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다스릴 화(話) : 제국의 분노(4)
출사를 한 사내들이 꿈꾸는 것이 입신과 출세라면, 채인의 첩지를 받아 후궁전에 든 여인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채인이 되었다는 건 그저 후궁전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라, 궁궐에 있는 수많은 궁녀들보다 시작이 조금 나을 뿐이었다.
결국 모두 ‘궁인’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승은을 입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황제의 승은을 입고 정말로 황제의 여인이 되어 첩지를 받는다면 궁 안에 별채를 가지고 궁인들을 부릴 수 있었다.
거기에 황자나 공주라도 낳는다면, 고관과 다름없는 직책을 받고 권세를 누리가 될 것이었다.
‘혹시 황자를 낳아 황좌에 올린다면, 그땐 천하를 발아래 둘 것이라!’
고관대작 집안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란 여인들이 젊고 아름다운 용모를 앞세워 간택례에 참여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본인의 야심이든, 가문의 바람이든.
황후의 배경이 만만치 않았지만, 당금 황제는 아직 정정하고 황후는 지금까지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잉태 소식이 없었으니. 간택례에 참여하는 여인들과 가문들이 기대하는 바도 이해는 갔다.
그렇다면 후궁 경합에 정말로 욕심을 내는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건 당연하게도 다음 황태자 위에 유력한 이황자 한진화일 것이다.
간택례가 있은 후.
건희전을 살피는 눈이 이전보다 배는 늘어났으며 각자 선을 댄 궁인이며 신료 들이 끊임없이 건희전의 빈틈을 찾기 위해 안달이었다.
적통 황자이자 군공까지 있는 진화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약점은 법도에 미약하고 무림의 무뢰배들과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진화의 곁에서 두문불출하는 남궁구와 남궁교명 대신 남궁진혜에게 시비가 많이 몰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 * *
탕-!
진화가 건희전 응접실 문을 열고 나가자, 동 태감과 궁인들은 물론 그 앞에 선 일련의 병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
진화는 그들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저, 저하.”
동 태감이 곤란한 표정으로 진화를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덤덤한 시선.
하지만 깊고 검은 눈이 서늘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
동 태감의 눈썹이 팔자를 그리며 울상이 되었다.
보통 진화가 저런 눈을 할 때는, 연못을 뛰어넘어 황자를 울리거나 혹은 황궁의 전각을 내려앉히거나 혹은 황궁 후원을 망치는 등등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진화의 등장에 동 태감의 앞에 선 군사들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주뼛주뼛 서로 눈치를 보는 와중에 제일 앞에 있던 장수 하나가 눈동자를 굴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동 태감의 날벼락 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어허! 감히! 저하께서 고개를 들라 허락지 않으셨다!”
진화는 동 태감의 호통을 제지하지 않았다.
감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지 마라!
진화는 동 태감의 입을 통해 눈앞의 이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 송구하옵니다. 소, 소장은 금호위 비장 저수명이옵니다. 일전에 황궁 안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조사차 들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라? 소상히 말하라.”
“그, 그것이…… 무림인 중 하나가 초간택에 통과한 수인들을 희롱했다는 고발이 들어와서…….”
진화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이 또한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내 휘하의 무인이 초간택이나 통과한 수인을 희롱했다? 고발자는 누구인가?”
“고, 고발자는 수인의 오라비인 저조명입니다…….”
비장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진화의 입꼬리가 작게 비틀렸다.
“희롱당했다고 한 수인의 오라비가 저조명이고 그자가 대신 고발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의 성이 그대와 같구나. 우연인가?”
“그, 그것이…….”
황궁 안에, 그것도 한 사건 안에 언급된 저씨가 무려 셋이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인가.
진화의 눈이 한층 더 싸늘하게 식었다.
“고발이 들어갔다고 했으니 묻지. 목격자들의 조사는 끝이 났나? 그때, 건희전 궁인이 내 휘하 무인을 안내했을 터인데. 동 태감?”
진화의 부름에 동 태감이 기다렸다는 듯 읍소했다.
“당시 염 내관이 단주님을 안내했습니다.”
“그래. 염 내관은 조사에 임했던가?”
“아니옵니다, 저하. 소인은 금시초문이옵니다.”
염 내관이 병사들을 노려보며 당당하게 답했다.
그와 동시에.
사아아아아아--.
순식간에 서늘한 무언가가 저수명과 병사들을 둘러쌌다.
저수명과 병사들은 뭔가 그들의 오금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요즘 황궁 경계를 강화한답시고 금호위라는 것이 생겼다지? 고관대작과 무관의 자제들이 한데 뭉쳐 꽤 기세가 좋다고 들었다만…… 그런데 그게 감히 내 손님을 조사할 권한을 가진 건가?”
“그럴 리가요! 감히 금호위 따위가 어찌 이황자전을 조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진화의 말에 화답하듯 동 태감이 목소리를 높여 답했다.
그러자 당황한 저수명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수, 수인은 채인과 마찬가지입니다. 저자가 감히 황제 폐하의 여인에게 함부로 접근한 것은 사실이라…… 윽!”
저수명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저수명의 오금에 천금 같은 무게가 내려앉았다.
저수명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수인은 수인일 뿐. 아직 정식 첩지도 받지 않은 이들이 감히 폐하의 여인을 자처하는 건가?”
“하…… 윽.”
억울할 만한 일이었다.
초간택에 통과한 이들은 후궁전에 들어가는 것이 황궁의 관례상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진화는 저수명이 말을 꺼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저들은 폐하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입시한 건희전 휘하의 무인이다. 감히 황궁의 손님도 되지 못한 수인 따위가 그 앞을 막아서선 안 된다는 말이다.”
진화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박은 저수명의 머리 위에서 덤덤하게 말했다.
“금호위는 황궁의 법도에 맞게 이 일을 다시 처리하라. 만약 다시 한번 법도에 어긋난 처신으로 무례를 범한다면, 그때는 내 직접 금호위의 존폐를 문제 삼을 것이니!”
진화의 온몸에서 서릿발처럼 차가운 기세가 흘러나왔다.
고귀한 자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엄숙한 위엄을 만들어 내며 저수명과 병사들의 고개를 짓눌렀다.
“……며, 명을 받드옵니다.”
저수명과 병사들이 겨우 소리를 내어 답했다.
하지만 진화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문시랑이라…… 그대의 가문도 기억해 두지.”
진화의 말에 저수명의 눈이 커졌다.
아비가 시킨 일이고 그걸 자신이나 이황자도 모르지 않았다.
으레 벌어지는 수 싸움이 아닌가.
그러나 저수명은 특별한 이유 없이 집안을 핍박할 순 없다는 걸 아는데도 진화의 목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시, 실례가 있었습니다. 이만 물러나옵니다.”
저수명과 금호위 병사들이 도망치듯 건희전을 나갔다.
결국 말 몇 마디로 끝날 별것도 아닌 소란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건희전 안으로 들어가는 진화의 뒤를 따르며 남궁구와 남궁교명, 적호단주는 어쩐지 김이 샌 듯한 얼굴이었다.
단, 동 태감만은 달랐다.
동 태감은 순진한 소년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진화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오호호호! 법도, 법도라니! 황자님께서 법도에 따라 아랫것들을 처결하시다니요! 노신, 감개가 무량합니다!”
동 태감은 감격에 젖은 눈으로 진화를 칭찬했다.
“법도에 대해서 따로 공부하신 적이 없는데 이런 건 어찌 다 아셨을까요, 호호호! 아니, 이리 잘하시면서 그동안은 왜 그러신 겁니까? 네? 네?”
동 태감이 촐싹맞게 발걸음을 종종거리며 답을 재촉했다.
기분 좋은 그 얼굴에 콧소리까지 섞이자, 결국 견디다 못한 진화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편하니까.”
“……예?”
진호의 답을 들은 동 태감은 퍼뜩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궁구와 남궁교명, 적호단주는 진화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아, 확실히.”
“일일이 말 상대를 하느니 한번 제대로 겁주는 게 편하지.”
“손가락을 꺾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둥이를 못 놀리게 턱주가리를 날려 버렸어야 했어.”
남궁구, 남궁교명, 적호단주의 말에 동 태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니까 저 말은.’
논리적, 상식적, 권위적으로 상대를 누르는 것보다, 전각을 부수고 화원을 뒤집고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이 더 편해서 그랬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 이……황자님!”
동 태감이 역팔자 눈썹에 도끼눈을 뜨고 이미 안으로 들어간 진화를 쫓아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진화의 경고가 황문시랑의 귀에 들어갔다.
별것 아닌 일에 이황자의 경고가 들어오자 황문시랑이 몹시 뜨끔했다는 말이 돌고, 이후 건희전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궁인의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 * *
양청현.
구우우우우---.
전서구가 정사연합 본부로 들어갔다.
중원 천하를 하루 만에 오간다는 남궁세가의 매응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방금 날아든 전서구도 다른 전서구와 비교하자면 몸집이 크고 깃털과 부리, 발톱 관리가 상당히 훌륭했다.
황궁에서 온 전서구였다.
“하하, 녀석. 일부러 매응을 보내지 않은 게 분명하구나.”
전서구에서 전서를 확인하던 남궁진휘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 제국 조정에서 온 전서구였지만 남궁진휘는 이게 누구의 뜻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나저나 천수현인 어르신이 역정을 내시겠는걸. 우리 진화도 제법이야. 하하하.”
남궁진휘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궁진휘에게 전서를 받아 든 천수현인의 반응은 남궁진휘의 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뭐? ……누가 뭘 어쩐다고?”
“남궁진화를 총사령관으로 한 제국 조정에서 본격적인 신 제국 정벌에 나선다고 합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천수현인의 물음에 남궁진휘가 또박또박 전서의 내용을 요약해 주었다.
결국 천수현인의 입에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허! 제 친우를 찾으려고 신 제국을 밀어 버리겠다니! 이런 미친놈을 봤나!”
천수현인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조정의 결정입니다. 폐하에게 미친 자라니요.”
“닥쳐! 지금 황제를 움직인 미친놈을 몰라서 그러는 게야?”
“글쎄요, 하하하하.”
“후후후후.”
능청을 떠는 남궁진휘의 모습을 천수현인이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는데, 한쪽에서 홍랑대부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갈가주 역시 이미 예상했던 일인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이미 적호단주조차 한번 경고를 한 일이었다.
얌전한 얼굴로 말수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이제껏 남궁진화가 벌인 일 중에 평범한 일이 있었던가.
순한 얼굴과 달리 성질머리도 보통이 아닌지라, 이제까지 적이란 적은 죄다 머리통을 날려 버리거나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으니.
적호단주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군사들 역시 어떤 방법으로든 진화가 움직이리라 예상했었다.
다만 진화의 움직임이 군사들이 예상한 규모를 아득히 넘어섰을 뿐.
“허! 참. 신 제국 자체를 밀어 버리려 할 줄이야…….”
천수현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찬 듯 몇 번이고 혼잣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한 제국이 움직인다면 정사연합의 계획도 달라져야 했으니.
“총연합 회의를 소집해야겠다. 귀천성 놈들 벼랑 끝으로 밀어 버리려 한다면 놈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안건은 다음 귀천성 움직임에 대한 대비책이다!”
천수현인이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진휘가 묘하게 미소를 흘렸다.
“그것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흐흐, 그래, 이 여우 같은 놈아. 한 제국이 진짜로 신 제국을 민다면, 우리도 놈들과 끝장을 봐야지…… 흐흐흐, 마침 현학문과 의선문에서 천문을 찾았다. 제갈가주가 천문에 따른 풍수와 지형도 추려 냈으니. 그야말로 제국이 준 기회로구나! 흐흐흐흐!”
천수현인이 제갈가주에게 슬쩍 눈짓을 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자랑스럽다, 잘했다 등등 낯간지러운 칭찬 한 번 한 적이 없었지만, 천수현인이 얼마나 기쁘고 들떴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얼른 전해라! 사천 무림과 호남, 호북 놈들이 엉덩이에 불붙은 양 뛰어오겠구나. 늙은 놈들 심장도 벌떡벌떡할 것이다. 하하하하하!”
마침내 끝이 보였다.
오랫동안 작은 씨앗을 심고 정성껏 키워 낸 다음 세대들이 모두 기대만큼 성장하여 그 결실을 거둘 때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놈, 그놈이야말로 하늘이 내려 준 천운이었던 게야.’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웠던 마제들과의 싸움에 절대적인 우위에 서게 된 것.
뒤로 물러서 웅크리고 있던 거인, 한 제국이 움직인 것.
무엇보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던 역천마제를 상대로 승기를 점칠 수 있게 된 것까지.
모두 남궁진화로 인한 변화였다.
천수현인이 알지 못하는 진화로 인한 변화는 더 많았지만, 그것까지 따지지 않더라도 천수현인은 충분히 남궁진화의 존재 자체가 무림에 큰 행운임을 인정했다.
‘드디어 무림이 돌아오는구나.’
평범한 일상.
무와 협이 있는 진짜 무림이 드디어 돌아온다는 생각에 천수현인은 봄을 맞는 소녀처럼 가슴이 뛰었다.
* * *
“크읏…… 크으으…….”
이불을 둘둘 말고 한껏 몸을 웅크렸다.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둘러싼 이불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지를 옭아매기 위한 감옥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이제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투툭. 둑.
아슬아슬하게 엮여 있던 실밥이 결국 터져 나가고.
흘러내린 이불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후아아- 폐부를 가득 채웠다.
현오는 결국 기지개를 켜듯 손을 뻗고 말았다.
“끄으……윽.”
뚜둑.
시원한 소리와 함께 손끝에서 느껴지던 맥동이 끊어졌다.
“꺄아아……!”
비명을 지르려 핏대가 솟은 목줄기 또한 현오의 손에 꿰뚫렸다.
파팟-!
뜨거운 피가 현오의 손등 위로 쏟아지고.
비릿한 혈향과 함께 현오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돌아왔다.
“아…… 더 참았어야 했는데. 어쩌겠어, 도무지 여유를 안 주는걸.”
현오가 피가 잔뜩 묻은 제 손과 쓰러진 궁녀들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아쉬움과 자책이 담긴 말과 달리 표정과 말투는 시릴 정도로 냉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