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벼락 진(震) 태울 화(火) : 재로 쌓아 올린 성(4)
황도, 낙양.
진화가 적호군의 호위를 받아 황도에 도착했다.
진화가 호위는 필요 없다며 사양했지만, 하후대장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남궁구와 남궁교명은 진화의 그림자 호위라도 된 듯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재촉에 가장 빠른 뱃길을 따라온 진화가 항구에 발을 딛자.
“동해왕 저하를 뵙습니다!”
항구에 나와 있던 사례교위 조정호와 사례군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평소에도 몇 번 마중을 나왔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와 격식이었다.
“혹시 폐하께서 도련님을 잡아 오라 하신 건 아니지?”
“글쎄…….”
남궁구의 질문에 진화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황궁에서 무림 일을 핑계로 도망친 전례가 있었거니와, 어쩐지 사례군에 포위된 느낌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눈앞에는 남궁세가의 꽃마차만큼이나 휘황찬란한 마차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어쩐지 끌려가는 느낌이군.’
진화가 씁쓸하게 웃었다.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이 모든 것에서 황제와 황후의 마음이 느껴져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황궁이 보였다.
하지만 그 전에.
“세워라! 어서!”
진화가 급하게 마차를 세우는 동시에 마차 문을 열었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정문 앞에 남궁경과 팽연화 부부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
진화가 마차에서 뛰어내려 남궁경, 팽연화에게 달려갔다.
“진화야!”
“아들!”
남궁경과 팽연화도 달려왔다.
남궁경과 팽연화는 진화를 보자마자 진화의 손을 잡고 얼굴을 매만졌다.
“아이고, 이 얼굴 상한 것 좀 봐라…….”
현경을 넘어선 고수의 최상으로 유지된 몸을 향해 남궁경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들, 이제 괜찮니?”
“예,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양주에서 자신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빨리 온 것인지.
진화는 촉촉한 눈으로 묻는 팽연화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팽연화는 진화가 괜찮다는 걸 눈으로 보고서야 진화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이제는 팽연화보다 훨씬 컸지만, 팽연화는 아주 어릴 적처럼 손으로 진화의 등을 쓸어내렸다.
진화를 다독이며 놀란 자신의 마음도 다독이는 듯했다.
곧 남궁경의 두툼한 팔이 그런 모자를 동시에 안아 왔다.
진화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귀가 뜨끈했지만,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려 꾸욱 참았다.
그렇게 조금 부담스럽지만 감사함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진화를 꽁꽁 둘러싸는 건 부모님이 끝이 아니었다.
건희전.
조정에 들러 황제에게 환궁을 고하기 전에 건희전을 향한 진화는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익숙하긴 하지만 결코 건희전에서 나서는 안 되는 냄새.
“무슨 탕약 냄새가 이렇게…… 헙!”
코를 찡긋거리며 두리번거리던 남궁구가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숨을 삼켰다.
“저어어어어하아아아--!”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던 동 태감이 진화를 부르며 달려왔다.
어디에 그렇게 있었는지, 곳곳에 쪼그려 있던 궁인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 동 태감, 이게 대체…….”
“의원에게 약재를 받아 와서 건희전 궁인들이 사흘 밤낮으로 달이고 있습니다. 저하께서 ‘또’ 실신을 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이 늙은이 심장이 다 내려앉았습니다. 폐하의 명으로 태의가 온갖 약재로 보신 처방을 내렸사온데, 어찌 건희전 궁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늙은 종과 건희전 궁인들이 사흘 밤낮으로 탕약을 달이고 있었사옵니다!”
동 태감이 피를 토하듯 열변을 토했다.
이렇게 보니 건희전 정원 곳곳에 쪼그려 앉아 있던 궁인들의 앞에는 한 사람당 탕약기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아…….”
진화의 눈엔 탕약 연기가 건희전을 꽁꽁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겨우 건희전에서 벗어난 진화가 대전 앞에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대전 안에서 조정의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폐하-! 동해왕 입시이옵니다!”
대전 앞에 있던 내관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진화가 안으로 들어갔다.
“동해왕 한진화, 폐하의 지엄하신 명을 받아 교주의 역도들을 토벌하고 장안성 수복에 미력하나마 조력한 후 무사히 돌아왔나이다. 모두 폐하의 은덕이라, 은혜가 하해와 같나이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진화의 말을 따라 대소 신료들이 만세를 제창했다.
전쟁에 이긴 것은 황제의 은덕과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았지만,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아부가 황실의 법도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들라. 얼굴 좀 보자꾸나.”
황제의 말에 진화가 고개를 들었다.
진화는 별생각 없이 황제와 눈을 마주쳤지만 대전 곳곳에서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까지 황제는 총애하는 황자와 공주에게도 다정한 말이나 애정을 직접적으로 표하지 않았다. 신료들이 황제의 말 한마디에 이리저리 파벌이 움직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정 회의에서 이황자를 아끼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다니, 이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폐하의 의중이 굳었군.’
‘무림인 출신이라니…… 우린 아무런 끈도 없지 않아?’
눈치를 보던 낙양 출신 문신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사이 하남조씨와 함께하는 지방 출신 호족들은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허어, 폐하의 의중이야 이미 굳어졌지. 대세도 이미 기울었고!’
‘군공이라니. 무인 출신이라 다른 황자들과는 확실히 달라서 다행이군.’
위가를 따르던 조정 무관들과 젊은 문신들도 진화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 진화의 귀 끝이 점점 붉어지자, 진화를 보고 있던 황제가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건강한 모습을 보니 참으로 다행이다. 큰일이 있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후의 걱정과 짐에 대한 원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 황자가 무사히 귀환하여 짐이 오히려 다행이로군. 하하하하하!”
“아, 하하하하하.”
황제가 농담 섞인 말을 하며 웃음을 터뜨리자, 신료들이 뒤늦게 따라 웃었다.
어색한 웃음소리에서도 불구하고 조정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장안을 되찾고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군공에 대해서는 조정을 거쳐 따로 치하할 것이니, 황자는 황후를 찾아 효를 다하라. 그리고 부모의 품에 돌아왔으니 그간 몸을 추슬러야 할 것이다.”
“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진화가 깊게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대전을 나왔다.
“하아…….”
고작 이것을 할 거면 왜 불렀나 싶었지만 남궁세가에도 있는 격식과 절차가 황실에서 중요하지 않을 리 없었으니. 정신적인 피곤함이 밀려와 한숨이 나왔지만 불평을 할 순 없었다.
대전을 나오는 진화에게 황제를 모시는 엄 태감이 슬쩍 말을 전했다.
“저하, 폐하께서 함께 황후궁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알겠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진화는 대전을 나와 후원에서 황제를 기다렸다.
진화의 알현이 오늘 회의의 마지막 안건이었던 듯, 진화가 나오고 얼마 뒤 조정이 일찍 파하였다.
신료들이 일시에 대전을 나오는 소리가 진화의 귀에 들렸다.
“폐하의 의중이 굳어지신 듯하지?”
“폐하의 의중은 이미 진즉에 굳히셨지. 제국에 하나밖에 없는 적통 황자시고,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는 것은 물론 전공까지 세우셨는데! 이제 등극식만 남은 거라고 봐야지.”
“우리 무신들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폐하도 그러셨지만, 윗전에서 실전에 나서는 무신들의 고충을 잘 알아주신다는 건 중요하니까.”
“위장군이나 북위군과도 잘 어울리셨다니 과거의 일이나 파벌에는 연연하지 않으시는 듯도 하고. 흐흐흐, 폐하는 일찍이 천장이라 불리셨는데 황자님은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뇌신이라 불리신다더군. 제국의 홍복이야.”
“벌써 아부하는가?”
“아이, 아부는 무슨. 사실이 그렇다고!”
조정에 있던 무신들의 목소리가 조심성 없이 컸다.
하지만 이어서 나온 문신들이라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또 쓰러지시다니!”
“아이고, 나도 겨우 정계가 개편되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했다니까!”
“나도 나도. 이황자님이라면 일황자님, 사황자님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으시니, 낙양 출신들이나 유림들도 차별 없이 대할 것이 아닌가. 삼황자보다는 훨씬 다행한 일이라 안심했는데, 쓰러지시다니. 나는 하도 불안해서 요번에 얻은 귀한 약재를 건희전으로 보냈네.”
한 신료의 말에 다른 신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재를? 거, 좋은 생각이네. 나도 태의에게 물어보고 좋다는 건 다 구해서 올려야겠네.”
“예끼, 이 사람아. 벌써 늦은 걸 수도 있어. 하남조씨는 물론이고 하후대장군부와 북위대장군부까지 나서서 중원에 좋다는 약재는 나 끌어모으고 있다네. 게다가 양주대부가 남궁세가 출신인 것도 잊었나? 청해상단이 뱃길로 그걸 다 나르고 있다는군.”
“버, 벌써? 아이고, 그래도 낙양은 우리가 꽉 잡고 있는데, 서역에서 온 것 중 귀한 것이 없다 찾아보세.”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진화와 가깝지 못해서 내심 불안했던 낙양 호족들은 기회를 잡은 듯 바쁘게 움직였다.
하남조씨와 가까운 이들은 친분을 내세우는 듯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고, 어찌 된 영문인지 하후대장군부와 북위대장군부까지 사병을 풀어 산천에서 보신에 좋다는 짐승들을 대대적으로 사냥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인 약재들이 모두 건희전을 둘러싼 그 탕약기로 향하거나 건희전 창고에 쌓이고 있었다.
“…….”
“흐흐흐, 걱정 마십시오. 안 그래도 약재만 보관할 약재 광을 새로 짓고 있습니다.”
동 태감이 약재 냄새 풀풀 풍기며 흐뭇하게 웃었다.
진화는 이제 대전 신료들까지 사방에서 저를 꽁꽁 둘러싼 느낌이었다.
“황자, 어찌 이리 수척한 것이냐, 아직 회복이 안 된 것이냐?”
눈물을 글썽이며 저를 끌어안는 황후를 만났을 때, 진화는 이미 지쳐 있었다.
* * *
진화가 황궁에서 온갖 산해진미와 귀한 약재들에 둘러싸이는 동안.
현오는 멀건 미음 하나를 해치우고 다시 침상에 누웠다.
“어그그,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구먼. 아이고, 부처님.”
현오가 입 밖으로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궁인들이 답할 리 없었다.
그들은 마치 살아 있기만 한 인형처럼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별궁 안에 존재하기만 했다.
‘……미치겠군.’
현오가 슬쩍 궁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입술을 질끈 감았다.
그는 실제로 어디 아픈 사람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붉어진 얼굴로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흡.”
코끝에 냄새가 스치자 현오가 숨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엔 현오도 모르게 새하얀 살결이 떠올랐다.
시큼한 땀 냄새와 함께 전해지는 혈향.
머릿속의 살결은 어느새 피투성이로 난자된 고깃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만두. 오향장육. 경장육사. 고기소면…….’
현오가 머릿속의 고깃덩어리를 지워 버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음식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오의 귀엔 사방에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울리고, 그의 눈엔 수그리고 있는 궁녀의 목에서 맥동하는 핏줄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해졌다.
굶으면 굶을수록 정신은 또렷해지고, 현오의 식탐에 눌려 있던 살의가 깨어났다.
‘역시 일부러 이러는 것이 분명하군. 천살성을 깨우기 위해 저 사람들을 계속 집어넣고 있어. 문제는 그게 통한다는 거지만! 으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제발, 빨리 뭐라도 찾아서 이동해야 할 텐데!’
짧게 불경을 외는 것으로 통하지 않자, 현오는 손목에 걸린 염주를 피가 날 듯 세게 쥐었다.
조용한 현오의 방을 보며 송마문주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법 오래 견디는군. 그래 봐야 소용없을 텐데. 나날이 감각이 예민해질 터이니, 내일은 상처를 입은 궁인을 넣어 보거라.”
“예.”
송마문주의 명에 방 앞을 지키던 내관이 마치 황족에게 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송마문주는 황궁에서 역천마제에게 궁을 하사받은 측근 중 하나로, 황궁 내에서는 암묵적으로 검마제를 비롯하여 궁을 하사받은 측근들을 황족이나 제후처럼 대우하고 있었다.
현오를 확인한 송마문주가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송마문 학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천문에 맞는 비문을 풀었다고?”
“예. 모산파의 귀법술사들이 혈월이 뜨는 곳은 곧 해가 지는 곳이라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해가 떨어지는 지점이 역천비지의 용루가 모이는 곳이라…….”
“그곳이 대법을 실행할 장소가 되겠군.”
송마문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수고했다. 조금만 더 애쓰면 대가는 충분히 주어질 것이라 전하거라.”
“예, 문주님.”
송마문주는 현오의 관리를 손수 할 정도로 역천대법을 성공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역천마제는 모든 것을 낙관하고 있었지만, 신 제국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안성에서의 패배가 예상을 넘어선 피해를 남겼다는 것도 문제지만, 교주 지역을 포함하여 곡창지대 여러 곳을 잃음으로써 식량 사정이 악화되었다.
식량 사정이 좋지 못하면 군사들을 모으거나 훈련을 시킬 수 없다.
무엇보다 국경의 검문을 강화하여 폐쇄적인 정책을 펴 식량까지 부족해지면, 호족들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호족으로 이뤄진 나라에서 이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믿을 건 역천마제 님의 힘밖에 없다. 역천대법을 성공시켜서 한 제국을 무너뜨리는 수밖에 없어.’
송마문주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정사연합 놈들이 우리가 찾는 역천비지를 알게 되면 곤란하다. 수신방에서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놈들이 우리 송마문을 찾고 있다 하니…… 송마문을 이용해 놈들을 밖으로 끌어내야겠군.’
송마문주가 결심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