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417화 (417/425)

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황태자 한진화(1)

색색의 화초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을 지나.

화려한 궁전에 꽃 같은 궁녀들이 부채를 흔들어 산들바람을 만들고, 그 사이로 천상의 선인 같은 가족이 화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부채를 든 궁녀들조차 행복한 미소를 달고, 지나는 궁인들마저 눈길을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황후가 두 번째 황손을 출산한 후 창신궁은 사철 내내 봄날 훈풍이 부는 듯했다.

“연화야, 여기 보렴. 오라버니가 왔구나.”

“꺄-하!”

비단 금포에 싸인 아이를 안은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황룡흑포를 입은 천인 같은 중년인의 사이에서, 송옥이나 반안의 환생이 아닐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요 녀석. 벌써 인물을 가리는 건가? 어째 태자가 왔을 때만 방긋방긋 잘 웃는단 말이지.”

황룡흑포를 입은 중년인, 황제가 짐짓 미간의 주름을 만들며 아기와 진화에 대해 말했지만 그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옥쟁반에 구슬 굴러가는 듯한 맑은 아기의 웃음소리도 듣기 좋았지만, 제 팔뚝만 한 작은 아이에게 손가락을 잡히고 어쩔 줄을 모르는 진화의 모습이 재밌으면서도 흐뭇했기 때문이다.

진화와 나누는 이런 작은 일상들이 온 마음 가득 행복해 올 때가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특히 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화의 새로운 표정을 볼 때마다 잃어버렸던 시간들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황후도 마찬가지였는지, 황후 또한 황제와 같이 진화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번 안아 보겠니?”

“아, 하지만…….”

“괜찮아. 아이는 그렇게 쉽게 부서지지 않으니까.”

황후가 거절하려는 듯한 진화에게 얼른 아이를 감싼 금포를 안겼다.

“아!”

진화가 화들짝 놀라면서도 양손으로 금포를 받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진화는 도움을 구하는 눈으로 황후를 보았다.

“어마마마, 연화가 위험합니다. 어서 받아 주세요.”

“글쎄. 연화는 좋은가 본데?”

“네?”

“꺄아! 흥헤헤헤헤!”

황후의 말처럼, 아이는 진화의 양팔 위에서 흔들리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달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허! 고얀 놈. 이것도 전에 짐이 해 주었던 둥기둥기 아니오? 그땐 이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말이오!”

황제가 이번에는 정말로 서운한 모양이었다.

“욘석, 오라비가 해 준다고 이렇게 웃어? 벌써부터 인물을 밝혀서 어찌할꼬? 음?”

황제가 즐겁게 웃고 있는 황녀의 통실통실한 볼을 꼬집으려는 듯 손을 뻗자, 진화가 은근히 몸을 틀어 그 손을 피했다.

그 모습에 황후와 황제, 궁인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 * *

나라의 안팎은 평안하고 황실은 화목했다.

제국의 황녀가 태어나고 한 제국 황궁에는 한동안 훈풍만 부는 듯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한 달 전, 황태자 후궁전에 간택전이 열렸다.

무려 일 년간 명망 높은 호족 집안이나 이름난 재녀들을 추천받아 그녀들의 사주를 황실 침례청에서 선별했다.

사실 황태자비나 황태자의 후궁 간택전은 힘 있는 호족들이 여식을 보내기 선호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간택전의 초간택에 통과하면 그 이후에는 궁인의 신분이 되는 것이라 궐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일황자의 선례를 보듯 황태자가 무탈하게 황제 위에 오르는 경우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힘 있는 호족들은 최종 간택으로 후궁 자리를 보장받고서야 여식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지방 호족이나 재인에게는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궁인이 된다면 평생 궁핍하지 않게 재주를 부리고 녹봉까지 받으며 살 수 있었으니. 언감생심 윗전의 자리만 넘보지 않는다면 특별히 험한 일 없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만을 곁에 두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간택전은 달랐다.

황태자에 오른 한진화 본인이 그 누구보다 강한 무림 고수이자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인 데다, 제국의 유일한 적통 황자로 황제와 황후의 총애가 어떤 때보다 남달랐기 때문이다.

모두가 특별히 큰일이 없다면 무탈하게 황제 위에 오를 것이라 예상했다.

게다가 얼마 전 특별히 큰일이 될 수도 있었던 황실의 두 번째 적통 황손마저 황녀로 태어나면서, 황태자의 앞길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으로 보였다.

“종사중랑의 꼴이 우습게 되었지. 황궁에서 적통 황자가 나면 어쩌니 하다가 간택전을 놓쳤으니.”

“안 그래도 그 양반 여식이 등극식 연회에서 황태자 전하를 보고 홀딱 반해 상사병에 걸렸다고 소문이 나지 않았소.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서 따로 혼처를 찾기도 힘드니. 흐흐흐, 모르긴 몰라도 그 집 안식구가 화병이 났을 것이오.”

“아니, 그 사람도 참 답답하오. 황후 폐하께서 회임을 숨길 정도로 황태자 전하를 애지중지하시는 것을 보고도 모르나?”

“답답한 사람은 끝까지 제 발목을 제가 잡게 두시지요. 하하하하.”

다른 사람의 불행이 마치 자신들의 행복인 양 신료들이 수군거렸다.

이때다 싶어서 헐뜯는 소리가 당사자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이 내려진 시점에서 그는 패배자였다.

종사중랑이 다른 이들에게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구실을 준 순간부터 그는 험담과 조롱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 황궁의 생활이라. 패배자는 그저 귀를 닫고 꼬리를 만 개처럼 황궁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모처럼의 조롱거리가 사라지자 사람들의 화제는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험담할 것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질시와 투기뿐이었으니.

“가장 유력한 이들이 중서령과 하남윤, 효기장군의 여식이라지요?”

“효기장군은 질녀라더군요. 북위대장군부에서도 가까운 질녀를 보냈다 하고요.”

“허어, 북위장군도 대단하시군.”

“이번에는 하후대장군부에서도 장남의 여식이 왔다고 합니다.”

“하후대장군부에서도요?”

“그만큼 황태자 전하의 입지가 단단하다는 것이겠지요.”

“모두 다섯인가요? 허! 참…… 끼어들 여지가 없겠구먼! 쯧쯧!”

간택전을 무시한 종사중랑을 노골적으로 헐뜯던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간택전에 여식을 보내 놓은 터였다.

하지만 간택전에서 높은 첩지를 받는 후궁이 많아 봐야 다섯이라는 걸 감안하면, 제국에 내로라하는 명문가에서 보낸 여식들이 딱 다섯이었으니 남은 자리는 없다고 봐야 했다.

간태전에 여식을 보내 놓은 사람들의 얼굴에 아쉬움과 분노가 스쳤다.

그때, 일행 중 하나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너무 그리 생각할 것도 아니오.”

“……무슨 뜻이오?”

“우리 같은 낭관들 여식에게 떨어질 자리는 결국 재인이나 미인밖에 더 있겠소?”

“허! 그래도 그 댁 여식은 미색이 곱기로 소문이 자자했으니 삼간택까지 간다면 모를 일이지 않소? 혹시 황태자 전하의 눈에 들지도.”

“에이, 그래 봐야 자리는 정해져 있는 것이오. 그러니 다른 기회라도 잡는 것이 좋지 않겠소? 나는 여식에게 그리 일렀소.”

낭관 중 하나가 목소리를 낮추고 은밀한 비밀이라도 전하듯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몸을 숙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기회라니, 그게 무엇이오?”

“다섯 집안 여식 중에서도 더 튼튼한 줄이 있을 것이 아니오. 효기장군의 질녀보다는 중서령과 하남윤의 여식이 낫고, 그들 모두 대장군부와 비교하기엔 모자란 감이 있지요.”

“호오.”

“음.”

낭관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이 부지런히 돌아갔다.

‘원귀빈의 일도 있고 하니, 북위대장군부보다는 하후대장군부에 줄을 대었겠군.’

‘질녀보다는 장남의 여식이 낫지. 직계와 한 다리 건너 방계는 차이가 크니까.’

조용히 눈알만 굴리는 사람들을 보며 낭관은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들이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 봐야 그들의 생각이랄 것이 뻔했다.

‘하후대장군부에 줄을 넣을 생각만 하고 있겠지. 멍청하긴. 결국 삼간택에 가면 본인들의 능력이 황실 윗전의 눈에 띄어야 하는데. 하후대장군부의 여식이 하후씨답지 않게 뼈대가 여물지 못하고 몸이 약하다는 소식도 못 들었나? 게다가 북위대장군부가 질녀로는 모자라다는 걸 알면서도 간택전에 넣었어. 필시 원귀빈의 일을 만회하기 위해 애를 쓸 것이 뻔하지.’

낭관이 여식에게 친분을 쌓으라 명을 내린 곳은 북위대장군부 쪽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쏙 빼놓고 사람들을 하후대장군부로 유도한 것은, 북위대장군부의 질녀 곁에 붙을 경쟁자를 떨어뜨려 놓기 위함이었다.

결국 끈끈하게 친교를 나누는 척 함께하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 제 잇속만 차리기 급급한 얄팍한 관계일 뿐이었던 것이다.

‘원영농이라고 했던가? 저 떨거지들이 다 떨어지고 나면, 원영농이 소의를 받을 때 우리 명환도 귀인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

귀인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황손까지 낳았던 허용화와 원귀빈이 죄를 짓고 떨어진 첫 자리가 미인이었으니, 그보다는 윗줄이 아니던가.

운이 닿아 인물도 없는 원영농보다 먼저 황손을 잉태한다면, 그녀의 자리 따윈 거뜬하게 뛰어넘을 것이었다.

‘아무리 아비가 낭관이라도 황손이면 용화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지. 게다가 그때 되어 황손의 외조부 되는 내가 낭관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리도 없고. 흐흐흐흐!’

낭관은 멀리 내다보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가 잡은 줄이 가장 튼튼할 것이라는 예상부터 큰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 *

간택전이 열린 후궁전.

삼백 명이 넘는 꽃같이 어여쁜 처자들이 긴장되고 들뜬 기색으로 정원에 모여 있었다.

지방 호족 출신들이나 중인 출신으로 추천을 받아 올라온 이들은 벌써부터 황궁의 화려함에 취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중앙 호족 출신들이 그런 이들을 비웃고 있었다.

벌써 같은 지방 출신들끼리, 중앙에서 같은 파벌의 집안 여식들끼리, 끼리끼리 패를 이룬 모습이었다.

삼백 명이 넘는 사람 중에서도 후궁으로 간택된 사람은 미리 정해진 것이 관례인 터라, 간택전에 모인 여인들도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음알음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저 여인이 북위대장군부 출신인가 보네. 벌써부터 중앙 호족 출신들을 덕지덕지 달고 있군.’

‘인물로는 중서령의 여식이 제일 낫다더니, 저 북위대장군의 질녀 옆에 저 여인은 누구지?’

‘무슨 상관이야. 결국 좀 예쁜 시녀나 되겠지.’

‘하후대장군부의 여식은 어디 있는 거야? 걔가 먼저 채녀를 달지 않겠어?’

끼리끼리 수군거리며 눈동자를 굴리는 소리가 바빴다.

그때.

콰-앙.

대차게 문이 열리면서 창신궁을 전담하는 장시궁녀인 정 상궁이 궁녀들과 함께 등장했다.

서슬 퍼런 정 상궁의 기세에 그녀가 누군지 모르는 이들까지 고개를 숙이고 움츠러들었다.

“…….”

정 상궁의 눈이 날카로운 매처럼 삼백 명의 여식들을 훑었다.

대부분이 눈을 마주칠세라 고개를 숙이기 바빴지만, 몇몇 이들은 반응이 달랐다.

오만하게 눈을 치켜뜨고 눈싸움을 하듯 정 상궁의 눈을 피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잘 보이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늘 간택전이 있을 때면 보아 왔던 태도였다.

다만 이번에는 반응이 좀 특별한 이들도 있었다.

무심하게, 혹은 무덤덤하게 정 상궁과 눈을 마주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호오.’

이 황궁에서, 특히 간택전에 든 여인이 아무런 흑심이나 의도 없이 상궁을 마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본 상궁이 이번 간택전의 치수장을 맡은 장시궁녀다. 정 상궁이라 부르면 될 것이다. 앞으로 삼 년간 간택전을 치르면서 궁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이나 몸가짐, 황궁에서 살아가기 위한 여러 재주들을 배워 나갈 테지만, 그 전에!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다수는 초간택에서 황궁을 나가게 될 것이니, 겨우 일 년 동안 머물면서 황궁에 분란을 만들거나 궁녀의 체신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어떤 귀한 집안 출신이든 상관없었다.

이곳에 든 이상 너희들은 그저 궁인 나부랭이일 뿐이다.

정 상궁의 차가운 눈이 고개를 빳빳하게 든 사람들 하나하나를 쳐다보며 경고했다.

고개를 들고 있던 대부분의 여인들은 정 상궁의 기세에 눌려 눈을 돌리거나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중에도 마지막까지 저의 모습을 꿋꿋하게 유지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으니.

“먼저, 수방. 임시로 수방장이 된 원가 영농!”

정 상궁의 부름과 함께, 끝까지 꿋꿋하게 정 상궁을 내려다보던 여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원, 영농이라 합니다.”

정 상궁에게 궁에서 지낼 수 있는 채녀의 패를 받아 든 원영농이 모두를 향해 인사를 해 보였다.

다소곳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마저도 오만해 보일 정도로 자신만만한 표정의 여인이었다.

원영농의 뒷모습을 보는 정 상궁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다음, 경방. 방장은 사마가 령!”

희고 고운 피부, 단아한 이목구비가 기품이 있어 보이는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근래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중서령의 장녀였다.

그녀는 황실에서 선호하는 생김은 물론 무겁지 않으면서도 발끝이 보이지 않는 걸음걸이마저 벌써 황실 사람인 듯 준비가 완벽해 보였다.

“다음 효방, 방장은 곽가 진진.”

하남윤의 장녀였다.

하남윤은 낙양을 관리하는 행정관의 우두머리라, 허씨 가문이 몰락하고 곽가가 새롭게 낙양 기반의 호족들 사이에서 구심점으로 떠오르며 조정에서 활발하게 세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곽진진은 본인이 금과 서화에 뛰어난 재녀로서 하남제일미라 불리며 탄탄하게 인망을 쌓아 놓고 있었다.

“명방, 방장은 하후가 선!”

모여 있던 여인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토록 찾고자 했던 사람 중 가장 궁금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배경으로는 따라갈 수 없다는 하후대장군부 장남의 장녀의 등장에 그녀를 찾아 나선 여인들의 시선이 엉뚱한 곳을 방황했다.

막상 모습을 드러낸 하후선이 그들의 상상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하후선입니다!”

큰 소리로 방긋 웃으며 말하는 하후선은 제국의 호골이라는 하후대장군부 출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작고 귀여운 체격과 인상이었다.

주변 여인들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이는, 호골이라기보다는 토끼 같은 하후선의 모습에 곳곳에서 코웃음이 터졌다.

그걸 들은 정 상궁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으나,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당당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만만치 않은 강단이로군.’

정 상궁이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다음, 병방 방장, 나가 하연!

다시 주변이 웅성거렸다.

휘이이이익---!

여인이 하늘을 날듯 모두를 뛰어넘어 나타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여인이 어떻게……!”

“무림인이 아니었나요?”

진화의 등극식 연회에서 숙청단원들은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중 당혜군과 나하연은 외모가 몹시 아름답기도 했지만, 여인의 몸으로 황태자와 스스럼없이 교분을 나누는 모습 때문에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었다.

“조용! 조용!”

소란이 커지는 모습에, 정 상궁이 목소리를 높였다.

소리가 점차 줄어들자 정 상궁은 채녀의 패를 나하연에게 전했다.

“황궁에서는 뛰거나, 사람이나 벽을 넘거나, 지붕 위에 올라서는 안 된다.”

“하하, 많이 듣던 것이네요.”

패와 함께 전해지는 정 상궁의 주의에 나하연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패를 받아 들었다.

“효기장군의 질녀라더니…….”

“패황권문의 적녀겠군요.”

다섯 명의 내정자 중에서 따지자면 효기장군의 질녀는 논외였다.

대장군부나 차기 승장 자리를 논하는 명신들에 비해 효기장군은 급이 떨어지거니와, 적녀도 아닌 질녀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가 패황권문의 적녀라면 사정이 달랐다.

패황권문은 단지 무림의 세가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정주의 모든 부와 군권을 쥔 호족이었기 때문이다.

황도 낙양의 재화도 중앙에서 나누지 못해 안달인 호족들이 드글드글한데, 정주를 독점하다시피 하는 권가의 금력과 무력이라면 중앙과 멀다 해서 무시할 수 없었다.

곳곳에서 따가운 시선들이 나하연의 뒤로 박혀 들었다.

방은 그녀들이 간택전에서 머무는 동안 지낼 숙소의 이름이었다.

후궁전 자체가 텅텅 비어 있어 은근히 기대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재물이 아무리 차고 넘쳐도 자격 없는 이들의 손엔 먼지 한 톨 쥐여 주지 않는 곳이 황궁이었으니.

여인들이 지낼 곳 또한 이제까지 여느 궁인들이 지낸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장으로서 채녀가 될 사람들에게 패가 나누어지고 난 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각 방의 이름이 쓰인 경의(更衣) 패가 주어졌다.

채녀나 경의나 결국 황궁의 밭을 가꾸거나 의복을 수선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는 궁인들과 같은 신분이라, 실제 그런 일은 하지는 않았지만 대우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 * *

나하연이 결국 간택전에 참여했다.

간택전의 초례 행사에 대해 들은 황후와 팽연화는 익숙한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후와 팽연화는 나하연에게 마음이 쓰였지만, 간택전의 형평성을 위해 초간택이 끝날 때까지 진화에게 전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나하연의 소식이 진화의 귀에 들어가기까진, 일 년은커녕 불과 보름도 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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