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416화 (416/425)

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인생의 전환점(5)

“……하여, 하늘과 땅, 천지신명과 만백성에게 알리노니. 동해왕 한진화를 제국의 황태자에 봉하였음이다. 황태자는 천명을 섬기고 백성을 아울러 짐의 다음, 그다음 만대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평화와 안녕을 이어 갈 것이다.”

황제가 진화의 머리 위에 황룡성관을 올렸다.

“대소 신료들은 황태자 전하에게 면복삼배를 올리라!”

승상 조위례가 계단 위에서 크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계단 위에 있던 황족과 남궁세가 직계들부터 계단 아래를 가득 채운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바닥에 몸을 엎드리고 절을 했다.

“경하드리옵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사람들의 목소리가 황궁을 가득 채우고 궐 담을 넘어갔다.

쿵! 쿵! 쿵!

대고 소리가 울리고 황궁 밖의 백성들도 새로운 황태자가 등극했음을 알게 되었다.

“와아아아아아---!”

“황태자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신 제국이 무너지고 곳곳의 역적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들녘에는 무르익은 곡식들이 풍년을 알려 주고 있었고, 사방으로 연결된 길을 통해 물산이 쏟아졌다.

태평성대였다.

바닥을 살아가는 백성들이야말로 태평성대를 가장 잘 아는 존재들이었으니.

백성들은 이 태평성대를 이어 갈 후계자의 등장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황태자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황도 전체가 진화를 환영하는 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황궁 전체를 아우르는 상석에 서서 진화는 쏟아지는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 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제국의 황태자가 되었다.

* * *

대낮처럼 환한 연회장.

황궁 호수 위에 마련된 무대에는 악사들과 아름다운 무희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호사스러운 공연을 펼치고, 연회장 주변은 갖가지 꽃과 비단 천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했다.

예법에 따라 진행하는 등극식과 달리 황제와 황후가 그들의 기쁨을 연회장에 쏟아부은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연회장에 입장하는 손님들마다 탄성을 자아냈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몹시 아끼신다더니. 연회장 좀 봐요.”

“그러게요. 이전 황태자의 등극 축하연과 비교되는구먼.”

“쉿! 그런 소린 말고요. 일황자와 황태자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소문도 못 들었어요?”

“아, 그, 그래요?”

연회장에 먼저 입장한 귀부인들과 그 자식들이 뒤쪽에 자리를 잡으며 수군거렸다.

큰 연회가 열릴 때마다 초대받아 오는 이들도 이런 광경은 처음인지, 연회장의 모습부터 주변에서 주워들은 황궁 소식들까지 할 말들이 많아 보였다.

이윽고 대소 신료들이 들어와서 익숙한 듯 자리를 잡고.

진화의 친인으로 초대받은 무림인들이 들어왔다.

“아……!”

맨 먼저 정의맹 사람들이 들어왔다.

성승과 옥허신검이 선두에 등장하자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중원 불문과 도문의 두 기둥인 소림과 무당파 거두들의 등장도 등장이지만, 성승과 옥허신검은 보기만 해도 신성이 느껴지는 풍모라, 성승의 몸에 난 흉터와 옥허신검의 비어 있는 소매마저 지난 세월의 풍파를 이겨 낸 굽어진 소나무처럼 영험해 보였다.

그들의 뒤로 천수현인 제갈길현과 현학문주 운송선생이 들어왔는데, 천수현인과 현학문주의 명성은 황도의 유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파 출신 숙청단원들이 들어섰을 때도 다시 탄성이 터졌다.

훤칠한 체격에 눈이 크게 뜨일 정도의 미남미녀들, 게다가 하나같이 무림 명문 출신의 신진 고수들이라 호족들 사이에 자리한 젊은이들 중에는 숙청단원들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패천 무인들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분위기는 또 달라졌다.

“허어!”

감히 황제의 앞에서 흑포를 걸치진 않았지만, 검은 호랑이가 수놓인 피처럼 붉은 적포를 입은 사패천주의 모습은 좌중을 압도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사패천주의 뒤로 역시나 피처럼 붉은 무복을 입은 강무련과 무복만큼 붉은 머리칼을 드러낸 군조는 정파 출신 숙청단원들과 달리 사납고 야성적인 매력을 뿜으며 호족 여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반면 붉은 옷을 입은 이들 사이에 당당하게 시리도록 푸른 경장을 입은 하오문주와 밤이 환해질 정도로 아름답고 요염한 초서비가 등장했을 땐 노소를 가리지 않고 남자들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들의 뒤로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하고 붉디붉은 입술로 웃고 있는 노인, 홍랑대부와 깜찍한 외모에 맞지 않는 무심한 표정을 한 한수림이 들어오자 소란스럽던 연회장에 침묵이 흘렀다.

야성적이고 사나운 기운을 뿜는 이들 사이로 노인과 아이까지 더해지자, 뭐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하고 위험한 분위기가 생겼다.

그들은 그들로 인해 변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로 사파 무림인들답게 당당하고 자유분방하게 연회장에 들어섰다.

드르르륵.

의자를 빼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마침내 정파와 사파 무림인들이 황족들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한데 어울려 앉자, 무림인들의 독특한 분위기가 호족들과 대소 신료들 사이에서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보였다.

“…….”

사방에서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한번 크게 술렁였다.

잠깐의 침묵 직후 더 시끄러워졌다.

“새, 생각보다 훨씬 뻔뻔한 작자들이로군요.”

“허어, 성승과 청연도사께서 사파인들과 어울릴 줄은 몰랐군.”

“그래 봐야 다 무림인 아니겠어요?”

“저렇게 가슴을 훤히 드러내다니, 천박한 출신들은 어찌할 수 없나 봐요.”

“쉿! 황태자 전하께서 저 무림인들을 아끼셔서 이 자리까지 불렀는데, 괜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눈 밖에 나지 말자고.”

노골적인 수군거림.

그 속에 들어 있는 불쾌한 평가와 배척이, 감각이 예민한 무림인들의 귀로 쏟아졌다.

“한 주먹이면 찍소리도 못할 것들이 더럽게 앵앵거리는군.”

“그러니까. 주둥아리들을 콱 쥐어박고 싶군.”

성승과 옥허신검의 말이었다.

“닥쳐. 그런 말들 할 거면 사패천주에게 대신 하라 그래.”

천수현인이 이를 악물고 입 모양이 보이지 않게 주의를 주었다.

“아, 왜? 뚫린 입으로 말도 못 하나?”

“입이 아니라 소림 재정을 뚫고 싶지 않으면, 그냥 닥쳐. 운현 그 맹한 놈이 따로 부탁까지 하더라. 네가 처먹는 술값, 고기값이 저놈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라고.”

“나는 왜?”

“네놈은 뭐가 다르냐?”

“…….”

천수현인의 말에 따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성승과 옥허신검이 조용히 입을 닫고 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차(茶)군.”

“젠장.”

당연히 술이 들었을 거라 생각했던 성승과 옥허신검은, 황궁 궁인들의 철저한 배려에 한숨을 흘렸다.

“횽아는? 횽아는?”

“수림아, 가만히 있어.”

“음. ……싫어.”

조금 고민해 보고 거절하는 것이 더 얄미웠다.

‘반항기인가?’

탁자 아래에 있는 강무련의 주먹이 움찔거리는 순간.

쿵!

“……!”

강무련은 물론 사패천 사람들 모두의 눈이 커졌다.

사패천주가 한수림의 머리를 쥐어박을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씨. 아부지, 왜 때려!”

사패천주의 꿀밤을 맞자 한수림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대차게 따지고 들었다.

아무리 살살 때려도 주먹질을 하다가 우각살호권을 만들어 낸 인간의 꿀밤이었거늘.

사패천 내부에서 한때 유난히 귀여운 한수림의 출생을 두고 말들이 많았지만, 이렇게 보면 한수림은 사패천주의 아들이 확실한 듯 보였다.

“까불지 마. 전에도 네 마음대로 까불다가 납치까지 당했잖아. 조용히 형 말 들어.”

사패천주가 목소리를 깔고 엄하게 한수림을 타일렀다.

물론 통할 리 없었다.

“싫……다면?”

“허허허, 그럼 궁댕이가 터지도록 처맞겠지.”

“체엣.”

한수림이 슬쩍 사패천주의 눈치를 보며 묻자, 사패천주의 이마 위로 혈관이 도드라졌다.

결국 협박까지 듣고서야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입을 다문 한수림이었다.

쪼그만 녀석이 천하의 사패천주를 슬쩍 떠보기까지 하는 모습에 강무련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이 앙큼한 녀석!”

“우아악! 이 형님은 왜 갑자기 발작이야? 형님, 진짜 그러지 말고 서비 누나랑 얼른 혼인이나 해!”

강무련이 한수림을 끌어안고 괴롭히듯 귀여워하자 예상치 못한 반격이 돌아왔다.

“하하하하하! 이 되바라진 녀석!”

강무련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잠시 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정돈하는 한수림의 앞으로 초서비가 달콤한 당과를 당겨 주었다.

밤이 깊어지자, 황족들이 들어왔다.

스르르륵.

호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무림인들도 눈치껏 일어섰다.

“황자 마마를 뵙습니다.”

“하하하, 노사는 오랜만입니다. 얼굴을 잊겠습니다. 종종 이 사람의 궁을 찾아 주세요.”

“분부 받들겠습니다.”

일왕자가 친근한 얼굴로 대소 신료들과 대화를 나누고.

“황자님, 강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머, 공주님, 이제 꽃이 만개한 듯하군요.”

“호호호, 정부인께서도 참. 칭찬이 과하세요. 호호호호.”

수많은 호족들이 저마다 황족들이 지나는 걸음마다 한마디씩 말을 붙이기 바빴다.

무림인들은 숙청단원들을 제외하면 황족들과 일면식도 없거니와 친분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닌 터라, 그들은 적당한 때를 보아 자리에 앉았다.

‘모르면 천수현인을 보자!’

천수현인과 운송선생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면 예법에 어긋난 행동은 아닌 듯싶었다.

그런데 주변 호족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머, 저길 봐요.”

“허어! 참!”

“하긴 저치들이 뭘 알겠어요. 앞으로 황궁 문턱을 또 넘어 볼 것도 아니고.”

성승과 옥허신검을 향해 동경의 눈빛을 보낼 때는 언제고, 호족들은 이제 모두를 깔보며 수군거렸다.

연회장에 입장하는 순서부터 모든 것을 따지기 좋아하는 호족들로선, 자신들보다 황족들 가까이 앉은 무림인들이 거슬리던 차였다.

그들은 황족들과의 한마디가 엄청나게 큰 위세라도 되는 듯 황궁과 정치와는 거리가 먼 무림인들을 무뢰배 취급하며 본격적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낯 뜨거운 조롱과 희롱이 이어지는 터라 몇몇 이들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달해 갔다.

그때.

“황제 폐하 납시오-!”

엄 태감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황족들은 물론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태자 전하께 경하드리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황족들과 대소 신료들, 호족들 모두가 앵무새처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인사하며 허리를 숙였다.

무림인들 역시 굳은 얼굴로 눈치껏 허리를 숙였다.

‘뭐 이렇게 내내 숙여야 해? 척추가 휘어지겠네.’

‘쓰불, 다시는 오나 봐라.’

불쾌한 기분에 아까까지 광영스럽던 일마저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모두 평신 하라.”

황제의 말이 있고 모두가 허리를 폈다.

그와 동시에.

“헉!”

“어, 어떻…….”

곳곳에서 숨을 참거나 말을 멈추는 소리가 났다.

황제와 황후, 황태자 진화가 무림인, 남궁세가 사람들과 함께 등장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 사람들은 당당하게 호족들을 지나쳐 대소 신료들을 통과한 뒤 황족들과 간단한 고갯짓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오! 저기, 저놈들도 왔군요. 저치들이 이 늙은이의 친우들입니다.”

“허허, 그렇소? 오, 저들은 짐도 명성을 들어 본 자들이로군.”

제왕검과 황제는 서로를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황제는 기어코 존칭을 사양하는 제왕검의 부탁을 들어 그를 평대 하고, 제왕검은 황제의 명에 따라 다소의 예가 부족하더라도 그에게 편히 말을 걸었다.

남궁경과 비슷한 성품의 제왕검은 빠르게 황제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물론 일국에 가까운 남궁세가를 이끄는 남궁가주와도 통하는 것이 많았다.

아니, 사실 이유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었다.

식사 내내 진화의 그릇 위에 고기를 쌓기 바쁜 남궁세가 사람들을 보며, 황제와 황후에겐 그들과 가까워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땡중이 성승이고, 외팔이가 청연입니다. 이 곰 같은 녀석이 사파를 일통한 한구혈이고요.”

제왕검은 사패천주의 소개에는 조금 더 공을 들였다.

사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의식한 동시에 황제의 앞에서 천주나 지존의 호칭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경솔한 듯하면서도 사패천주와 황제 모두를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에, 황제의 안에서 제왕검에 대한 평가가 한층 더 올라갔다.

“제왕검 덕분에 중원 불문의 등불과 도문의 선구자를 보는구려.”

“황공하옵니다.”

“그게 어찌 저 칼만 잘 쓰는 놈의 덕분이겠습니까. 다 우리 황태자 전하의 덕(德), 덕분이지요.”

“허허허허, 청연도장의 말씀이 참으로 와닿는군.”

“어어? 폐하, 이치들 앞에서 제 면을 세워 주시기로 해 놓고 이러시깁니까?”

“하하하하, 미안하오. 내 자식 자랑에 깜박했소이다. 하하하하!”

황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자 반대로 연회장 전체가 숙연해졌다.

모든 눈과 귀가 황제와 황후, 황태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황제가 무림인들과 친분을 나누고 그 옆에서 황태자까지 나서서 한 명 한 명을 소개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대소 신료들과 호족들이 턱을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재고 따지길 좋아하는 그들의 생리에 따르자면. 지금까지 그들이 뽐내듯 보이던 영향력이란 건 결국 절대적인 권력 앞에선 태양 아래 반딧불처럼 초라해질 뿐이었으니.

“모두 황태자를 위해 마련한 연회에 참석해 주어 고맙소. 오늘 하루는 짐이 무엇이든 부족하지 않게 내놓을 테니, 넉넉하게 누리고 황태자를 축하해 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태자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인사가 끝나는 것에 맞춰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되고 황궁 무희들이 화려한 춤을 뽐냈다.

지금만큼은 모두가 즐겁게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 * *

연회가 무르익어 가고.

이번 연회에서 황제와 황후, 황태자 진화의 관심이 온통 남궁세가와 무림인들에게 가 있었으니, 일찌감치 마음을 접은 이들은 저마다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황자와 공주 들은 평소 친분이 있던 젊은 영식, 영애 들과 따로 자리를 가지고, 대소 신료들은 뚜렷하진 않지만 은근히 나뉜 파벌끼리 자리했다.

호족들도 저들 사이에 나뉜 철저한 급에 따라 뭉치거나 가장의 파벌에 따라 흩어졌다.

물론, 그러면서도 모든 이들의 신경은 황제와 황후, 황태자를 향해 있었다.

태양이 없이는 어떤 화려한 꽃도 피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황제가 흩어진 척 그들의 주변을 맴도는 이들을 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짐이 오기 전 불쾌한 일이 있었다면 이해하시오. 대의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함께할 수 있는 무림인들과 달리, 저들은 신료들이나 그 집 식구들이나 할 것 없이 정치가 삶이고 일상이오. 그러다 보니 개중에는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것이 스스로 격을 올리는 거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소.”

“흠. 사람 사는 것이야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무림에도 그런 자들이 넘쳐 나는 편이지요.”

손님을 초대해 놓고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을까 봐 신경 쓰는 황제에게, 제왕검이 싱긋 웃어 주며 술병을 흔들었다.

엄 태감이 얼른 비어 있는 병을 치우고 새 병을 가져다주었다.

“호오. 그럴 때 무림인들은 어찌하오?”

황제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각자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그것을 공손히 받아 들고 단번에 털어 넣은 사패천주가 시원하게 답했다.

“좀 괜찮으면 죽빵을 때리고, 영 아니다 싶으면 대가리를 날려 버립니다.”

“음? 하하하하하하! 그거 참…… 황궁과 비슷하군.”

“그렇습니까? 황궁도 무림 못지않게 살벌하군요. 허허허허허!”

황제와 무림인들이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신료들과 호족들의 간담이 서늘할 만한 농담을 서슴없이 나누며 즐거워하는 사이, 황후와 여인들도 정답게 교분을 나누었다.

황후는 몸이 약한 자신과 달리 거친 무림을 살아가며 사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모 하후민이나 하오문주의 이야기에 흥미가 많았고, 황후의 회임을 알고 있는 팽연화가 황후의 옆에서 궁인들이 나설 틈도 없이 그녀를 챙겼다.

진화는 남궁진휘와 앞으로는 자주 보지 못할 숙청단원들과 즐겁게 회포를 풀었다.

끊임없이 황제와 황후, 황태자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던 신료들과 호족들이 그런 모습을 두고도 수군거렸다.

“……회임하신 것 아니야?”

“뭐, 회임?”

“쉿!”

“그, 그럼 황태자 전하는? 이제 등극하셨는데…….”

“글쎄. 적통 황자가 태어난다면, 무림인 출신보다는 황궁에서 나고 자란 적통 황자가 좀 더…….”

황궁을 채운 사람들은 쥐새끼처럼 부지런하게 보고, 관찰하고, 헐뜯었다.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타-악.

나하연이 술을 입안에 털어놓은 뒤 과격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힘에 술잔이 바스러졌다.

당혜군은 황궁에 온 내내 묘하게 가라앉아서 말이 없었던 나하연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왜 그래? 이제 황태자가 되니 더 보기 괴로워? 이만 돌아갈까?”

당혜군은 나하연이 실연으로 괴로워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혜군의 물음에도 나하연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 아무래도.”

“아무래도?”

“간택전에 참여해야겠어!”

“그래…… 응? 뭐?”

“저 쥐새끼 같은 년들 한 방에 정리하고 꽃 같은 진화 공자 옆에 말뚝을 박겠다고!”

나하연의 당찬 선언에 당혜군이 경악하고 그녀를 보았다.

무림 고수들의 청력으로 그녀의 선언은 당연히 진화를 포함한 모두의 귀에도 들어갔다.

“하하하하, 왜 하연 낭자가 농을 안 하나 싶었다.”

“우리 황태자 전하, 나중에는 저것도 그리울 거야. 많이 들어 두라고.”

안타깝게 아무도, 진화조차도 그게 진심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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