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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400)화 (400/425)

남궁마제

보배 진(珍) 꽃 화(花) : 용루가 떨어지는 날(5)

낙양 석양호(夕陽湖).

낙양의 외곽, 옛날에는 낙강의 한 줄기로 통했으나 어느 날 물줄기가 끊어지면서 그대로 호수가 된 곳이었다.

이 근방 주민들은 봄에 호수 주변의 꽃을 보러, 여름에는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러, 평소에는 통통한 향어를 잡으러 자주 찾는 곳으로, 낙양 어디에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호수였다.

이 낙양 외곽의 별 볼 일 없는 작은 호수가 유명해진 것은 석양호라는 이름이 붙고 난 이후였다.

낙양에 들른 한 문인이 우연히 이 호수를 찾았다가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이 호수는 석양이 그대로 담기는구나!’라고 해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이후 낙양을 찾는 문인들이 석양을 보러 와서 시를 지으며 꽤 유명해졌다.

마침 저녁이었다.

천천히 떨어지던 해가 호수를 둘러싼 높고 가파른 절벽 사이에 걸리고 사방에 붉은 노을이 퍼지자, 사람들은 ‘호수에 석양이 담긴다’는 말의 의미를 대번에 알 것 같았다.

해가 빠진 듯 석양호 한가운데에 새빨간 해가 담기고 호숫물 전체가 붉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장관이로군.”

역천마제조차 호수에 담긴 해를 보며 감탄을 뱉었다.

그 옆에서 송마문주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석양을 보자니 그들이 무사히 역천비지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역천비지는 이 호수 아래에 있습니다.”

“호수 아래?”

“저 절벽 사이에 호수 밑으로 통하는 동굴이 있더군요.”

“호오. 신비감을 품은 동굴이라…… 좋군.”

송마문주의 말에 역천마제가 석양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지는 해 아래에서 역천대법이라니.

“해가 지고 나면 새로운 해가 떠오르기 마련이지. 내 새로운 육신은 새로운 해와 함께 태어나겠구나. 허허허허!”

역천마제가 기꺼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송마문주 또한 역천마제가 부여한 의미에 동의하는 듯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역천마제 일행은 석양호를 둘러싸고 여장을 풀었다.

수많은 송마문 무인들과 서장마군의 수하들이 석양호 근처를 둘러싸고 삼엄한 경계를 서는 가운데, 역천마제와 송마문주, 송마문 학사들은 동굴로 들어가서 역천대법을 준비했다.

그리고 현오는 손발이 족쇄에 묶인 채 동굴 입구에 있는 작은 방을 감옥처럼 바꾼 곳에 갇혀 있었다.

귀천성 무인들이 짐을 푼 뒤, 빛 한 점 들지 않는 깊은 밤이 되자.

저벅. 저벅. 저벅.

지금까지 현오를 잊은 듯하던 송마문주가 현오를 찾아왔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환단 한 알을 꺼내 현오의 얼굴 쪽으로 던져졌다.

“먹어라. 허기를 달래 줄 것이다.”

송마문주가 현오를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입고 있던 승복이 거적처럼 헐렁해진 현오에게 통할 말이 아니었다.

“꽤 생각해 주시는군.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괜한 자존심이라면 버려라. 어차피 죽을 목숨, 그것 정도 개처럼 입으로 받아먹은들 괜찮지 않으냐?”

“……이봐, 송마시주, 그것도 꼬시는 말이라고 하는 거요?”

자존심을 버리라며 자존심을 제대로 거드는 말에, 현오는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꼬시든 시비를 걸든 하나만 하시라고.”

“고작 환단 한 알이다만?”

“꼬시는 거 맞네! 난 또 시비 거는 건데 내가 착각했나 했네! 소림 땡중들도 그것보단 잘 꼬시겠다! 송마시주, 그러고도 장가는 갔소?”

현오가 황당하다는 듯 몸을 일으켜 송마문주를 보았다.

송마문주는 습관처럼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며 현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입꼬리만큼, 천천히 현오의 눈빛도 돌변했다.

“겁먹었어? 그러니까 날 꼬시려면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더 잘 먹힌다니까. 듣기 좋네…… 당신 심장 소리도.”

어둠 속에서 현오의 눈빛만이 타는 듯 붉게 이글거렸다.

한두 번 보는 광경이 아니었던 듯 송마문주가 현오의 살기를 마주했다.

아니, 오히려 독한 눈빛으로 현오를 쏘아보았다.

“아직도 네놈이 살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면 버려라. 네가 기다리는 남궁진화는 지금쯤 황성으로 갔을 거니까. 그곳엔 너도 알다시피 검마제 님이 기다리고 계시지. 네놈 때문에 잃어버린 팔의 복수를 하고 오실 거다. 혹시 남궁진화가 운이 좋아 검마제 님의 손에서 살아남더라도 네놈은 결코 구하지 못하겠지. 네놈에게는 남아 있는 운도 없다는 거다!”

송마문주는 현오의 눈빛에서 기어코 절망을 보겠다는 듯 현오에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현오는 그런 송마문주를 향해 비릿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쫄았네? 역천마제가 검마제까지 버렸으니, 이제 너희를 지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아니, 당신부터 역천마제가 언제 버릴지 모르려나? 아, 알았다! ……크흐흐, 당신, 불안하구나?”

“다, 닥쳐라! 허기로 고통받다 죽겠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

현오의 말이 정곡을 찌른 듯 송마문주가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떴다.

“흐흐, 역천대법 준비가 부디 역천마제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말이야. 우리 송마시주를 위해 극락왕생은 빌어 줄게. 크하하하하!”

현오의 웃음소리가 송마문주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송마문주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현오의 웃음소리도 뚝 끊겼다.

‘황성으로 갔다고? ……못 보고 가게 되는 건 아쉽군.’

현오의 눈빛이 점차 주변의 어둠 속에 묻혀 들었다.

* * *

뚝. 뚝. 뚝.

동굴 위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니, 그만큼 동굴 안이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송마문 학사들이 기어이 구덩이를 파고 만년독수를 채워 넣었다.

그 위에 제단을 만들고 역천대법을 준비하는 데에만 꼬박 사흘.

동굴 밖에 떠오른 달은 기이할 정도로 붉었다.

마침내 오늘 역천대법을 실행하는 날이 되었다.

마비혈이 잡힌 현오가 검은 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송마문 학사들에게 들려 힘없이 제단으로 올려졌다.

철컥. 철컥.

현오의 팔과 다리가 쇠사슬에 단단히 묶이고, 검은 천을 뒤집어쓴 학사가 마비혈을 풀었다.

마비혈이 풀리며 현오의 입도 풀려났다.

“허어! 굳이 혈을 안 잡아도 얌전히 잡혀 줬을 것을. 내 발로 걷게 하면 좀 좋소? 그쪽들도 무거운 나를 굳이 들어서 옮기지 않아도 되고.”

“…….”

현오의 불평에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쪽에선 역천마제가 명상을 하고 있고, 송마문주가 그 곁에서 역천마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다경 정도 지났을까.

현오에겐 참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마침내 역천마제가 눈을 떴다.

“가지.”

역천마제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리고, 현오는 그 목소리가 천근만근인 듯 심장이 떨어졌다.

‘빌어먹을. 떨지 마라. 떨지 말고, 가자.’

현오가 제 손끝, 발끝을 보며 주문을 외듯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역천마제와 귀천성 무인들에게 결코 제가 떠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정말로, 괜……찮았잖아? 흐흐흐, 구덩이에서 나와 그렇게, 행……복하게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산사에서 퍼지는 고기 냄새는 한창 자라는 소년들, 청년들에게 고통스러운 유혹이었다.

각우 사부는 그럴 때마다 사형제들을 이끌고 몸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모두 저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불마대법을 받고 실컷 고기를 입에 밀어 넣은 채 소생각(甦生閣)으로 돌아가면 사형제들이 덜덜 떠는 저에게 들러붙어 밤새 체온을 나눠 주었다.

쿰쿰한 땀 냄새와 온몸을 감싸는 무게감, 축축한 온기에 의지해서 춥고 시린 밤을 견뎌 냈다.

땀내 나는 그곳이 집이었고, 그들이 가족이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지나가고 나자.

천살성이라는 걸 알면서도 뚱뚱땡중이라며 서슴없이 제게 달라붙던 친우들도 생각이 났다.

“시작하라!”

역천마제의 명이 있고.

위치를 잡은 학사들이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납귀골육(納歸骨肉) 연지천로(聯之天路) 유아혼신(有我魂神)-.”

학사들의 주문과 함께.

출렁! 출렁- 출렁!

제단 아래에 있던 만년독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차올라왔다.

현오는 숨을 쉬기 힘들어졌음을 알아차렸다.

때가 온 것이다.

‘친우라니.’

평생 알게 될 줄 몰랐던 단어였다.

마음 깊이 이해하고 의지하는 친우…… 남궁진화의 얼굴도 스쳐 갔다.

진화라면 지금도 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믿음이라는 게 제게도 생겼다.

‘됐어. 진짜 괜찮아. 진화, 너라면 내 선택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친애하는 나의 가족, 소림과 나의 친우,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현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만년독수가 그의 몸을 집어삼키는 것을 느끼며 현오가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반야심경은 현오가 불마대법을 실행할 때 외는 것으로, 불마대법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불마대법은 그저 불력으로 현오를 보호하는 가운데, 현오를 죽이는 독으로 천살성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비록 현오를 지켜 주는 불력이 없었지만, 현오는 기꺼이 독을 집어삼켰다.

‘큭! ……무,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크흑!’

현오는 온몸의 혈맥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독기를 흡수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역천마제와 송마문 학사들이 이상함을 느낀 것도 그때였다.

“으음? 허! 이놈! 독기를 흡수하고 있구나!”

역천마제는 단번에 만년독수 속에 파묻힌 현오가 뭘 하고 있는지 꿰뚫었다.

“독기를 흡수하고 있다고요?”

“주군, 이러면……!”

송마문 학사들은 물론 송마문주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년독수의 독기 속으로 현오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와야만 역천대법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군, 천문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허허, 되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 않느냐?”

송마문주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역천마제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만년독수를, 아니 만년독수 속에 있을 현오를 보았다.

“시간을 벌려는 게냐? 어디 네 마음껏 발악해 보아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허허허허!”

역천마제는 현오를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

그의 눈빛은 흥미와 호기심 그리고 권태로 가득했다.

마치 벌레의 사투를 구경하는 아이같이, 잔인하고 순수했다.

송마문주는 그런 역천마제의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역천마제의 그러한 눈빛이 비단 현오에게만 해당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천마제에게는 타인의 죽음마저도 제게 유용한 것만 흥미로운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검마제 님의 소식에 대해 묻지 않았지.’

송마문주는 이제야 역천마제에 대해 알 것 같았다.

제물과 같은 운명, 그렇다면 역천마제 또한 천살성을 타고난 자라는 것을.

송마문주는 이제까지 어렴풋이 느끼던 불안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크게 길을 잘못 들었구나!’

송마문주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이놈-! 발악은 네놈이 해야지!”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모두가 동굴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동굴 밖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여어, 오랜만이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였지만, 송마문주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제왕검 남궁강!”

역천마제가 욕지거리를 뱉듯 그 이름을 뱉었다.

* * *

역천대법이 시작될 즈음.

석양호를 둘러싼 절벽 위엔 이미 정사연합 무인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역천마제 놈이 만년독수의 기운 속에 갇힌 지금!”

“가자-!”

천수현인 제갈길현의 허락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정사연합 무인들이 동굴 밖을 지키던 귀천성 무인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와아아아아---!”

“죽어라!”

정의맹의 주작단과 백호단, 화산 매화검수와 제갈연환대, 패왕권문 패룡대, 남궁세가 창궁무애단, 황보세가 웅호대. 거기에 사패천의 홍랑대와 교룡대, 하사대가 모두 나왔다.

신 제국으로 가지 않은 모든 전력이 석양호로 온 것이다.

앞선 주작단과 백호단이 송마문 학사로 보이는 이들을 제일 먼저 죽였다.

“웬 놈들이냐!”

“그걸 몰라서 물어?”

“네놈들은!”

괴팍한 되물음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서장마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서장마군의 표정이 어떠하든, 천수현인은 매서운 눈으로 동굴 안을 보았다.

“어서 가지. 안에서 애송이가 기다리겠어.”

“알아.”

“제 놈이 가라고 등 떠밀어 놓고 이제 와서 생각하는 척은.”

“닥쳐, 이놈아!”

천수현인 제갈길현과 제왕검 남궁강, 사패천주 한구혈이 서장마군의 시선을 무시하며 곧장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뒤로 서장마군은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따랐다.

“자, 잠깐!”

“당신의 상대는 우리다.”

“억울해하지 마라.”

뒤늦게 동굴 앞을 막으려는 서장마군의 앞으로 백호단주 황보웅과 주작단주 구격용이 섰다.

백호단주 황보웅은 태산천왕이라는 별호답게 서장마군의 거대한 체격 앞에서도 전혀 작아 보이지 않았다. 

구화검 구격용, 십이좌회 소속으로 역천마제에게 죽임을 당했던 매화성검 구산용의 손자는, 귀천성 무인들 앞에서 거대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문제는 그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공평해도 참아. 인생이 원래 그래.”

신살대주 초전후와 서하 채명지, 대산흑호 이만평과 녹림산군 황계수, 장강사군 배병룡이 서장마군의 주위를 에워쌌다.

서장마군이 주변을 살피자, 이미 절대적인 수적 열세 속에 귀천성 무인들이 일방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중이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였다.

“음. 살아날 길이 없다면 영광스러운 죽음을 택하겠다! 오라! 주군을 위해 너희 모두를 길동무 삼으리라!”

서장마군이 투기를 불태우며 사방을 향해 소리쳤다.

서장마군의 목소리가 공허한 메아리처럼 절벽 사이로 퍼져 나갔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그러게요.”

창궁무애단주와 부단주가 서장마군의 외침을 비웃으며 주변을 완전히 장악해 갔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역천마제는 이 석양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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