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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397)화 (397/425)

남궁마제

보배 진(珍) 꽃 화(花) : 용루가 떨어지는 날(2)

처음에는 당가, 그다음은 청성파.

그리고 아미파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산파가 떠났다.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진화와 뇌룡군은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신 제국의 관문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순식간에 성도를 코앞에 둔 건위성에 도착했다.

붉은색 흙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건지 모를 만큼 높은 협곡.

그 협곡의 끝에 붉은 벽돌로 된 건위성 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저곳만 넘으면 성도인가?”

“예, 그렇습니다. 다만 건위성 관문을 뚫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부장 곽유의 말에 진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부장 곽유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지도를 가리켰다.

“이렇게 좁은 길에서 적을 상대하는 건, 상대적으로 대군인 뇌룡군에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시는 대로 이곳은 건위성 관문을 정면에서 뚫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지요. 이전에는 적마곡을 돌아 들어가는 잔도가 있긴 했는데, 이전 전쟁에서 그 잔도가 끊겼습니다.”

한 제국과 신 제국의, 도무지 몇 차례인지 모를 전쟁에서 그러했다.

신 제국 호족들은 뒤를 쫓는 한 제국군을 피해 도망치며 이곳의 길을 모조리 끊어 놓았다.

길이 험하고 특히 절벽의 잔도 외에는 다른 곳과 연결된 길이 없는 건위성의 고립마저 각오한 필살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호족들에겐 그것이 필살의 선택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해에 건위성 백성들은 질병과 기근으로 수백 명이 죽었다.

“이곳 잔도가 끊어지며, 무너지는 잔도에서 떨어진 한 제국군의 피가 이 협곡을 붉게 물들이는 데에 일조했을 겁니다.”

부장 곽유가 약간 원망스러운 눈을 하고 적마곡(赤馬谷)을 보았다.

진화가 곽유를 물끄러미 보았다.

곽유의 눈빛에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진화는 그런 것보다 무장인 곽유가 여느 문관들만큼이나 감상적인 표현을 늘어놓는 것에 놀라는 중이었다.

‘문무겸장. 조정에 첫 입조 때에는 문관으로 들어왔다고 했었지.’

진화는 외숙인 조정호가 전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문관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하남조씨의 후예이자 오래도록 무관으로 있어 온 조정호였다.

조정호는 그 스스로 문무의 조화를 중시해서 그런지, 그런 인재들을 가까이하고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장인 곽유 역시 조정호가 오랫동안 지켜보고 진화에게 소개하며 “여러 곳을 유람하며 아는 것도 많고 지략에도 밝으며 무공도 뛰어나니, 부장으로서 이만큼 두루두루 능한 자도 없다.” 했던 이였다.

“이 적마곡에 대해 압니까?”

“관문 말입니까?”

진화의 물음에 곽유가 당연한 듯 관문과 연결하여 되물었다.

그러자 진화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 적마곡 전체 말입니다. 특히, 그 둘러 간다는 잔도.”

제 말뜻을 다시 또박또박 전한 진화가 천천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곽유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결국 경악으로 물들었다.

툭. 툭.

진화가 손에서 붉은 흙먼지를 털어 내고.

곽유의 시선이 진화가 섬섬옥수로 뜯어 놓은 것이 확실한 듯한 절벽의 흔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환하게 달이 뜨기 전.

“관문의 정면을 그대로 향하는 건 불필요한 군사들의 희생을 만들 겁니다. 게다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요. 이번에 역천마제와 귀천성을 확실하게 절멸시키기 위한 계획엔 ‘그들보다 한발 빠르게 움직이고, 그들보다 반보 뒤에 따라붙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는 건 옳지 못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진화가 적호단주와 숙청단을 모아 놓고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시간 낭비를 줄이겠다는 거야?”

“인원을 차출해 주십시오. 너무 많은 인원도 필요하지 않고, 열다섯 내외로 추려 주십시오. 야밤을 틈타 하는 위험한 임무니만큼 기감에 밝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놈들이라면…… 이미 정해져 있지.”

진화의 말에 적호단주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긴 했지만, 거부하거나 더 자세한 사항에 대해 묻진 않았다.

그리고 적호단주는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금방 후회했다.

“이…… 미친 새끼.”

“아, 내 동생한테 왜 그래요? 좋은 생각이구먼!”

적호단주의 속에서 우러나온 욕지거리에 남궁진혜가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았다.

그사이 적호단 일 조 조장 서장원도 애매한 웃음을 흘리며 농담같이 자연스럽게 불평을 흘렸다.

“하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밤눈 밝은 밑에 놈들이나 보낼 걸 그랬어요.”

안 들리게 욕하는 척 다 들리도록 하기는 오랜 조장 생활을 한 일 조 조장의 특기였다.

하지만 그런 일 조 조장도 제갈상 앞에서는 입을 꾹 닫아야 했다.

“……좋겠네요, 조장님은. 저흰 선택의 여지도 없었는데.”

제갈상은 붉은색, 아니 이제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절벽을 손으로 매만지며 마치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화는 적호단주와 몇몇의 불평을 전부 들었지만, 가볍게 못 들은 척했다.

“자, 앞에 나서는 사람은 누구죠?”

“뭘 물어. 나, 남궁진혜, 팽수, 팽신, 나하연, 강무련이지.”

진화의 물음에 적호단주는 한숨을 푹 쉬고 마치 준비한 듯 술술 이름을 말했다.

전부, 광룡귀면대의 사슬을 맨몸으로 감아 터뜨리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단축하려면 앞서 길을 낼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혹시 더 나설 놈들 있나?”

적호단주가 한쪽에서 터질 듯한 근육을 최대한 웅크리고 있는 이천평과 황계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적호단주의 시선을 느낀 이천평과 황계수가 펄쩍 뛰었다.

“조, 죄송합니다. 저희는 밤눈이 어두워서…….”

“도적놈들이 밤눈이 어둡다고? 핑계를 대려면 좀 더 성의가 있어야지…….”

“진짭니다! 야맹증 있습니다!”

“……지켜본다.”

제아무리 사패천의 소녹군과 소흑호라 할지라도, 정의맹 미친 호랑이의 협박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자, 그럼 가 볼까?”

어쩐지 신이 난 듯한 남궁진혜가 소매를 뜯어 버린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앞으로 나서고.

그 옆으로 진화와 팽치, 나하연, 팽가 형제, 강무련이 섰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적호단 열 개 조 조장들과 숙청단원들이 비장한 얼굴로 준비를 마쳤다.

마침 구름에 잠시 가렸던 달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퍼-억!

남궁진혜가 두 손과 두 발을 적마곡 절벽에 박아 넣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진화와 나머지 인원들도 절벽으로 뛰어올랐다.

퍽. 퍽. 퍽. 퍽. 퍽.

어디 짐승이 땅이라도 파는가 싶은 소리가 들렸다.

퍽. 퍽. 퍽. 퍽. 퍽.

“응?”

긴가민가하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왜 그래?”

성벽 위에 있던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료에게 물었다.

그러자 동료가 병사를 향해 되물었다.

“자네는 이상한 소리 안 들리나?”

“이상한 소리?”

퍽. 퍽. 퍽. 퍽. 퍽-!

동료가 병사에게 묻기 무섭게, 땅을 파는 소리가 이전보다 확실하게 들렸다.

병사 또한 그 소리를 들었다.

“뭐지? 누가 이 야밤에 땅을 파나?”

“땅을 판다기에는…….”

퍽퍽퍽퍽퍽!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아니,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퍽퍽퍽퍽퍽!

“윽!”

“젠장!”

“……!”

이제는 사람의 말소리까지 들리자, 두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쉐에에엑-!

“치, 침입…… 헉!”

“컥!”

두 병사가 뭔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달빛을 받은 무언가가 번뜩이더니 두 병사의 목을 할퀴고 지났다.

털썩!

두 병사가 쓰러진 것이 시작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직----!

달빛보다 환하게, 성벽 위로 새파란 번개가 번뜩였다.

“침입자다!”

누군가의 뒤늦은 외침은 소용없었다.

퍼억! 퍽!

뚜두둑!

“으아아악!”

“크악.”

쉐에에에엑-! 푹푹!

성벽 위에 있던 횃불 사이로 붉은 절벽에서 튀어나온 악마처럼 붉은 옷을 입은 인영들이 비치고, 인영들은 가차 없는 손 속으로 병사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리고, 섬뜩한 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퍼져 나갔다.

“쓰불! 아까 내 머리 위에 미끄러진 놈은 누구냐!”

적호단주가 사방으로 흉흉한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얼굴은 아직 털어 내지 못한 흙먼지로 엉망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십 조 조장 강성필이 검을 휘두르며 자진 납세를 했다.

“강성필, 똑바로 못 해?”

“아이고, 좀 봐줘요, 단주님. 이 야밤에 남이 손발로 파 놓은 홈을 딛고 따라오라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니까 겨우 한 거라고요!”

일 조 조장 서정원이 아직 얼어 있는 십 조 조장의 편을 들며 그들의 어려웠던 여정을 항의했다.

하지만 그 항의를 들어야만 하는 진짜 인물, 진화는 건위성 관문에서 뇌전을 휘두르기 바빴다.

파파파파파파파팟---!

“으아아아악!”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본 신 제국군은, 병사들은 물론 장수들까지 무기를 놓고 도망쳤다.

도망치는 이들을 향해 진화의 눈이 번뜩였다.

쉐에에에엑-!

펑! 펑! 퍼-엉!

“크어어억!”

“사, 살려…… 으악!”

사방으로 갈라진 뇌전이 도망치는 이들의 등을 꿰뚫고 지났다.

“천뢰제왕검법 낙엽이 언제부터 저런 쾌검이었는지.”

“만류귀종이라 했다. 검술이 극의에 달하면 검의 구분이 없어지는 거지.”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진화의 검에 감탄하며 재빨리 성벽을 내려갔다.

쉐에에엑! 쉐엑!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궁구와 남궁교명 또한 진화에 비할 정도로 빠르게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베어 나갔다.

“열어!”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성문 앞의 병사들까지 모두 처리하고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뒤늦게 이천평과 황계수가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오-냐!”

“쓰불, 나도 누가 열어 준 성문으로 오고 싶었다고! 오늘 죽은 엄마 만나는 줄 알았네!”

그들은 절벽을 타고 오는 것이 꽤 힘들었던 듯 온몸이 땀과 흙먼지로 엉망이었다.

하지만 몸이 힘든 것보다 정신적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컸는지, 땅을 밟고 선 지금은 천하무적이 된 기분이었다.

“이 쓰불----로----마!”

“두---고---보—자, 나아쁜 놈아---!”

우렁찬 기합과 함께, 십수 명의 병사들이 여닫는 성문이 두 사람의 손에서 활짝 열렸다.

성문 밖에는 오만의 뇌룡군이 출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성도를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건위성 관문이 뚫리던 그때.

신 제국 황궁에도 바쁜 발소리가 울렸다.

송마문주가 한밤중에 별채를 찾자, 그 앞을 지키던 무인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놈을 옮길 준비를 해라, 어서! 놈의 이동은 서장마군께서 직접 챙기실 것이다.”

“충!”

송마문주의 급한 말소리가 안에 있던 현오에게까지 들렸다.

침상에 누워 있던 현오가 눈을 번쩍 떴다.

“녀석이 오는군!”

현오가 기쁜 듯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문밖에서 송마문주와 무인들이 현오의 목소리를 듣고 우뚝 멈춘 것이 보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송마문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현오는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기는 듯 송마문주를 보았다.

“쫓기는군, 그렇지 않소? 하하하하하! 천하의 귀천성이 쫓겨 나가는군!”

현오가 송마문주를 비웃는 듯 크게 웃었다.

그에 송마문주가 살기까지 번뜩이며 현오를 노려보았다.

“대업을 위해 가는 것이다. 이제 네놈이 죽을 자리가 확실해졌거든.”

송마문주가 현오를 협박하듯 말했다.

하지만 현오는 두려움 따윈 모르는 듯 송마문주를 비웃었다.

“댁들이 죽을 자리는 아니고? ……누가 먼저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신 제국은 이제 끝이로군.”

나지막이 깔리는 목소리가 마치 저주 같았으니.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현오의 눈과 마주친 송마문주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듯했다.

냉막한 이목구비에 두 눈 가득 살기가 번들거리는 저자를 보고 누가 얼마 전까지 소림을 그리워하던 젊은 승려라 하겠는가.

“허……튼수작 부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그래 봐야 죽을 날까지 고통이 늘어날 뿐이니까.”

송마문주는 제 속에서 울컥 솟은 두려움을 감추듯 현오에게 짧은 경고를 남기고 돌아섰다.

툭.

급히 돌아서는 발에 죽은 궁녀의 시체가 차였다.

주변을 돌아보니 치우지 않은 궁녀들의 시체가 방 안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벌써 작은 지옥에 발을 디딘 느낌이었다.

송마문주는 지옥을 빠져나가는 듯 별채를 나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불도 켜지 않은 대륜궁 한복판에 눈을 감고 정좌를 하고 있던 역천마제가 스르륵 눈을 떴다.

마침, 밖에서 내관이 알현 요청을 전해 왔다.

“폐하, 송마문주 들었사옵니다.”

“들라.”

역천마제의 허락과 함께 대륜궁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잔뜩 상기된 얼굴의 송마문주가 뛰어들다시피 들어왔다.

“주군, 수신방주의 전갈입니다. 네 번째 유력지도 아니라고 합니다!”

송마문주의 말에 역천마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읏.”

격정을 주체하지 못한 듯 역천마제의 웃음소리에 그의 기운이 섞여 나오며, 밖에 있던 내관이 두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송마문주 또한 입술을 깨물었다.

“하하하하하! 그렇지! 이것이야말로 운명이 아닌가!”

웃음과 함께 짧게 터져 나온 역천마제의 감상이 이어지고.

감정을 가라앉힌 역천마제는 만찬을 즐긴 맹수처럼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낙양이라니. 참으로 운명적이지 않은가. 내 스스로 하늘을 찾아가라는 이것이야말로, 이제 역천이 순리가 되었다는 계시 같구나.”

역천마제의 말에 송마문주 역시 눈을 크게 뜨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주군, 대법의 그날이 급박합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허허허, 그래. 낙양으로 가자꾸나.”

송마문주의 재촉에 역천마제가 기꺼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길로 대륜궁을 나가는데…….

“천흠.”

미련 없이 궁을 나가려던 역천마제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의 곁에서 호법을 서고 있던 검마제를 불렀다.

“천흠, 너는 이곳에 남아 그 애송이에게 빚을 갚아 주고 오너라. 돌아올 때는, 놈의 절망이 어떠했는지 본 좌에게 알려다오.”

“예, 주군.”

역천마제의 말에 검마제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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