를 인정하지 못해서 진화의 활약을 깎아내렸지만, 결국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사실 앞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소용없다 하지 않았더냐.”
진화의 눈이 환술 속에 숨은 혼현마제를 찾았다.
어느 순간 혼현마제는 현홍사를 움직여 제 모습을 가렸지만 진화에게는 처음부터 소용없는 일이었다.
“눈을 현혹하는 화려하기만 한 공격도, 기운의 흐름을 흐려서 그 속에 숨는 얄팍한 수작도, 네 어떤 것도 소용없다.”
진화의 눈에 푸른 섬광이 스치고, 동시에 의천검이 한쪽 풀숲을 일자로 갈랐다.
쉐에에엑---!
파스스스슷! 쿠-웅!
풀숲이 스러지고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그 위에서 혼현마제가 뛰어내리며 진화를 향해 현홍사를 쏘았다.
“이대로 당하지 않는다!”
파팟-!
은빛 실선을 따라 내려오던 현홍사가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느다란 거울처럼 빛을 반짝이며 시야를 어지럽힌 현홍사 덕에 진화의 눈동자엔 혼현마제와 방금의 공격이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채-앵! 챙! 챙!
투두두두둑. 투두둑.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소용없다 하지 않았던가.
진화의 검이 보이지 않는 현홍사를 베어 떨어뜨리고 사라진 혼현마제의 기운을 흐트러뜨렸다.
“이런!”
혼현마제가 다급하게 진화의 검기를 피했다.
‘망할! 망할! 망할 자식들!’
참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혼현마제의 환술은 상대의 악몽을 파고들며 전장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흔들리는 정신을 파고들어 조종하는 등 전쟁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현마제에 대한 평가가 역천마제, 광마제, 검마제에 비해 모자란 것은, 현경을 넘어 본질을 보기 시작한 이들에게 혼현마제의 환술은 그저 빛나는 현홍사로 벌이는 손장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 잠깐!”
혼현마제가 다급하게 몸을 날리며 진화에게 말을 걸었다.
저를 위해 스스로 독이 되어 죽은 독마제에 비하면 비굴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진화는 혼현마제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죽어라!”
저 알량한 눈속임이 남궁세가를 무너뜨렸다.
제왕검과 남궁가주를 쓰러뜨린 해독제가 없던 독은 독마제의 것이었고, 그들을 중독시킨 남궁세가 내부의 첩자나 반란을 일으킨 남궁도를 도운 것은 혼현마제였다.
남궁세가와 잠삼현을 지옥으로 만든 건 광마제였지만, 그 모든 사달은 혼현마제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떤 기회도 주지 않겠다! 죽을 때까지 베어 주마!’
쉐에에에엑---!
제왕무적검법 백악회토(百惡灰討)-!
쉑! 챙! 쉑! 쉑! 챙! 쉑!
“커헉! 컥!”
백 번이 넘는 검이 혼현마제를 베었다.
어떤 것은 막았고 어떤 것은 막지 못했지만, 막지 못한 하나하나가 모두 치명적이었다.
“헉. 헉. 헉. 허허…….”
숨을 몰아쉬던 혼현마제가 허탈한 듯 웃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미리 현홍사로 된 보호의를 입고 있던 덕에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곧 출혈로 쓰러질 듯 보였다.
“내가, 이러려고…… 허허! 그냥, 평화롭게 살아갈 내 땅, 나만의…….”
빛이 사라져 가는 눈이 허망하게 피투성이가 된 제 몸을 향했다.
혼현마제는 비참한 제 모습을 둘러보며 한탄을 뱉어 냈다.
하지만 그조차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쉐에에에엑---!
채-앵!
혼현마제는 제 앞으로 날아드는 검기를 마지막 현홍사를 끌어모아 막았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진화가 제 앞에 다가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닥쳐. 어떤 말도 남기지 말고 죽어라.”
서늘한 말과 함께 진화가 의천검으로 뇌전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런 진화를 보며 혼현마제의 눈빛도 차갑게 식어 갔다.
툭.
“…….”
진화에게 밀려난 혼현마제는 제 발끝 뒤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쏴아아아아---!
발아래, 절벽처럼 가파른 산꼭대기의 아래는 세찬 물소리가 들리는 검은 강이었다.
혼현마제가 검은 강과 진화의 검은 눈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어떤 결심을 굳힌 듯 눈빛이 결연해졌다.
“소용없는 짓이다.”
진화의 말과 동시에 혼현마제의 눈이 커졌다.
의천검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혼현마제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그리고 그가 발의 방향을 강으로 바꾸는 순간, 땅 밑에서 번개가 솟아올랐다.
천뢰제왕검법 무수전뢰-!
콰과광---콰—광!
“크아아아아아----!”
땅 밑에서 솟아오른 뇌전이 혼현마제를 통과하며, 혼현마제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콰광! 쾅! 쾅! 쾅!
번---뜩!
무수전뢰가 통과한 혼현마제가 채 쓰러지기도 전에, 천뢰제왕검법 천뢰우전이 연달아 떨어졌다.
하나둘도 아닌 수십 개의 벼락이 떨어지자, 혼현마제의 살이 타고 뼈가 드러나고 결국에는 형체만 남은 검은 재가 바닥에 쓰러졌다.
콰과광-----콰앙!
쓰러진 혼현마제의 위로 마지막 천뢰우전이 떨어졌다.
혼현마제의 시체가 형체도 없이 흩어졌다.
동시에.
콰드드득, 쿠—웅!
혼현마제가 있던 꼭대기의 바위 바닥이 그대로 쪼개져 나갔다.
풍-----덩!
펑! 펑!
검은 강물로 커다란 바위들이 떨어지고, 밑에 있는지도 몰랐던 배들이 불을 밝히고 물러서기 바빴다.
그리고 혼현마제가 누웠었던 가장 큰 바윗덩어리는…….
앞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콰광-! 쾅! 쾅!
혼현마제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바위마저 굉음을 내며 산을 굴러떨어지자, 진화가 조금 후련한 얼굴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씨발, 뭐야!”
“……!”
익숙한 적호단주의 고함에, 진화는 모르는 척 남궁진휘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산 아래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의 존재가 진화의 발길을 붙잡았다.
* * *
“튀----어!”
옥혼진이 사라지자마자 순식간에 바윗덩어리가 굴러떨어졌다.
그것에 놀란 적호단주가 고함을 지르고, 적호단원들이 양쪽으로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남궁진화 이 새끼, 혼현마제 잡으라고 보냈더니 산을 잡은 거야, 뭐야!”
적호단주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쪼개진 산꼭대기를 보았다.
다른 적호단원들도 심장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내고 환영과 싸우면서 살아남았는데, 적호단원들은 설마 산사태에 쓸려 죽을 뻔할 줄은 생각도 못 한 얼굴들이었다.
그런 중에 일 조 조장 서장원이 조용히 적호단주를 불렀다.
“단주님, 저기…….”
“왜? 뭐! 또 다른 거 굴러와?”
“예, 불청객들이 굴러들어 올 것 같은데요.”
“뭐?”
서장원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린 적호단주가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저 새끼들은……!”
적호단주가 귀천성 무인들을 보다가 검마제를 발견하고 뒤로 물러섰다.
적호단원들이 잔뜩 경계 태세를 굳히고 적호단주의 곁으로 모였다.
“……아쉽게 되었군.”
검마제가 적호단주 쪽을 보며 말했다.
정확하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적호단주와 적호단이 있는 곳보다 더 뒤쪽, 무서운 기세로 내려오고 있는 진화였다.
“어쨌든 서로 목적한 바는 달성한 것 같으니, 이곳에서 멈추도록 하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검마제는 옥혼진이 흐려지는 순간 꼭대기에서 일어난 일을 보았다.
혼현마제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그의 존재감도 완전히 사라진 지금, 이대로 남궁진화와 검을 맞대는 것은 그에게 이롭지 못했다.
“물러난다.”
“존명.”
검마제의 명에 송마문주와 수신방주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검마제의 뒤를 따라 귀천성 무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진화야!”
“단주!”
진화가 적호단주의 곁에 선 뒤로, 남궁진휘와 일행이 도착했다.
“너 이 새끼, 꼭대기에서 바위, 네가 밀었냐?”
“왜 우리 진화한테 그래요!”
긴장감이 맴돌던 곳에는 어느새 유쾌한 소란이 자리했다.
산을 내려오며.
검마제의 명에 순순히 물러나긴 했지만 송마문주는 지금 기회가 조금 아까웠다.
“왜 물러나신 겁니까? 이 기회에 정사연합의 신진고수들을 죽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요.”
송마문주의 물음에 검마제가 슬쩍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흑살대와 청룡단이 우리의 뒤로 움직였다.”
“……!”
“남궁진휘, 남궁세가의 애송이가 제법이더구나.”
“…….”
검마제의 말에 송마문주가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혼현마제는 남궁진화에게 어떤 타격도 입히지 못했을 것이다. 환술 따위 현경의 고수 앞에선 그저 허상에 불과할 뿐이니, 결국 그렇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겠지. 정말로…… 시대가 달라졌구나.”
흥미롭다는 듯, 혹은 아쉽다는 듯.
나지막하게 들리는 검마제의 말이 길게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