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황태자 한진화(4)
“으아아아아아앙-!”
“아이고, 마마,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래, 연화야. 우리 연화, 착하지?”
“으아아아앙!”
늘 그렇듯 아침 문안 겸 한연화를 보기 위해 창신궁을 찾은 진화는 평소와 달리 궁 밖까지 새어 나오는 한연화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랐다.
“어서 가 보자.”
“저, 전하, 뛰시면, 아니, 저희를 뛰게 만드시는 것도…… 저, 전하!”
진화는 뛰지 않았다.
진화는 누구보다 느긋한 자세로 경공을 펼쳐 황후궁으로 들어갔고,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진 진화를 쫓아 건희전 궁인들이 열심히 뛰어야 했을 뿐이었다.
진화가 황후궁 안으로 들어가자, 울음소리는 귀가 아플 정도로 커졌다.
“흐아아아아앙!”
“진화야!”
“태자!”
한연화는 황후의 품마저 거부한 채 유모 상궁의 품에 안겨 계속 울고 있었고,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던 황후와 황제가 반색하며 진화를 맞았다.
아니, 이번만큼은 진화의 존재로 해결될 상황을 반긴 것이랄까.
“연화야, 오라버니 왔구나.”
“그, 그래. 네 오라비가 왔다. 그만 울거라!”
황후와 황제는 울고 있는 한연화를 얼른 진화의 품에 넘겨주었다.
“끄아아아앙!”
잔뜩 골이 난 듯 울던 한연화가 웬일인지 오늘은 진화의 품에도 가기 싫은 듯 유모 상궁의 옷자락이 늘어질 정도로 붙들고 발버둥을 쳤다.
“연화야?”
진화는 한연화가 저를 거부하는 것에 꽤 충격을 받은 듯 한연화를 불렀다.
진화의 목소리를 들은 한연화가 멈칫한 틈에 유모 상궁이 얼른 한연화를 진화의 품에 안겼다.
“히이잉. ……끄아아앙-!”
결국 진화의 품으로 온 한연화는 안락한 진화의 품과 잔뜩 골이 난 제 심기 사이에서 결국 진화의 품에 안겨 엉엉 우는 것을 택했다.
“으아아아앙!”
다행히 한연화가 진화의 품에 푹 안기면서 울음소리가 묻히고, 그 소리마저 점점 잦아들었다.
울다 지친 한연화가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연화는 왜 울고 있었던 겁니까? 어디가 아픈 것입니까?”
한연화를 달래던 진화가 그제야 의아한 얼굴로 황제와 황후에게 물었다.
황후와 황제는 몹시 지친 얼굴이었다.
“후우, 요즘 동경 놀이에 빠져서 그렇단다.”
황후가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황후의 대답은 진화를 이해시키지 못했다.
“동경 놀이요?”
“현실을 깨달은 거지. 제 얼굴이 황후와 다르게 생겼다는 걸 알았거든.”
“……?”
“어쨌든 그리 알고 너도 오늘 하루는 얼굴을 보여 주지 말거라. 나도 오늘은 걸음을 하지 않을 테니. 왜 하필 날 닮아서…… 쯧.”
“……?”
황제의 대답도 진화를 전혀 이해시키지 못했다.
진화가 동 태감을 향해 눈짓하자, 동 태감이 지금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 *
한연화로 인해 아침에 진을 뺀 황후는 오후에는 진화를 위한 큰일을 앞두고 있었다.
초간택에 황실 어른들이 나서기 전 황후가 미리 간택전에 나설 여인들을 살피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초간택에 통과한 이들은 궁인으로서 황궁에 남기에 그 전에 일종의 대면식을 가지는 과정이었다.
초간택 전에 여인들을 떨어뜨리는 건 대부분 상궁들의 평가를 따르기에, 대면식은 그저 내명부 수장으로서 황후가 간택전 여인들의 생활을 살피고, 오후 동안 하사한 차와 다과를 나누며 안면을 익히는 내명부의 작은 행사 같은 것이었다.
다만 간택전 여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때 황후의 눈에 든다면 초간택은 물론 삼간택까지 오를 수도 있는 중요한 기회였으니.
집안과 배경이 월등한 다섯 채녀들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에겐 위로 오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와 같았다.
“사향, 내 사향주머니!”
“그건 왜 챙겨? 황후 폐하가 전하도 아니고.”
“그런가?”
“너무 많이 꾸미지도 말고 수수하고 단아하게. 어른들 눈에 들게끔 하란 말이야.”
“그, 그러네. 고마워!”
“뭘.”
간택전 여인들도 오늘만큼은 사이좋게 서로의 모습을 봐주며 치장을 하는 데 집중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그래도 사향주머니는 챙겨야지.’
‘바보. 넌 수수하게 꾸며라. 난 최대한 화려하게 꾸밀 테니. 여기 있는 여인들만 수백 명인데 수수하게 꾸미면 누가 봐 주겠어?’
화기애애한 목소리들 속에서 묘하게 날카로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후후후, 모두 웃음 속에 가시를 숨기지. 덥석 삼키다가 목에 콱 걸리라는 저주를 담아서.”
단아하면서도 아름답게 치장하길 바라는 수십 명의 여인들이 사마령을 참고하고 있을 때, 사마령은 눈을 내리깔고 어디 비정 소설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나 지껄이니.
“아, 이게 그 황궁 암투인 건가요?”
색색이 귀하고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하후선이 사마령의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날이 날이니만큼 열심히 치장을 했나 싶지만, 그저 가지고 있던 보석을 죄다 꽂은 것뿐이었다.
다행히 그것이 깜찍한 외모에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아니. 여기서 암투가 되려면 누군가 사향주머니를 독향으로 바꾼다든지, 비녀에 독을 발라 누군가 그걸 꽂고 쓰러진다든지 해야죠.”
“호. ……그럼 나중을 기대해 봐도 될까요?”
“저도 내심 기대 중이랍니다. 후후후후.”
“호호호, 나 소저, 걱정 말아요. 어떤 암투에도 주인공은 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세상 아름답게 꾸민 상태로 음산하게 웃고 있는 하후선과 사마령을 보며 나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곱게 자란 두 귀한 댁 영애들이 소설 같은 상황을 꿈꾸는 것이야 상관이 없다만, 나하연은 실제 그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간택전에 있는 여인들 중 수많은 실전을 겪어 온 고수의 눈을 속이고 수작을 부릴 수 있는 여인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하연은 다른 사람들이 색색이 보석을 달고 있는 동안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힘이나 줄여야지. 오늘은 사고 치면 안 돼.’
나하연이 모래주머니 끈을 꽉 조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나하연의 생각은 모든 면에서 어긋났다.
* * *
휘이이익-!
“꺄아아악!”
나하연은 번개같이 빠른 손놀림으로 제 찻잔에 뭔가를 넣던 손을 붙잡았다.
“손에 힘만 주면 부러질 것 같군.”
상대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려 갔다.
“이 차에 넣은 하얀 가루가 뭐지?”
나하연의 물음에 여인은 머릿속이 하얗게 된 상태로 사방을 돌아보았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와 나하연에게 집중되고, 간택전을 맡은 정 상궁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지막지한 힘에 잡힌 순간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지만, 여인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깨달았다.
주렴으로 가린 황후가 있는 곳을 본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도 모자라 턱밑이 덜덜덜 떨려 왔다.
“감히 뉘 안전이라고! 안 경의와 나 채녀는 대체 무슨 일인가!”
엄한 얼굴로 정 상궁이 달려왔다.
하지만 이미 황후의 눈과 귀에 이 소란을 들킨 이상 조용히 넘어갈 순 없었다.
나하연은 여전히 무심한 눈길로 여인을 보고 있었다.
여인, 안명환도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부지런히 눈동자를 굴렸다.
‘이걸 알아차릴 줄이야. 아니, 차라리 잘되었어!’
일을 시작하자마자 나하연이 알아차릴 줄, 그리고 나하연이 황후까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소란을 일으킬 줄은 몰랐지만, 누군가에게 들키는 상황마저도 안명환의 예상에 있었던 일이었다.
안명환이 정 상궁과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때, 정 상궁이 다시 한번 두 사람을 채근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질 않는가!”
“이 여인이 제 찻잔에 흰 가루를 넣었습니다. 손에 들린 이것이 그 증좌입니다.”
나하연이 안명환의 손에 들린 흰 천을 보이며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러자 여인, 안명환도 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나하연과 안명환의 말에 정 상궁이 인상을 찌푸렸다.
“두 사람 모두, 이 사달이 일어났으니 조용히 지나가긴 어려울 것이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숙이고 황후 폐하의 앞으로 가서 죄를 청하거라!”
서로 판이한 주장을 하는 두 사람을 노려본 정 상궁이 싸늘하게 말했다.
* * *
황후가 차와 다과를 내리고 간택전 여인들이 준비한 재주를 선보이는, 화기애애한 대면식은 시작도 전에 모두 끝이 났다.
이 자리를 망친 두 사람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에 황후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렴 안의 황후를 대신해서 진 상궁이 말했다.
“두 사람은 일의 경위에 대해 밝히라.”
“안 경의가 제 차에 하얀 가루를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 손에 잡혔고, 안 경의가 하얀 가루가 묻은 천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 그 증좌입니다.”
나하연이 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상황에 대해 전했다.
그러자 안명환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나 채녀님이 오해를 하신 것입니다. 이 천은 향 가루를 담은 것으로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일 뿐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애처롭게 애원하는 안명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억울한 듯 보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진 상궁의 엄한 호통이었다.
“닥쳐라-! 감히 뉘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느냐! 아직 네게 입을 열라지 않으셨다!”
진 상궁의 호통에 안명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의 기대와 달리 황후는 두 사람의 말이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는 나하연과 달리 안명환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그때, 안에서 황후가 진 상궁에게 뭔가를 말하고 진 상궁이 황후의 말을 전했다.
“궁인들은 천 조각을 가져오라. 그리고 나 채녀의 찻잔도 가져와라!”
진 상궁의 말이 떨어지자, 궁인들이 재빨리 움직이는 동시에 안명환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사라졌다.
천 조각과 아직 차가 담겨 있는 나하연의 찻잔을 가져온 이유야 뻔했다.
황후의 명을 기다렸다는 듯 궁녀들이 나와 천에 남은 가루와 나하연의 차에 은침을 담갔다.
“……꿀꺽.”
안명환이 초조한 듯 궁녀들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후.
찻잔에서 은침을 꺼낸 궁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천에 남은 가루에 은가루를 뿌렸던 궁녀도 고개를 저었다.
“아! 흑! 마마, 저는 억울하옵니다. 독이라니, 나 채녀가 제게 얼토당토않는 오해를 한 것입니다!”
궁녀들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안명환이 울음을 터뜨렸다.
독이라니.
애초에 은밀한 부분까지 몸수색을 하고 사흘에 한 번씩 귀신같은 정 상궁과 나인들이 숙소를 점검하는데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멍청한 것.’
안명환이 눈물을 감추듯 입꼬리가 들썩이는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안명환은 얼굴을 가리느라 나하연의 표정을 보지 못했으니. 그 순간에도 나하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황후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독은 없었다. 나 채녀는 이에 관해 할 말이 있는가.”
“예, 황후 폐하. 저는 처음부터 독이니 뭐니 한 적이 없습니다.”
나하연의 말에 걱정스럽게 그녀를 보던 정 상궁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누구보다 안명환이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뜨고 나하연을 보았다.
“저는 그저 안 경의가 제 찻잔에 흰 가루를 넣었다고 했을 뿐. 안 경의가 그것을 향 가루라 한다면, 그것을 왜 제 찻잔에 넣었는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나하연의 말에 간택전이 술렁거렸다.
독이 아니라며 의기양양하던 안명환은 주변의 의심이 다시 저를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하, 하오나 황후 폐하, 제가 흰 가루를 넣었다는 것 또한 나 채녀의 주장일 뿐입니다.”
“찻잔에 가루를 넣는 즉시 제 손에 잡혔으니 천에 묻은 흰 가루가 그 증거입니다. 제가 보지 못했다면 어찌 천에 흰 가루가 있음을 알았겠습니까.”
“억울하옵니다. 저는 그저 향이 다 날아간 듯하여 가루 주머니를 연 것뿐입니다!”
두 사람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황후가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간택전 전체에 황후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무림인의 안력이 특별하다 들었으나 본 후는 알 리 없으니, 이 일의 판별을 위해 황태자를 불러오라.”
“예, 황후 폐하.”
내명부 수장의 지엄한 명에 진 상궁이 공손히 읍하고 궁녀들과 함께 움직였다.
황후의 명은 급하지만 경박하지 않았고, 양측 모두에게 고루 증명할 기회를 주었으니.
“또한 안 경의는 그것이 향 가루라면 남은 것이 있을 것이다. 가져오라.”
“……!”
황후의 말에 안명환의 눈이 커졌다.
“어찌 말이 없는가?”
“그, 그것이 소, 송구하오나 황후 폐하, 나, 남은 것이 없사옵니다. 중요한 때를 위해 겨우 구한 향 가루인지라…….”
“그래? 그런 것 치고는 향이 퍼지지도 않고 잔향이 오래가지 않는구나. 제국을 통하는 세상 모든 향에 통달한 궁녀들조차 알지 못한 향이라니, 그것 참 궁금하구나. 지금은 없어도 사가에서는 가져올 수 있겠지? 사가에 연통하여 가져오라.”
황후의 말이 안명환이 주장하는 바의 모순을 제대로 찔렀다.
향의 질이 떨어지고 궁녀들조차 알지 못하는 귀한 향을 낭관의 여식이 구했다니. 누가 들어도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소리라 안명환을 향한 궁인들과 간택전 여인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황후는 안명환에게 ‘당장 거짓말을 집어치우라.’ 하는 대신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
더 큰 거짓을 만들고 고하여 사가에까지 황후를 능멸한 큰 죄를 짓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제 잘못을 고하여 홀로 벌을 감당해야 할 것인지. 안명환이 선택해야 할 것이었다.
안명환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앉은 자리가 젖어 갈 정도로 땀을 흘렸다.
그때, 간택전 밖이 부산스러워지고 급히 내관이 달려왔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납시었사옵니다!”
“드시라 하게.”
진화의 등장에 간택전에 있던 여인들 사이의 공기가 술렁였다.
몸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으나, 여인들의 모든 신경이 진화의 걸음을 향해 있었다.
스으윽.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금빛 황포가 여인들을 스쳐서 앞으로 갔다.
“찾아 계시었습니까, 황후마마.”
진화의 음성이 간택전에 울려 퍼졌다.