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놀랄 진(唇) 불 화(火) : 넘어지는 순간(4)
화창하게 맑은 날씨.
솔직히 말하자면 장안은 늘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파랗고 여름에도 그리 덥지 않고 겨울에도 춥지 않아,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는 좋지 않았지만 상인과 유람가, 귀족과 황제에게는 살기 좋은 도시였다.
맑게 갠 시야에 장안성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겁먹은 군사들의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좋아! 극락왕생시키기 딱 좋은 날이군.”
“……저 연옥에 떨어질 것들을?”
“에이, 저 잔챙이 같은 중생들이 무슨 잘못이 있나. 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음, 자비롭군.”
성승의 말에 옥허신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승의 뒤에는 각우와 금동백팔나한 그리고 현오가 있었고, 옥허신검 청연의 뒤에는 청수검 무현과 태극혜검대 검수들이 서 있었다.
그들 모두 성승과 옥허신검의 대화를 못 들은 척했다.
“아해야, 떨리지 않느냐?”
성승의 물음이 진화를 향했다.
진화는 그런 성승을 향해 되물었다.
“떨리십니까?”
무저갱처럼 까맣고 깊은 눈동자.
성승의 눈엔 그 깊은 곳에 자리한 분노와 복수심이 보였다.
아득한 정도로 넓고 검은 우주에 검게 내리치는 번개라니.
성승은 세상의 끝이 바로 저곳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름답고 또 위험한.
하지만 성승을 향한 진화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곧게, 누구보다 곧게 성승을 마주 보았다.
그제서야 성승의 눈에도 분노와 복수심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 빛이 보였다.
신념, 심지…… 남궁을 향한 지극한 애정.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성승은 다행이라는 말 대신 낮게 염불을 외었다.
그리고 진화를 보는 눈이 한결 다정해졌다.
“제왕검이 날로 삼키기에는 참 고운 아해로구나. 이왕 주워 온 거, 저것도 좀 예쁠 것이지. 에잉, 쯧!”
진화를 보던 성승의 눈이 현오에게 향했다.
아쉬운 듯 혀를 차긴 했지만, 나한들 사이에서 벙긋벙긋 웃고 있는 현오를 향한 눈에 애정이 가득했다.
그런 성승을 보며 진화의 입가가 조금 풀어졌다.
귀천성의 예상대로 일곱 개의 문 중 가장 중요한 이문과 삼문은 성승과 옥허신검이 맡았고, 그들과 가장 가까운 문에 진화가 있었다.
진화의 뒤에는 늘 그렇듯 남궁구와 남궁교명, 팽가 형제, 나하연, 당혜군이 있었고, 단단한 방패를 든 현무단이 있었다.
“창천화룡의 뇌전이 그렇게 대단하다지? 그럼 먼저 시작하지.”
성승의 말에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진화의 의천검이 성벽을 베었다.
천뢰제왕검법 현뢰일섬-!
퍼버벙! 펑! 펑! 펑! 퍼-엉!
장안성 일곱 개 외문에 벼락이 떨어지며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정사연합 무인들이 성문을 뚫고 성벽을 넘기 시작했다.
“가자-!”
* * *
바람이 일었다.
누군가 기운을 움직여 바닥의 흙먼지를 피워 올렸고, 성문들이 쪼개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병사들은 적들이 몰려오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평범한 군사들에게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소리로만 느껴지는 적들의 존재는 실로 공포스러웠다.
정사연합이 노린 것도 바로 이 공포였을 것이다.
“쏴라-! 쏴! 아끼지 말고 화살을 쏘라고!”
적세방주 원길이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그들을 지휘하는 비장은 따로 있었지만 적세방주 원길의 힘과 권위가 그것을 무시했다.
쉐에에엑--!
“크아아악!”
“윽!”
어디선가 날아든 나비 모양의 비편이 병사들의 목을 갈랐다.
채-앵!
적세방주 원길이 비편을 때려 반으로 갈라 버렸다.
“겁먹지 마라! 망설이지 마! 빌어먹을, 보인다고 맞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쏘라고!”
적세방주 원길이 주춤거리는 병사들을 재촉했다.
그는 어차피 다 죽어 버릴 소모품들이 죽기 전에 제 몫을 다하고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원길의 재촉에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피-잉!
탓. 탓. 탓. 탓.
첫 화살이 날아가고, 수십 수백의 손이 시위를 놓았다.
“너희들은 뭐 해? 던져!”
적세방주가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수하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서 검을 돌을 꺼낸 뒤, 불을 붙여 아래로 던졌다.
후두두두두두두-둑!
화살이 뭔가에 박혀 들고 불붙은 검은 돌이 그곳에 부딪혔다.
화살에 불이 붙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검은 연기도 점차 옅어졌다.
적세방도들은 물론 정신없이 화살을 쏘아 보내던 병사들도 활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방패였다.
무림인들은 방패 속에 숨어 보이지 않았고, 병사들이 쏜 화살은 모조리 방패에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방패를 본 병사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했다.
한 제국군의 방패와 달랐기 때문이다.
정확한 육각형에 검은색, 마치 거북의 등껍질과 같은, 정의맹 무단 중 유일하게 방패를 쓰는 현무단의 것이었다.
“현무단이 왜 여기 있지?”
적세방주가 눈을 크게 뜨며 얼굴을 찡그렸다.
의문은 품었지만,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있던 방패가 열렸다.
그리고 새파란 번개가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파지지지지지직----!
“무, 뭐야!”
적세방주 원길이 놀라 소리쳤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크아아아악!”
“아아악!”
적세방주 원길과 병사들이 당황한 사이, 번개가 이번에는 두 번째 벽에 있던 문을 향했다.
파파파파팟---!
콰-광!
튼튼하라고 박아 둔 철심을 따라 뇌전이 번뜩이고 마침내 문을 이루고 있던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적세방주 원길이 힘도 쓰지 못한 사이 첫 번째 문이 제일 먼저 열린 것이다.
“안 돼-!”
적세방주 원길이 부서진 문을 보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방패 속에서 누군가가 날아올랐다.
정확히는 누군가‘들’이었다.
쉐에에에에엑----!
“우아아아악!”
벽을 타고 올라선 남궁구가 병사들 사이를 돌풍처럼 헤집었다.
천풍검법은 혼란한 상황 특히 사방이 적들일 경우에 가장 효과적인 검법이었다.
“막아라-!”
적세방주 원길이 수하들에게 명했다.
하지만 수하들은 불을 붙인 검은 돌을 던져 보기도 전에 손이 잘려 나갔다.
“어림없지.”
남궁교명의 창궁대연검법은 거칠지만 빠르고 군더더기 없이 치명적이었다.
푸른 무복에 누가 보아도 남궁세가의 검을 펼치는 귀공자라, 적세방도들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하지만 적세방도들이 뒤로 물러서기도 전에 돌이 부서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퍼어억!
뻐어어어억-!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뇌화! 그분의 꽃잎 한 장이라도 상하는 날엔 용서하지 않겠다!”
“……이미 용서하지 않고 있지 않나?”
“팽신, 뒤!”
외성과 두 번째 벽을 잇는 다리 위.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오른쪽, 나하연과 팽가 형제가 왼쪽에서 병사와 무인 들을 죽이거나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사이 현무단원들이 안전하게 성벽을 올랐다.
“감히……!”
몰아치는 공격에 정신이 없었던 적세방주는 이제야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양 주먹에 쥔 불같은 기운을 현무단원들이 오르는 사다리로 날리려 했을 때엔, 이미 그의 앞에 새파란 뇌전이 번뜩이고 있었다.
“내 몫은 당신인가? 운이 좋지 않았군.”
진화가 덤덤한 얼굴로 적세방주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네놈은? 허어! 네놈이 그 창천화룡 남궁진화렷다!”
적세방주는 놀란 눈을 떴다가 진화를 알아보고 만면에 화색을 지었다.
“하하하! 아니, 나는 오늘 운이 좋구나! 어차피 성문은 포기한 거였어. 대신 내 앞에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나타났지 않느냐!”
적세방주 원길이 진화를 향해 탐욕스러운 눈빛을 번들거렸다.
진화는 그런 원길을 보며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날 말하는 거다, 내가 운이 없다고. 맛없는 사냥감이 걸렸으니까.”
쉐에에에엑---!
뇌전이 불이 붙은 듯 붉은 기운을 두른 적세방주 화강군 원길을 두 팔을 지났다.
“끄아아아악!”
적세방주가 크게 비명을 질렀다.
* * *
현무단주와 현무단이 창천화룡 남궁진화와 있다니.
그것만큼은 송마문주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그는 당연히 현무단주가 일곱 문 중 하나를 맡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설마 십만의 대군을 이끄는 대장군이 직접 문을 부수러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본인 빼고는.
퍼---억! 퍽! 퍽!
퍼----엉!
대여섯 번의 주먹질로 외벽 문을 부순 하후대장군이 함정 속으로 들어가 당당하게 웃어 보였다.
“으하하하하! 난 평범한 장군이 아니지. 내 밑에 있는 놈들도 평범한 장수들이 아니고!”
황소만큼 큰 덩치에 범처럼 사나운 눈빛, 커다란 창을 들고 온몸으로 내뿜는 기세에 신 제국군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쏴, 쏴라!”
비장의 말과 함께 병사들이 활을 쏘았다.
하지만 쏟아지는 화살은 하후대장군에게 닿기도 전에 종남파 무인들이 검으로 쳐 냈다.
캉! 캉! 캉!
제자들을 살리기 위해 비참하게 죽어 갔을 전 장문인과 현청대 동문들, 세가의 혈족들의 복수를 위해 종남파 무인들과 장안 무림 출신 무인들은 이를 악물었다.
장가, 종가, 면가, 견가를 제외한 다른 힘없는 세가들은 무인들을 보내지도 못했다.
그날 살아남은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여-!”
검을 회전시키며 화살을 튕겨 내는 무인들의 모습에 당황한 신 제국 비장이 병사들을 닦달했다.
병사들은 몰려드는 공포를 견디며 화살을 쏘았다.
그때.
“컥!”
“응?”
“크어어어…… 컥. 컥!”
한 병사, 아니 둘, 아니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입에 허연 거품을 뿜으며 쓰러졌다.
그들은 계속해서 허연 거품을 토하며 바닥을 뒹굴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왜, 왜?”
바로 옆 사람이 쓰러졌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이들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톱비늘살무사의 독이지. 독사들 중에서도 출혈과 괴사 없이 깔끔하게 뒤처리를 할 수 있어서 좋아.”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리고, 병사는 제 목을 붙잡은 채 다른 이들과 같은 모습으로 쓰러졌다.
“이, 이! 주, 죽어라-!”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비장이 검을 들고 당혜평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어디선가 날아든 매서운 칼날이 비장의 목을 갈랐다.
“시간 없으니 빨리 처리하지.”
호현기가 느긋한 당혜평을 재촉하며 외성과 두 번째 벽을 연결한 다리 위의 병사들을 죽여 나갔다.
반대편 다리에서는.
휙휙휙휙휙---!
챙! 챙! 챙!
갑자기 날아든 무언가가 빠르게 회전하면서 병사들의 활을 갈랐다.
“우앗!”
“앗!”
활을 놓친 병사들이 당황한 사이 제갈상이 빠르게 그들의 급소를 베며 지나갔다.
“이놈들-!”
비장이 소리를 지르며 제갈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검을 높이 치켜든 순간.
푸-욱!
회전하던 단창 두 개를 잡아 빠르게 연결한 관서겸이 비장의 가슴팍에 창을 꽂아 넣었다.
콰-앙! 콰앙! 콰-----앙!
병사들의 공격을 종남파를 비롯한 장안 무인들이 막는 사이, 하후대장군이 두 번째 벽에 있던 문을 부수었다.
해야 할 일을 마쳤으니 이제 좀 즐겨 볼 시간이었다.
“흐흐흐, 도망가려면 이미 늦었다!”
성문을 부순 하후대장군이 발을 한번 구르는 것으로 단숨에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잔뜩 겁에 질린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사천팔귀의 넷째 미승을 발견했다.
“겁을 먹고 쥐새끼처럼 숨었구나!”
“이, 이!”
미승이 놀라 도망치려 했다.
사천팔귀의 명성이 아무리 귀천성을 울린들, 그건 다른 형제들과 함께했을 때의 일이었다.
미승 혼자 십이좌회 중 일인인 하후대장군을 상대할 순 없었다.
“비, 비켜! 비켜!”
미승이 혼란한 병사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미 사냥감을 발견한 하후대장군이 그를 놓칠 리 없었으니.
“어딜 가느냐!”
퍼----엉!
“우아아악!”
하후대장군의 철혈장에 병사들이 나가떨어지고.
“젠장!”
미승이 쌍검을 휘둘러 제게 날아드는 병사들을 베어 버렸다.
미승의 행동으로 인해 겁을 먹은 병사들은 더 혼란스러워졌고, 그의 앞을 막아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놈! 아군을 베다니 이 사람 같지 않은 놈!”
악귀처럼 사납게 얼굴을 구긴 하후대장군이 미승을 향해 날아들었다.
단지 한 번 발을 굴렀을 뿐인데 그 큰 덩치가 미승의 코앞에 있었다.
“으아아아악---! 죽어!”
미승이 이성을 잃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퍼-억! 퍽!
검과 팔뚝이 맞닿아서 결코 나올 수 없는 소리가 났다.
당황한 미승이 고개를 들자, 하후대장군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퍼---억!
“커-억!”
하후대장군의 철혈장이 미승의 가슴을 부수고, 미승이 피를 토하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미승아--!”
미승의 모습을 본 다른 형제의 비명 같은 고함과 함께 미승의 몸이 바닥과 만났다.
쿠—웅!
“……컥! 커헉!”
움푹 파인 듯 함몰된 가슴과 머리에서 붉게 피가 흘러나왔다.
차례로 성문이 뚫리고, 가장 먼저 미승이 죽었다.
송마문주와 수신방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후대장군이라니, 내 예상이 빗나갔군.”
“자네가 모든 일을 꿰뚫을 순 없네.”
“어쨌든 미승이 죽었고, 희생이 내 예상보다 크군.”
“말했듯, 모든 것이 자네 뜻대로 될 순 없네.”
송마문주의 자책에 수신방주가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물론 이들 중 미승이나 병사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중요한 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두 번째 문, ‘목표’가 성승과 함께 있군.”
“움직이지.”
뒤에서 없는 듯 있던 송마문주와 수신방주가 두 번째 벽 뒤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 * *
세 번째 문.
“내 팔을 자르고 이십오 년 만인가?”
“이번엔 목을 잘라 주지.”
운명의 장난인지, 하늘이 안배인지.
옥허신검 청연은 그의 좌수를 자르고 명성을 얻은 검마제와 다시 한번 마주했다.
이십오 년 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때의 젊은 검수는 이제 옥허신검의 명성에도 뒤지지 않는 검마제가 되었고, 옥허신검 청연은 빼앗기던 입장에서 빼앗으러 온 입장이 되었다.
“그때 살려 준 목숨이나 더 아낄 것이지.”
“시간이 없으니, 가세.”
검마제가 무심하게 옥허신검을 노려보고, 옥허신검은 결연한 눈빛으로 검집을 버리고 검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