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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382)화 (382/425)

남궁마제

놀랄 진(唇) 불 화(火) : 넘어지는 순간(2)

장안.

왕조가 달라질 때마다 지명도 자주 바뀌었지만,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항상 같았다.

황제의 도시.

왕조와 제국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중원에서 가장 번성한 군사력과 기반 시설을 갖춘 도시로, 서역과 북방, 중원 천하를 연결하는 교역의 도시이자 문화의 도시였다.

결국 가장 부유하고 안전한 도시였다는 말이다.

광마제와 광룡귀면대의 침탈로 그 많던 인구가 죽거나 흩어지고 폐허나 다름없이 변했지만, 금세 다시 기력을 회복 중이었다.

광마제가 죽은 후에도 장안성은 여전히 귀천성 무인들의 손에 있었지만, 그들은 광마제와 달리 교역과 교류를 막지 않고 장안의 회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귀천성 무인들이야말로 진심으로 장안의 회복을 바랐다.

황제의 도시라는 명성답게 따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통행료나 교역료가 쏠쏠하게 들어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이런저런 명목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었다.

“젠장. 여기에 우리 적세방의 주루가 들어오면 딱 좋았는데. 쩝.”

적세방주 화강군 원길이 성안의 풍경을 보며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보고 사천팔귀라 불리는 네 명의 사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근본도 없는 장사치가……!”

“쉿.”

사천팔귀 중 미상, 미승 형제 중 동생 미승이 불만을 터뜨리자 미상이 급하게 동생의 입을 막았다.

“근본 없는 장사치이긴 하지만 수완이 좋은 자지. 적세방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으니 괜한 분란 만들지 마라.”

미상이 목소리를 낮추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다른 사천팔귀 경후창의 심기를 건드렸다.

“적세방이고 뭐고, 지금 겁을 먹은 것이오? 아니, 우리 사천팔귀가 언제부터 저런 놈들 눈치를 봤다고!”

“스읍. 어디 큰형님한테 눈을 부라리느냐!”

“아니, 운필 형님…….”

“어허!”

사천팔귀의 경후창이 버럭 하자 이번에는 운필이 그를 다그쳤다.

그들을 지켜보던 미상이 다른 세 명을 모았다.

“장안은 역천마제 님이 ‘반드시 막아 내라’고 하실 정도로 특별하게 생각하는 곳이다. 하후대장군과 옥허신검, 성승까지, 십이좌회에서 세 사람이 왔다. 정사연합 놈들에게도 이곳이 특별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형제가 공을 세우고 나면…….”

꿀꺽.

“공, 공을 세우고 나면?”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귀천성 제일 세가! 그걸 황제의 도시에 만드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오오!”

미상의 말에 미승과 경후창, 운필이 눈을 반짝였다.

혈연이 연결되었든 아니든, 그들은 사천 뒷골목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금까지 온 형제였다.

변변한 사부도 없이 타고난 무재와 협동심으로 귀천성 지휘부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들 스스로 일가를 이루는 것뿐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기고 나면, 적세방 놈들이 주루를 세우든 말든 우리는 이곳에 세가를 세운다.”

“예, 형님!”

미상의 말에 세 동생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한편.

적세방과 사천팔귀가 최근에 빈자리를 꿰차고 귀천성 지휘부에 올랐다면, 폭수문주 백골수 곡해와 서장마군 서율경은 이전 전쟁 때부터 역천마제의 휘하에서 활약해 온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저마다 욕망을 불태우는 적세방주 원길과 사천팔귀의 모습은 걱정스럽거나 가소롭게 비쳤다.

“이런이런, 애송이들이 이제까지 잔챙이들만 상대하다 보니 십이좌회 고수들마저 우습게 보고 있군.”

탈속한 노도인 같은 모습을 한 폭수문주가 적세방주 원길과 사천팔귀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자들이다.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서장마군은 보다 더 단호하고 냉정하게 그들의 미래를 단정했다.

하지만 그의 예언은 폭수문주도 동의하는 바였다.

오랜 경험에 비추어 상대의 실력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자들의 말로는 대개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그나저나 검마제 님과 송마문주, 수신방주가 오고 있다더군. 검마제 님과 함께 나서서 독마제와 혼현마제를 죽이는 데에 공을 세웠다지? 적어도 저놈들보다는 신중하고 시기를 볼 줄 알더군. 진짜 위험한 애송이들은 이쪽이지.”

“송마문주 머리가 좋다. 하지만 괜찮다. 송마문주는 약하다. 학사들도 약하다. 위협이 아니다. 하지만 수신방주는…… 제법, 괜찮았다.”

“허허허! 자네 입에서 그런 평가가 나오다니, 그자들이 인물은 인물인 모양이군.”

무공에 있어서 평가가 냉혹한 서장마군의 인정에 폭수문주가 의외라는 듯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서장마군의 평가를 부정하진 않았다.

“검마제 님까지 오고 계시네. 이참에 우리야말로 남은 마제들의 자리에 올라야 하지 않겠나?”

“문제없다. 우리 자리다.”

우리 자리.

폭수문주와 서장마군이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혼현마제와 독마제, 진국의 상황이 예상보다 빨리 정리되자, 누구보다 당황스러운 건 장안 공략에 나선 이들이었다.

적호군을 이끄는 하후대장군과 정사연합을 이끄는 성승 각오, 옥허신검 청연이 허탈한 표정으로 탁자에 마주 앉았다.

“그 미친 개노무 새끼들. 꼬리에 불이 붙은 것도 아니고 뭔 일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해?”

“진짜 번개 쓰는 아해가 있잖아. 제왕검 손자 놈.”

성승과 옥허신검이 답답한 마음에 그 원흉들을 탓했다.

“그놈은 손주 놈들이 하나같이 생지랄 같은 것들이더만. 그게 다 업보야, 업보!”

“그게 다 업보면, 또 시주 단지 털어먹은 네놈은 대체 무슨 업보를 쌓는 게냐?”

“아, 그 얘기가 왜 여기서 나와?”

“따지고 보면 이 생고생이 다 네놈 업보인가 했지.”

“뭐야, 이놈아?”

마음이 맞은 지 한 합도 지나지 않아서 성승과 옥허신검이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그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며 하후대장군이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어, 참. 등을 떠민다고 떠밀려서 공략에 나설 수도 없고…… 허어!”

첫날, 기세등등하게 장안 성문을 깨부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성벽을 뛰어넘을 듯 굴던 것과 달리 적호군과 정사연합은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시도조차 망설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우리끼리라도 넘어가 버리면 좋은데…….”

“우리가 성을 뛰어넘어도 문제야. 성벽이 겹겹으로 된 구조라, 자칫하다간 그 안에 갇혀서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어.”

“아서게. 아까운 젊은 놈들 명줄을 그렇게 허무하게 재촉하면 죽을 때 하늘은 어찌 보고 죽겠어.”

“후우…….”

누군지 모를 사람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후대장군과 성승, 옥허신검이 차일피일 장안성 공약을 미룬 이유였다.

장안성은 튼튼하다 못해 거대하고 위압적인 외벽을 넘어 안쪽으로도 이중, 삼중으로 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외벽과 두 번째 벽이 다리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외벽을 지나 두 번째 성벽을 통과하려면 마치 방에 갇힌 듯한 구조를 피할 길이 없었다.

애초부터 외세의 침략 시에 외벽을 통과한 적을 좁은 공간에 고립시키고 성벽 위에서 몰살시키기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귀천성 무인들과 신 제국 병사들은 노골적으로 좁은 공간 바로 위에 있는 병력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본부에서 지원을 보낸다고 했으니 그쪽을 믿어 봐야지.”

“제왕검의 손자부터 적호단과 청룡단, 흑살대를 고스란히 보낼 것 같더군.”

“놈들 쪽에서 지원군이 올라오고 있을 걸세. 그놈들보다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후대장군이 걱정스럽다는 듯 장안성을 보았다.

* * *

신 제국과 귀천성 측에 지원이 도착했다.

하후대장군의 우려대로 검마제와 송마문, 수신방 무인들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대규모 군사 증원은 없었지만, 검마제 백천흠의 등장만으로도 귀천성 무인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장안성에 있던 귀천성 무인들이 검마제를 마중 나왔다.

“검마제 님!”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수고 많으셨습니다.”

“계속 대치 중인 터라 변화는 없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귀천성 무인들의 설명에 검마제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검마제의 뒤를 곧바로 적세방주 원길과 사천팔귀가 차지했다.

함께 지원 온 송마문주와 수신방주는 아랑곳하지 않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허!”

수신방주 장배경이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송마문주는 그 옆에서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곁으로 느긋하게 물러서 있던 폭수문주 곡해가 다가왔다.

“허허허, 혈기가 왕성한 자들이 아닌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폭수문주님. 격조하였습니다.”

송마문주와 수신방주가 폭수문주 곡해를 보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공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태도에 폭수문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다들 바쁜 처지가 아닌가. 그래, 진국에서는 제법 바빴다지? 정사연합의 애송이들은 상대할 만하던가?”

비꼬는 건지, 그저 묻는 것인지.

속을 알 수 없는 폭수문주의 얼굴을 살피며 송마문주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함께 있던 서장마군이 끼어들었다.

“창천화룡이 광마제 님을 죽였다. 그의 무공은 어땠나?”

폭수문주와 달리 서장마군의 질문은 이해하기 쉽고 숨겨진 뜻이라는 것도 없이 단순했다.

그에 송마문주는 조금 더 편한 쪽을 상대하기로 했다.

“예. 마군 님이나 수신방주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면 상대하기 어려운 자였습니다.”

“……그렇군.”

송마문주의 말에 서장마군이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섰다.

서장마군은 자신과 수신방주를 함께 거론한 것이 거슬린 듯했지만, 폭수문주는 몹시 흥미로운 눈빛으로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안으로 들지.”

폭수문주가 웃으며 안으로 자리를 옮기길 권하고, 서장마군이 제일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폭수문주와 서장마군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송마문주와 수신방주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텃세가 만만치 않겠군.

-상관없을 것이네. 다음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면 기세가 누그러질 테니까.

송마문주의 답에 수신방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정말, 패배해도 되는 건가?

-저자들이 전투를 패배해도,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것이네.

송마문주가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을 번뜩였다.

* * *

다행스럽게도.

검마제와 일행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화와 일행도 적호군 막사에 도착했다.

“적호군. 적호군이라…… 이름이 비슷하니까 막 친근감이 돋는군. 마음에 들어!”

남궁진혜가 기분 좋게 말하며 적호단을 이끌고 제일 먼저 안으로 들었다.

청룡단과 흑살대가 그 뒤를 따랐다.

북위군과 달리 이전 전쟁에서도 정사연합과 합동 임무를 펼쳐 본 적호군은 무림인들을 환대하며 어색함 없이 안내했다.

“여어-! 뚱뚱땡중!”

“땡중! 우리 안 보고 싶었어?”

“구! 교명!”

현오가 두툼한 팔을 흔들며 달려왔다.

남궁구와 남궁교명, 팽가 형제, 당혜군, 나하연에 사패천 출신 강무련, 초서비, 이천평, 황청산, 군조 그리고 외유 나가 있는 제갈상과 관서겸까지.

현오가 다가오자 진화를 비롯한 숙청단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땡중, 너 몸은 괜찮아? 성승께 끌려왔다며?”

“또 시주 단지를 털다니. 대체 학습 능력이라곤 없는 거냐?”

“다친 곳은 없나?”

걱정과 구박이 섞인 질문이 현오에게 쏟아졌다.

현오는 내심 기분이 좋은 듯하면서도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니, 그게…… 시주 단지의 만두는 내가 먹었는데, 다른 고기는 사백조님이 드신 거라고! 암.”

현오는 억울한 듯 사실관계를 바로잡았지만, 그걸 들은 일행의 표정엔 황당함이 가득했다.

“……어떤 대답을 기대했던 건지.”

“소림의 앞날이 깜깜하군.”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남궁교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행의 눈앞에 뭔가가 번쩍거렸으니.

“저들이 소림의 금동백팔나한인가?”

“들었던 것보다 더 눈부시군.”

금동나한들은 처음 보는 사패천 일행이 감탄하는 사이, 눈부신 소림의 미래들이 수련을 마치고 막사로 복귀했다.

“네놈들도 온 것이냐?”

“사부님!”

“각우 사부님을 뵙습니다!”

“진국에서 대단했다 들었다. 수고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각우의 모습에 정의무학관 출신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각우는 여전했다.

여전히 반질반질하고 터질 듯한 근육을 유지하고 있었고, 칭찬도 엄한 얼굴로 덤덤하게 했다.

그리고 현오에게 눈을 부라리는 것도.

“현오, 네 이놈! 또 수련을 빠져!”

“아앗! 사, 사부! 아니, 나는 금동나한도 아니잖아요!”

“닥치거라! 감히 시주 단지를 훔쳐 먹는 썩은 정신머리를 고쳐 주마!”

“아아악! 왜 나만 그래요! 사백조님도 같이했잖아요!”

“허어-!”

“강약약강의 전형! 강자무죄, 약자유죄! 이건 핍박입니다-!”

“말이 많구나!”

각우가 현오의 뒷덜미를 잡고 데려갔다.

그 모습을 본 진화와 일행은 현오가 누구의 손에 끌려왔는지 이제야 진실을 확인한 느낌이었다.

“아 참, 네 녀석들도! 여기서 엉뚱한 짓 하면 전부 혼날 줄 알아! 진화 네놈은 또 전장에서 맹하게 있지 말고!”

현오를 가뿐하게 한 팔로 들고 가던 각우가 길을 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팔뚝을 보이며 협박을 하고, 진화를 향해 주의를 주는 것도 여전했다.

“아니, 우리가 아직도 관도생인 줄 아시나.”

각우의 협박 아닌 협박에 남궁구가 툴툴대긴 했지만 실제로 기분이 나빠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우가 정의무학관 관도생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그 과정에 진짜 제자들을 잃고 슬퍼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일행이다.

오랜만의 애정 어린 잔소리에 몇몇은 그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화 또한 현경에 오른 뒤에 듣는 잔소리가 익숙하진 않았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휘부 막사 안에는, 남궁진휘가 하후대장군과 성승, 옥허신검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군사가 필요하신 듯하여 총군사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제갈길현 놈이 우리 대가리가 나빠서 장안 공략을 못 했다고 지껄이더냐?”

“하하하하하, 성승께선 같은 말을 재밌게 하시는군요.”

남궁진휘가 성승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저 성을 넘을 방법은 있고?”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

“다행히 방법이 없진 않습니다.”

남궁진휘가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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