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415화 (415/425)

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인생의 전환점(4)

진화의 등극식이 있는 날.

남궁세가 식구들이 황궁으로 오는 날이기도 했다.

등극식 준비로 새벽부터 바빴던 날이지만 진화는 식구들을 맞이하기 위해 황궁 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멀리서 마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

반가운 마음에 진화를 따라온 남궁구의 턱이 벌어졌다.

남궁가주의 뒤를 따라 들어온 남궁희를 이제야 본 것이다.

고개를 돌린 남궁구가 배신감 가득한 눈빛으로 진화를 보았다.

“뭐, 왜?”

“우아, 도련님,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기야?”

“뭣 하면 또 도망가면 되잖아, 나와 달리.”

진화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어제 간택전을 두고 짓궂게 놀리던 남궁구를 상기시키곤 도망치듯 앞으로 나갔다.

“할아버지, 큰아버지, 큰어머니, 형님!”

반갑게 외치며 뛰어가는 진화의 뒤로 남궁구가 ‘우아, 우아.’ 하며 배신감에 가득한 소리를 냈다.

다만.

“전하, 체통을…… 전하-!”

동 태감의 애달픈 목소리에 남궁구의 소리가 묻혔다.

“할아버지!”

“오, 허허허허! 우리 전하, 잘 있었는가?”

진화가 반갑게 제왕검의 손을 잡자, 제왕검도 화색이 되어 진화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귀천성이 사라진 이후 진화도 확실히 달라졌다.

식구들을 대하는 데에 있어 거리낌이 없어진 것이다.

모처럼 꽃 같은 손자의 살가운 행동에 취해 있던 제왕검은 진화의 등을 두드리고 얼굴을 쓰다듬고 나서야 옆에서 불편한 헛기침 소리를 내는 동 태감을 발견했다.

“흠, 흠. 흐으흠!”

“뭐야? 이거 아니야? 이거 내 손주한테 반말도 못 하고, 차려야 하는 예의는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앞으로 손주 얼굴은 마음대로 보겠어?”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동 태감에게 제왕검도 만만치 않게 불편한 기색을 내뿜었다.

꼬장꼬장한 두 노인의 눈빛이 부딪히고.

이 경우엔 정파제일 고수라는 제왕검과 대등하게 눈싸움을 하는 동 태감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두 사람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진화가 슬쩍 끼어들었다.

“하하, 할아버님, 여긴 우리끼리 있지 않습니까, 편히 대해 주세요. 할아버님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목숨입니다. 폐하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흐흐흐, 그렇지?”

진화의 말에 제왕검이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은근히 동 태감에게 콧대를 세웠다.

진화가 슬쩍 동 태감의 손등을 두드리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대신이라긴 뭣하지만 그런 진화의 모습을 남궁가주와 가모가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진화가 많이 유연해진 것 같지?’

‘많이 친근해지기도 했고요. 안심해도 되겠어요.’

남궁가주와 가모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흐뭇하게 웃었다.

“장추궁으로 가시죠.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화가 익숙한 듯 식구들을 안으로 이끌었다.

아침 일찍 황궁으로 온 남궁세가 식구들은 특별히 황제와 황후를 알현하고 진화의 등극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모두 함께 발길을 돌리려는 때.

황궁 정문에서 또 다른 무리가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여-어! 남궁이로군!”

사패천주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사이로 무언가가 쌩-하니 달려왔다.

“횽—아!”

한수림을 발견한 진화의 눈이 커진 것과 동시에 그 옆에 있던 남궁구의 눈도 커졌다.

‘저 여자가……!’

‘미쳤군.’

사패천주의 뒤로 푸른 비단옷을 입은 하오문주를 발견하고, 남궁구와 남궁희 부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와락 얼굴을 구겼다.

* * *

남궁세가 식구들이 장추궁에서 남궁경, 팽연화와 함께 황제와 황후를 알현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한 제국의 백성으로서 이때만큼은 제왕검도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황제가 제왕검이 무릎을 꿇기도 전에 그의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은인을 뵙습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진화를 그 간악한 무리의 손에서 구해 온 분이 어르신이라 들었습니다. 부디 편히 대해 주세요.”

황제와 황후는 제왕검을 향해 존대를 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국 주인의 인사에 제왕검이 펄쩍 뛰었다.

“어이쿠, 뭔가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한 인사는 거두어 주십시오.”

“아닙니다. 그래서 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왕검의 손사래에 황후가 목소리를 떨며 눈물을 글썽였다.

“황후의 말이 맞습니다. 제국의 어떤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황후를 감싸며 제왕검에게 진심을 전했다.

그러자 제왕검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저 아이, 아니 황태자 전하께 받은 것이 더 많습니다.”

“하하, 편히 하셔도 됩니다. 제국의 은인이시니, 얼마든지 그러셔도 됩니다.”

제왕검이 실수를 하고 슬쩍 눈치를 보는 모습이 남궁경과 닮아 있어, 황제는 유쾌하게 웃으며 제왕검의 실수를 정정하지 않았다.

그동안 남궁경과 마음을 터놓는 의형제로 지낸 터라 제왕검의 모습이 더욱 친근했다.

예는 다소 부족할지 모르나 진심이 가득한 사람들.

황제와 황후는 이렇게 선의와 정직함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화가 컸을 거라 생각하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크흠. 황공하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저희가 진화에게 받은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늘그막에 어여쁜 손주를 얻어 그 성장을 볼 수 있었지요. 애정을 쏟은 만큼 그걸 돌려주려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진화가 들어오고 손녀 있는 늙은이들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제왕검도 분명 손녀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제왕검의 말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말년에 웃을 일을 만들어 준 것도 감사한 일이건만, 진화는 이 늙은이의 평생 염원마저 이뤄 줬습니다. 진화가 무림을 구했습니다. 남궁과 무림이 진화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것이지요. 그러니 과한 인사를 거두셔도 됩니다.”

말을 하는 제왕검의 눈빛이 진화에게 닿았다.

촉촉한 눈동자엔 진화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진화가 십수 년 동안 남궁세가에 지지 않는 꽃이 되어 그 향과 정을 잊지 못할 정도로 깊게 나누었으니. 가문을 대표하여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황제와 황후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는 남궁가주를 따라 가모 하후민, 남궁경, 팽연화, 남궁진휘와 진혜까지 모두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황제와 황후는 물론 진화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크게 감격했다.

한편.

남궁세가 사람들이 황제와 황후를 알현하는 동안 사패천 사람들은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너무해! 예쁜 형아를 얼마 만에 보는 건데 방해를 하느냐고!”

한수림이 입술을 불툭 내밀고 투덜거렸다.

오랜만에 진화를 볼 생각에 황도까지 한달음에 달려왔건만, 고대했던 운명적 재회는 실패하고 말았다.

황궁 입구에서 진화에게 달려가 허리를 안기 직전에 동 태감과 내관들이 진화의 앞을 가리고 남궁진휘가 한수림의 목덜미를 달랑 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엔 장애물이 많다는데, 왜 내 편은 없는 건지!”

한수림이 저를 도와주지 않은 강무련을 새초롬하게 째려보았다.

강무련은 그런 한수림조차 귀엽다는 듯 그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어이구, 이 녀석아! 이제 황태자 전하가 되실 분이다. 어여쁜 영애들 다 놔두고 왜 하필 진화에게 빠져서 이 난리인 거냐.”

“아우, 형님은 눈도 없어? 당연히 횽아가 제일 예쁘니까 그렇지!”

어릴 때부터 입이 야무진 한수림은 강무련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게다가 한수림의 말은 뜻하지 않게 아무 상관도 없던 사람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으니.

‘망할 놈의 꼬마!’

사파제일미 초서비가 살쾡이 같은 눈으로 한수림을 째려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들라 하십니다.”

엄 태감이 사패천 일행을 안으로 데려가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허허허! 어서 오시오. 황태자를 위해 먼 길 와 주어 고맙소.”

목숨을 건 전쟁.

전쟁터에서 서로 등을 맞댈 수 있는 동료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제가 사패천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아, 형님, 여기가 바로 극락일까? 황궁에 또 납치를 당해도 이런 황궁이라면 구하러 오지 않아도 좋아.”

“뭐?”

한수림의 말에 강무련이 황당한 듯 아래를 내려다보자, 한수림이 황후와 진화를 번갈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천마제가 이래서 황제가 되려고 환장을 했었나 봐.”

“뭐어?”

“하하하하하하하하!”

뭣 모르는 아이의 말이라기엔 너무 진심이 담긴 표정과 말투였으니.

황제가 먼저 대소를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장추궁에서 모두가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지는 동안.

남궁구와 남궁희, 하오문주가 십수 년 만에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하아…….”

남궁구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남궁구의 한숨에 남궁희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하오문주 채명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남궁구가 고개를 들어 남궁희와 채명지를 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냉막한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진화나 친우들과 함께 있을 때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냉막한 표정과 차가운 목소리였다.

“네 아버지와 널 버린 것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인해 길이 막혔고…….”

“아버지와 저만큼 하오문의 식구들이 소중했던 거겠죠.”

채명지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때의 사정을 설명하려 했지만, 남궁구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벌써 애틋하게 젖어 든 채명지의 눈과 달리 남궁구의 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덤덤하기만 했다.

채명지가 당황하며 남궁구를 보았다.

“그때의 사정이나 뭐 그런 걸 줄줄 읊을 거라면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할 나이도 아니고, 전쟁으로 헤어진 이들이 한둘도 아닐 테니까요.”

채명지는 남궁구의 말투에서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에게는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비극이었건만, 남궁구의 말투에는 전혀 그런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남궁세가가 그런 위기에 놓였다면 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남편과 아들도 가족이지만, 어머니나 사형제들도 가족이니까. 지내 온 시간으로 치자면 그들이 좀 더 길었죠. 게다가 그쪽은 목숨이 경각에 달렸고, 아들에게는 남편과 남궁이라는 울타리가 있으니 안심도 되었겠죠. 다 이해합니다.”

남궁구의 말에 채명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틀린 말도 없고 다 이해한다고 말을 하는데 저-만큼 거리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하지만 그걸 다 이해하는 것과 당신을 받아들이는 건 다르죠.”

남궁구가 채명지와 눈을 마주치고 덤덤하게 말했다.

쿵!

채명지는 제 속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왜 남궁구가 덤덤했는지, 왜 이해한다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성인입니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필요할 나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남궁을 지켜야 하는 내가 하오문주가 된 당신을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게다가…… 당신과 나 사이에는 그런 위험을 무릅쓸 만한 정(情)도 없고요.”

덤덤한 말투로 가차 없이 밀어내는 남궁구의 모습에 채명지는 그녀의 생각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궁구에겐 그때의 일이 아프긴 했지만 채명지가 생각하는 만큼 비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아픔마저 희석되었다.

채명지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그런 채명지를 보는 남궁희의 눈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남궁희는 이미 남궁구의 생각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너무 부족함이 없어서 탈이었나.’

남궁희는 너무 잘 키워도 탈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채명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을 가리는 듯 고개를 돌렸다.

“흑! 역시! 아들이 엄마 없이 자라서 저렇게 삭막하게…… 흑흑, 내가 죄인이구나. 네 아비 손에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

갑자기 제게 돌아오는 화살에 남궁희가 억울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남궁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교육관에 공감하지 못하신다는 유감이군요. 어쩌겠어요, 전 이미 이렇게 자란 것을.”

남궁구가 한쪽만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로 채명지의 연기를 비웃었다.

결국 채명지도 자세를 바로 했다.

“후우. 이것도 통하지 않는단 말이지…… 좋아, 내가 물러날게. 그래, 네 말대로 이제 와서 어미랍시고 나서는 것도 웃기지. 하지만 내가 널 낳았어. 우리 사이에 정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난 네게 모정이 있으니까.”

“……보기보다 버린 것에 미련이 강하시네요.”

남궁구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모정(母情)이라니.

사정이 어쨌든 버려진 자식의 귀엔 몹시 거북한 단어였다.

“버린 게 아니야!”

“그게 그거죠.”

채명지가 격하게 부정했지만 남궁구에겐 통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남궁구의 기세가 사납게 변하자, 남궁희도 심각한 눈으로 남궁구와 채명지를 보았다.

그때, 채명지가 남궁구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남궁희의 팔에 손을 올렸다.

“……!”

남궁희가 놀란 눈으로 채명지를 보았다.

펄쩍 뛰며 팔이 빠질 뻔했지만, 채명지가 남궁희의 팔을 꼭 쥐고 놓아 주지 않았다.

“새어머니라고 생각하렴.”

“뭐……요?”

“정 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면, 생판 처음 보는 새어머니 될 여자라고 생각하렴. 앞으로 네 아버지와 말년을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틀린 말도 아니잖니. 모자간의 정이야 이제부터 차차 쌓아 가 보자꾸나, 아들아.”

채명지가 이를 꽉 깨문 것보다 더 결연한 얼굴로 남궁구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남궁구는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힌 듯 턱을 벌리고 채명지와 남궁희를 보았다.

아들의 눈치를 보던 남궁희가 팔을 빼려 했지만 채명지가 내공까지 일으켜 잡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 * *

그날.

해가 중천에 떠오른 정오에 대전 앞으로 황금 용이 수놓인 붉은색 거대한 차양막이 쳐졌다.

대전을 통하는 계단 아래에 대소 신료들이 시립하고, 계단 위에 황족들과 특별히 남궁세가 직계들이 자리한 가운데.

황룡흑포를 입은 진화가 입장하며 등극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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